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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님의 서재입니다.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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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작품등록일 :
2017.12.04 19:58
최근연재일 :
2024.04.07 19:32
연재수 :
20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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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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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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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3.12.02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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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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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글자
25쪽

194. 두 마리의 사자 (2)

DUMMY

“제기랄! 이거 너무 밀리는 거 아니야?”


참다못한 피터 블랙이 외쳤다.


겨우 오 분이 지났을 뿐이지만, 조바심이 났다.


보통 초반 흐름에서는 강팀을 상대로도 팽팽하게 맞서 싸우던 로스 카운티였건만. 나폴리와 붙었던 2차전 그때보다 체감은 더 심한 것 같았다.


정작 파리 생제르맹은 그렇게 라인을 올리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3선을 거쳐서 공격진에게 도달하는 단순한 직선 빌드업이 연달아 통하면서 위기를 맞이하는 상황.


그것이 블랙을 환장하게 만들고 있었다. 철저히 상대 패스 길을 봉쇄하여 앞으로 쉽게 볼을 보낼 수 없도록 방해하는 걸 잘하던 로스 카운티가 그 주특기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뭔데 자꾸 빤한 방식에 당해주느냐고!”


수긍할 만한 실력 차가 난다면 말이라도 안 한다. 저쪽에서 딱히 대단한 뭔가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음에도 위협적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문제를 유발하고 있는 유일한 곳. 아드리앵 라비오(Adrien Rabiot), 이 선수에게 딩월이 계속 허무하게 뚫리면서 밸런스가 무너진 탓이었다.


“저 녀석, 공격이 바보 같은 적은 많았어도 다른 건 듬직했었는데 왜 저래?”


“컨디션이 특별히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


토드 홉킨스 역시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혹시 저런 유형에 약한가?”


“엉?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게 대화하는 와중에도 여유롭게 수비진에서 볼을 돌리며 다음 공격을 위한 예열을 가하는 파리 생제르맹.


중앙의 치아구 시우바가 달려드는 톰슨을 피해 찔러주었고, 라비오가 또다시 볼을 잡자 블랙은 크게 기겁했다.


“저거, 저 무서운 자식 좀 어떻게 해봐!”


그 순간, 거칠게 충돌하며 달라붙는 한 명.


“오오!”


블랜차드의 습격에 꿈쩍도 하지 않았던 몸이 격하게 흔들린다. 볼을 뺏기지는 않았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는지 서둘러 뒤로 볼을 빼는 라비오.


“마크맨을 바꿨구먼.”


홉킨스의 말이었다.


“딩월은 저 체격에 밀려 고전했던 것 같지만, 이제 쉽사리 경합에서 밀리지 않겠지. 상대가 블랜차드거든.”


방향을 급선회하여 반대편으로 패스를 보내는 수비진. 그러나 전진이 여의치 않아 뒤로 돌아온 볼을 라비오가 다시 받는다.


곧장 두 사람이 엉켰고, 볼을 지키는 쪽이 엎어지면서 블랜차드의 파울로 마무리된다.


볼을 잡기만 하면 불안함이 엄습할 만큼 두려운 존재였던 라비오에게 블랜차드가 붙으니 되레 흥미로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야. 이게 내가 알고 있는 로스 카운티라고.”


잠시 후 입을 연 블랙의 목소리는 평온해진 상태였다.


델 레오네 감독이 터치라인으로 나와 변화를 주고 나면 흐름이 순식간에 뒤바뀐다. 이 팀의 팬이라면 익숙할 수밖에 없는 기류.


몇 분 전까지 손쉽게 전개해 나가던 파리 생제르맹의 빌드업이 답답해지기 시작하고, 3선 영역을 중심으로 치열한 볼 다툼이 일어난다.


로스 카운티가 좋아하는 흐름이다.


앞을 뚫지 못하는 백패스의 반복으로 수비진 쪽에서만 맴도는 볼. 결국 마르퀴뇨스가 전방으로 길게 차올리며 중앙선을 넘겨본다. 라비오가 위로 높이 올라간 걸 보고 준 패스였다.


가슴으로 받아내는 데에는 성공한 라비오였으나 자리를 지키고 있던 브리튼과 뒤에서 붙어오는 블랜차드에게 양면으로 협공당하며 볼을 빼앗기고 만다.


“기회다! 들어가!”


볼을 낚아챈 브리튼이 측면으로 보냈고, 받아서 치고 나가는 톰슨. 가속을 이용해서 자리 잡은 수비까지 제쳐보려는 시도였지만, 다비드 루이스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건 너무 객기잖아! 수비가 허수아비도 아니고.”


먼저 진로를 차단하며 볼을 가로채는 루이스. 곧장 몸을 틀어 톰슨을 떨쳐내고 막스웰을 향해 찔러준다.


와아아 -


그러나 막스웰의 뒤에서 타이밍 좋게 튀어나와 재차 가로채는 델샤드. 빠른 속공을 저지한 그의 패스가 루이스 뒤에 빠져있던 톰슨에게 들어가면서 재역습이 된다.


열린 뒷공간으로 파고드는 톰슨. 박스 부근까지 좁혀 들어가면서 날카로운 땅볼 크로스를 붙여 넣었고, 쇄도하는 잭 마틴을 향한 경로에 끼어든 치아고 시우바가 몸을 던지며 밖으로 걷어낸다.


입을 떡 벌린 채 소리 없이 관전하던 블랙은 아쉬운 결과에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으, 이거 좋았는데!”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파리가 다시 공격을 나가는 턴이 되었음에도 그들은 시원한 전개 하나를 뻗어나가지 못했고, 또 빼앗기며 역공을 당한다.


케빈 트랍 키퍼의 선방이 없었다면 난전 도중 흘러나온 볼을 찬 딩월의 중거리 슛에 실점하고 말았을 것이다.


급기야 로스 카운티가 파리 생제르맹을 밀어붙이며 공격을 퍼붓는 양상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래, 좋아. 흐름을 탄 건 참 좋은데······.”


한창 경기를 즐기던 블랙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지?”


*******


“만일 이긴다면 저게 정말로 최고의 한 수가 되겠지.”


같은 홈 스탠드에서 경기를 직관하고 있던 존 프리먼은 진작 분석에 들어간 상태였다.


블랜차드를 라비오 쪽에 붙이면서 제어한 것이 꽤 주효하긴 했다.


처음 겪어보는 매치업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딩월은 힘을 써서 전진할 줄 아는 타입에게 약한 면모를 보이는 것 같다. 거머리처럼 상대를 잘 괴롭혀왔던 그가 저토록 고전하는 건 처음 봤으니까.


하지만 그건 뜻밖의 미스 매치가 터진 걸 수습한 것뿐이다. 이 유리한 흐름이 만들어진 건 감독이 플랜 B를 빠르게 꺼내든 덕분.


로랑 블랑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3-4-1-2를 들고나왔다. 그리고 이 작전은 로스 카운티 선수들을 잠시 혼란에 빠뜨리는 데 성공했다.


경기 전 델 레오네의 구상은 이랬을 것이다.

파리전 1.jpg

올라가 중앙 싸움을 맞받아치는 구도에서 블랜차드와 딩월이 각각 베라티와 모타를 마크하고, 브리튼은 마튀디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그가 측면으로 빠져 카바니를 지원하는 걸 견제한다.


톰슨은 막스웰에게 적절히 붙다가 계속 간 보면서 뒤를 파고들 기회를 노린다.


3선 인원을 써서 효율적으로 측면을 막고 상대 풀백이 비운 공간을 전방 요원으로 파고드는 것. 전형적인 로스 카운티의 패턴이자 승리 공식.


블랑은 백스리를 편성하여 마틴과 톰슨의 침투를 방지했고, 라비오를 선발로 내세우며 기존에 해왔던 방식을 비틀어버렸다.


여기서 평범한 감독이었다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톰슨을 내려 막스웰을 막게 했을 것이다.


더 보수적인 감독이라면 월리스마저 아래로 깊이 내리고, 블랜차드를 측면으로 옮겨 4-5-1의 형태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델 레오네의 선택은? 바로 델샤드를 올려버리는 것이었다.

파리전 2.jpg

우측 스토퍼에 위치했던 델샤드를 아예 측면으로 올려붙이면서 막스웰을 전담케 했고, 반대로 월리스를 아래로 내렸다.


수비적인 목적으로 내린 게 아니다. 월리스가 맡고 있던 측면에 캐리가 이동했으니까.


그렇다. 레알 마드리드와 3 : 3 호각세를 벌였던 그때처럼.


분명 시작할 때만 해도 캐리의 활동 반경은 중앙이었다. 아마도 파리 생제르맹의 우측에 디 마리아가 나오는 걸 염두에 두고 배치했을 터.


빠르고 위협적인 드리블을 구사하는 상대가 있으면 캐리를 좌측에 두는 것이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그 디 마리아가 측면이 아닌 중앙 2선에서 뛰고 있다.


측면의 위협 요소는 프랑스 리그에서 고작 2골 2어시스트를 기록한 세르주 오리에만 남은 상태. 그 정도면 크게 경계하지 않아도 될 거란 판단이 섰을 테고, 그래서 마음 편하게 캐리를 옮긴 것이다.


“이제 와서 디 마리아를 측면으로 옮기기엔 문제가 많아.”


센터백 수만 늘고 미드필더가 부족한 탓에 양 윙백이 넓게 퍼져서 공격을 도맡아야 하는 구조. 무턱대고 디 마리아가 측면으로 가면 오히려 동선이 꼬여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게다가 모타와 라비오는 수적 열세에 놓여 완전히 중앙 싸움을 밀리게 될 공산이 크다.


그 단계까지 고민할 것도 없이 당장 지금도 문제였다.


라비오에게 휘둘렸던 딩월이었지만 전술 조정이 된 이후 모타를 잘 마크하고 있고, 블랜차드는 말할 필요도 없는 상황.


후방 3선이 묶이면서 둔탁해진 파리의 흐름을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강제로 디 마리아까지 내려가 볼을 직접 운반해야 할 판이다.


“거기에 폼마저 좋지 않으면 최악의 시나리오가 완성 되는 거지.”


무리하게 돌파를 시도하려다 옆에서 불쑥 들어온 딩월의 태클에 볼을 뺏기는 디 마리아. 길을 터주기는커녕 역습의 빌미가 되고 만다.


수비 틈새로 빠져나가는 잭 마틴, 그를 향한 블랜차드의 스루패스는 수비의 헌신적인 슬라이딩 태클로 아쉽게 차단되었다.


파리 생제르맹의 단단한 캡틴, 치아고 시우바(Thiago Silva)가 결정적인 찬스를 벌써 서너 차례는 막아낸 것 같다. 그가 아니었다면 전반전부터 승부가 결정 나버렸을지도.


“그러고 보니, 공격진이 기회를 못 잡은 지도 한참 된 것 같은데.”


카바니는 열심히 뛰면서 볼을 받아주긴 했지만, 대부분 패스를 돌려주고 올라가는 실속 없는 움직임뿐이었고.


즐라탄은 초반부에 나왔던 중장거리 슛 이후로 자취를 감췄다.


3선에서 볼 순환이 제대로 안 되니 전방에도 전달되지 않는 거다. 그나마 이런 상황을 타개해 줄 수 있는 막스웰은 챔피언스 리그 안에서 일대일 수비 지표 상위권에 올라가 있는 델샤드에게 꽁꽁 묶여버렸다.


활로를 뚫어줄 공격 루트가 전부 막혀버린 상태. 델샤드를 과감히 올린 게 결정적인 한 방이었던 셈이다.


그러면 파리 생제르맹은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까? 마르퀴뇨스를 올려서 4-3-3으로 급히 전환해야 할까?


그것도 만만치 않은 게 모타와 마르퀴뇨스 둘 다 수비적인 부분에 빛을 발하는 선수다. 라비오에게 모든 공격 부담이 주어지면 로스 카운티가 대처하기도 쉬울 것이다.


부족한 화력을 보완하려 좌우 측면이 더 올라갈 수밖에 없을 테고, 결국 델 레오네가 의도한 대로 마틴과 톰슨에게 뒷공간을 내주는 흐름이 될 수 있다.


한마디로 시작할 때부터 꼬여버린 라인업.


수비를 늘려서 로스 카운티의 가장 위협적인 무기라 할 수 있는 톰슨을 저지하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에 집중한 나머지, 팀의 전체적인 밸런스가 무너지리란 건 염두에 두지 않았다.


계획은 좋았으나 세밀함이 부족한 바람에 자충수가 되어버린 꼴이다.


스코티시 팀의 안방이라 해도, 델 레오네가 아무리 수를 잘 썼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밀릴 체급은 아닌데. 스스로 자멸하고 만 결과라 봐도 무방했다.


“이제 블랑이 할 수 있는 건 현 진형을 고수하며 어떻게든 버티고 후반전을 도모하는 것 외엔······.”


이래저래 최악이라 해도 수비적인 접근에서만 보면 마냥 틀린 답안지는 아니다. 확실히 톰슨은 평소보다 힘을 잘 못 쓰고 있긴 하니까.


문제는 저 왼쪽 영역이다.


프리먼은 작년의 로스 카운티였다면 블랑의 소심한 작전이 통했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캐리가 부상으로 빠지고, 주축 선수들이 아직 미숙하여 성장기를 거치는 중이었던 그때라면 말이다.


세계 최강을 꿈꾸는 프랑스의 제왕을 끄트머리에 밀어 넣고서 여유롭게 볼을 돌리는 유로파 리그 챔피언. 중앙선을 넘은 캐리가 패스를 받자 오리에가 바짝 붙는다.


저 7번의 발에서 계속 골치 아픈 전개가 나오니 방해를 안 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볼 배급이 정교하다 한들 캐리 하나만으로는 밀집한 수비 대형을 쉽게 뚫어낼 순 없다. 그래서 저 하일랜드 전사들은 삼 년간 이탈리안 전술가의 지도를 꾸준히 받으며 패스 앤 무브에 통달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단지 이 팀엔 그가 존재한다.


연계 플레이의 중심이며, 촘촘하게 세워둔 진형 속에서 발생하는 찰나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능력자가.


캐리의 자로 잰 듯한 패스가 오리에를 지나쳤고, 일렬로 선 모타와 라비오의 사이로 빠져나가며 블랜차드의 발에 안착한다.


받자마자 부드럽게 돌아서며 오른발 인사이드로 밀어주는 짧은 패스. 박스 안에서 치아구 시우바를 등지고 처절하게 버티면서 볼을 되돌려주는 딩월.


리턴 패스를 받아 한발 빠르게 터치하며 달려드는 다비드 루이스를 옆으로 살짝 벗겨내는 블랜차드. 그리고 페널티 아크 부근에서 내지르는 오른발 슛.


철썩 -


“와악!”


프리먼은 통쾌하게 뻗어나간 직선 슛이 트랍 키퍼를 뚫고 그물에 꽂히는 걸 보며 짤막한 비명을 뱉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멈칫했다가 함성으로 쩌렁쩌렁 울리는 햄던 파크. 아마 중계 해설진도 ‘어메이징’ 수식어를 붙이며 호들갑을 떨고 있을 게 분명했다.


프리먼은 흥분한 심장을 손으로 가라앉히며 전광판 스크린을 보았다.


“고뇌의 시간인가?”


필드를 주시하는 로랑 블랑의 클로즈업. 턴이 그에게로 넘어왔지만, 형편이 썩 좋지 않다는 걸 표정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델 레오네를 상대해 온 감독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홈에서 승부를 보려는 작전도 방금 실점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파리 생제르맹은 골을 내줬고, 나가서 반격해야만 하는 처지.


그런데 이 불완전한 백스리 진형으로? 멀리서 보아도 블랑 감독의 머릿속이 얼마나 복잡한 상태인지 알 것 같았다.


거의 울며 겨자 먹기로 무리하게 라인을 올리는 파리 생제르맹. 오래간만에 로스 카운티 진영까지 도달하여 공격을 시도한다.


“어어?”


모타의 길게 차 넣은 로빙 패스가 패터슨을 따돌린 카바니에게로 단숨에 들어가면서 발생한 위기.


예리한 침투 이후 날린 슛은 몸을 던진 얀손의 허벅지를 맞으며 박스 밖으로 튕겨 나갔고, 브리튼이 받아 좌측의 캐리에게로 횡패스를 넘겨준다.


전개 루트를 예측했는지 빠르게 붙는 오리에와 함께 쫓아가는 디 마리아.


에워싼 협공으로 볼을 빼앗거나 최소 시간이라도 벌려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아니?”


무심하게 툭 밀어 찬 패스가 두 선수의 사이로 빠져나간다.

파리전 3.jpg

디 마리아는 설마 뒤에 있던 좌측 스토퍼가 자신을 지나쳐 올라갈 거란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그건 프리먼도 마찬가지였다.


캐리의 볼을 받아 진격하는 리 월리스. 수비를 재정비하기 위해 뒤로 물러서는 파리 생제르맹.


모타를 피해 좌측으로 빠진 딩월이 월리스의 볼을 받았고, 마르퀴뇨스가 반응하기 전에 중앙으로 횡패스를 보낸다.


모타와 라비오 뒤쪽, 수비진과 미드필드진 사이에 생겨난 공간으로 발 빠르게 들어간 블랜차드가 그 볼을 받아준다.


뒤돌아서지도 않은 채 덤벼드는 라비오를 따돌리듯 빼돌리는 백패스. 후퇴가 아닌, 월리스가 아직 올라오고 있는 걸 보고 준 패스였다.


볼을 받자마자 원터치로 뻗어나간 월리스의 스루패스는 우측을 겨냥했고, 톰슨이 달리고 있었다.


발을 뻗어 끊으려던 루이스의 슬라이딩 태클은 실패. 완벽하게 뒤가 열린다.


와아아 -


언제 봐도 환상적인 저 스피드스터의 질주에 햄던 파크 전체가 광란에 빠져든다.


“멀어!”


직접 마무리하기엔 약간 측면에 치우쳐진 위치. 치아고 시우바가 무섭게 추격하며 톰슨의 경로를 막아선다. 그가 전담하던 마틴은 마르퀴뇨스가 대신 바짝 붙어서 경계하는 상태.


박스 부근에 도달한 톰슨의 선택은 시우바에게 도전하기보단 우선 뒤로 피하는 것이었고, 백패스를 받은 건 열심히 쫓아온 블랜차드였다.


이미 그의 중거리 슛에 데인 적 있는 파리 생제르맹. 마르퀴뇨스가 서둘러 방향을 틀며 몸으로 막을 기세로 달려들었으나.


블랜차드의 발을 떠난 볼은 직선 슛이 아니라 대각선 패스.


시우바와 마르퀴뇨스가 한쪽으로 쏠리면서 좌측 박스 안으로 들어간 딩월에겐 마크맨이 아무도 없었다.


에이든 딩월, 그답지 않은 침착하게 깔아 차는 인사이드 슛.


그러나 케빈 트랍의 선방.


철썩 -


키퍼에게서 재차 튕겨 나온 볼을 밀어 넣으며 득점한 건 잭 마틴이었다.


“하······.”


프리먼은 떨리는 한숨을 토해냈다. 등골에서 연신 전율이 솟아올랐다.


“저 속공은 세계 레벨에서 통하는 수준까지 도달한 건가.”


그렇게 말하기에 충분했다. 저 쟁쟁한 선수들을 상대로 저렇게 매끄러운 팀플레이와 역습도 모자라 결과물마저 보여줬지 않은가.


“저 패턴이 진짜 골 때리는 것 같아.”


후방에서 일어나는 유동적인 빌드업.


지금의 로스 카운티는 누가 측면을 맡고 누가 중앙을 맡을지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캐리를 옆으로 뺀 것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 얌전히 있던 수비수가 앞으로 튀어 나가며 혼선을 줄 수 있는 패턴을 장착했다.


주요 플레이메이커가 좌측으로 이동해 압박을 끌어당긴 뒤, 벌어진 중앙 공간으로 침투를 유도하면서 이뤄낸 득점. 좌측 스토퍼의 전진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시너지가 덜 발휘되었을지도 모른다.


“월리스가 센터백을 소화할 수 있는 신체 스펙은 되니 델샤드가 올라간 자리를 안정적으로 메우는 용도인 줄로만 알았는데, 역시 전술가의 뇌 구조는 다른 건가?”


상대 시점에서는 정말로 미칠 노릇인 게 어떻게든 파악해서 수비 진형을 다시 알맞게 짠다 해도 금세 다른 형태로 전환해버린다는 점이다.


그것도 하프타임이나 잠깐의 작전타임을 가질 필요도 없이 감독의 손가락 제스처 몇 번이면 이루어진다. 아마 상황별 훈련을 셀 수 없이 거치며 얻어낸 성과로 예상된다.


챔피언스 리그 내에서 봐도 이만큼 다채로운 후방 구조를 만들 수 있는 팀은 손에 꼽을 것이다. 다시 강조하는데 챔피언스 리그 내에서다. 이게 진짜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1차 빌드업이 통과된 이후엔 어떠한가? 딩월이 측면으로 빠지고, 블랜차드가 공간에 뛰어들면서 그 짧은 새 지속해서 균열을 만든다.


마틴은 침투를 가장한 더미 런(Dummy Run : 수비를 현혹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격하는 척 공간을 만드는 움직임)으로 자신에게 붙는 시우바와 루이스 사이의 틈새를 넓게 열어주었다.


최종 전개에 가담한 월리스가 스루패스를 찔러 넣기 좋게 만들어진 일련의 과정이다.


저 군청색 군단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받아주며 상대 진영 속에서 교란을 일으킬 줄 안다.


보통 어떤 역할을 맡은 선수는 일정한 패턴과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그게 당연한 것이 감독은 선수 특성에 어울리는 임무만 주거나 자신이 짜놓은 틀에 맞춰서 적응을 시킨다.


그러면 상대 팀은 경기 전에 그 패턴을 분석해 나오며, 준비를 철저히 한 만큼 대응을 명확히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탈리안 감독을 닮아 교활하기 짝이 없는 저 스코티시 팀은 일관성이라는 게 없다. 물론 좋은 뜻으로 말이다.


*******


후반전이 되어서도 블랑은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압박에 고전하는 3선을 우려한 나머지 디 마리아를 내려버리는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3-4-1-2에서 모타를 가운데로 옮긴 3-1-4-2. 안정감은 올라갔지만, 공격이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로스 카운티보다 높은 점유율은 대부분 후방에서 볼을 돌리면서 만들어진 허위 지표에 불과했다.


특히 디 마리아는 이대로 끝난다면 워스트 유력 후보로 꼽힐 지경이었다.


레알 마드리드 시절,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 휘하에서 하프 윙으로 세계를 제패했던 그 당시가 무색할 만큼 하락해버린 폼.


돌파도 안 되고, 볼을 가지고 있는 시간이 많아 템포만 잡아먹고, 수비 가담마저 저조해 맡아야 할 선수를 놓치기까지.


기습적으로 올라간 브리튼의 중거리 슛을 트랍 키퍼가 간신히 쳐냈기에 망정이지 파리 생제르맹은 3 : 0으로 짓밟힐 수도 있었다.


경기의 전체 양상보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라비오와 블랜차드의 충돌이었다.


블랜차드는 시종일관 라비오를 괴롭혔고, 라비오 또한 후반전 들어서는 블랜차드를 향한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188cm와 186cm의 두 장정이 얽혀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건 또 하나의 재밋거리였다.


마치 예전 2013/14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맨체스터 시티의 야야 투레와 첼시의 네마냐 마티치가 숨 막히는 경합을 벌였던 그때를 방불케 하는 일대일 결투.


다만 블랜차드는 이미 케빈 더브라위너와 치고받았던 전적이 있긴 하다.


후반부 가서는 결국 폭발한 라비오가 손으로 거칠게 밀쳤고, 성깔로는 지지 않는 블랜차드가 이마를 부딪쳐 노려보면서 맞서기도 했다.


두 선수는 주심에게서 사이좋게 옐로카드를 받았다.


The Staggies on the Pitch, The Staggies on the Pitch -

Hi-ho, the derry-o, The Staggies on the Pitch -


승기가 굳혀져 가는 흐름이 되고 홈 스탠드에서 ‘경기장 위의 숫사슴들’ 챈트가 울려 퍼질 즈음 파리 생제르맹은 딱 한 번 만회에 성공했는데.


프리킥 상황에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센스 있게 점프한 수비벽 아래로 깔아 차면서 골망을 흔든 것이었다.


브라운 키퍼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구석에 꽂힌 걸 바라봐야만 했다.


즐라탄은 평소의 여유까지 내버리고 셀레브레이션을 생략하며 볼을 급히 주워들어 달리는 열정을 보여주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로스 카운티는 그 이상의 반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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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 카운티 2 : 1 파리 생제르맹 FC >

제임스 블랜차드(21‘)

잭 마틴(36‘)

+++++++++++++++++++++++++++++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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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가 끝나는 순간, 햄던 파크가 또 한 번 크게 진동했다.


“와하하! 파리를 이겼어! 16강에서 이겼다고!”


블랙은 홉킨스와 얼싸안으며 기뻐했다.


작년에도 실컷 느껴본 익숙한 감정이었지만, 이 승리의 달콤함은 아무리 맛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챔피언스 리그 16강. 쾌감의 정도가 달랐다. 결과도 과정도 너무나도 짜릿한 그런 경기.


한 명도 빠짐없이 팬들 모두가 자리에 남아 챈트를 불렀고, 선수들과 코치진 역시 라커룸에 바로 들어가지 않으며 이에 화답해 주었다.


기어코 경기장 내 가벼운 팬 사인회가 열리면서 한동안 다들 쉽게 떠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햄던 파크를 나오고 나서도, 고향인 하일랜드로 복귀하는 차 안에서도 다들 승리의 노래를 그칠 줄 몰랐다.


“오늘따라 뭔가 아쉬운 것 같지 않아, 토드?”


“이대로 집에 가긴 아쉽긴 해.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여운을 끝내 떨쳐내지 못한 일부 숫사슴들은 2차로 즐길만한 장소를 찾기로 했다.


“제가 저번에 듣기로는 하이 스트리트 쪽에 최근 소문이 자자한 술집 하나가 있던데요.”


“그래? 그럼 거기로 한번 가보자고.”


최종 결정을 내린 뒤 이동한 곳에는 똑같이 승리에 취해 한창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거리에 즐비해 있었고, 들어선 펍 안 역시 바글바글하여 자리조차 찾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어서 옵셔!”


그 펍의 주인장 조지 맥도넬이 흥이 난 목소리로 손님들을 반겼다.


살짝 코가 벌게진 상태의 맥도넬은 블랙과 그 일행 등 뒤에 매여 있는 푸른색 깃발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황금색 사슴 무늬는······ 로스 카운티?”


“호오, 알아보시는군?”


“알다마다! 나도 열렬한 서포터인걸! 여기서 자라 로스 카운티를 접한 뒤로 이 나이가 될 때까지 한시도 응원을 멈추질 않았다오!”


“아주 오래전부터 팬이셨구먼! 예상은 했지만, 그러면 지금 여기에 모인 사람들 모두?”


“아, 당연히 챔피언스 리그의 승리를 만끽하기 위해 모인 로스 카운티 팬들이지!”


맥도넬의 말에 테이블에 앉아 맥주잔을 부딪치던 사람들이 일제히 한 손을 흔들며 호응했다.


“······하핫, 이런 외딴곳에 숫사슴들을 위한 유토피아가 숨겨져 있었나?”


블랙은 웃음을 터뜨렸다. 끝난 뒤에도 경기장 밖에서 다수와 공유하고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건 소중한 행복이다. 숫사슴들에겐 그런 또 하나의 쉼터가 필요했었다.


그는 짧은 감상을 가지다가 맥도넬을 마주 보았다.


“우리도 좀 더 취하고 싶어 온 거요. 한 잔 주시오, 주인장!”


“기꺼이!”


초면이지만 죽이 잘 맞는 두 사람. 왠지 서로 괜찮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하! 역시 그 공식 응원단이셨구먼? 항상 고생이 많으시오!”


“고생은 무슨.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오. 즐겁기도 하고.”


“그 못돼 먹은 불량배들을 몰아내 주지 않았소? 당신들의 노고 덕에 선수들도 엄청 힘이 날 거요.”


“실은 그 망할 버러지들 때문에 우리가 일어선 겁니다. 어떻게 보면 그놈들이 추진력을 달아준 셈이지요.”


“순서는 아무렴 뭐 어떻소? 아참, 그렇지.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는 조지 맥도넬이라 하고, 이쪽은 내 친구들 케니 풀러, 해리 윌슨, 이쪽은 코리 맥골드릭 씨고 저쪽은······.”


아직 봄이 찾아오지 않아 싸늘한 날씨. 몸속 구석구석 스며들던 추위가 어느새 사그라진 듯했다. 한곳에 모인 사람들의 온기 때문일까? 그들에게서 나오는 따스한 유대감이 감싸줘서일까?


해가 저물어 밤이 깊어졌음에도 맥도넬의 펍 안은 왁자지껄한 웃음이 하루 종일 떠나가질 않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주도 행복한 주말로 마무리 하시길.

언제나 찾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_ _)


소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신

모아두상 님

매번 감사드립니다. (_ _)


소중한 추천 글을 써주신

왕콩알 님

시간 들여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추천 글로 인하여 방문해 주신 모든 분들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참 면목이 없네요.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데

주걱으로 젓는 게 한계인 글쟁이라 죄송합니다.

그래도 완결은 반드시 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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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200. 공간 싸움 +6 24.02.06 751 37 26쪽
199 199. 대립 +5 24.01.25 788 33 26쪽
198 198. 대면 +5 24.01.14 840 35 25쪽
197 197. 팀의 완성도 +8 24.01.04 814 43 24쪽
196 196. 신뢰의 결실 +5 23.12.23 869 38 28쪽
195 195. 한 마리의 송골매 +5 23.12.10 855 40 23쪽
» 194. 두 마리의 사자 (2) +5 23.12.02 865 42 25쪽
193 193. 두 마리의 사자 +4 23.11.22 925 43 25쪽
192 192. 캡틴 잭 +3 23.11.10 879 40 26쪽
191 191. 경기장 위의 숫사슴들 +6 23.10.31 938 35 28쪽
190 190. 계몽의 시대 (3) +3 23.10.20 962 44 23쪽
189 189. 계몽의 시대 (2) +5 23.10.08 971 39 26쪽
188 188. 계몽의 시대 +4 23.09.26 1,013 42 26쪽
187 187. 새로운 국면 (5) +7 23.09.15 1,066 45 22쪽
186 186. 새로운 국면 (4) +6 23.09.03 1,095 42 25쪽
185 185. 새로운 국면 (3) +8 23.08.19 1,177 45 22쪽
184 184. 새로운 국면 (2) +8 23.08.04 1,226 40 26쪽
183 183. 새로운 국면 +7 23.07.13 1,302 56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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