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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님의 서재입니다.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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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작품등록일 :
2017.12.04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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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7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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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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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184. 새로운 국면 (2)

DUMMY

“감독님은 변화를 주저하지 않아요. 과감하고 도전적이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침없이 추진해 버립니다. 이를테면 캐리나 블랜차드를 중앙 미드필더로 바꿔버린 사례를 예로 들 수 있겠죠. 그런 발상쯤이야 해본 사람이 없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행동에 옮기는 건 다르죠. 정말로 시도하고, 성공까지 거두는 건 아무나 못 합니다. 실험정신이 강하지 않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죠. 전술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는 패배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어요. 그렇기에 카멜레온처럼 다채로운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오는 거겠죠. 그 수많은 아이디어가 허황되지도 않았어요. 확실한 판단으로 매번 승리까지 가져오니 로스 카운티가 어찌 강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승부사라는 건 안토니오 델 레오네를 두고 하는 말인 게 틀림없어요. 저도 그에게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 - 로스 카운티 유소년팀 감독 ‘매티 로우(Matty Low)’ -


*******


라 살리다 라볼피아나(La Salida Lavolpiana).


2000년대를 주 무대로 활동했던 아르헨티나 국적의 멕시코 대표팀 감독 리카르도 라 볼페(Ricardo La Volpe)가 최초로 만들어서 세상에 알렸던 방식.


후방 빌드업 시 센터백 두 명이 양 측면으로 빠지면 3선 미드필더가 그 사이로 들어가 백스리를 만드는 구조다.


이런 형태를 만드는 이유는 수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기본 목적 외에도, 치열한 경합이 불가피한 중앙 지역보다 최후방으로 내려오는 게 압박에서 좀 더 자유로우므로.


보통 수비수보다 더 정교한 볼 배급을 해줄 수 있는 미드필더를 활용하기 위해 고안된 전술이다.


여기서 상대가 내려간 3선을 압박하려면 최후방까지 붙어야 하고, 그 과정이 조직적이지 못하면 간격이 벌어지며 공간이 생겨난다.


압박,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간 창출. 현대 축구는 크게 이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그래서 라볼피아나는 현대 축구의 교본 중 하나로 빠르게 자리 잡기 시작했고, 특히 후방 빌드업을 중시하는 팀들의 핵심 패턴으로 채택되어 왔다.


굳이 따라갈 생각이 없는 팀도 적지 않았지만 말이다.


본래 로스 카운티는 그 예외에 속하는 팀이었다.


*******


< 15-16 Scottish Premiership 14 Round >

로스 카운티 : 던디 FC

2015년 11월 21일 (토) 12:30

햄던 파크 (관중 수 : 46,177명)



[로스 카운티 / 4-1-2-3]

FW : 잭 마틴 / 에이든 딩월 / 앤드류 톰슨

CM : 제임스 블랜차드 / 리차드 브리튼

DM : 알렉산더 캐리

DF : 리 월리스 / 대니 패터슨 / 폰투스 얀손 / 아메드 델샤드

GK : 마크 브라운



“맞아, 확실해.”


프리먼은 경기를 보며 확신에 찬 표정으로 끄덕였다.


A매치 일정을 넘기며 하루빨리 프리미어십이 재개되기만 고대했던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왜 그토록 기다렸냐 하면 2주 전, 파틱 시슬과의 경기에서 잠깐 드러났던 그 형태가 단순히 맛보기에 불과했었는지 알고 싶었던 까닭이다.


캐리가 본인 위치보다 내려가서 받는 장면은 이전에도 종종 있었다. 그건 상대를 떨쳐내고 볼을 원활하게 받기 위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파틱 시슬전에서 보았던 건 센터백들과 캐리의 동선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아예 정형화된 시스템을 가동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전반전에 승부를 결정지어 버렸으니, 숨 돌릴 겸 일부러 템포를 늘어뜨리려고 임시로 주문한 건지. 아니면 다른 변화를 예고한 건지. 프리먼은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눈앞에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이 광경을 보니 슬슬 확정 지어서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이탈리안이 본격적으로 라볼피아나를 이식하려 한다는 걸.


사실 안 쓰는 게 이상했다. 델 레오네 또한 후방 빌드업을 등한시하는 성향이 아니었으니까. 작년부터 롱볼보다는 골키퍼의 짧은 패스로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방식을 애용했던 감독이다.


“로스 카운티가 올 시즌 주력으로 쓰던 포메이션이 단서였나?”


4-1-2-3에서 1의 자리. 이곳에 전통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지 않고 패스에 강점인 캐리를 배치할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을까?


로스 카운티는 활발하게 올라가는 레프트백과 다르게 라이트백은 안으로 좁혀 우측 스토퍼로 배치하는 비대칭 구조를 세운다.


라이트백이 기습적으로 오버래핑하면서 공격을 지원하는 변칙 패턴도 존재하지만, 대체로 최후방에 세 명을 둔 형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앞에서 수비진 보호를 해줄 자원이 필수적이진 않다.


“캐리를 저 자리에 두어도 문제없는 이유였지.”


그러면 캐리를 저기에 둬야만 하는 이유? 간단하다. 후방 빌드업의 중심을 잡기 위해. 빌드업 리더로서 전체적인 조율을 맡기기 위해. 프리먼도 알고 있던 부분이었다.


더 나아가서 라볼피아나를 쓰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과정이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빤한 답 속에 궁극적 목표가 숨겨져 있었어.”


엄밀히 보면 미드필더를 내리지 않았을 뿐, 백스리 구조로 빌드업을 진행하는 것부터 그 원류를 따라가고 있던 셈이다. 라볼피아나는 아니지만, 라볼피아나와 다를 바 없는.


이제 정식으로 도입하려는 중이고 말이다.


저 과감한 이탈리안 전술가가 왜 이 시스템에 한해서는 조심스레 접근하는 걸까? 그러다가 왜 이제 와서 갑자기 꺼내 드는 걸까? 이 또한 나름대로의 근거를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첫째로 기존 백스리의 주전 멤버. 얀손, 보이드, 델샤드가 볼을 괜찮게 다루는 선수들이라는 점.


특히 스콧 보이드. 발이 느리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지녔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가 앞으로 패스를 보낼 줄 알아서다.


경험에서 나오는 노련한 수비진 리딩 능력과 세트피스에서 발휘되는 득점 본능은 둘째 치고, 가장 큰 생존 비결은 서투른 볼 처리가 적다는 것.


델 레오네 부임 전에는 뚜렷한 특징이 아니었으나, 부임 후 개선된 최신식 훈련과 선수의 노력까지 어우러지며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힘과 스피드를 전부 갖춘 대니 패터슨이 우월한 신체 조건으로 금세 주전을 꿰찰 거란 예상과 달리, 보이드를 쉽게 밀어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애당초 얀손과 델샤드는 발밑이 준수해서 데려온 선수들이라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면 현 백스리로도 충분한데 굳이 캐리를 내려야 할까?


오히려 그가 좀 더 윗선에서 패스를 받았기에 더 빠르고 날카로운 볼 배급을 해줄 수 있었던 건데 말이다.


두 번째는 반대로 캐리의 불안정성 문제.


워낙 활약이 좋아서 잊었을지 모르겠으나, 저 선수는 윙이었다.


감독 밑에서 특별한 개인 교습을 받으며 적응기를 거친 끝에 포지션 변경을 성공한 것이지, 중앙 미드필더로서 제대로 정착한 건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시스템의 혜택을 받는 중이다. 핵심 전력임에도 여전히 단점으로 꼽히는 수비력과 에너지 레벨, 팀 측면에서 이 부분을 상쇄시키려고 꾸준한 공을 들이고 있으니까.


언제나 체력 관리를 위한 교체 1순위이며, 왕성하게 뛰어다니는 선수들이 캐리의 주변을 열심히 보조한다.


코치진의 세심한 케어와 팀원들의 헌신이 있기에 그가 빛날 수 있다는 말.


그런데 느닷없이 서투른 움직임을 요구하며, 무책임하게 필드로 내던진다?


“그럴 리가.”


라볼피아나는 압박을 해체하기에 좋은 무기지만, 조직적으로 능숙하게 이루어졌을 때 해당하는 얘기다.


어설프게 수행하면 도리어 압박에 휘말려 대형 사고를 초래할 수 있다. 최후방에서 볼을 뺏기면 바로 실점 위기니까.


“캐리를 라볼피아나의 중심으로 두는 건 오래된 구상이었을 테고, 다만 그 실현을 천천히 해나갈 계획이었겠지.”


생각해보면 이게 갑작스러운 것만도 아니다.


작년 유로파 리그의 올림피아코스전, 블랜차드가 첫 중앙 메짤라로 깜짝 출연했을 때부터 캐리를 후방에 둔 역삼각형 미드필드진을 구성했던 이탈리안이지 않은가?


확실히 계획에 있던 건 맞다. 그리고 이 시기에 던디 유나이티드는 자신들의 안방에서 여섯 골이나 내주며 처참히 박살났던 그 사건, 던디 쇼크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었다.


그만큼 경기력도 눈에 띌 요소가 많았다는 건데, 안타깝게도 캐리가 삼 개월에 달하는 장기 부상을 끊으면서 어쩔 수 없이 플랜 B로 선회해야 했었다.


“어쩌면 로스 카운티의 라볼피아나를 좀 더 일찍 볼 수 있었을지도.”


이후 나폴리전에서 화려하게 복귀했던 캐리는 계속 착실하게 레지스타로서의 수업을 받아 왔고, 눈부신 발전을 보여줬다. 원래 중앙 미드필더라고 해도 믿을 만큼 역할을 완벽히 소화할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내 이탈리안이 꺼내 드는 걸로 보아, 이제 그 책임을 맡겨도 될 시기가 찾아왔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마지막은 앞선 두 근거와 연관되는 부분인데, 바로 리그의 수준.


백스리만으로도 빌드업이 된다거나 발밑이 좋다거나.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스코티시 프리미어십을 기준으로 하는 얘기다.


가동만 잘 되면 라볼피아나로 분명 하이리턴을 얻을 수 있겠지만, 당장은 백스리 구조로 운영하는 게 훨씬 안정적이라 판단했을 터. 설령 감독이 품은 철학이라 해도 서두를 것 없으니 천천히 진행하면 될 일이었다.


물론 최근 프리미어십의 수준이 조금씩 올라가고는 있다.


기본적인 전방 압박조차 엉성하던 이곳이 점점 달라지는 중이니까. 리그 팀들의 전체 지표가 우상향을 그리고 있으며, 더 높아질 여지도 충분하다.


그런 상향평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스코티시 챔피언이 도달한 레벨에는 못 미치는 게 현실이지만.


어쩌면 로스 카운티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타 팀들이 따라 올라올 동안 그만큼 더 치고 올라가기 위해서.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겠다는 거다.


하지만 프리먼은 프리미어십의 수준과는 크게 상관없는 문제라 생각했다. 감독이 신중을 기해 라볼피아나를 오래전부터 구상했던 이유. 근본적인 원인을 따져본다면 역시 그것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챔피언스 리그. 다시 말해 유럽 대항전에서의 경쟁력을 미리 갖추기 위해 세운 프로젝트.


첼시, 레알 마드리드 등의 강적을 상대로 프리미어십에서 쓰던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운석 급의 규모가 충돌하는 별들의 전쟁터에서는 이전보다 더욱 향상된 수준을 보여야만 한다.


일찍 탈락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최상위 레벨의 무대지만, 저 야망이 들끓는 이탈리안 감독은 분명 그 흐름을 거스르려 할 테니까.


실제로 첼시는 1차전에서 로스 카운티의 빌드업을 효율적으로 제어했고, 오스카와 윌리안의 이중 트랩에 휘말린 캐리는 필드에서 지워져 버렸다. 델 레오네는 발견된 결함을 가만히 놔둘 위인이 아니다.


그게 라볼피아나를 서둘러 꺼내든 결정적인 계기인데, 주도면밀한 감독이 단계별로 은밀하게 쌓아온 덕택인지 엉성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상대가 던디 FC여서 대처를 못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지금으로선 효과적. 로스 카운티가 두 골을 넣으면서 승부는 결정 난 상태였다.


최근 원터치 스루패스에 맛을 들인 블랜차드가 중앙 왼쪽에서 볼을 받자마자 수비진의 틈새로 찔러주었고, 뒤로 몰래 빠져나간 마틴이 침착하게 마무리하며 첫 번째 골.


두 번째 골은 라볼피아나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가동되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후방에서 가볍게 압박을 풀면서 중앙선을 넘어 올라간 캐리의 기습적인 롱패스가 수비진을 넘기며 박스 안까지 투입되었고.


동시에 뒷공간을 뚫어낸 딩월이 낙하하는 볼에 머리를 맞추며 옆으로 전달, 동일선상으로 쇄도하던 톰슨이 미끄러지듯 오른발을 갖다 대며 득점.


골이 터질 동안 로스 카운티는 후방에서부터 올라오기까지 무려 22번의 패스를 연달아 신속하게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뺏기지 않았다.


이후 던디 FC는 압박하는 걸 완전히 포기하고 내려앉는 모습을 보였다.


“흠······.”


프리먼은 턱을 괸 채 한 손으로 펜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라볼피아나를 꺼내든 건 괜찮은 선택이다. 진작 설계해 뒀던 장기 프로젝트라는 점도 꽤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충격을 받을 만큼이냐고 하면.


‘이것만으로 첼시를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해.’


조제 무리뉴, 잔뼈가 굵어 온 인물들 중에서도 손에 꼽는 베테랑. 수십, 수백의 경기를 치르면서 라볼피아나를 쓰는 팀 또한 숱하게 만나왔을 텐데.


과연 로스 카운티가 급하게 장착한 패턴에 흔들릴까? 그의 눈에는 허술해 보일 확률이 높다.


게다가 첼시는 유리한 고지에 서 있다. 이미 2위를 확보한 위치라서 그냥 비겨도 되는 상황이니까.


실리주의자는 이런 경기에서 무리하지 않는다. 만일 극단적으로 내려앉으면 라볼피아나를 쓴들 로스 카운티가 첼시의 견고한 방어진을 깰 수 있나?


캐리가 자유로워진다고 골이 만들어지는 건 아닌데 말이다.


그럼에도 심각한 표정은 짓지 않는 프리먼이었다. 보이는 게 끝은 아닐 것 같기 때문에. 로스 카운티 팬이라면 많이 경험해 봤지 않은가?


“뭔가 또 다른 수를 감추고 있겠지.”


저 이탈리안은 항상 그래왔으니까.


단지 궁금할 뿐이었다.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그걸 첼시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알 도리가 없다는 것이지만.


프리먼은 다시 경기 날이 다가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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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 카운티 2 : 0 던디 FC >

잭 마틴(43‘)

앤드류 톰슨(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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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경기에 대해 염려하는 것은 프리먼만이 아니었다.


레알 마드리드가 초호화 군단의 위용을 보여주긴 했지만, 실상 제일 고전했던 건 다름 아닌 첼시. 로스 카운티를 응원하는 이들이라면 모두 기대와 불안감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무승부를 거둬도 가망이 없어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전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인 건 스코틀랜드 팀이다.


작년에도 극적인 토너먼트 진출을 이뤄냈던 기억이 남아있기에 마냥 비관적이지는 않았지만.


클럽 내부도 팬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구단주 로이 베넷은 매일 밤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고, 단장 대런 코너는 감독실이 안식처라도 되는 양 하루에 한 번은 꼭 방문해야 편안히 퇴근할 수 있었으며, 그 외 각 스태프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첼시전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감독 곁에서 함께하는 당사자들조차 다를 바는 없었다.


수석 코치 스튜어트는 한참 전부터 별다른 대비도 없는 현 상황에 혼란스러워했었다. 특별히 언급을 안 했을 뿐, 직접 뛰어야 하는 선수들의 심정도 마음 한구석이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오······.”


“이거라면······.”


반응이 뒤집힌 건 정확히 경기를 앞둔 하루 전날, 집합하여 감독의 설명을 듣고 난 뒤였다.


“이대로만 되면, 정말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선수들은 화색이 밝아졌고, 며칠 전까지 안절부절못했던 스튜어트는 들떠 있었다.


“아마도 이 작전이 실패한다면 무리뉴가 모든 걸 간파하고 맞춤 대응책을 가지고 나왔을 때겠지.”


델 레오네가 차분히 말했다.


“1차전을 보고 확신했어. 그는 모른다.”


언제나 그래왔지만, 얼굴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맹목적인 믿음과 미련이 클수록 시야는 어두워지지. 상대할 팀을 열심히 분석하는 건 좋으나, 너무 이쪽만 쳐다보면 중요한 걸 놓치게 될 거야. 첼시의 라인업에 변화가 없다면, 반은 성공한 거다.”


이런 모습의 감독은 매번 설득력을 갖게 한다. 경청하던 선수들은 이미 완벽하게 수긍한 상태였다.


“실패하는 경우의 수가 하나 더 있지 않아요?”


유일하게 손을 든 한 명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알렉산더 캐리가 제대로 이 작전을 수행 못 했을 때. 결국 이 게임을 터뜨릴지, 터질지 결정하는 건 내 손에 달렸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런 경우의 수도 있긴 하지. 하지만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감독이 옅은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왜냐하면 난 자네를 믿으니까.”


*******


< 15-16 UEFA Champions League ‘Group E’ Match >

로스 카운티 : 첼시

2015년 11월 25일 (수) 19:45

햄던 파크 (관중 수 : 48,355명)



[로스 카운티 / 4-1-2-3]

FW : 제임스 블랜차드 / 에이든 딩월 / 앤드류 톰슨

CM : 존 맥긴 / 리차드 브리튼

DM : 알렉산더 캐리

DF : 리 월리스 / 스콧 보이드 / 폰투스 얀손 / 아메드 델샤드

GK : 마크 브라운


[첼시 / 4-2-3-1]

FW : 디에고 코스타

AM : 에덴 아자르 / 오스카 / 윌리안

CM : 세스크 파브레가스 / 네마냐 마티치

DF : 세사르 아스필리쿠에타 / 커트 주마 / 존 테리 / 브라니슬라브 이바노비치

GK : 아스미르 베고비치



“블랜차드와 맥긴이 동시 출전한 건 이번이 처음 아닌가?”


프리먼은 킥오프 전부터 흥미로운 요소를 발견하여 즐거운 상태였다.


마틴이 나와야 할 자리에 블랜차드가 이름을 올렸다. 본래 왼쪽 날개에서도 잘 뛰었던 선수라 딱히 이상할 게 없지만, 중요한 건 맥긴까지 합세했다는 거다.


그가 이적하고 처음으로 블랜차드와 필드 위에서 선발로 합을 맞추는 경기라니.


거기에 캐리와 브리튼까지 포함하여 순간적으로 네 명의 미드필더를 밀집시킬 수 있게 된다. 중앙 싸움에서 지지 않겠다는 의도가 느껴진다.


우선 주도권을 먹은 다음에 공격을 퍼붓겠다는 걸까? 오늘 3점을 무조건 따내야 하는 로스 카운티로선 물러설 수 없는 처지다.


그런다 해도 상대가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체급은 아니니, 서로의 허점을 찌르는 패턴이 반복되면서 경기는 점점 빠른 템포로 진행될 공산이 크다.


반면 첼시는 같은 라인업을 그대로 들고나온 모습. 저번에 제대로 효과를 봤으니 구태여 변화를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오늘은 커다란 변수가 있다.


라볼피아나, 1차전의 양상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줄 포인트. 무리뉴도 이쯤은 파악하고 나왔을 테지만.


“과연 어떻게 될지.”



삐익 -


초조하게 기다리며 테이블 위에 연신 펜을 두드리던 프리먼의 손동작은 킥오프하자마자 멈췄다.


“어?”


예상하던 그림이 아니었다.


델샤드가 우측 스토퍼에 위치하지 않고, 월리스처럼 높이 올라가는 것까지는 라볼피아나에 충실한 움직임이 맞는데.


정작 핵심인 최후방이 달랐다.


“캐리가 왼쪽으로 간다고?”


양쪽으로 넓게 퍼진 센터백의 사이로 미드필더가 들어가는 게 기본. 그런데 캐리가 현재 위치한 곳은 좌측 스토퍼.


전형적인 라볼피아나가 아니다.


원래대로라면 보이드가 측면으로 빠지고, 가운데에서 캐리가 빌드업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기동력인가?”


그나마 머릿속에 떠오르는 답안이었다.


캐리도 빠른 편은 아니지만, 보이드는 느리다. 한쪽 공간을 신속하게 커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로스 카운티는 월리스가 활발한 오버래핑으로 비운 공간을 메워주는 좌측 스토퍼가 굉장히 중요하다.


보이드는 그 조건에서부터 탈락. 그래서 델 레오네는 보통 그를 중앙에 두곤 했다. 최근 라볼피아나를 쓴 경기에서 발 빠른 패터슨을 얀손의 짝으로 맞춰서 나온 것도 그 때문일 텐데.


“보이드가 선발일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캐리를 저렇게 쓸 줄이야.”


캐리도 스토퍼의 조건에 부합하진 않는다. 그러나 빌드업의 기준이 왼쪽이라면 좀 더 안전할 수 있다.


볼을 뺏기더라도 주변 선수들이 바로 압박을 가할 수 있고, 그러면 상대는 비교적 공간이 넓은 반대편으로 전환하여 활로를 열려고 할 테니까.


그동안 캐리 쪽은 재정비할 시간이 주어지고, 월리스가 내려와 수비 대열을 가다듬을 수 있다.


이론상으로는 괜찮으나, 한 가지 전제 조건이 붙는다. 볼을 일단 전방으로 배급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캐리를 좌측으로 빼는 수법은 낯설지 않다. 세비야전도 그랬다. 교묘한 배치로 마크맨이 붙을 수 없는 환경을 만들고, 자유롭게 전개해 나가던.


“그건 2선이 바네가여서 통했던 전략인데.”


첼시 상대로는 안 된다. 무리뉴가 괜히 주전으로 기용하던 페드로를 빼면서까지 윌리안과 오스카를 내보낸 게 아니다.


오스카는 압박할 때 더 빛을 발하는 선수. 본인이 플레이메이커가 되기보다 상대 플레이메이커를 잡아먹는 데 특화된 2선이다.


딩월에 버금가는 그의 활동량은 최후방으로 내려간 캐리를 능히 쫓아가고도 남는다. 여전히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차피 무리뉴는 수비 시에 중앙 2선을 올려서 4-4-2를 만들기 좋아하니 급조된 압박 형태도 아니다.


“이러면 윌리안과 오스카에게 둘러싸이는 문제는······ 그대로 아닌가?”


라볼피아나만으로는 어렵다고 한 까닭이다.


윌리안은 직선으로 압박을 똑같이 수행하면 되고, 전방의 디에고 코스타까지 가담하면서 첼시의 전방 압박에 되레 휘말려 버릴 수도 있다.


1차전처럼 극한의 핀치로 몰리는 것은 덜할 테지만, 그뿐이다. 반대로 캐리 또한 공격진과 거리가 멀어져서 날카로운 지원을 해주는 게 쉽지 않다.


구조적인 개선을 이뤘다기보단 그저 회피한 것에 지나지 않는 대응.


캐리를 통해서 전개하려고 내린 건데, 막히면 무슨 소용인가? 위험지역에서 볼을 뺏길 리스크를 감당한 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면 라볼피아나를 쓴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프리먼은 계속 묘한 위화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일개 분석가조차 알고 있는 빤한 술수를 델 레오네가 들고나온다고? 말도 안 된다.


“뭔가 다른 게 있어. 뭔가 다른 게······.”


프리먼은 그렇게 중얼대며 필드를 뚫어져라 보았다.


“······.”


어쩐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캐리의 동작.


처음엔 잘 적응되지 않은 위치에서 뛰느라 그런 거로 생각했다. 자세히 보니 다른 느낌의 부자연스러움이었다.


마치 연기를 하는 것 같은.


문득 그의 뇌리를 스치는 무언가.


“어쩌면······.”


라볼피아나와 알렉산더 캐리. 이 둘의 연관성에만 집중하느라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 건 아닐까? 당연히 핵심 키워드는 이 둘이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던 건······.


생각을 거듭하던 프리먼의 시야에 볼을 잡은 캐리가 들어왔다.


달려드는 윌리안과 오스카를 피해 등을 돌리면서 뒤로 패스하는 캐리. 1차전에서 지겹도록 봤던 장면이다.


압박을 견디지 못해서 후퇴하던, 이후 수비진도 줄 곳을 찾지 못해 옆으로 무의미한 볼 돌리기만 반복하는 답답한 플레이가 나왔던 게 저번 경기였었는데.


백패스를 받은 보이드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볼을 보낸다.


직선으로 나아간 패스. 내려와서 받는 맥긴, 그리고.


와아아 -


따라와서 발을 뻗는 마티치를 옆으로 제쳐내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중앙선을 넘어간 그의 스루패스가 침투하는 딩월을 겨냥했지만, 테리의 태클에 막혀 터치라인 밖으로 나간다.


“······잠깐만.”


분석할 새도 없이 다시 조금 전과 비슷한 광경.


뒤로 뺀 캐리의 패스가 이번엔 보이드를 지나쳐 브라운에게 전달된다.


재빨리 곁눈질로 본 위쪽에서는 마티치가 똑같이 당하지 않으려는 듯 내려가는 맥긴을 쫓아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이어 브라운의 골킥. 치열한 몸싸움이 붙는 마티치와 맥긴의 머리를 훌쩍 넘긴다.


떨어지는 볼을 받은 건 블랜차드. 아무도 그를 방해하고 있지 않았다.


부드럽게 돌아서며 측면으로 찔러준 볼이 내달리던 월리스에게 도달하고, 이바노비치와의 경합을 이겨낸 월리스가 크로스를 올린다.


쇄도하던 딩월의 슛까지는 이어졌지만, 몸을 날린 주마의 등을 맞고 굴절되며 밖으로 나가고 만다.


프리먼은 방금 연달아 일어난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라볼피아나가 형성되면 맥긴은 캐리가 있었던 자리로 내려간다. 이 정도는 당연한 움직임이다.


“기본조차 제대로 수행 못 하는 팀들도 수두룩하지만, 어쨌든······.”


캐리가 뒤로 볼을 돌리고, 수비진이 간결하게 전달해 준 볼을 내려온 맥긴이 받아서 발재간으로 뚫어내며 공격을 만든 게 첫 번째 장면.


여기까지는 맥긴만 막아도 해결될 일이다. 그러나 이후 마티치가 들러붙자, 브라운이 골킥으로 넘겨 블랜차드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것이 두 번째 장면.


자리를 지키면 맥긴이 전개하는 걸 방치해야 하고, 견제하러 붙으면 블랜차드에게 공간을 허용해야 한다.


둘 중 한 명은 무조건 노마크로 풀려난다.


그러니까 마티치의 앞뒤로 맥긴과 블랜차드가 포진해 있는 거다.

첼시전.jpg

네마냐 마티치(Nemanja Matic). 작년에 훌륭한 활약으로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베스트까지 수상한 선수지만, 올해는 폼이 많이 떨어진 상태.


전성기 시절에도 기동력이 좋은 편은 아니어서 책임져야 할 공간이 넓어질수록 단점이 도드라지는 편이었다. 슬럼프까지 겪고 있는 시점에서 이건 정말로 최악의 위기에 직면한 셈이다.


혼자서 두 명을 상대해야 하는 꼴이니까.


무리뉴는 전방 압박을 하더라도 수비 라인을 끌어올리길 선호하진 않는다.


최소한의 효율적인 인원으로 압박을 가하다가 상대가 풀어 나오면 즉각 내려와서 지역방어로 전환하는 게 특징.


잘 돌아간다면 실리적인 축구의 이상적인 표본이나, 지금 같은 상황은 첼시 선수들에게 좋은 환경이 아니다.


수비진이 처져있을 때 공격진이 전방 압박을 하러 올라가면 미드필드진에 커다란 균열이 생겨난다.


캐리만 막으면 된다는 무리뉴의 발상으로 행하는 전방 압박이 스스로 리스크를 만들고 있었다.


“완전히 잘못 알았어.”


한마디로 프리먼이 예측한 건 전부 틀렸다.


캐리에게 원활한 빌드업 환경을 만들어 주고자 한 게 아니었다. 저 7번의 레지스타는 아니, 레지스타인 척하는 사기꾼은 그저 오스카와 윌리안을 자기 쪽으로 깊이 끌어들이는 역할만 수행하고 있을 뿐.


그로 인해 공간이 발생하는 순간부터 로스 카운티의 본격적인 전개가 시작된다.


라볼피아나는 단순히 압박을 유도하기 위한 트릭 장치.


사실상 빌드업의 중심은 맥긴과 블랜차드 쪽이었던 것이다.


“캐리는······ 그저 미끼였구나!”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최근 다시 코로나가 기승을 부린다는데

독자분들 모두 몸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고

언제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소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신

모아두상 님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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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200. 공간 싸움 +6 24.02.06 750 37 26쪽
199 199. 대립 +5 24.01.25 787 33 26쪽
198 198. 대면 +5 24.01.14 839 35 25쪽
197 197. 팀의 완성도 +8 24.01.04 813 43 24쪽
196 196. 신뢰의 결실 +5 23.12.23 867 38 28쪽
195 195. 한 마리의 송골매 +5 23.12.10 853 40 23쪽
194 194. 두 마리의 사자 (2) +5 23.12.02 863 42 25쪽
193 193. 두 마리의 사자 +4 23.11.22 924 43 25쪽
192 192. 캡틴 잭 +3 23.11.10 877 40 26쪽
191 191. 경기장 위의 숫사슴들 +6 23.10.31 936 35 28쪽
190 190. 계몽의 시대 (3) +3 23.10.20 960 44 23쪽
189 189. 계몽의 시대 (2) +5 23.10.08 969 39 26쪽
188 188. 계몽의 시대 +4 23.09.26 1,011 42 26쪽
187 187. 새로운 국면 (5) +7 23.09.15 1,064 45 22쪽
186 186. 새로운 국면 (4) +6 23.09.03 1,093 42 25쪽
185 185. 새로운 국면 (3) +8 23.08.19 1,175 45 22쪽
» 184. 새로운 국면 (2) +8 23.08.04 1,225 40 26쪽
183 183. 새로운 국면 +7 23.07.13 1,300 56 22쪽
182 182. 지상 최고의 팀 (4) +8 23.06.28 1,278 50 29쪽
181 181. 지상 최고의 팀 (3) +5 23.06.16 1,168 39 24쪽
180 180. 지상 최고의 팀 (2) +6 23.05.27 1,282 50 24쪽
179 179. 지상 최고의 팀 +5 23.05.07 1,369 50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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