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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님의 서재입니다.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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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작품등록일 :
2017.12.04 19:58
최근연재일 :
2024.04.07 19:32
연재수 :
20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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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0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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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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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190. 계몽의 시대 (3)

DUMMY

“다들 좋은 하루!”


라커룸에 들어서며 큰소리로 인사하는 에이든 딩월. 경쾌한 발걸음에서 거만함이 느껴지는 데에는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오, 12월의 사나이가 오셨군.”


“에이든. 이달의 선수가 된 걸 축하한다.”


“너무 띄워주지는 마요, 폰투스! 고마워요, 리!”


2골 4어시스트, 종합 6경기 6공격 포인트 생산에 두 번의 MVP 수상. 표면으로 보이는 기록뿐만 아니라 압박이나 볼 탈취, 왕성하게 뛰면서 연결고리 역할을 충실히 하는 등 전체적으로 필드에 끼친 영향력까지 고려하면 확실히 인정받을 만한 활약이었다.


게다가 데뷔 이래 커리어 최초로 받은 이달의 선수상이니 더욱 기고만장할 수밖에.


딩월은 당당한 포즈를 유지하며 자신의 캐비닛으로 가더니 묵묵히 축구화 끈을 다듬고 있는 옆자리를 익살스럽게 흘겨보았다. 다른 팀원들의 칭찬도 기분 좋긴 하지만, 정말로 자랑하고 싶은 대상은 따로 있었다.


“아, 이런. 생각보다 무거워서 팔이 뻐근한걸?”


연기자로서는 영 소질이 없는 듯한 뻣뻣한 억양을 내뱉으며 제대로 봐달라는 듯이 들고 있던 트로피를 벤치에 내려놓았지만, 눈길도 주지 않는 블랜차드.


“후후.”


그 모습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이라 제멋대로 해석한 딩월은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 봐. 내가 말했지?”


“······.”


“언젠가는 따 보이겠다고.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응? 언젠가가 아니라 작년이잖아? 그때 3월의 선수상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끝난 얘기 아니었어?”


초를 치는 스콧 보이드의 목소리에 딩월은 잠깐 흠칫했지만, 이내 표정을 다듬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어쨌든 12월의 선수는 내가 됐어. 그 말의 뜻이 뭔지 알아? 바로 나, 에이든 딩월이 제임스 블랜차드보다 더 뛰어났다는 얘기지!”


“에이, 출장 시간이 좀 다른데 불공평하다. 제임스는 교체로 들어온 적도 꽤 많았잖아. 12월만 해도 너랑 200분 이상 차이 날 텐데, 공격 포인트는 별로 차이도 안 나고.”


“출······ 연속 출장도 실력이거든요? 그만큼 감독님이 절 신뢰하고 있다는 건데······.”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재미있는 먹잇감을 포착한 보이드에게 알 바는 아니었다.


“에이든 좀 그만 놀려, 스콧.”


“심심해서 그러지. 형이 나랑 안 놀아주잖아.”


주장과 부주장의 대화를 뒤로 하고 딩월은 다시 블랜차드에게 집중했다.


“공격 포인트만 해도 그래. 내가 저번 경기에서 기막힌 크로스로 하나 떠먹여 줬잖아. 나 아니었으면 골 못 넣었을 텐데.”


“그거는 제임스가 잘 받아 넣은 거지. 내가 봤을 때 그 크로스는 제임스 아니었으면 뒤로 그냥 훌쩍 넘어가버렸을걸?”


“······꼬투리 좀 그만 잡아줄래요, 스콧? 그래도 만들어 준 건 맞잖아요. 반면에 제임스한테서 제가 받아먹은 건 없었다고요.”


“······.”


“이것까진 반박 못 하겠죠?”


“챔스 때 제임스가 슛한 거 주워먹었잖······.”


“그만해. 내가 놀아줄 테니까. 안 그래도 잠깐 홍보 부서에 볼일이 있던 참이니까 지금 같이 가.”


브리튼이 보이드를 끌고 나가면서 방해꾼은 사라졌지만, 딩월의 들떴던 마음은 식어버린 뒤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블랜차드는 덤덤한 눈으로 한번 곁눈질을 주더니 다시 제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이어서 들려온 미세한 코웃음.


“우······ 우스워? 그러면 이번에 결판을 내보자고. 다음 달 1월의 주인공은 누가 될지. 어때?”


“또 덤비려고, 에이든? 그때도 제임스에게 호되게 시달려 놓고서 뒷감당할 수 있겠어?”


월리스의 물음에 딩월은 가슴을 활짝 펴며 대답했다.


“아니요. 이번엔 정말로 자신 있어요. 전 드디어 깨달았거든요. 축구의 진리를 말이죠.”


“······이달의 선수 한 번 됐다고 너무 나간 거 아니야?”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좋았지만, 라커룸 안의 모두가 참혹한 미래를 예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한 명만이 다른 결말을 확신하는 듯했다.


사실 블랜차드가 당장 진열장에 넣어둔 올해의 선수 트로피만 들고 와도 진작 끝나버릴 승부였겠지만.


‘나중에 어쩌려고 또 저 녀석을 자극하는지.’


다들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 겉보기엔 미동도 없는 것 같지만, 벌써 저 승부욕의 화신에게 불씨 하나가 지펴졌다는 걸.


*******


같은 시각, 로스 카운티 사무실에서는 새로운 손님맞이에 한창이었다.


아니, 이제 식구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 Scottish Sports ] 라이언 잭, 부가 옵션을 포함한 3.9m 파운드(약 67억 원)에 최종 낙찰



겨울 시장이 열리자마자 모든 절차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며칠 전부터 진척되어 가던 양 팀의 협상이었기에 이적이 성사되기까지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선수 또한 미리 짐을 싸둔 상태였기에 바로 하일랜드로 넘어올 수 있었다.


올드 펌 중 하나에 입성하는 것. 잭이 세웠던 예전 목표였다. 그는 애버딘에 의미 없이 계속 머물기보다는 좀 더 야망이 넘치는 팀에서 뛰고 싶어 했다.


현대 축구 트렌드가 뒤떨어진 스코티시 리그 내에서 그 뜻을 펼칠만한 건 올드 펌뿐이었다. 포부가 남다른 젊은 재능들이 항상 셀틱이나 레인저스로 향하는 이유였다.


잭도 다를 바 없었고, 올드 펌 양측에서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에 자연히 다음 행선지도 그쪽이 되었다.


하지만 셀틱은 3선이 포화 상태라 불분명했고, 레인저스는 아직 프리미어십으로 올라오지 못한 상황. 그래서 우선 그들이 승격하기 전까지 기다릴 요량으로 일 년 연장 계약을 수락하려 했던 것이었다.


로스 카운티가 러브콜을 보내오기 전까지 말이다.


갑작스럽게 떠오른 팀이 아무도 닿지 못했던 올드 펌의 아성을 무너뜨리며 프리미어십의 패자가 되었고, 그 돌풍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자신을 원하고 있다고 한다.


안토니오 델 레오네가 손을 내미는데 더 기다릴 이유가 없잖은가. 단지 그가 원하는지 확신도 신호도 없었기에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것뿐.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독주 중인 로스 카운티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것도 멋진 일이겠지만, 그보다 더욱 즐겁고 설레는 건 세계적인 감독 라인업에 들어서려 하는 이탈리안 밑에서 뛸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델 레오네의 선수가 된다는 건 스코틀랜드 일대의 모든 축구 선수에게 있어 꿈의 목표나 다름없었으니까. 그의 입지와 명성은 어느새 그 정도로 드높아져 있었다.


“잘 왔네.”


그 동경하던 위인을 직접 눈앞에서 마주하자 멀리서 보던 때보다 더 거대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가, 감사합니다.”


건넨 손을 맞잡은 잭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을 더듬고 말았다.


메디컬 테스트 통과와 계약서 사인까지 완료하고, 유니폼을 착용한 사진까지 촬영한 뒤 이제 마무리할 차례. 감독과 나란히 서서 찍을 시간이었다.


카메라를 쳐다보는 동안 잭의 신경은 옆으로만 쏠렸다. 자신의 체격이 작은 건 분명 아닌데, 같은 높이로 맞닿는 감독의 어깨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활약을 기대하지.”


모든 일정이 끝난 뒤 그가 다시 악수를 청하면서 한마디 던져주었다. 잭은 그 말 하나만으로도 빨리 뛰고 싶다는 열정이 끓어올랐다.


“바로 다음 경기에 선발로 나가야 할 테니까.”


“네?”


정말로 빨리 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우리 팀의 주장이 경고 5회 누적으로 한 경기 징계를 받은 상황이거든. 자네 말고는 후방을 책임져 줄 미드필더가 없다는 얘기네.”


오자마자 부담감을 짊어지게 된 꼴이었지만, 잭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상황을 즐기는 타입이었다.


케틀웰이 부상으로 이탈하게 된 배경은 알고 있었지만, 브리튼까지 나올 수 없는 상황. 로스 카운티로서는 잭이 바로 합류해 준 게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선두를 달리는 팀의 위기를 직접 구할 수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잭은 다시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


< 15-16 Scottish Premiership 21 Round >

세인트 존스톤 : 로스 카운티

2016년 1월 4일 (월) 19:45

맥다이어미드 파크 (관중 수 : 10,696명 / 매진)



[로스 카운티 / 4-1-2-3]

FW : 제임스 블랜차드 / 에이든 딩월 / 앤드류 톰슨

CM : 존 맥긴 / 라이언 잭

DM : 알렉산더 캐리

DF : 리 월리스 / 스콧 보이드 / 폰투스 얀손 / 아메드 델샤드

GK : 마크 브라운



맥다이어미드 파크의 매진. 만 명의 좌석을 채운 건 17년 만의 일이었다.


1999/2000 시즌에 셀틱과 치른 경기에서 10,200명이 모여 직관했던 관중 수 최고 기록이 오늘 갱신된 것이다.


카운티 신드롬으로 인해 축구 관심도가 증폭한 자국민들과 외국 관광객들의 유입도 크겠지만, 그들의 연고지인 퍼스가 채운 비중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일랜드 챔피언이 영국 안팎에서 활약하며 연일 화제를 몰고 다니는 동안, 알게 모르게 한 인물도 심상찮은 행보를 보이면서 수많은 팬에게 추앙받는 중이었으니까.


본디 명성에 비하면 과분한 수준의 뛰어난 감독을 얻어 모든 프리미어십 팀의 팬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있는 로스 카운티. 퍼스의 주민들은 현재 그 황홀한 기분을 조금이나마 비슷하게 체험하고 있었다.


철썩 -


1 : 0


리드하는 쪽은 홈팀, 세인트 존스톤.


로스 카운티를 상대로 선제골을 넣는 데 성공한 팀이야 몇 있긴 했지만, 이번엔 느낌이 좀 달랐다. 보통은 중거리 슛이나 세트피스 상황에서 약간의 운이 따라줬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방금 그들이 한 것은 압박을 빠져나와 속공으로 허점을 찌르는, 월리스가 올라와 비어있던 공간을 정확히 급습하는 형태였다.


그 공격을 막는 과정에서 보이드가 측면 커버를 해주긴 했으나, 얀손과 보이드 사이에 일순간 벌어진 틈새로 한 명이 빠져들어 가는 것까지 저지하진 못했고.


2차 침투를 해내며 박스에 진입한 상대는 침착한 컷백 패스를 내주면서 로스 카운티의 골망을 흔들어 냈다.


요행 하나 없이 짜임새 있는 움직임만으로 만들어 낸, 로스 카운티의 시스템을 제대로 공략한 플레이.


“그새 또 발전했군.”


가만히 지켜보던 델 레오네는 감탄 섞인 얼굴로 말했다.


“팀을 만들어 가는 속도가 여간 예사롭지 않아. 닐, 자네가 봐도 그런 것 같지 않나?”


“예······ 확실히 다른 팀에 비해 뭔가 더 버거운 느낌입니다.”


전반적인 주도권은 로스 카운티가 가져가고 있지만, 불시에 날카로운 공격으로 위협적인 기회를 만든 건 세인트 존스톤이 더 많았다.


“참 대단한 감독이야. 우리를 상대로 이런 접근법을 가져온다는 발상 자체도 놀랍지만, 실제로 해낸 것이지 않나?”


“우리 선수들이 구사하는 압박을 저렇게 매끄럽게 빠져나오는 팀은 프리미어십에서 올해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저건 올바른 훈련법을 바탕으로 수많은 담금질이 반복되어 이루어진 결과일 테니까.”


이제껏 로스 카운티에 도전해 온 팀들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의 접근법을 사용했었다.


과감히 압박하여 후방 빌드업을 사전에 제어하려는 방식과 극단적으로 내려앉아 공간부터 틀어막는 수비 방식.


후자는 애당초 이기려는 전략이 아니기에 생략하고, 전자만 보자면 이 수법을 택한 팀들은 번번이 실패만 겪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리미어십의 압박 구조는 아직 엉성한 상태.


최근 로스 카운티의 대성공으로 압박의 중요성이 두드러지면서 탈바꿈을 시도하려는 팀들이 늘어나고는 있으나, 이곳은 수년간 킥 앤 러시에 더 익숙했던 리그다.


이제 막 걸음마 단계로 진입한 그들이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건 무리에 가까웠다.


같은 수준끼리 맞부딪치는 거라면 통할 수 있겠지만, 상대는 전술 변화에 능숙한 델 레오네. 그래서 매번 호기롭게 달려들었다가 깨지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캐리를 중심으로 한 라볼피아나와 후방 스위칭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정착하면서 견제하는 게 더욱 어렵게 되었다.


세인트 존스톤의 감독 라이언 고드프리는 그 두 가지에서 벗어나 다른 접근법을 가져온 거다.


“탈압박을 기반으로 한 속공.”


감독이 말했다.


“프리미어십의 대부분 팀들은 압박을 대처할 때 좋게 말하면 롱볼, 실상은 뻥 차기에만 바빴지. 빌드업 목적이 아닌 걷어내기에 불과했기에 전방으로 정확히 전달하지 못하니, 우리가 쉽게 볼의 소유권을 가져올 수 있었어.”


“저 팀은 빌드업 목적이 뚜렷한 것 같습니다.”


“선수 면면만 보면 우리와 비교해서 한참 떨어지는 부분들이 많아. 그런데 적어도 시스템적인 면에서는 셀틱보다도 더 완성도가 높아 보이는군.”


세인트 존스톤은 정교한 패스와 호흡이 맞아떨어지는 움직임으로 전방 압박을 풀어 나오고 있었다.


무모하게 압박하기보다 반대로 압박을 벗어나는 걸 연마한 셈이다.


그 과정에서 실패하기도 했지만, 성공할 경우 그들에게 턴이 넘어가면서 매서운 공격이 이루어진다. 포위망을 뚫으면 완전무결해 보이는 로스 카운티 시스템의 허점을 찌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붙어온 상대들은 맥긴과 딩월을 중심으로 쳐놓은 그물을 벗어나지 못해 그대로 말라 죽었다. 하지만 그물을 뜯어내고 나오는 순간 로스 카운티에도 약점은 존재한다.


바로 왼쪽. 월리스가 오버래핑해 올라온 공간은 제일 취약한 지점이다.


초반 빌드업을 거쳐서 상대 골문까지 압박하는 형세가 되면 맥긴이 좀 더 위로 올라가고, 캐리가 3선 자리를 메우는 형태가 되는데.


그 말은 월리스의 자리를 커버하는 미드필더가 캐리라는 뜻이다.


“알렉스는 팀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선수지만, 수비나 에너지 레벨에서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지.”


감독이 말했다.


“하필 이번에 빌드업을 강화하려고 스콧을 왼쪽에 둔 것도 화근이 됐어. 알렉스를 대신할 기동력이 전무한 상태니까 말이야. 상대는 그걸 역으로 노렸고, 성과를 거뒀지.”


걷어내려는 것이든, 목적이 뚜렷하든 롱볼은 직선으로 차기 어려운 구조이기에 반대편으로 전환하는 게 보통. 그래서 델 레오네는 압박을 빠져나와도 저지할 수 있도록 수비에 발군인 브리튼과 델샤드를 오른쪽에 배치해 놓았다.


하지만 저렇게 잘게 썰어 압박을 풀어 나오면 왼쪽을 공격하기 수월해진다.


아직 팀에 적응하기 바쁜 라이언 잭이 선발로 나온 것도 뼈아픈 원인일 수 있다. 브리튼이었다면 수비의 틈새로 들어온 후속 침투를 노련하게 막아냈을지도 모르니까.


“저 신예 감독이 로스 카운티 파훼법을 하나 고안해서 들고나와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줬군. 하지만 재미있는 건 저게 다른 팀에 딱히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을 거야. 왜인 줄 아나?”


“장기적으로 보면 몰라도 당장은 세인트 존스톤만 가능한 방법 같습니다. 다들 따라 할 엄두를 못 낼 것 같은데요.”


“그래, 맞아. 저건 어설프면 오히려 독이 되지. 무리뉴가 캐리에게 마크맨을 붙이거나 하는 정도는 조건만 갖추어지면 비슷하게라도 흉내 낼 수 있겠지만, 저건 고유의 노하우를 오랜 기간에 걸쳐 녹여내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야.”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축구에는 코치진이 관여하기 어려운 재능의 영역과 최대한 관여할 수 있는 담금질의 영역이 있지.”


그가 계속 말했다.


“타고난 발재간이나 골을 넣는 감각 같은 것은 우리가 아무리 가르쳐도 한계가 있어. 그건 선천적으로 타고나야 해. 그러나 팀원 간의 호흡, 패스를 받는 움직임, 수비의 끈끈함. 이런 것들은 지도자에 따라 누구라도 충분히 개선될 수 있는 부분이네.”


“감독님도 빌드업은 주는 사람보다 받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항상 강조하셨죠.”


“뛰어난 패서만 있으면 무조건 볼이 원활하게 돌 거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아. 주변에서 정적인 움직임만 가져가면 아무 소용이 없거든. 주는 건 패서지만, 패스 루트를 만드는 건 받는 쪽의 몫이지.”


델 레오네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상대 쪽 벤치를 보았다.


“그 당연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공식을 잘 파악하고 이행할 줄 아는 인물이 세인트 존스톤 선수들에게 축구 지능을 꾸준히 이식해 준 성취물이라 봐도 될 거야.”


설명을 다 듣고 난 스튜어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은 막연하게나마 그렇겠거니 했었지만, 이제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왜 이탈리안이 고드프리라는 인물을 높게 평가하는지, 그가 다른 프리미어십의 감독과 어떤 부분에서 차별점이 있는지.



후반전이 되자마자 감독은 얀손과 대니 패터슨을 교체했다.


얀손의 폼이 오늘따라 좋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문제점이 드러난 측면 기동력을 패터슨으로 메우기 위함이었다.


전반전보다는 안정적이게 되었으나, 점수를 따라가긴 쉽지 않았다. 아마 세인트 존스톤이 좀 더 조심스러운 경기 운영으로 전환한 탓도 있을 것이다.


후반 70분이 되어 딩월과 맥긴을 대신해 리암 보이스와 잭 마틴의 투입까지 이루어졌지만, 성과는 도통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프리미어십 첫 패배의 기운이 드리울 무렵.


측면 높이 올라온 델샤드가 크로스를 올렸고, 그 궤적을 쫓아 박스 중앙으로 그림자처럼 불쑥 들어가는 침투.


블랜차드였다.


델샤드의 볼을 받아 오른쪽 가슴으로 짧게 터치해 밀고 들어가면서 세인트 존스톤의 두 센터백 사이를 빠져나가는 움직임.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빠져나오자마자 곧바로 슛을 날리는 동작에 무게 중심이 흐트러졌지만, 그의 발을 떠나 솟아오른 볼은 우측 상단 구석으로 강하게 꽂혀 들어갔다.


“우와악! 제······ 제임스가 해냈습니다! 잘했어, 제임스!”


관중들의 함성과 함께 지켜보던 스튜어트가 환호했고, 뒤의 코치들은 기뻐하며 옆 사람과 얼싸안았다.


정말로 질 줄 알았는데, 무패 행진이 이렇게 종결되나 싶었는데 극적으로 팀을 구해낸 멋진 골에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인트 존스톤과 로스 카운티의 차이는 만들어져 가는 팀과 완성된 팀의 차이였을 뿐. 제임스의 개인 능력이 아니었다면 웃는 건 저쪽이었겠지.”


감독은 그다지 기쁘지 않은 얼굴이었다.


“어쩌면 오늘 경기는 이 나라 축구판에 있어 꽤 상징적인 날이 될지도 모르겠군. 또 한 번의 지각변동이 일어날 거야. 그건 관계자로서 기쁜 일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계기를 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넥타이를 고쳐 맨 그는 분한 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실상 나의 패배야, 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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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인트 존스톤 1 : 1 로스 카운티 >

제임스 맥파든(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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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블랜차드(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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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끝난 뒤, 그의 예상대로였다.


‘델 레오네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고드프리 같은 인물이 나타났을까?’


현재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였다.


이탈리아에서 온 이방인이 등장한 시점부터 프리미어십이 계속 격변하고 있다는 설을 예전부터 제법 여럿이 주장하곤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정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델 레오네가 없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가 존재하지 않고, 여전히 셀틱이 정상에 군림하는 세계관이라면? 강자의 밑에 깔리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풍조는 유지되었을 테고, 위기의식을 가지는 팀도 없었겠죠. 세인트 존스톤도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니 샘 라이트 감독은 그대로 자리를 지켰을 것이고, 라이언 고드프리는 그대로 포퍼 애슬래틱에 남아 있었겠죠. 현 세인트 존스톤 감독은 끝내 재능을 피우지 못해 사라졌을 수도 있고, 그를 알아주는 다른 무대로 가서 경력을 이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경질될 이유도 구실도 없어 안전하게 눌러앉아만 있던 기득권층에 의해서 말이죠.” - 축구 평론가 ‘그렉 코너(Greg Connor)’ -


“마틴 오닐이 못하고 있는 것 같나요? 아니요. 그는 평소대로 하고 있습니다. 원래대로였다면 그는 여느 때와 그렇듯 셀틱의 막강한 군단을 이끌며 단독으로 선두를 질주했을 테고, 역시 전설이라며 팬들에게 칭송받았겠죠. 아니, 그 전에 전임 감독 로니 데일라가 자진 사임하지 않아서 오닐을 볼 일이 없었으려나요? 단지 로스 카운티, 델 레오네란 존재 하나 때문에 모든 게 문제로 보일 뿐인 겁니다. 운명이 뒤틀려 버린 거죠.” - 풋볼 전문가 ‘마이클 포드(Michael Ford)’ -


어찌 보면 마땅한 근거도 없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웃기게도 이 운명론에 스코틀랜드 전역의 모두가 설득당하고 있었다.


축구팬들, 선수들, 감독들, 보드진들, 고위층 인사들까지.


최근 유로 2016 예선을 통과한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의 선전도 이 주장에 힘을 실어줬을 것이다.



[ Scottish Sports ] 라이언 고드프리, 카운티 신드롬이 만들어 낸 걸작품



급기야 언론에서도 관련 주제를 보도했다.


그것은 혁명의 바람이었다.


일각에서는 이 현상을 두고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과거 18세기에 우리나라가 커다란 깨우침을 얻었던 것처럼. 축구에, 프리미어십에 또 다른 변화가 내려앉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Scottish Enlightenment). 뛰어난 지식인들이 모여 다양한 분야에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면서 나라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사상운동.


수준이 떨어지는 곳, 앞으로도 발전할 일이 없을 곳으로 멸시받아 오던 프리미어십에 한 뛰어난 전술가가 나타나 유로파 리그까지 제패하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또 하나의 인물이 등장해 지금 모든 구단 관계자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만들었다.


또한 과거에 지배층의 권력을 당연시하며 순종하던 피지배층의 개념이 점차 변화해 갔던 것처럼.


올드 펌의 우승을 당연시하던 팀들이 하나둘 들고 일어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과장해서 말하면 범위가 좀 작을 뿐, 스코틀랜드에 두 번째 계몽주의가 찾아오고 있는 셈이었다.


어떤 곳에서는 델 레오네 이름의 ‘Del’ 부분을 따서 ‘Delightenment’라는 고유명사를 만들어 부르기까지 했다.


이 모든 건 이탈리안의 존재가 있었기에, 그가 군소 클럽이었던 로스 카운티를 이끌고 더블 크라운을 이룩했기에 벌어진 일. 여기에 이견을 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문 축구 분석 프로그램 Scottish Football Day의 고정 패널 조니 밀러는 다른 방송에 출연하여 이 내용에 대해 다뤘다.


“프리미어십은 혼돈에 빠져들었습니다. 다들 무언가를 깨우친 듯이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죠. 그리고 셀틱을 향해 하나둘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올드 펌 절대주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감독 만능주의’ 시대로 접어든 겁니다.”


이어서 그가 한 말은 완벽히 다음 단계로 넘어감을 선포하는 발언이었다.


“더 이상 단순한 로스 카운티 감독이 아니에요. 델 레오네는 프리미어십 개혁의 선구자이며,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습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빨리 써서 올리고 싶은데 참 쉽지 않네요.

그래도 계속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_ _)


소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신

모아두상 님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_ _)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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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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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202. 공간 싸움 (3) +6 24.03.18 576 35 25쪽
201 201. 공간 싸움 (2) +11 24.02.27 644 39 31쪽
200 200. 공간 싸움 +6 24.02.06 751 37 26쪽
199 199. 대립 +5 24.01.25 788 33 26쪽
198 198. 대면 +5 24.01.14 839 35 25쪽
197 197. 팀의 완성도 +8 24.01.04 813 43 24쪽
196 196. 신뢰의 결실 +5 23.12.23 868 38 28쪽
195 195. 한 마리의 송골매 +5 23.12.10 855 40 23쪽
194 194. 두 마리의 사자 (2) +5 23.12.02 864 42 25쪽
193 193. 두 마리의 사자 +4 23.11.22 925 43 25쪽
192 192. 캡틴 잭 +3 23.11.10 878 40 26쪽
191 191. 경기장 위의 숫사슴들 +6 23.10.31 938 35 28쪽
» 190. 계몽의 시대 (3) +3 23.10.20 962 44 23쪽
189 189. 계몽의 시대 (2) +5 23.10.08 971 39 26쪽
188 188. 계몽의 시대 +4 23.09.26 1,013 42 26쪽
187 187. 새로운 국면 (5) +7 23.09.15 1,066 45 22쪽
186 186. 새로운 국면 (4) +6 23.09.03 1,095 42 25쪽
185 185. 새로운 국면 (3) +8 23.08.19 1,177 45 22쪽
184 184. 새로운 국면 (2) +8 23.08.04 1,226 40 26쪽
183 183. 새로운 국면 +7 23.07.13 1,302 56 22쪽
182 182. 지상 최고의 팀 (4) +8 23.06.28 1,278 50 29쪽
181 181. 지상 최고의 팀 (3) +5 23.06.16 1,169 39 24쪽
180 180. 지상 최고의 팀 (2) +6 23.05.27 1,282 50 24쪽
179 179. 지상 최고의 팀 +5 23.05.07 1,369 50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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