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
장마철도 아닌데 비가 계속 내렸다.
세진은 우비를 걸치고 하얀 장화를 신은 채 진창길을 걸어가는 중이었다. 과거 논두렁이었을 사방은 가슴 어림까지 차오른 잡초들로 무성했다. 발목에서 찰박거리는 흙탕물 속에서는 미꾸라지들이 꿈틀거리는 중이었다.
낚싯대를 어깨에 걸친 세진은 성큼성큼 걸어 미꾸라지들이 헤엄치는 구역을 벗어났다. 그러자 전방에 커다란 모텔이 보였다. 안에는 한 명밖에 없다.
"나 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카운터의 소파 위에 앉아 있던 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텔레비전을 통해 뉴스를 보고 있던 차였다.
영은 머리를 검게 다시 염색했는데, 살을 섞은 후에 세진이 중얼거렸기 때문이었다.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
"뭐? 왜? 뭐가?"
"하얀 머리카락이 자꾸 눈 앞에서 흔들거리니까 말이야. 마치 할머니랑 잔 기분이야.."
"....."
"아 ...무심코 뱉어놓고 보니 이게 좀 아닌가. 미안하다."
"이런 씨발.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진짜 욕좀 안 하며 살고 싶은데 세상이 도와주지 않았다. 정말 근본이 실종된 세상이었다.
둘은 한국 곳곳을 여행하며 신혼여행을 대신했다. 베트남에 가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묵살되었다. 트윈헤드 상어 낚자는 기호는 한쪽에게 호응이 없었기 때문이다.
"뭐 좀 건졌어?"
"꽃게 두 마리. 그런데 뭘 그렇게 보냐? "
"그냥 개판 된 세상을 보니 나름 재미있어."
"......"
세진이 샤워를 하는 동안 영이 라면을 끓였다. 물론 꽃게와 함께 말이다. 채소를 써는 도마 옆에서 작은 라디오가 떠들어 댄다. 우기가 5달 동안 계속될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그 외에 시타델의 세력이 부산을 탈환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하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오는 세진은 전국구로 노는 쌍민의 소식을 듣고 있자니 참으로 갑갑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계 전체에서 난장을 피우는 테러로드들에 비하면 쌍민의 분투는 모자란 감이 있었다. 물론 그건 감상일 따름이고 뭔가 따로 도와줄 생각은 눈곱 만큼도 없다.
시타델의 계획은 한국을 점령하고 뭔가 해보겠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영이나 세진이나 거기에 관해 관심이 없었다. 나중 가서는 별 의미 없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게살이 들어간 라면은 끝내줬다. 막길수에게 뺏어온 깍두기와 어울려 얼큰한 국물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풍미를 선사했다.
둘은 혼자 노는 시간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침묵을 공유하는 것도 잘했다.
모텔에서 책을 보거나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내던 그들은 침대 위에서 같이 끌어안고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 날 북쪽으로 출발했다.
빗속을 헤매는 좀비 떼도 있었고 탱크와 엉겨 붙어 하나가 된 괴물도 있었지만 둘은 그냥 지나쳤다. 영과 세진은 굳이 괴물들에게 간섭하지 않았고 단지 덤벼들면 쉽게 죽여 버렸다.
둘은 같이 밤을 보내며 많은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틀이 넘도록 한마디 말도 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사흘이 지나 온천 앞에 도착한 그들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눈과 비가 섞여 내리는 얼음꽃들 속에서 온천물은 뜨거웠다. 뜨거운 물의 밖은 바로 눈밭이다.
알몸 상태의 영은 세진에게 안겨 있었다. 세진은 손가락으로 영의 팔뚝 안쪽을 쓰다듬었다. 간지럽다는 듯이 그녀의 팔이 조금씩 다른 곳으로 옮겨갔지만 포기하기엔 너무 부드러운 살결이었다.
"후회하지 않아?"
"뭘?"
"앞으로 100년밖에 못산다는 게 말이야."
천사들도 언젠가 죽는다. 그들에게 태어난 영도 영원을 사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충분히 오래 살았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수명은 100년도 안 된다. 천사들이 알면 아주 강하게 짜증 낼 일들이었다. 지금도 허리가 휘게 미친 듯이 찾고 있는데 말이다. 영의 수명이 몇만 년 이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세진은 눈과 비를 흘리고 있는 회색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얼어붙은 소나무들을 눈에 담았다.
이런 풍경들을 즐기는 데에는 100년이면 충분하고 남을 것만 같았다. 그의 수명이 앞으로 아주 많이. 몇천 년 이상 남아 있다 해도, 남은 시간 내내. 먼저 간 그녀를 그리워하며 보낼 이유는 없어 보였다.
‘사실 100년이면 충분해. 차고도 넘쳐.’
대체 이 여자는 어떻게 홀로 그 많은 시간을 버텼던 걸까? 그게 사실 더 신기하긴 하다.
"야."
"왜?"
"마지막으로 부탁한다. 제발 할머니 티 좀 내지 마라.."
"...."
한동안 입을 우물거리던 영은 자신도 모르게 욕을 뱉어냈다. 작게 속삭이듯이 말이다.
"이런 씨발..."
그녀가 세진의 손등에 자신의 손바닥을 포갰다. 둘은 그렇게 서로의 숨과 살결을 공유하면서 멍하니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못다 한 이야기가 있다면 그건 적어도, 이제 세진과 영의 몫은 아니었다. 엔딩을 냈다면 모르지만 안 냈다면 막길수의 몫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눈들이 미약한 빛을 뿜어내자 밤이 내리는 하늘과 땅이 대비되었다. 눈송이들과 빗물들은 계속 내려와 온천물에 녹아들었다.
산속에는 길 잃은 짐승 한 마리도 없었다.
정적이 유지되다가 영이 노래를 부르자 깨졌다. 세진은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뒤통수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그녀가 노래를 부를 때 전해지는 진동을 느꼈다.
그녀가 그의 곁에 살아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들으란 듯이 노래를 불러주고 있다.
영의 손가락이 파고들에 세진의 손가락과 합쳐진다. 그렇게 깍지를 낀 둘은 같이 시간을 음미했다.
"영."
"왜?"
"사랑해."
그녀가 손을 들어 그의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보드라운 입술을 느끼라고. 자신의 대답을 보다 더 잘 느끼라고 말이다.
"나도 널 사랑해."
그 대답을 들으며 세진이 눈을 감았다.
고마워.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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