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Diov 님의 서재입니다.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웹소설 > 일반연재 > 스포츠, 일반소설

Diov
작품등록일 :
2017.12.04 19:58
최근연재일 :
2024.03.18 20:47
연재수 :
202 회
조회수 :
1,076,957
추천수 :
33,696
글자수 :
1,864,586

작성
23.01.14 17:48
조회
1,404
추천
46
글자
27쪽

171. 이적 시장 종료

DUMMY

“그는 선수들을 누구보다 정성 들여서 관리합니다.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면서 절대 방치해 두지 않죠. 전문 영양사를 통해서 식단은 어떻게 짜는지, 누가 어떤 걸 먹었는지 정기 보고서까지 받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대체 어떻게 관찰을 하고 다니는 건지 선수들의 몸 상태를 귀신같이 판별해 내죠. 예를 들면 작년 유로파 리그 결승전 일화가 있어요. 블랜차드는 당시에 발목이 꽤 악화됐는데도 결승전에 나가고 싶어서 그 사실을 숨겼었죠. 팀 닥터인 저조차 모르던 부상이었어요. 제가 만일 알고 있었다면, 선수가 함구해 달라 부탁했어도 무조건 감독에게 알렸을 겁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정보가 왜곡되는 걸 무척 싫어하거든요. 뭐, 어쨌거나 결국은 들켰던 모양이에요. 감독과 함께 의료실에 찾아온 블랜차드는 마치 선생에게 붙잡혀 온 학생 같았죠.” - 팀 닥터 ‘애덤 말킨(Adam Malkin)’ -


*******


안토니오 델 레오네의 경기 후 인터뷰.


“바르셀로나에 결국 패배하고 말았는데요. 로스 카운티가 이 정도로 크게 밀린 건 오래간만에 봤습니다. 역시 당신에게도 버거운 상대였나요?”


“그들이 왜 유럽 최고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트로피가 걸린 경기였으니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할 순 없겠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배울만한 점은 많았죠. 얻은 게 없는 건 아니니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잭 마틴과 알렉산더 캐리를 선발에서 제외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특히 캐리가 안 나온 건 충격적이기까지 했는데요. 최근 당신이 계속 주전으로 써왔던 선수들이잖아요? 후반에 교체로 들어와서 각각 골까지 기록했고요.”


“전술적인 이유였습니다. 바르셀로나의 이니에스타는 혼자서 필드를 헤집을 수 있는 선수죠. 우리는 그가 편하게 볼을 잡을 수 없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맥긴이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적임자라 판단했을 뿐이죠.”


“캐리로는 제어가 어렵다고 생각하신 거군요. 그러면 대런 케틀웰과 필립 로스의 깜짝 선발도 전술적인 이유로 보면 되는 건지?”


“우리 팀이 종합적으로 바르셀로나에 밀린다는 걸 인정하고 경기에 임해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승리를 노리려면 특별한 무기가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최대한 에너지가 높은 라인업으로 구성했습니다. 그들보다 더 많이 뛰면서 공간을 장악하는 것이 목적이었죠.”


“그래도 캐리를 뺀 건 아쉬운 선택이었을 것 같은데요. 실제로 그가 들어오고 나서 경기력도 많이 좋아졌었습니다.”


“만일 이 시합이 더 중요한 일정이었다면 저 또한 그들을 쉽게 선발에서 제외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슈퍼컵은 유서 깊은 대회 중 하나지만, 부담감이 그렇게 크진 않지요. 도박을 해볼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근데 말씀하신 대로 유럽 최강인 바르셀로나인데 너무 공격적으로 나간 건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공연히 맞불을 놓아서 전반전이 크게 말려버린 건 아닌지?”


“바르셀로나 같은 팀을 상대로 라인을 내리는 건 사형선고를 얌전히 받아들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탈압박에 능하며 밀집 대형을 분쇄하는 데 능숙하죠. 수비진이 전부 월드클래스의 기량을 발휘하고, 더불어 행운까지 따라준다면 가능은 할 겁니다. 물론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확신이 서지 않는 방식으로 승부를 걸고 싶지 않았습니다.”


“알겠습니다. 다른 주제로 전환해 보죠. 패배는 아쉽지만, 앤드류 톰슨의 선제골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감독님의 감상을 한번 들어보고 싶은데요.”


“저 역시 환상적인 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스피드와 기술이 잘 어우러진 플레이였어요. 이미 모두에게 알려진 장점과 자신이 아직 인지하지 못하는 장점이 적절하게 섞인 장면이었습니다.”


“인지하지 못하는 장점이요?”


“말 그대로입니다. 그는 본인이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번 골은 여러모로 값진 의미를 지녔다고 봐야겠죠.”


*******


[ Marca ] 졌어도 인상 깊었던 로스 카운티의 13분



이번 경기에 관한 구체적인 평가를 처음으로 내놓은 건 스페인 언론의 마르카 쪽이었다.


마르카는 로스 카운티의 초반 경기력을 극찬했는데, 바르셀로나와 호각세를 다툰 것도 모자라 그들을 몰아붙이고, 선제골까지 넣은 게 무척 인상 깊다면서 이런 평까지 남겼다.


‘전반전 13분까지는 유프 하인케스의 바이에른 뮌헨을 보는 듯했다.’


2012/13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이자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던 유프 하인케스의 바이에른 뮌헨.


4강전에서 바르셀로나를 만나 4 : 0과 0 : 3, 총합 7 : 0으로 완파했던 당시의 엄청났던 그 팀의 경기력을 언급한 것이다.


물론 마르카는 바르셀로나와 적대 관계에 놓인 마드리드를 연고지로 삼은 언론사. 단순히 로스 카운티를 이용해서 도발하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켜보던 관중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좋은 퍼포먼스를 보였던 것도 사실.


이후 메시의 프리킥 골이 들어간 뒤로는 판세가 뒤집히며 충격과 공포의 연속이었으나 후반전에 다시 안정을 되찾기도 했고, 만회 골로 한 점 차까지 따라가는 저력까지 보였다.


상대가 힘을 빼긴 했어도 전반적으로는 잘 싸웠다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두 팀의 어마어마한 체급 차이를 고려하면 충분히 그럴 만한 결과였으니까. 대회 자체도 중요하다기보단 이벤트성이 더 짙었고 말이다.


당연히 패배에 불만을 늘어놓는 팬들은 없었다.


단지 만회 골을 넣었던 마틴과 캐리가 선발로 나왔으면 좀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표현하는 정도였다.


캐리는 같은 스페인 리그의 세비야를 상대로도 최고의 활약을 펼친 바 있었으니 경험적인 측면에서도 맥긴보다 더 나았을 것 같다는 의견들.


반대로 맥긴이 잘 압박하면서 헌신적으로 뛰어줬기에 선제골 기회가 온 거고, 바르셀로나와 정면 싸움을 벌여볼 수 있던 거라면서 감독의 선택에 전폭 지지를 보내는 의견도 많았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부지기수라 봐도 무방했다.


“저는 참 아쉬워요. 블랜차드가 복귀하지 못한 게 말이에요. 우리 팀 라인업에 부팔과 블랜차드만 있었다면 진짜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 몰랐다고 보거든요? 여러분들도 동의하시죠?” - 하일랜드 풋볼 라디오 진행자 ‘콜린 피콕(Colin Peacock)’ -


그 와중에 아예 다른 의견을 펼치는 쪽도 있었지만.


이런저런 반응들은 많았어도 유로파 리그 챔피언다운 면모를 나름대로 보여줬으며, 훌륭히 맞서 싸웠다는 것은 별 이견 없이 통일되는 분위기였다.


*******


2015년 8월 30일.


이적 시장의 마감 날짜가 임박해 오면 구단들의 움직임이 급격하게 분주해지기 마련이다.


차근차근 진행하던 영입 작업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혹은 적합한 대상을 끝끝내 찾지 못해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그 외에도 다양한 사유로 인해 구단의 영입 부서는 철야 근무를 감수하기도 한다.


그 때문인지 축구 이적 시장 역사에서는 종종 마감 직전에 깜짝 놀랄 대형 딜이 성사되어 오곤 했는데.


최근에는 대표적으로 2010/11 시즌 겨울, 리버풀에서 첼시로 50m 파운드(약 900억 원)에 이적했던 페르난도 토레스가 제일 유명할 것이다.


하루 이틀 남은 기간이야말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이적 시장의 쫄깃한 긴장감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최적의 골든타임. 그래서 언론들은 ‘48시간’이란 키워드를 만들어 매년 꾸준히 써먹어 왔다.



[ Sky Sports ] 제임스 블랜차드의 거취는 48시간 이내에 결정될 것



이런 식으로 말이다.


언제나 이적 시장의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었던 스코티시 프리미어십. 리그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이들이 거대한 이슈를 몰고 온 적은 극히 드물었다.


역대 최고 이적료가 2013/14 시즌 셀틱에서 사우샘프턴으로 이적했던 수비형 미드필더, 빅터 완야마의 12.5m 파운드(약 211억 원). 올해 마찬가지로 셀틱에서 사우샘프턴으로 이적한 리그 베스트 수비수, 버질 반다이크가 13m 파운드(약 230억 원)로 살짝 기록을 갱신했을 뿐이다.


뛰어난 재능들을 사고파는 이 바닥에서 거의 취급도 받지 못하던 불모지가 이만큼 주목받은 건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라이징 스타. 확실히 작년 그의 활약이 꽤나 센세이션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잉글랜드 언론의 메인 페이지 한 군데를 로스 카운티 선수가 며칠 내내 차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스케일이 걷잡을 수 없도록 커진 계기는 48시간 사이에 일어났다.


셀틱의 구슬픈 블랜차드 사가가 종결되고, 에버튼 쪽으로 완전히 넘어간 듯한 시점에서 터져 나온 갑작스러운 속보.



[ BBC ] 에버튼의 블랜차드 단독 입찰에 끼어든 리버풀



잉글랜드의 명문 구단인 리버풀까지 참전하면서 본의 아니게 머지사이드 더비(Merseyside Derby : 머지사이드 주를 연고지로 삼은 두 팀의 지역 더비 명칭)가 프리미어십을 사이에 두고 발발하게 된 것이다.


뜻밖의 대형 건수를 잡은 언론들은 신이 나서 해당 기사를 마구 뽑아대기 시작했다.



[ Daily Mail ] 리버풀, 초기 비드로 12m 파운드(약 217억 원) 장전


[ Daily Star ] 리버풀은 제임스 블랜차드를 높이 평가하며, 차세대 스티븐 제라드가 될 스타성을 지녔다고 확신한다


[ Sky Sports ] 물러서지 않는 에버튼, 14m 파운드(약 254억 원) 제안 중


[ The Guardian ] 블랜차드의 몸값, 로스 카운티가 쉽게 거부하기 어려운 금액으로 불어나고 있다


[ Daily Mail ] 리버풀, 15m 파운드(약 272억 원) 비드



거의 한 시간꼴로 신규 소식이 뜰 만큼 급격하게 흘러가는 상황.


설령 이적하더라도 10m 파운드 부근에서 마무리될 것 같았던 액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역대 최고 이적료마저 단숨에 뚫어버리니 팬들도 혼란스러울 지경에 이르렀다.


끝났다고 통보해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끝난 줄 알았는데 어느새 또 나타나 끊임없이 흔들어 댄다. 재력이 빵빵한 곳에서 계속 군침을 흘리며 건드리고 있다.


여태 겪었던 이적 건과는 뭔가 다른 분위기.


분명 선수는 떠나길 원치 않고, 감독 또한 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구단주인 로이 베넷도 블랜차드의 판매를 반대한다고 공식 발표까지 했는데.


왜 이번 사가는 두어 달이 넘도록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걸까?


*******


“기사 보셨습니까? 장난 아니에요! 제대로 이슈 중심에 섰다니까요?”


그건 로스 카운티의 수뇌부 한 명이 계속 여지를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1,500만 파운드입니다. 무려 1,500만 파운드! 리버풀이 그 돈을 내겠다고 방금 정식 제안을 해왔다고요! 하아······ 정말이지 굉장한 액수예요. 도대체 이걸 어떻게 무시할 수 있다는 거지? 사람들이 참 금전 감각이 없어.”


감독실에 다짜고짜 들이닥친 론 딕슨 이사는 완전히 흥분 상태에 있었다.


“더 대단한 건 뭔지 아십니까? 여기서 더 받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에버튼도 물러서지 않고 있으니 말입니다! 둘이 경합 붙여서 잘만 굴리면 내 생각에 이거 2,000만 파운드까지 불어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니까요?”


“······.”


“2,000만 파운드면 우리가 빅토리아 파크 증축하는 데 쏟아부은 돈을 바로 메울 수 있는 수준입니다! 고작 선수 한 명 팔아서! 맙소사, 이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예요!”


그는 콧김을 내뿜으며 열변을 토했다. 이미 머릿속에서는 20m 파운드를 손에 거머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잘 생각해보세요! 이 정도 이윤은 쉽게 남길 수 없다니까요? 최고점에 올랐을 때 내놓아야지, 안 그러면 굴러오는 황금을 걷어차는 꼴입니다! 평생 후회할 일을 만드는 거죠!”


이리저리 분주한 발걸음을 놀리다 대뜸 책상 위를 양손으로 짚으며 상체를 들이미는 론 딕슨. 문서를 읽고 있던 델 레오네가 희미하게 미간을 찡그리며 올려다보았다.


“블랜차드를 팝시다.”


“······.”


“그러면 빈자리에 새로운 선수를 사와도 넉넉히 남아요. 팔고 나서 다음 시즌에 섭섭지 않게 지원해드릴 테니까. 원한다면 겨울에 바로 돈을 푸는 것도 가능하고요!”


침묵을 지키던 감독이 천천히 입을 뗐다.


“블랜차드는 여기서 할 일이 더 남아 있습니다.”


“델 레오네 씨, 내가 괜히 이러는 게 아니에요.”


딕슨은 답답하다는 듯 허리를 세우며 팔을 휘적거렸다.


“당신이 팀을 잘 이끌어나가니까. 블랜차드 없이도 잘해 나가고 있으니까 제안을 꺼내 볼 수 있는 거죠. 부상으로 빠져 있는데도 전혀 공백이 없잖습니까? 그, 뭐더라? 조쉬 맥······ 아, 아무튼 이번에 영입한 선수가 대신해서 훌륭히 역할을 소화 중인데 뭐가 문제입니까?”


“시즌은 한참 남았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한정된 스쿼드로 꾸려나가면 달리는 도중 낙마할 가능성이 높아지지요.”


“그래서 뭣하면 겨울에 보강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거죠! 아니지. 시간이 남아 있을 때 빨리 대체자를 사 옵시다! 영입 리스트 있죠? 약간 오버페이 하더라도 2,000만 파운드를 넘지는 못할 테니.”


“블랜차드를 대체할 수 있는 프로필은 없습니다.”


“어차피 지금 선발로 나가는 선수들이 주전이잖아요? 그들을 받쳐줄 전력만 영입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챔피언스 리그에 적합한 레벨인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어휴, 거기서 성과가 나오면 얼마나 난다고 그럽니까? 챔피언스 리그는 기대하지도 않아요! 유로파 리그에서 한 번 이변을 일으켰으면 된 거죠!”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데드라인에 점점 가까워져 가는 시간.


마감의 압박을 이용해서 경쟁을 부추긴 뒤 최대한 뜯어낼 심산이었으나 딕슨도 초조함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구단 재정을 관리하는 한 축으로서 거금을 벌어들일 기회를 어찌 마다한단 말인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돈다발들이 신기루가 되어 날아가 버리기 전에 서둘러야만 한다.


딱 한 사람만 설득하면 된다.


저 완강한 이탈리안의 마음만 돌리면 구단주와 단장의 태도도 바뀔 터. 한 번만 설득에 성공하면 끝나는 것이다.


“내년에 또 이만한 관심을 받을 거란 보장이 없어요. 블랜차드가 부진하기라도 하면, 다른 선수를 영입한 구단들이 흥미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그냥 헐값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조급한 나머지 딕슨의 언행은 아슬아슬 선을 넘을락 말락 하고 있었지만, 감독은 태연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사님의 말씀이 맞다 해도 선수가 원치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까요. 그래서 당신이 필요한 거예요!”


딕슨이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 말이라면 껌뻑 죽는 선수 아닙니까? 델 레오네 씨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래서 구태여 내가 여기까지 찾아와서 부탁하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프로라면 누구든 더 높은 무대를 동경하지 않습니까? 그게 당연한 거예요. 상식적으로 에버튼과 리버풀이 부르는 데 거절하는 게 말이 됩니까? 선수가 세상 물정을 몰라도 단단히 모르는 거죠.”


“······.”


“구단은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선수도 더 높은 곳에서 뛸 수 있고. 서로 좋은 거잖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 말은 도통 듣질 않으니 이 얼마나 갑갑한 노릇입니까? 설득이 가능한 건 당신뿐이에요.”


감독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보고 블랜차드에게 떠나라고 직접 얘기하란 말씀이시군요.”


“그래요! 그겁니다! 그게 그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당신이 가서 살짝 등 떠밀어 주기만 하면 뭐, 별수 있겠습니까? 바로 계약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는······.”


“거부하겠습니다.”


거의 성공을 목전에 두었다고 생각했던 딕슨은 돌아오는 답변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예? 거······ 거부요?”


“방금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아니, 잠깐만요! 오해를 산 것 같은데, 내 말은 강요하듯이 쫓아내라는 게 아니라······.”


“론 딕슨 이사님.”


평소보다 더 낮게 깔리는 중저음. 자세를 고쳐 잡은 이탈리안과 눈이 마주친 딕슨은 흠칫하며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리고 말았다.


책상 위에 팔을 올려놓고, 한데 모은 두 손에 턱을 얹은 채 똑바로 응시하는 시선은 등골이 오싹하기까지 했다.


“제가 이사님이 하시는 일에 조금이라도 간섭한 적 있습니까?”


“그건 갑자기 왜······.”


“제가 구단 사정을 무시하면서 어려운 영입을 주문하거나 운영에 차질을 빚을 만한 사항을 요구한 적 있습니까?”


“······없죠.”


“저는 이사님의 권한과 업무를 존중합니다. 그러니 저 또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손을 책상 위에 천천히 놓으며 델 레오네가 계속 말했다.


“모두 제가 지극히 아끼는 선수들입니다. 한데, 제 입으로 그런 말을 전달하라는 것은 감독인 절 무시하는 처사로 느껴지는군요.”


“그게······.”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선수가 원한다면 전 가로막지 않을 겁니다. 블랜차드가 남으려는 건 본인 의지입니다. 정 2,000만 파운드에 미련이 남으신다면 직접 설득하시죠. 그가 마음을 바꾸면 저 또한 수용하겠습니다.”


딕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워낙 당황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기도 했지만, 적절하게 받아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용건이 끝났다면 이만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더는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군요.”


“······.”


사실 따지고 보면 이사직에 있는 자신이 더 높은 위치에 있다. 한낱 고용인에 지나지 않는 감독 따위에게 쩔쩔매는 것이 우스운 일이었다.


평범한 감독이었다면 그랬을 테지만.


더블 크라운으로 벌어들인 상금, 대폭 늘어난 유명세와 인기로 급상승한 매출, 거대한 기업들과 스폰서십을 체결하며 받은 막대한 후원금까지.


안토니오 델 레오네가 부임하지 않았다면 없었을 것들.


구단주는 그를 볼 때마다 사랑에 빠진 눈을 하고 있고, 단장의 신뢰도 굳건하다. 모두가 그를 철썩같이 믿으며 따른다.


혹여나 그를 내쳤다간 팬들은 폭동을 일으킬 기세다.


이제는 단순히 감독을 넘어선 그 이상의 존재. 한눈팔고 있다가 어느 순간 말도 안 되게 커져 버린 거다.


명목상으로만 자신의 직급이 높을 뿐. 누가 더 구단에 영향력 있는 인물인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저쪽에서 먼저 무례하게 굴었어도 감히 터치를 못 했을 것인데. 그는 끝까지 신사답게 정중한 태도를 유지할 뿐이다.


누가 봐도 과실을 저지른 건 자기 자신.


딕슨은 도망치듯이 감독실을 허겁지겁 빠져나와야만 했다.


문을 닫자마자 깊은 심호흡을 내쉬었다. 정면으로 쏘아보던 그 싸늘한 시선이 잊히지 않아 가슴이 미칠 듯 뛰었다.


다시는 그와 단둘이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을 정도로.


언제나 차분하던 그 이탈리안이 분노 어린 표정도 지을 줄 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참 내, 뭐 저리 무게를 잡으면서 말한담.”


간신히 숨을 고른 딕슨은 혹시나 들릴세라 조용히 투덜거리며 떨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 Scottish Sports ] 오피셜) 제임스 블랜차드 잔류 확정



< 이적 시장 종료 >


=============================

< 영입 >

존 맥긴 / 미드필더 / 세인트 미렌

2.5m 파운드(약 42억 원)



< 방출 >

맷슨 클락 / 미드필더 / NEC 네이메헌

120,000 파운드(약 2억 원)


에드빈 데 루어 / 미드필더 / SC 헤이렌베인

1m 파운드(약 18억 원)


케빈 루카센 / 포워드 / NAC 브레다

75,000 파운드(약 1억 3천만 원)


소피앙 부팔 / 레프트윙 / 앙제 SCO

임대 종료



<임대>

엘리엇 비스턴 / 라이트윙 / 에어드리 유나이티드


크리스 켈리 / 레프트백 / 에어드리 유나이티드


숀 맥카시 / 골키퍼 / 알비온 로버스


=============================


*******


하일랜드의 딩월시, 아치니 로드의 어느 아지트.


이적 시장이 마감되고, 찾아온 A매치.


국가대표에 발탁된 선수들을 제외하면 잠시나마 일정이 여유로워지는 기간이었지만, 구단 못지않게 바쁜 일과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토드, 우리가 저번에 새로 디자인한 깃발은 어찌 됐나?”


“어제 주문했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그래. 다음 세인트 미렌전까지는 가져가야 해. 좀 더 사슴뿔이 번쩍거려야 한다고. 황금색 윤기가 좔좔 흐르게 말이야.”


로스 카운티의 공식 서포터즈 ‘숫사슴들’의 응원단장 피터 블랙과 토드 홉킨스. 그리고 그들이 선별한 몇몇 대표가 모여서 한창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미스터 딩월 구호 외칠 때 있잖아. 북을 처음에 연속으로 치는 거보다 끊어서 치는 게 좋겠어. 둥둥둥 둥둥이 아니라, 둥 둥 둥둥둥 이렇게.”


“다음에 걸어둘 브리튼 전용 현수막에 들어갈 문구는 생각해 뒀나?”


“새로운 노래를 만드는 중인데, 이 가사 내용 어떤 것 같아요?”


사소한 부분을 수정하는 것부터 큼지막한 프로젝트 계획까지.


로스 카운티가 전국적으로 치솟은 인기를 지속해 나갈 수 있는 비결은 역시나 올 시즌이 되어서도 흔들리지 않는 성적에 있겠지만, 이들의 활약도 마냥 무시할 순 없었다.


숫사슴들이 대외 활동을 꾸준히 펼쳐나가지 않았다면 작년의 짜릿했던 기억도 결국 서서히 흐릿하게 변해갔을 테니까.


카운티 신드롬의 뜨거운 열기가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는 데에는 서포터즈의 지분도 상당히 컸을 것이다.


스탠드를 점거한 불량배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기나긴 홍역을 치렀던 빅토리아 파크. 신흥 숫사슴들은 거기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반년 사이에 올바르고, 열정적인 팬 문화를 정착시켰다.


구단주 로이 베넷도 그 공헌을 인정하여 조직 운영 자금을 지원해주었고, 계속 성원을 보내 달라 부탁해 왔다.


언론에서는 작년 결산 때 선정한 스코티시 리그 서포터즈 순위에서 만장일치로 ‘숫사슴들’을 1위로 뽑았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 경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며 오늘도 서포터로서의 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이제 캐리하면 7번이잖아요? 이름에 숫자를 넣어보는 건 어때요? L 자리에 7을 넣는 거죠. ‘A7EXANDER CAREY’ 이런 느낌으로.”


“좋네. 거기서 그냥 숫자 7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L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거야.”


“그럼, 브리튼도 8번을 강조해 볼까요? B 자리에 숫자를 넣어서······.”


다들 하나씩 자기 의견을 내가며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조용히 앉아 있던 한 명이 손을 들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 좋은데. 제일 먼저 해야 할 게 있는 것 같아요.”


“제일 먼저 해야 할 것?”


블랙의 물음에 제안을 꺼냈던 남자가 대답했다.


“감독이요. 로스 카운티를 최고로 만들어 준 당사자인데. 우리의 자랑스러운 위인부터 뭔가 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건······ 그렇지. 근데 뭘 해줘야 한다는 거야? 그를 위한 대형 현수막은 이미 만들어서 경기장에 걸어뒀고, 챈트까지 계획 중에 있는데.”


“별명이죠.”


“별명?”


“좀 더 특별한 애칭이요. 지금은 사람들이 그를 델 레오네라 부르거나, 그의 이름인 안토니오로 부르죠. 더 줄여서 안토니 혹은 토니로 부르기도 하지만, 한마디로 임팩트가 없어요. 이름을 부를 때도 그에게 걸맞은 특별함이 가미된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특별하지 않다는 건 공감이 되는군.”


홉킨스가 거들었고, 블랙 또한 은연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말엔 동의하는데, 떠오르는 거라도 있나?”


남자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레오는 어떤가요?”


“레오?”


“그래요. 레오. 즉석에서 만든 게 아니라 따온 거예요. 특별함은 진작 그의 이름 안에 숨어 있었던 거죠.”


블랙은 머릿속에서 곱씹어보다가 깨달은 듯 외쳤다.


“오호, 그렇구먼! 그 말이 맞네! 왜 몰랐던 거지?”


그의 이름 Antonio Del Leone. 그리고 Del ‘Leo’ne.


레오(Leo)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별칭이다.


남자 이름을 짓는데 자주 쓰이는 편이지만, 실질적인 의미는 맹수의 왕인 사자를 뜻하는 라틴어.


유럽권에서는 왕을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터치라인에 서서 필드를 지휘할 때 드러나는 기품, 선수단을 꽉 잡고 있는 카리스마, 여전히 독보적인 프리미어십에서의 행보.


왕과 사자. 그야말로 이탈리안 감독에게 어울리는 이미지 아닌가?


“레오······ 레오라······. 좋은데?”


“확실히 그냥 이름을 부를 때보다 특별한 것 같아.”


“난 대찬성.”


다른 인원들도 새로운 별명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찾아보니 레오네가 이탈리아어로 사자를 뜻하는 이름이었어요. 그대로 불러도 되지만, 좀 더 간결하면서 느낌이 꽂히는 건 아무래도 레오 아니겠어요?”


블랙은 손가락을 튕기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이거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것 같아. 바로 추진하자고!”


“사소하긴 한데, 딱 하나 문제가 있긴 해요.”


제안했던 남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저번에 상대했던 리오넬 메시도 스페인에선 레오라고 불리더라고요. 이름에서 따온 거긴 하지만 별명이 겹친다는 게······.”


“아니,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블랙이 딱 잘라 말했다.


“난 우리 감독이 지금보다 훨씬 더 굉장하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거든. 로스 카운티로 강적들을 물리치며 유로파 리그를 먹고, 바르셀로나와 용맹하게 싸웠어. 리그에서 셀틱보다 높은 순위에 있는 건 이제 당연한 일로 여겨질 정도지. 이건 아무나 해낼 수 없는 일이란 말이야.”


이어서 홉킨스가 말했다.


“세계 최고의 선수와 같은 별명을 공유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더 의미가 깊은 일일지도.”


다른 사람들도 맞장구치기 시작했다.


“그쪽에서 레오란 별명을 특허 낸 것도 아니잖아? 더군다나 본래 이름에서 따오는 건데.”


“우리가 우리 감독을 최고라 생각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그렇지. 세상 어떤 감독을 가져와서 맞바꾸자 해도 난 싫어.”


“좋아. 그러면 다들 이견 없는 거지?”


모두의 의견을 확인한 블랙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잠깐 맥렐랜드 기자와 통화 좀 하고 올 테니 먼저들 회의하고 있어. 이번 건은 언론의 힘도 좀 빌려야 할 것 같군.”


그는 들뜬 발걸음으로 방문을 나섰다.


“앞으로 레오는 그의 상징적인 이름이 될 거야.”


작가의말

한 눈에 들어오기 쉽도록

2015/16 선수 명단과 영입 내역까지 포함해서

공지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_ _)


소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신

모아두상 님

감사드립니다. (_ _)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7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2015/16 로스 카운티 선수 명단 (스포일러 주의) 23.01.14 546 0 -
공지 2014/15 로스 카운티 선수 명단 (스포일러 주의) +4 18.09.04 2,076 0 -
공지 연재 주기에 관한 공지입니다 +4 18.04.11 3,266 0 -
공지 독자분들께 공지 하나 드립니다 +11 18.02.08 5,460 0 -
공지 2013/14 로스 카운티 선수 명단 +9 17.12.19 18,391 0 -
202 202. 공간 싸움 (3) +5 24.03.18 399 31 25쪽
201 201. 공간 싸움 (2) +11 24.02.27 591 38 31쪽
200 200. 공간 싸움 +6 24.02.06 701 36 26쪽
199 199. 대립 +5 24.01.25 745 32 26쪽
198 198. 대면 +5 24.01.14 799 34 25쪽
197 197. 팀의 완성도 +8 24.01.04 774 42 24쪽
196 196. 신뢰의 결실 +5 23.12.23 831 37 28쪽
195 195. 한 마리의 송골매 +5 23.12.10 820 39 23쪽
194 194. 두 마리의 사자 (2) +5 23.12.02 828 41 25쪽
193 193. 두 마리의 사자 +4 23.11.22 886 42 25쪽
192 192. 캡틴 잭 +3 23.11.10 847 40 26쪽
191 191. 경기장 위의 숫사슴들 +6 23.10.31 897 35 28쪽
190 190. 계몽의 시대 (3) +3 23.10.20 922 44 23쪽
189 189. 계몽의 시대 (2) +5 23.10.08 937 39 26쪽
188 188. 계몽의 시대 +4 23.09.26 983 42 26쪽
187 187. 새로운 국면 (5) +7 23.09.15 1,035 45 22쪽
186 186. 새로운 국면 (4) +6 23.09.03 1,061 42 25쪽
185 185. 새로운 국면 (3) +8 23.08.19 1,146 45 22쪽
184 184. 새로운 국면 (2) +8 23.08.04 1,192 40 26쪽
183 183. 새로운 국면 +7 23.07.13 1,272 56 22쪽
182 182. 지상 최고의 팀 (4) +8 23.06.28 1,247 50 29쪽
181 181. 지상 최고의 팀 (3) +5 23.06.16 1,140 39 24쪽
180 180. 지상 최고의 팀 (2) +6 23.05.27 1,252 50 24쪽
179 179. 지상 최고의 팀 +5 23.05.07 1,339 50 27쪽
178 178. 승부욕의 화신 +3 23.04.22 1,267 50 2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