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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님의 서재입니다.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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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작품등록일 :
2017.12.04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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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3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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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183. 새로운 국면

DUMMY

“요새 이런 말이 떠돌더군요. 안토니오 델 레오네는 전술에 미친 감독으로 알려졌지만, 그건 잘못된 소문이다. 그의 진정한 능력은 선수단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라느니, 시즌 전체를 보고 운영하는 능력이라느니······ 틀린 말은 아닌데, 이거 하난 확실히 짚고 가죠. 그는 전술광이 맞아요. 당신들이 그걸 봤어야 합니다. 코치진 회의에서 만족할 결과물이 나왔을 때 감독님이 짓는 표정을요.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교수보다 매드 사이언티스트에 가까워요. 밖에서는 그렇게나 점잖은데 전술만큼은 정말 진심이라니까요? 돌변하는 게 지킬 앤 하이드가 생각날 정도예요. 네? 이렇게 얘기해도 되냐고요? 걱정 마세요. 이미 감독님에게 다 허락받고 온 거니까요. 본인도 이미지가 너무 왜곡된 상태라고 하더군요. 오히려 자신을 전술광으로 봐줬으면 한대요. 그러니까 이건 몰래 험담하는 게 아닙니다?” - 상대 팀 분석 보조 ‘칼 베이커(Kal Baker)’ -


*******


[ 전반전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면, 후반전은 델 레오네의 대담한 용병술을 확인한 그런 경기였습니다. ]


전문 축구 분석 프로그램 Scottish Football Day의 사회자 스티브 맥멀런이 꺼낸 오프닝 멘트였다.


본래 모든 경기를 결산한 뒤 월요일에 종합하여 내보내는 방송이지만, 올 시즌의 SFD는 특별히 한 주에 두 번 방영하는 일정이 추가되었는데.


바로 챔피언스 리그가 껴있는 주간. 당연히 목적은 이 최상위 유럽 대항전에 참가 중인 유일한 프리미어십 팀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 정말 스코티시 구단이 챔피언스 리그에서 이런 활약을 한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


SFD 고정 패널인 조니 밀러의 멘트대로 스코틀랜드가 챔피언스 리그에서 제법 지분을 차지했던 것은 7~80년대가 마지막.


전성기가 꺾인 현재에 들어서는 그저 동네북으로 전락하여 수십 년간 다른 팀들을 위로 올려보내 주는 발판 역할에만 충실했을 뿐이었다.


조 추첨에서 스코틀랜드 팀이 들어오면 해당 구단 관계자들의 입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가게 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한때 ‘리스본의 사자들’이란 이름으로 상대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셀틱이었지만, 그것도 이젠 한낱 과거일 뿐.


애버딘과 던디 유나이티드의 몰락 이후 올드 펌이 양분하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프리미어십 경쟁력은 나날이 약해졌고, 셀틱과 레인저스는 매번 챔피언스 리그 조별 단계에서 고꾸라지기 일쑤였다.


어쩌다 통과해도 16강이 한계였다.


물론 로스 카운티 또한 아직 조별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남아 있는 두 번의 경기에서 결과가 좋지 못하면 올드 펌의 부진한 성적과 다를 바가 없어지니 공연한 호들갑을 떠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SFD 출연자들을 비롯한 스코틀랜드 국민들에겐 믿음이 있었다.


전 시즌 유로파 리그 챔피언을 향한 믿음, 그간 로스 카운티가 보여줬던 행적에 관한 믿음. 결국 그들이 뭔가를 해내고 말 거라는 믿음.


이번에 나온 결과도 그 믿음에 한몫했고 말이다.


전 세계를 통틀어도 최고에 속하는 레알 마드리드를, 그것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3 : 3 무승부를 거뒀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일이었다.


어쩌다 요행이 따라줘서 이긴 것도 아니고, 전술의 변화로 만들어 낸 결과이기에 더욱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2012/13 시즌 셀틱이 조별 경기에서 바르셀로나를 2 : 1로 이겼던 경기가 있었어요. 메시와 이니에스타, 사비 같은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한 팀을 상대로 승리했으니 분명 놀라운 결과였죠. 하지만 그때는 정신력으로 악착같이 버티다가 행운의 승리를 얻어낸 느낌이 강했습니다. 물론 그걸 생각해도 대단하다는 것엔 변함없지만, 로스 카운티의 경기는 보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 줬어요. 점수를 비겼음에도 더 강한 인상을 남긴 거죠.” - 스코티시 스포츠 해설자 ‘롭 맥케나(Rob McKenna)’ -


맥케나가 언급한 것은 당시 11 대 89라는 압도적인 점유율로 밀리면서 웅크리고 있다가 코너킥 세트피스와 역습으로 바르셀로나를 격파했던 경기.


아직도 가끔씩 회자되는 프리미어십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언제나 세계 최강을 두고 다투는 팀을 무너뜨렸으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런데 그 바르셀로나와 비슷한 전력의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하면서 번갈아 세 골씩 넣는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그것도 그 팀이 불과 몇 년 전에는 셀틱과 나란히 설 수도 없는, 강등권에서 헤맬 수준의 전력이었다?


연고 의식을 떠나서 스코틀랜드인이라면 미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다.


이미 로스 카운티는 작년에 여러 번 놀라움을 안겨주긴 했지만, 챔피언스 리그는 그야말로 차원이 아예 다른 곳.


유로파 리그 정상에 올라섰던 그들이라 해도 조별 리그에서 고배를 마시는 것이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승리한 것도 아닙니다. 냉정히 따지면 비겼을 뿐이죠. 그런데 이 결과는 아마도 스코티시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겁니다. 왜냐고요? 전술 변화, 후반전 경기력, 대접전.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하면서 여럿 상징적인 키워드를 남길 수 있는 팀이 여기에 얼마나 존재하겠습니까?” - 축구 평론가 ‘그레이엄 파커(Graham Parker)’ -


그 자랑거리라던 바르셀로나전 승리조차 극단적인 수비 이후 역습 한 방이라 분석할 거리도 없었지만, 이번은 얘기가 많이 달랐다.



[ Football Focus ] 전술이란 무엇인가? 로스 카운티가 레알 마드리드와 비등할 수 있었던 비결



카운티 신드롬이 스코틀랜드 전역에 퍼지면서 사람들의 인식에 강렬히 자리 잡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전술. 유로파 리그의 강적들을 차례대로 물리치면서 주목을 받았던 것도 전술.


현재 레알 마드리드전 역시 존 프리먼을 중심으로 급격히 늘어난 여러 칼럼니스트들에 의해 해당 전술이 화두로 떠오르는 중이었다.


프리미어십은 어떠한가? 스코티시 챔피언을 타도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연구하는 팀들이 성공 여부를 막론하고 하나둘 대응책을 고안하려 들면서, 예전처럼 단순한 패턴보다는 다양한 색채를 내보이는 중이다.


전술이란 것에 회의적이었던 구단주인 로이 베넷이나 대런 코너 단장은 물론이고, 심지어 조지 맥도넬처럼 그저 열정적인 응원만 할 줄 알았던 팬들조차 관심을 들이기 시작했다.


전술 분야 자체가 스코틀랜드 땅에서,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는 전국적으로 인기 있는 화젯거리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었다.


시대에 뒤처진 축구, 심하게는 미개한 축구를 하고 있다는 평가까지 받던 이 전술의 불모지에서 이탈리안이 틔워냈던 싹이 마침내 한 그루의 나무로 자라난 것이다.


어쩌면 안토니오 델 레오네가 해낸 일은 단순히 성적 이상으로 위대한 업적일지도 모른다.



한편 반대쪽 스페인에서는 비판의 소리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레알 마드리드인데, 어떻게 초호화 군단을 이끌고 한낱 로스 카운티에 휘둘리느냐는 의견이 대다수.


그러면서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은 ‘감독이 베니테스였기 때문에.’ 동시에 재조명된 것은 그가 이전에 나폴리 지휘봉을 잡았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벌어졌던 ‘산 파올로의 기적.’


이미 델 레오네에게 패배한 전적이 있는 감독이므로 이런 결과가 일어난 것이라는 목소리가 커지는 중이었다.


생각이 깊은 명장이었다면 상대가 수를 쓸 시간도 주지 않았을 거라며.


애당초 베니테스가 부임할 때부터 고운 시선으로 보고 있지 않았던 레알 마드리드 팬들이었기에 더욱 불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일부에서 옹호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기대치에 못 미치긴 했어요. 하지만 상대가 로스 카운티였습니다.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결과죠. 세비야를 제압했고, 슈퍼컵에서도 바르셀로나와 용맹하게 싸운 팀이니까요. 베니테스의 후반전 대응은 아쉽긴 했지만, 전반전에 좋은 아이디어로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던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봐요.” - 마르카 소속 기자 ‘카를로스 카르피오(Carlos Carpio)’ -


델 레오네에게서 일방적인 우위를 가져왔던 전반전. 그 모습만으로 참작의 여지가 있다는 의견. 게다가 아직 조에서 1위를 유지하고 있으니 딱히 치명타를 입은 상황도 아니다.


제삼자가 보기엔 흥미진진한 박빙의 승부였으며 양 팀 감독은 서로 좋은 전술 싸움을 한 셈. 그런 부분을 보아서라도 베니테스를 조금 더 지지해 볼 만하다는 내용이었다.


감독을 믿어보려는 갸륵한 마음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그 옹호론은 얼마 안 가서 무색해져 버리고 말았다.


잠시나마 총기가 느껴졌던 그 라파엘 베니테스는 어디로 갔는지. 스페인 라 리가에서 중앙이 생략되다 못해 소멸되어 버린 괴상한 축구를 하기 시작했으니까.


현지 언론을 비롯하여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던 베니테스의 전술은 ‘5-0-5 포메이션’이라는 명칭까지 붙으며 한동안 레알 마드리드 팬들을 괴롭게 만들었고.


갑자기 극단적인 롱볼 축구에만 일관하며 부진한 성적을 거듭하던 베니테스는 끝내 두 달을 버티지 못하며 경질을 통보받게 된다.


한때 전술가란 이름이 어색하지 않았던, 라인 간격을 중요시했던 감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행동.


어쩌면 불가사의한 현상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


스페인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닐 스튜어트는 여운을 쉽게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관전하던 팬들도 짜릿한 쾌감을 느꼈는데, 바로 코앞에서 지켜보던 쪽의 심정은 오죽할까.


그것도 이런 결과를 만들기 위하여 감독과 함께 밤낮으로 연구하고, 선수들을 훈련시켜왔던 그 노력의 성과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위치라면.


레알 마드리드다. 그 최강이라 불리던 레알 마드리드. 몇 번을 언급해도 한참 부족하다. 설마 했는데 로스 카운티가 그들을 상대로도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니.


이탈리안의 곁을 보좌했던 2년여간 참 진귀한 경험이란 경험은 다 해봤다고 생각했는데. 놀라워할 일들은 여전히 세상에 넘쳐나는 것일까?


“감정에 충실한 건 좋은데, 너무 헤벌쭉하면 다 티가 난다네, 닐.”


감독의 말에 스튜어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죄송합니다. 아직도 눈앞에 생생한 기억이라서······.”


단순히 베르나베우에서 만든 3 : 3 동점 때문만이 아니다. 블랜차드가 라모스와 바란 사이에서 치열하게 경합하던, 딩월의 중거리 슛이 골대를 강타했던, 톰슨의 엄청난 폭발력이 마르셀루의 측면을 헤집었던. 그런 장면 하나하나가 감명 깊은 과정들이 많았으니.


천문학적인 몸값의 선수들을 상대하면서 그런 경기를 펼쳤다는 생각만 해도 설렘이 잦아들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다.


“뭐, 이해는 하네. 오늘 청소부인 필립 씨도 매표소의 레베카 씨도 날 보자마자 떨리는 목소리로 그 얘기부터 하더군.”


감독이 말했다.


“대회의 비중을 차치하고 어찌 보면 팬들에게 있어 가장 놀라운 경기였을지도 모르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닐, 자네는 팬들에게 그런 경기를 계속 보여주기 위해서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 기쁨은 어느 정도 추스르고 다음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해야지. 아직도 갈 길이 멀었네.”


“예. 그 말씀도 맞습니다.”


평소에도 늘 신사다운 면모를 잃지 않는 이탈리안이지만, 특히 지금처럼 감독실 책상에 앉아 하얀 와이셔츠 차림으로 팔을 걷어붙인 채 일하는 그의 모습은 품위란 단어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듯했다.


문득 저 눈앞의 남자보다 기품이 넘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뭔가 대단한 업적을 세워놓은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 우리는 여전히 3위에 머물고 있으니까.”


“······그렇죠.”


스튜어트는 맥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독 말대로 안전하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

< 현 E조 순위 >

1. 레알 마드리드 (2승 2무 0패 / 8점)

2. 첼시 (2승 1무 1패 / 7점)

3. 로스 카운티 (1승 2무 1패 / 5점)

4. 샤흐타르 도네츠크 (0승 1무 3패 / 1점)

=============================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대접전으로 언론이 호들갑 떨곤 있으나, 실상은 레알 마드리드와 첼시에 좀 더 유리한 상황.


추첨 당시 전문가와 도박사들이 예측한 그림대로 가고 있었다.


새삼 챔피언스 리그의 빡빡한 경쟁력이 느껴졌다. 심지어 E조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죽음의 조라고까지 했으니.


“확실히 죽음의 조는 죽음의 조인 것 같습니다. 강팀들의 틈에 끼어서 잘 버텨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만, 선후관계는 명확히 해야지.”


감독이 느긋하게 대꾸했다.


“이 그룹이 죽음의 조가 된 것은 레알 마드리드와 첼시 때문이 아니야. 4 포트에서 제일 까다로운 팀이 포함된 게 결정적인 원인이지.”


스튜어트는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감독이 내뱉은 말이긴 해도, 이건 나름대로 신빙성 있는 발언이다.


이미 언론에서 조사한 ‘4 포트 중 같은 조로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 선정에서 당당히 몰표를 받았던 로스 카운티니까.


그나마 안정적으로 승점을 얻어낼 수 있는 최약체들이 모인 4 포트. 이 그룹에서 어느 누가 유로파 리그 챔피언을 상대로 맞이하고 싶겠는가.


최근에는 조 추첨을 주도했던 UEFA가 뭇매를 맞는 중이었다. 못해도 로스 카운티는 3 포트에 넣었어야 한다면서.


물론 관련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일 뿐이다.


“모든 경기를 이기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건 이상론에 불과해. 현실적으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어.”


이탈리안이 말했다.


“우리가 패배할 수 있는, 패배하더라도 타격을 적게 받을 수 있는 경기는 정확히 두 번이었네. 스탬퍼드 브리지 원정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원정.”


“1무 1패로 마쳤으니, 결과적으로는 좋은 성과네요.”


“그렇게 볼 수도 있는데······ 결국 홈에서 이기지 못했지. 내가 생각한 최선의 결과는 4승 2패였거든. 나쁘지는 않지만, 마냥 좋다고 볼 수도 없는 상황이야.”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를 정말로 홈에서 잡아 볼 심산이었다는 것쯤은 스튜어트도 이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쨌든 남은 경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전부 이겨야 한다는 것이지. 로스 카운티의 또 다른 무용담이 일찍 마무리되지 않으려면 말이야.”


“저희도 충분히 각오하고 있습니다.”


“좋아. 슬슬 다음 단계로 발을 내디딜 시간이 됐군. 남은 경기는 두 번. 그리고 다음 상대는 첼시. 반드시 잡아내야만 해.”


“첼시······.”


스튜어트도 승리에 대한 열망만큼은 감독 못지않았다. 하지만 이름을 듣자마자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첼시, 그들의 수장인 조제 무리뉴와의 재격돌. 1차전에서는 보기 좋게 당했었다. 팀의 중추인 캐리가 아무것도 못 했으며, 델 레오네마저도 전술 싸움을 밀렸던 경기.


2차전에서 과연 그들에게 복수할 수 있을까?


“자네의 표정은 참 읽기가 쉬워.”


감독의 말이었다.


“우리는 준비를 철저히 해왔네. 자네도 그 과정에 참여했으니 알고 있지 않나? 너무 걱정하지 말게. 정신이 흔들리면 될 것도 안 되는 법이야.”


“예······. 그렇죠.”


애써 대답은 했지만, 내면의 불안감까지 지울 순 없었다.


감독이 못 미더운 건 아니다. 그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준비를 철저히 해왔다는 것이 꾸준한 훈련을 반복했다는 의미라면 맞겠지만, 첼시전의 대비책을 뜻하는 거라면 스튜어트의 기억 속에선 특별히 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감독이라면 후자의 의미로 얘기한 것일 텐데. 나폴리전의 4-2-2-2 시스템이나 세비야전의 변칙 4-4-2 같은 비밀 카드를 준비한 적이 있었던가?


예전에 대놓고 직접 첼시전에 맞춘 훈련 스케줄을 짜야 하지 않나 물어보기도 했었으나, 그럴 필요가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가 언질을 준 건 있다. 캐리를 중심으로 한, 일명 ‘그 계획.’


하지만 그 계획이라는 건 뚜렷한 실체가 없다. 스튜어트가 보기엔 그저 캐리를 포함한 수비진의 체계적인 움직임과 패스 훈련이 부쩍 많아진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늘 해왔던 훈련의 강도를 좀 더 높였을 뿐인 거다.


단지 그것만으로 괜찮을까? 상대는 치밀하기로 유명한 무리뉴인데.


감독은 하일랜드 더비에서 ‘그 계획’을 일찍이 실행하려다가 인버네스 CT의 주전 미드필더가 부상으로 결장한다는 소식을 접한 뒤 다음으로 미뤘다.


언제라도 바로 꺼내서 쓸 수 있는 것처럼.


“실전으로 두어 번이면 충분해.”


그때 이탈리안이 말했다.


“특별히 대비할 필요가 없어. 평소에 다 훈련이 되어 있던 부분이고, 시간을 걸쳐서 자연스럽게 다듬어질 거였으니까. 이미 특정 경기에서 알게 모르게 숙달해 왔던 영역이기도 하지. 첼시전이 다가오기까지 두 번의 리그 경기가 있지 않나? 거기서 결과물을 확인만 하면 될 거야.”


“죄송하지만, 어떤 결과물을 뜻하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참다못한 스튜어트가 묻자, 그는 천천히 의자 등받이에 기대면서 눈을 감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커피잔은 분명 비어 있음에도 마치 향에 취한 듯한 얼굴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결과물이지. 어쩌면 이날이 오기만을 고대했을지도.”


그가 눈을 뜨며 말했다.


“비로소······ 내 기준에 충족하는 레지스타의 완성형.”


*******


< 15-16 Scottish Premiership 13 Round >

파틱 시슬 : 로스 카운티

2015년 11월 9일 (월) 19:45

퍼힐 파크 (관중 수 : 7,218명)



[로스 카운티 / 4-1-2-3]

FW : 잭 마틴 / 에이든 딩월 / 필립 로스

CM : 존 맥긴 / 대런 케틀웰

DM : 리차드 브리튼

DF : 리 월리스 / 대니 패터슨 / 스콧 보이드 / 스티브 샌더스

GK : 마크 브라운



초장부터 결론이 난 시합.


파틱 시슬전은 그렇게 요약할 수 있었다.


좌측 엔드라인에서 수비들을 끌어당긴 맥긴의 컷백 패스를 받은 월리스의 박스 외곽 슛이 시원하게 골망을 갈랐고.


그다음엔 월리스가 직접 좌측에서 볼을 잡더니 막아서는 수비 둘의 틈새로 빠져나가는 돌파에 성공하며 낮은 크로스로 잭 마틴의 골을 어시스트하는 쾌조의 컨디션을 보였다.


골문으로 쇄도하는 마틴을 방해하려 수비 한 명이 집중력을 잃지 않고 쫓아갔지만, 오른쪽 바깥 발로 먼저 볼을 건드리는 해결사의 타고난 골 감각을 끝내 저지해 내지는 못했다.


파틱 시슬은 행운의 팀이 될 수도 있었다.


A매치 주간을 앞둔 경기였는데도 무슨 이유에선지 로스 카운티는 주전 선수들을 몇 명 제외한 상태였으니까. 앤드류 톰슨은 구단 측에서 감기에 걸린 바람에 결장할 거라는 공식 발표까지 나왔었다.


올 시즌 공격의 선봉으로 활약하던 톰슨이 질병으로 빠졌는데도 과감히 주전들을 빼다니.


아마 델 레오네는 강등권에서 허덕이고 있는 팀쯤은 이 정도 라인업으로 처리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상당히 오만한 결정. 이탈리안의 건방진 콧대를 짓밟아 주고 싶었겠지만, 파틱 시슬의 감독 아론 아치볼드는 자존심을 지키지 못했다.


1.5군의 로스 카운티를 상대로 최소 무승부, 잘하면 홈의 이점으로 승리를 따내 그들의 무패 행진을 마감시키는 성과까지 거둘 수도 있었지만.


전반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 골을 내주면서 완전히 박살 나버려 그럴 깜냥이 되지 못한다는 것만 확인시켜 주고 말았다.


거기에다 세 번째 골은 필립 로스의 드디어 터진 마수걸이 골.


딩월의 매서운 압박으로 수비진에서 패스 미스가 나왔고, 그 볼을 잡은 케틀웰이 직선으로 밀어준 스루패스가 침투하던 로스에게 도달했으며.


단독 찬스를 맞이한 로스가 침착하게 골키퍼까지 옆으로 제치면서 골문 안으로 굴려 넣은 득점이었다.


상대의 약해진 타이밍을 이용하기는커녕 리그에서 아직 득점이 없던 유망주의 소중한 경험까지 제공해 준 꼴.


기회도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교훈과 주전이 몇 빠져도 로스 카운티는 문제없이 돌아갈 만큼 강하다는 걸 알 수 있는 경기였다.


하지만 쭉 관전하고 있던 존 프리먼에게 그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랬다.


그의 관심을 이끈 건 골이 터지지 않아 잠잠하기만 했던, 의도적으로 템포를 늘어뜨리면서 체력을 비축하는 흐름으로 가던 후반전.


정확히 60분에 브리튼과 보이드가 빠지고, 캐리와 얀손이 투입되면서 펼쳐진 상황에 모든 신경이 쏠리는 중이었다.


축구 칼럼니스트로서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저건······.”


캐리가 필드에 들어오면서 발견된 새로운 움직임.


패터슨과 얀손이 좌우로 넓게 퍼진 뒤, 그 사이로 캐리가 내려가며 백스리를 구성하는 움직임이었다.


프리먼은 이 형태를 잘 알고 있었다.


“라볼피아나?”



=============================

< 파틱 시슬 0 : 3 로스 카운티 >

리 월리스(11‘)

잭 마틴(16‘)

필립 로스(42‘)


=============================


작가의말

이렇게 연재 속도가 느린데도

꾸준히 찾아와 읽어주시고

또 선작을 눌러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_ _)

다른 건 몰라도 완결만큼은

반드시 이루도록 하겠습니다.


소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신

모아두상 님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_ _)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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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200. 공간 싸움 +6 24.02.06 751 37 26쪽
199 199. 대립 +5 24.01.25 788 33 26쪽
198 198. 대면 +5 24.01.14 839 35 25쪽
197 197. 팀의 완성도 +8 24.01.04 813 43 24쪽
196 196. 신뢰의 결실 +5 23.12.23 868 38 28쪽
195 195. 한 마리의 송골매 +5 23.12.10 855 40 23쪽
194 194. 두 마리의 사자 (2) +5 23.12.02 864 42 25쪽
193 193. 두 마리의 사자 +4 23.11.22 925 43 25쪽
192 192. 캡틴 잭 +3 23.11.10 878 40 26쪽
191 191. 경기장 위의 숫사슴들 +6 23.10.31 937 35 28쪽
190 190. 계몽의 시대 (3) +3 23.10.20 961 44 23쪽
189 189. 계몽의 시대 (2) +5 23.10.08 971 39 26쪽
188 188. 계몽의 시대 +4 23.09.26 1,012 42 26쪽
187 187. 새로운 국면 (5) +7 23.09.15 1,065 45 22쪽
186 186. 새로운 국면 (4) +6 23.09.03 1,094 42 25쪽
185 185. 새로운 국면 (3) +8 23.08.19 1,177 45 22쪽
184 184. 새로운 국면 (2) +8 23.08.04 1,226 40 26쪽
» 183. 새로운 국면 +7 23.07.13 1,302 56 22쪽
182 182. 지상 최고의 팀 (4) +8 23.06.28 1,278 50 29쪽
181 181. 지상 최고의 팀 (3) +5 23.06.16 1,169 39 24쪽
180 180. 지상 최고의 팀 (2) +6 23.05.27 1,282 50 24쪽
179 179. 지상 최고의 팀 +5 23.05.07 1,369 50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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