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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님의 서재입니다.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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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작품등록일 :
2017.12.04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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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07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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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3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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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186. 새로운 국면 (4)

DUMMY

“셀틱의 제안을 거절하고 로스 카운티로 온 건 배우기 위해서였어요. 실력을 한 단계 더 상승시키고 싶어서. 당장은 주전으로 뛰지 못해도 받아들이려 했죠. 그런데 감독님은 저를 보더니 무섭게 웃으면서 심장이 터질 각오를 하라는 거예요. 그리고 보다시피······ 팀에 합류하자마자 특별 개인 훈련을 받았고, 감독님은 절 핵심으로 기용하셨죠. 전 이렇게 느꼈어요. 내가 꾸준히 노력했다는 전제하에 빨라도 2~3년 뒤에나 쓸 수 있는 능력을 지금 발휘하고 있다고. 나 자신이 급성장했다는 걸 실감했죠. 역시 로스 카운티를 선택하길 잘했던 겁니다. 세인트 미렌에 있었을 때도 저 사람에게 지도를 받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그는 선수들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데 타고났던 거죠. 아마 저 말고도 다른 팀원들 모두 같은 생각일 겁니다.” - 로스 카운티 미드필더 ‘존 맥긴(John McGinn)’ -


*******


경기 후 회견장에는 많은 이들이 기대에 부푼 표정을 하고서 무리뉴를 기다리고 있었다.


“첼시가 조 3위로 추락했는데요! 위기를 실감하십니까?”


“로스 카운티에 너무 일방적으로 패배한 것 아닌가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죠?”


“선수들의 움직임이 무거워 보였습니다. 계속 휘둘리는 데도 수습이 되지 않던데요.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인터뷰를 가장한 언론의 공격 세례. 패자에게 주어지는 시련이지만, 거부할 수도 없기에 더욱 가혹하다. 총책임자인 감독은 매번 이 순간을 넘기기 위해 정신을 다잡아야만 한다.


자리에 앉은 무리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으려다 멈칫, 볼을 어루만지며 기자들의 질문에 대응했다.


“이게 챔피언스 리그니까요. 여기에 참가한 팀들은 모두 자국에서 월등한 성적을 내고 참가 자격을 얻었습니다.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상대들이란 거죠.”


“하지만 로스 카운티는 창단 이래 올해로 첫 챔피언스 리그 진출 팀 아닌가요? 첼시는 이 대회에 숱하게 참가했던 팀이고요. 경험의 차이로 따지면 비교가 안 될 정도인데요.”


“첫 진출 팀이지만, 동시에 유로파 리그 우승팀이기도 하죠. 방금 발언은······ 로스 카운티에 실례가 되는 얘기입니다. 아니면 당신이 그를 빌미로 나에게서 말실수를 이끌어내려는 것이거나.”


“······.”


계속되는 질타.


“경기가 끝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비판 여론이 나오는 중입니다. 로스 카운티를 상대로 좋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면서요.”


“어떤 게 좋지 않았다는 거죠?”


“이바노비치의 선발이라든가, 마티치의 과부하를 덜어줄 파트너 선정을 잘못했다든가······.”


“결과론적인 얘기로군요. 이바노비치를 빼면 누굴 넣으라는 거죠? 한 번 제시해 봐요.”


“아즈필리쿠에타가 오른쪽으로 옮긴 뒤 수비가 안정을 찾았죠.”


“그러면 왼쪽에 바바 라흐만을 출전시켜야 했다는 거네요. 그렇죠? 쓸 수 있는 선수는 그뿐이니까요. 그리고 결국 버티지 못하고 상대 윙에게 무너져 내려 페널티 킥을 준 것도 알겠군요? 당신도 경기를 봤을 테니 말이죠.”


“그건······.”


“라흐만은 더 성장해야 합니다. 순위가 바뀔 수도 있는 중요한 시합에 부담을 짊어지기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이해됐습니까? 말로는 누구나 지적할 수 있지만, 나는 모든 걸 고려하면서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그게 감독이 할 일이고. 이게 쉽다면 아무나 감독 자리에 앉아도 되겠죠?”


농담을 던지는 것처럼 웃으며 조목조목 받아쳐 내는 무리뉴였지만, 그에게 썩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원래는 선수들을 보호하면서 자신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릴 줄도 아는 그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특정 이름을 도마 위에 올리는 것부터 평정심을 잃었다는 뜻이다.


“더 선의 찰리 버틀러입니다. 저번에 당신은 그렇게 말했어요. 델 레오네를 쓰러뜨리고 시대의 관문을 뚫어내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결국 통과하지 못한 것 같은데······ 동의하십니까?”


“글쎄요.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이긴 건 우리입니다. 결과는 1승 1패라는 거죠. 각 팀이 홈에서 승리를 한 번씩 가져갔는데, 이걸로 델 레오네가 무리뉴에게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겁니까?”


“만일 첼시가 조별 단계에서 탈락하면 이 경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니까요.”


“저번에 로스 카운티가 패배했을 때, 당신들과 칼럼니스트들의 반응은 지금과 달랐죠. 1차전과 2차전, 모두 같은 라인업으로 나왔다는 건 혹시 알고 있나요? 그때는 선수들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고, 오늘 경기의 책임은 전부 나에게 뒤집어씌울 셈이군요? 그게 훨씬 편할 테니까요.”


사실 이미 무리뉴는 멘탈이 거의 붕괴되어 있는 상태였다.


프리미어 리그에선 여전히 부진한 성적을 거두는 중이고, 자칫하면 유럽 대항전마저 일찍이 나가떨어질 판. 무리뉴의 오랜 커리어를 통틀어서 최악의 시기를 달리고 있다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로스 카운티를 홈에서 맞이할 적에 보였던 여유는 전부 증발해 버렸고, 점점 말투는 거칠어져 가고 있었다.


먹잇감을 포착한 기자들은 번갈아 가면서 심기를 건드리는 중이었고 말이다.


“전술적으로 밀렸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전술? 전혀요. 그런 말이 나올 경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전술의 허상을 쫓는 데 너무 익숙해요. 과정이 어찌 되었든 승리를 얻는 것보다 점유율이 높은 축구가 무조건 옳다고 믿는 것과 비슷하죠.”


카메라를 의식해 절제하던 무리뉴의 손이 어느새 이마까지 올라가 있었다.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는데 말입니다. 다들 쉽게 간과하는 점이······ 경기는 선수들이 뛴다는 거예요. 골을 넣는 것도, 수비하는 것도 전부 그들의 몫입니다. 벤치에서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단 말이죠. 직접 피치 안으로 들어가서 뛸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건 선수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얘긴가요?”


“때로는 의도했던 계획이 그대로 흘러가지 않고, 뜻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무기력함을 느끼는 순간이죠.”


선수 탓을 유도하려는 노골적인 질문이라 분노할 법도 했으나, 무리뉴는 착잡하면서도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로스 카운티는 승리할 자격이 있었습니다. 왜냐고요? 모든 힘을 쏟아부었기 때문이죠. 그들이 뛰는 걸 보세요. 용맹한 전사처럼 몸을 내던지길 마다하지 않아요. 축구는 정신력의 스포츠입니다. 실력이 좋아도, 전술이 훌륭해도 자신을 한계치까지 몰아붙이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어요.”


“첼시는 제대로 뛰지 않았나요?”


“우리는 로스 카운티의 정신력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챔피언스 리그 경기가 아니라 프리시즌 친선 경기를 치르는 듯했죠. 로스 카운티가 보여준 모습을 우리가 보여줬어야 했습니다. 그게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 냈어요.”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상당히 민감한 내용이군요. 보기에 따라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겠는데요. 당신의 선수들이 반발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스카와 윌리안은 델 레오네가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기 전까지 활발하게 뛰어다녔고, 존 테리나 아즈필리쿠에타도 좋은 수비를 여러 번 보여줬다. 싸잡아서 비판받기엔 몇몇 선수들은 분명 억울한 감이 있을 것이다.


무리뉴는 앞의 물병을 집어 들며 바싹 마른입을 적셨다. 이젠 미소를 머금던 표정마저 사라지고, 심각하게 굳은 모습이었다.


“내가 이 팀의 지휘봉을 잡고 있는 한 가급적 꺼내고 싶지 않은 주제였는데······ 오늘, 이 말은 하고 넘어가야겠군요.”


물병을 내려놓은 그는 잠시 뜸 들이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썩은 사과는 다른 주변의 사과도 서서히 썩게 만듭니다. 멀쩡했던 사과도 점점 변질하게 마련이죠.”


“누구를 얘기하는 건가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핵심은 방치해두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사과가 곯아버릴 테니까요. 급기야 사과를 담은 상자마저 오염될 겁니다. 그때 가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죠.”


쉴 새 없이 핀치로 몰아세우던 기자들은 이제 조용히 듣고만 있다. 마침내 폭탄을 터뜨리는 데 성공했으니 이 내용을 토대로 흥미로운 기사를 쓸 일만 남았을 뿐이다.


“썩은 알을 골라내는 건 혼자서 해낼 수 없어요. 협조가 되어야 이루어지는 작업입니다. 더 늦기 전에 과감히 버리고, 빈 곳에 새로운 사과를 채워 넣는 결단이 필요해요. 하지만 그게 전혀 되지 않고 있죠.”


“······.”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환경부터 갖춰져야 합니다. 열악한 조건에서 성적을 거두는 건 어려운 일이며, 무모한 요구에 불과하죠. 이 정도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했을 겁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이 비추는 화면을 통해 인터뷰를 보게 될 사람들 모두.”


무리뉴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내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흥미로운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이 팀에는 몇 알의 썩은 사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회견장을 나갔다.



[ BBC ] 조제 무리뉴 “이 팀에는 썩은 사과가 있다.”


[ Daily Mirror ] 무리뉴가 언급한 썩은 사과는 누구인가?


[ The Sun ] 무리뉴의 발언에 분노한 첼시의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그를 불러들여서 언쟁을 벌였다


[ Scottish Sports ] 첼시를 제압한 로스 카운티, 조별 단계 진출 희망적


[ The Scotsman ] 햄던 파크 스탠드에 걸렸던 커다란 현수막에 쓰인 ‘King Leo’는 무엇을 의미하나?


*******


첼시가 패배했다.


단순한 패배가 아니다. 챔피언스 리그를 이른 시기에 탈락할 수도 있는 위기를 안겨준 패배.


내용도 상대적 약팀이 강팀을 가까스로 잡아냈다는 느낌이라기보단 오히려 반대에 가까웠다. 첼시가 약팀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양 팀의 슈팅 횟수는 11 대 3으로 거의 네 배에 달하는 차이였으며, 유효 슈팅 또한 5 대 1로 압도적인 수치.


그 유효 슈팅 하나마저도 마티치가 브라운 키퍼의 정면으로 안겨준 중거리 슛이 전부. 사실상 제대로 된 공격은 전무했다고 볼 수 있었다.


점유율은 어떠한가? 58 대 42. 그냥 모든 지표가 로스 카운티에 밀렸다고 할 만한 경기였다.


그래도 명색이 첼시인데, 작년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챔피언이었던 첼시인데. 이 지경이면 처참하게 무너졌다는 평가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무리뉴가 대놓고 수비적인 태세를 취한 탓도 있겠으나, 그걸 고려해도 용납이 될 경기력은 아니었다. 게다가 결국 2점을 내주며 패배했으니 수비 전략이 성공한 거라 보기도 어려웠다.


첼시는 자신들보다 몇 배는 규모가 작은 팀을 상대로 졸전을 벌이며 치욕적인 패배를 겪은 셈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이 결과에 놀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첼시가 올 시즌에 부진한 이유도 있긴 했지만, 그보다 로스 카운티가 부리는 마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버린 까닭이었다.


놀라운 일이긴 해도, 경악할 만큼은 아니다. 그런 수준은 이미 작년에 유로파 리그에서 지겹도록 겪어봤으니까.


하일랜드의 챔피언은 이 방면에서 꽤나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또 하나. 무리뉴가 회견장에서 던진 폭탄 발언은 경기 결과를 흐릿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승전보를 퍼뜨려야 할 언론들은 ‘썩은 사과’라는 워딩에 더 집중했고, 그게 누구를 겨냥한 건지 추리하는 시간에 빠져들었다.


최근 무리뉴와 불화설이 나돌던 선수를 꼽기도 하는가 하면, 여름 이적 시장 내내 서로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아 마찰을 빚었던 마이클 에메날로 기술이사와 연관이 있는 언급이란 추측도 나왔다.


이 논란 덕분에 간간이 나돌던 첼시 선수들의 태업설이 더욱 불거지기까지 하고 있었다.


승리한 건 로스 카운티인데, 스포트라이트는 첼시가 가져가는 중이라니. 조제 무리뉴라는 남자의 스타성이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스코티시 팀이 2위에 올라선 건 분명한 사실.


첼시는 마지막 남은 경기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무조건 이겨야만 하며, 동시에 샤흐타르가 햄던 파크 원정에서 기적을 일으키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이제 자력으로 순위를 뒤집는 건 불가능이나 다름없으며, 바꿀 수 있는 상황도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는 의미다.


어쩌면 이미 가망이 없다고 여긴 무리뉴가 자포자기하면서 쌓여왔던 걸 터뜨려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


그다음 날, 로스 카운티의 감독실.


“요청하셨던 두 명의 상세 정보입니다.”


“오, 수고하셨습니다.”


말끔하게 정리된 파일을 건네는 한 사십 대 초반의 남자. 그는 케빈 호프, 현 유소년 총괄로 전임자 데이비드 위어가 사표를 제출한 뒤 감독이 직접 추천하여 내부 승진으로 올라온 인물이다.


2년 차가 되자마자 즉시 나태한 스카우트 팀을 숙청했던 이탈리안이 아서 마틴과 함께 남겨둔 인물이기도 하다. 제임스 블랜차드와 대니 패터슨을 발굴했던 장본인이니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델 레오네가 요청한 건 전반기가 끝나가는 지금, 유독 눈에 띄는 활약을 한 유소년 재능. 호프가 제출한 두 명은 올해 그가 유소년 스카우트 팀과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물색해 데리고 온 선수들이었다.


“이번에 계약한 아이들이 합류하자마자 팀 내에서 제일 돋보이고 있다는 겁니까?”


“공교롭게도 그렇게 됐군요.”


“뭐, 호프 씨의 안목은 훌륭하니 그 부분은 믿어 의심치 않지요. 우리 기존 유소년팀 성적이 딱히 좋았던 편도 아니었고.”


델 레오네는 가볍게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아론 맥냅(Aaron McNab), 11경기 2골 6어시스트.

폴 캠벨(Paul Campbell), 10경기 5골 3어시스트.


확실히 동 나이대 기준으로 보면 크게 두드러지는 기록이다.


“맥냅은 왼발잡이 윙입니다. 우선은 좌측을 파고드는 스타일로 성장 중이죠. 톰슨만큼은 아니어도 빠른 발을 갖춘 녀석입니다.”


“캠벨은? 측면과 중앙 미드필더를 전부 뛸 줄 아나 보군요.”


“체격이 187cm로 어린 나이에 몸은 벌써 완성되어 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희 쪽에서는 제2의 블랜차드로 평가하는 중입니다.”


“하하하, 제임스가 성인 무대에 데뷔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런 수식어가 붙은 겁니까?”


이탈리안은 진심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호프의 말이 마냥 허황된 건 아니었다. 본격적인 프로 레벨에서 뛴 건 3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 블랜차드를 롤 모델로 삼아 축구를 시작하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추세인 건 제법 유명한 얘기다.


아마 나폴리전의 극적인 역전 골을 기점으로 많이 생겨났을 것이다. 워낙 임팩트있는 장면 중 하나였으니.


“그래도 내부 평가가 그 정도라면 기대해 봐야겠지요. 이 둘은 잠시 1군 훈련에 합류시키겠습니다. 다음 스코티시 컵 명단에 넣도록 하지요.”


“혹시 선발로 내보낼 생각이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벤치에 앉아 경기 장면을 코앞에서 직관하는 경험은 이 꼬맹이들에게 값진 일이 될 테지요. 여유가 돼서 몇 분만이라도 투입해 잔디를 밟아볼 수 있게 한다면 더더욱 좋고.”


“아, 그건 저도 동감합니다.”


감독은 매년 최소한 1군의 스쿼드 플레이어 역할을 할 수 있는 재능을 꾸준히 배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고, 올해 개설한 ‘스태그 팜’은 그걸 극대화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시스템화한 선수 양성 시설이다.


“어린 새싹들은 구단의 귀중한 자산입니다. 로스 카운티의 황금 세대가 언제까지고 유지될 거라 생각하면서 안도해선 안 됩니다. 기량 하락, 더 큰 무대로 이적, 부상 등. 변수는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그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물론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유소년은 그저 유소년일 뿐이다. 꼬마들 사이에서 돋보였다고 그 활약이 성인 레벨까지 안정적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아마 숱한 재능들이 빛을 못 보며 고꾸라질 것이고, 축구 선수로 정착한다 해도 로스 카운티의 일원으로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라도 계속 시도해 볼 가치가 있는 게 유소년 육성 정책이다. 만일 투자에 성공할 경우, 천문학적인 거금을 들여서 영입해야 할 선수를 공짜로 얻게 되는 셈이니까.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뭔지 아십니까?”


이탈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바로 즐거움입니다. 아직 꽃피지 못한 재능이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지도자로서 아주 보람차고 흐뭇한 일이니까요.”


*******


< 15-16 Scottish Cup 4 Round >

레이스 로버스 : 로스 카운티

2015년 11월 28일 (토) 15:00

스타크스 파크 (관중 수 : 5,325명)



[로스 카운티 / 4-2-3-1]

FW : 리암 보이스

AM : 잭 마틴 / 필립 로스 / 앤드류 톰슨

CM : 대런 케틀웰 / 데미안 생클랜드

DF : 고든 스미스 / 대니 패터슨 / 스티븐 샌더스 / 딜런 갈브레이스

GK : 데이비드 밀스



“우리 팀이 지난 시즌에 프리미어십에서 버티지 못하고 강등된 건 맞습니다. 그러나 로스 카운티 2군에 밀려날 정도는 아니에요. 델 레오네 감독은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레이스 로버스의 감독 지미 레슬리(Jimmy Leslie)가 경기 직전에 가진 인터뷰에서 한 말이었다.


그가 언짢을 만한 부분은 있었다. 좌우 날개를 빼면 전부 후보군인 선발 멤버. 그것도 모자라 벤치에는 이름도 못 들어본 17살의 유소년 두 명.


어디 3부나 4부 리그 수준의 팀이 상대였다면 그럴만하겠으나, 이 팀은 2부인 챔피언십. 그것도 작년까지는 프리미어십에 있던 전력이다.


물론 컵 대회는 셀틱이 나온다고 해도 후보 라인업을 고수하던 게 이탈리안이며, 그런 고집 때문에 작년에는 리그 컵과 스코티시 컵을 전부 4강에서 마무리했었다.


그리고 이번엔 32강에서 떨어뜨려 큰 망신을 주고야 말리라고 벼르던 레슬리였지만.


철썩 -


“······.”


전반전에만 네 골을 내주고 난 뒤로 그는 일찌감치 손을 놓고 말았다. 주전으로 나온 좌우 날개들이 레이스 로버스를 짓뭉개버린 것이다.


샌더스의 롱패스를 받아 찔러준 로스의 스루패스, 가공할 스피드로 뒤에서부터 수비를 앞지르더니 거침없이 대각선 구석으로 차 넣는 톰슨의 선제골.


이어 두 번째 골은 측면에서 완벽히 무너진 장면이었다.


멈칫하다가 타이밍을 빼앗아 치고 나가는 동작에 속은 수비가 허공에 태클을 걸면서 공간을 완전히 내줬고, 톰슨은 대각선으로 파고 들어가 반대편 파 포스트 쪽을 향해 적당한 높이의 예리한 크로스를 올렸으며.


번개 같은 쇄도로 도착점에 뛰어 들어가 이마에 맞추는 잭 마틴의 헤더 골로 레이스 로버스의 사기는 단번에 꺾였다.


전의를 상실한 뒤에는 생클랜드에게 볼을 빼앗긴 뒤 잭 마틴과 케틀웰, 로스로 연달아 이어지는 깔끔한 역습으로 최종 슈팅을 가져간 보이스의 추가 골.


측면 깊이 올라온 스미스의 낮은 크로스를 보이스가 오른발 인사이드로 갖다 대듯이 밀어 넣으며 쐐기까지 박아 넣었다.


굴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큰 점수를 내준 탓에 승부가 기울어져 흐름이 느슨해진 후반전. 레슬리가 언짢음을 느꼈던 결정적 원인, 벤치의 두 소년이 80분이 되자 경기장으로 투입된 것이다.


그럼에도 레이스 로버스는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순간적으로 박스에 침투해 크로스를 받은 폴 캠벨의 오른발 슛이 골문에 들어갈 뻔한 것을 골키퍼가 겨우 막아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에 나온 로스의 슛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밀스의 골킥, 자리를 선점한 보이스의 헤더 패스, 수비 라인을 허물고 뒤로 빠져나간 로스의 일대일 단독 찬스, 침착한 마무리.


의욕이 소멸한 수비진은 따라갈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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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스 로버스 0 : 5 로스 카운티 >

앤드류 톰슨(8‘)

잭 마틴(14‘)

리암 보이스(27‘, 35‘)

필립 로스(86‘)


=============================


*******


< 15-16 Scottish Premiership 15 Round >

애버딘 : 로스 카운티

2015년 12월 1일 (화) 20:00

피토드리 스타디움 (관중 수 : 17,803명)



[로스 카운티 / 4-1-2-3]

FW : 제임스 블랜차드 / 에이든 딩월 / 앤드류 톰슨

CM : 존 맥긴 / 리차드 브리튼

DM : 알렉산더 캐리

DF : 리 월리스 / 스콧 보이드 / 폰투스 얀손 / 아메드 델샤드

GK : 마크 브라운



며칠 뒤 치러진 정규 리그 경기.


“로스 카운티의 상승세요? 피토드리 스타디움은 어떤 팀이 와도 쉽지 않은 곳입니다. 우리는 작년보다 전력이 더 상승했고,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애버딘의 감독 데렉 매키니스(Derek McInnes)는 정중한 태도로 자신감을 내비쳤다. 상대를 향한 도발을 유도하는 질문을 교묘히 피하면서 포부만 넌지시 내던지는 무난한 답변이었다.


단지 그뿐이었지만.


언론 대응은 훌륭했으나, 이 시합의 결과도 레이스 로버스가 겪었던 것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초반엔 좋았다. 월리스가 비워둔 공간을 기습적으로 파고 들어가 크로스를 골문 앞에 붙이는 역습 플레이가 통하면서 선제골을 넣었기 때문이었다.


캐리를 왼쪽으로 빼는 변형 라볼피아나 과정에서 동선이 꼬이는 실수로 공간 커버를 놓친 탓이 컸지만, 분명 상대가 잘 찌른 공격이라 할 만했다.


문제는 그게 끝이었다.


홈 어드밴티지의 영향을 받아 로스 카운티를 밀어붙였던 애버딘이었으나, 조절하지 못 하여 지나치게 체력을 많이 소모해 버렸고.


후반전에 급격하게 지치며 오버 페이스를 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집중력이 흐트러져 기본적인 패스 미스가 나오기 시작하면 높은 위치에서 달려드는 로스 카운티의 압박이 더 잘 통하게 되고.


이럴 때 빛을 발하는 선수가 바로 에이든 딩월이다.


후반 60분, 블랜차드와 잭 마틴이 교체된 이후.


측면으로 빠진 맥긴이 마틴에게 찔러주는 패스를 차단하는 것까진 좋았으나.


곧장 주변에 있던 두세 명이 매섭게 달려드는 압박에 바로 볼 처리를 하지 못할 경우, 언제나 그 선수가 소리소문없이 다가와 치명적인 실수를 유발하게 만들곤 한다.


애버딘 진영, 그것도 자신들이 보호해야 하는 박스 부근에서 빼앗긴 볼.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한데.


그 패스가 하필 박스로 진입한 마틴에게 들어간다면 골키퍼는 수비진을 원망하며 억지로 달려들 수밖에 없다.


철썩 -


보통은 실패로 끝나게 되지만 말이다.


역전을 내준 골 역시 애버딘 후방 라인의 패스 미스로 비롯되었다.


맥긴의 압박을 피해 반대편으로 길게 전달해 주려던 횡패스. 부정확한 궤적을 그린 볼이 딩월에게 끊겼고, 결대로 밀어준 패스를 뒤에서부터 빠르게 쫓아가며 받아내는 톰슨.


저번 스코티시 컵에서 나왔던 골과 비슷한 패턴으로 치고 나가며 마무리하는 장면이었다.


결국 애버딘은 리드한 점수를 본인들의 실수로 망치게 된 셈이었다.


그리고 캐리의 프리킥 과정에서 나온 딩월의 헤더 슛을 몸으로 막으려다 뒤통수를 맞고 굴절되어 들어가는 불상사까지 겹치면서 애버딘은 스스로 자멸하는 결과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호기롭게 챔피언의 기세를 꺾어보려 했으나 결국 무너져 내리며 고개 숙인 선수들. 피토드리 스타디움 원정에서 울려 퍼지는 로스 카운티의 챈트와 수만 명으로 이루어진 군청색 물결.


차분한 팔짱 자세로 서서 승리를 만끽하는 이탈리안과 이마를 짚은 채 입술을 깨물고 있는 홈팀 감독 매키니스.


이를 보던 중계 해설자가 한 감상평을 늘어놓았고, TV로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그 발언에 수긍했다.


[어나더 레벨······. 스코티시 레벨의 팀이 아니란 얘기는 많긴 했지만, 도저히 적수가 보이지 않네요. 15라운드를 치르는 동안 로스 카운티는 아직도 단 한 번의 패배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우승 경쟁자 셀틱과의 격차도 조금씩 벌어지고 있고요. 숫사슴들은 더 이상 프리미어십에서 치르는 경기에 긴장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너무나 압도적인 결과와 경기력. 그리고 챔피언스 리그, 유럽의 강팀들과 벌이는 치열한 접전에 중독되어 버렸거든요. 하물며 한때 이름을 날렸던 베니테스와 무리뉴마저 잡아낸 마당에 이 좁은 무대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셀틱이 리그만 지배하던 시대와 다릅니다. 그들은 유럽에서도 위세를 떨치는 중이니까요.]


특히 마지막 멘트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안토니오 델 레오네의 로스 카운티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



=============================

< 애버딘 1 : 3 로스 카운티 >

니얼 맥긴(13‘)

+++++++++++++++++++++++++++++

잭 마틴(66‘)

앤드류 톰슨(78‘)

루이스 밀른(OG 85‘)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밌는 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다음 주도 즐겁고 좋은 일만 있으시기를..

감사합니다. (_ _)


소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신

모아두상 님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_ _)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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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200. 공간 싸움 +6 24.02.06 751 37 26쪽
199 199. 대립 +5 24.01.25 788 33 26쪽
198 198. 대면 +5 24.01.14 839 35 25쪽
197 197. 팀의 완성도 +8 24.01.04 813 43 24쪽
196 196. 신뢰의 결실 +5 23.12.23 868 38 28쪽
195 195. 한 마리의 송골매 +5 23.12.10 855 40 23쪽
194 194. 두 마리의 사자 (2) +5 23.12.02 864 42 25쪽
193 193. 두 마리의 사자 +4 23.11.22 925 43 25쪽
192 192. 캡틴 잭 +3 23.11.10 878 40 26쪽
191 191. 경기장 위의 숫사슴들 +6 23.10.31 938 35 28쪽
190 190. 계몽의 시대 (3) +3 23.10.20 961 44 23쪽
189 189. 계몽의 시대 (2) +5 23.10.08 971 39 26쪽
188 188. 계몽의 시대 +4 23.09.26 1,012 42 26쪽
187 187. 새로운 국면 (5) +7 23.09.15 1,066 45 22쪽
» 186. 새로운 국면 (4) +6 23.09.03 1,095 42 25쪽
185 185. 새로운 국면 (3) +8 23.08.19 1,177 45 22쪽
184 184. 새로운 국면 (2) +8 23.08.04 1,226 40 26쪽
183 183. 새로운 국면 +7 23.07.13 1,302 56 22쪽
182 182. 지상 최고의 팀 (4) +8 23.06.28 1,278 50 29쪽
181 181. 지상 최고의 팀 (3) +5 23.06.16 1,169 39 24쪽
180 180. 지상 최고의 팀 (2) +6 23.05.27 1,282 50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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