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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金舶
작품등록일 :
2015.07.09 08:42
최근연재일 :
2015.11.03 01:07
연재수 :
10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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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82,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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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09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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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광해왕(光海王)의 회상(回想)

DUMMY

광해왕은 다시 쓴 맛의 노주 한 잔을 따라 마셨다. 그리고 입맛을 음미하다가 지난 2 월 초의 일을 회상하였다. 초하루 부왕(父王)께서 급서(急逝 갑자기 돌아가심)하시고, 다음 날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명국의 세자책봉 인준도 없이 이루어졌던 일이다. 왜란이 일어나서 세자가 된지 16 년째 되어 수많은 사연이 있었으나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자신이 정말 현군이 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기뻐하였다. 신하들의 당파싸움이 주는 폐해를 잘알고 있으니 자기는 당을 구분하지 않고 신하들을 임용하리라 속깊이 다짐하였었다. 그러나 즉위하고 선왕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벌써 불미스러운 소문이 나돌았음을 듣게 되었다. 심지어 선왕이 독살되었다는 등의 말까지 나오다니 참 선왕께 너무나 황송하기까지 하였다.


소문을 누가 퍼뜨린 것일까? 광해왕은 아직도 알수 없었다. 자기를 반대하던 사람들일 수도 있으며, 자기를 지지하던 사람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아우 영창군의 지원세력 괴수인 유영경을 잡아서 유배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대소 신하들을 골고루 임용하려는데, 고사(固辭)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자리를 채우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그 이유는 지금 같은 난세에 벼슬길에 나섰다가 제명 다 살지 못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왕이 아무리 탕평(蕩平)을 말해도 믿는 사람들이 없었으니 참 괴롭기 짝이 없었다. 영의정으로 남인 이원익을 불러 앉혔으나, 벌써 사직 상소를 수십 차례나 내고 물러나겠다니 참 왕의 자리가 너무나 어렵다는 생각을 하였다. 북인(北人)이 아닌 사람은 북인의 세상이 왔으니 아예 관직을 고사하는 것이었으며, 북인들은 현왕이 북인 세상이 온 것을 인정하지 않고, 왜 남인들을 임용하려 하느냐 불만을 표시하였음이다.


광해왕은 다시 쓴 맛의 노주 한 잔을 따라 마셨다. 회상은 다시 거슬러 올라서 어느 날인가? 영창대군이 적자로 태어나서 많은 신료들은 저울질을 바쁘게 하고있던 참이었다. 부왕에게 아침에 문안을 갔다가, 부왕이 문안을 받지않고 물리쳐서 광해군은 점심을 먹은 후에 다시 문안을 갔었다. 그리고 들어오라고 하여 들었다가 부왕의 호된 질타를 들었다.


"넌 세자가 아니야. 다시 문안오지 말거라. 그 때 전쟁통에 임시로 널 세자에 앉혀두었던 것인데,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부턴 세자가 아닌게야. 알았느냐?"


그 자리에서 물러나오니 북인에 속한 신료들이 모두 찾아와 세자를 위로해주었다. 간신들이 사리사욕을 챙기려고 노쇠한 부왕을 흔들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어도,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정인홍, 이이첨 등의 말을 위안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북인들이 이제는 공을 내세우며 자기들 세상이 왔다고 권력을 독점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고 있었다. 그러나 정인홍 대감만은 권력 욕심이 아니라는 것을 왕은 잘 알고 있었다.


광해왕은 다시 또 한 잔의 노주를 따라 마셨다. 왜란에 공을 세운 사람을 뽑아 기록하는 공훈록(功勳錄)에서 부왕은 피난 길에 말고삐를 쥔 사람들에게도 공을 인정해주었으나, 자기에게는 공을 인정해주지 않았던 추억이 떠올랐다. (1604 년 6 월 25 일 왜란 중의 공신을 뽑아 공훈록을 적어 발표함) 왜란이 터진 임진년, 피난길에 득병하여 죽은 동생 신성군은 호성공신 2 등 첫머리에 이름이 있었으나, 분조(分朝 세자를 중심으로 운영하는 또 하나의 조정)를 이끌고 돌아다니며, 군량미와 군수품을 모으고, 백성들을 위무하며, 의병을 끌어모았던 자기와 자기를 따르던 의병대장들 역시 공신록에서 모조리 제외되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들은 자기들의 공을 내세우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으나, 오히려 공이 없이 공신이 되었던 자들이 자기들의 공적이 적게 기록되었다고 아귀처럼 달려들던 것이 생각났다.


임진년 왜란이 터지자 정인홍은 나이 58 세의 노구(老軀 늙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무찔렀음도 기억이 났다. 그러나 공신록에는 장인홍의 이름 역시 없었다. 이덕형 역시 공신이 되지 못하였다. 명나라에 가서 원병을 끌어오는 데에 큰 공을 세운 그는 부왕이 인정하는 공신이었으나 본인이 끝내 사양하였다. 광해군은 그 때에 혼자 생각했었다. 당연히 공신이 되어야할 사람이 빠지게되니 본인도 공훈록에 이름을 올릴 염치가 없었던 것이라고. 이덕형은 염치를 아는 신하인 것이다.


유성룡이란 자는 명나라의 화친책에 따라 조선국 한수(漢水 = 한강) 이남 남쪽 절반을 왜국에게 할양하라는 왜국의 화친조건을 받아들여서 화친해야한다고 주장했던 신하였는데, 버젓히 2등 공신에 올라있었다. 그것은 당시 아버지 선조의 마음 속에 있는 말, 선조가 차마 할수없는 말을 대신 토해낸 것임을 광해군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유성룡은 아버지 선조에게 충성을 바친 것이다. 하지만 신하가 충성하는 길은 무조건 왕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님을 유성룡이 어찌 몰랐을 것인가? 스스로 공신록에서 이름을 빼달라고 해야 할 놈은 바로 이놈인 것을... 광해왕은 유성룡이 참 염치없는 놈이라 생각하였다. 당시에 정인홍은 주화론자들의 어이없는 행태를 듣고서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었다 하였다.


필마로 옛 싸움터 지나노라니 / 匹馬經過舊戰場

강물은 한을 품고 유유히 흐르네 / 江流遺恨與俱長

지금 그 누가 왜적과 주화하려 하는가 / 於今誰唱和戎說

장군과 사병은 이미 원통하게 죽었는데 / 將士當年枉死亡


일신의 안일과 가문의 영달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입으로는 오히려 치국과 경세의 요체를 더욱 매끄럽게 토해내는 것이다. 그 놈들이 위선자임이 분명하였으나 자기는 앞으로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정치를 해가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선자 아닌 사람, 정인홍 같은 사람은 가뭄에 콩나듯 드물어서 찾기가 어려운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인홍의 의견은 너무 과격하여 따르기에 두려웠다.


광해왕은 다시 노주 한 잔을 마셨다. 왜란 때에 잡혀갔던 백성들이 3000 명이나 돌아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왜란 후 왜국과는 절교상태였으나, 왜국은 대마도주를 통해서 몇 차례나 통교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부왕은 신료들과 의논하여, 의병으로 군공을 세운 사명당(四溟堂), 전계신(全繼信) 등에게 포로송환 협상을 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에 사명당 등은 왜국에 가서 협상을 하여 3000 명의 포로를 데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1604 년 일임, 이 일 후 다시 서계(書契 - 조선과 왜국 간의 외교서신)를 주고 받다가 1607 년에서야 정상적인 외교가 성립되고 왜관(倭館)이 다시 개설되었다.]


이겼다면 포로송환은 물론 전쟁손해보상까지 받아내었을 터인데, 사실상 이기지 못한 전쟁이므로 신료들 누구도 더 이상 포로송환을 왜국에 요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7 년 전쟁에서 잡혀간 백성들이 적게보아도 20만 명이거늘, 고작 3천 명 돌아왔다고 크나큰 성공이라고 축하하고 그걸로 그만인 것이었다. 조선국 신료들 중에 제대로 씨알이 들어있는 놈은 정인홍 한 사람 밖에 없음이었다. 하지만 둘이서 정치를 다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정인홍은 이제 74 세의 노구였으니, 앞으로 남은 날이 얼마나 될 것인가?


광해왕은 다시 쓴 맛의 노주 한 잔을 따라 마셨다. 왜란 후 북벌을 도모하였던 일이 떠올랐다. 왜란이 끝나고 이태가 채 지나지 않아서 신료들은 벌써 전란을 잊어버리고 사리사욕으로 당쟁을 일삼았다. 왜란의 말미 시절부터 백두산 동북의 야인여진 무리들이 국경을 어지럽게 하고 있다는 장계(狀啓)가 올라왔었다. 세자 광해는 부왕께 자기가 나가서 여진 무리들을 징치하고 오겠노라고 하였다가 어떤 결말도 없이 한 해 두 해 지나게 되었다. 처음에 부왕은 보내주려는 것처럼 하셨다가 나중에는 불가하다는 명을 내렸다. 부왕은 세자가 전쟁터에 나가 죽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세자의 안위를 걱정해주셨던 것일까? 아니면 세자가 군공(軍功)을 세워 백성들에게 인망을 더욱 얻게 될 것을 두려워 하심인가?


만력 28 년 (경자년,1600 년 임) 3 월 25 일 두만강 국경선에 야인여진의 무리 일천 명 이상이 침공해 들어왔다. 왜란으로 조선이 쇠약해졌다 하여, 여진의 무리가 깔보고 쳐들어오는 것이었다.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수일의 장계에서는 적도들을 물리치기는 하였으나 함경 부사 이간이 중상이요, 조선군 편장, 비장 등 부장급만 해도 5 - 6 인이 전사했다는 것이었다. 전(前) 해 부터 함경도사 강홍립 역시 적극 병사를 내어 여진 무리를 선제 토벌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왜란 종결후 아직 기력을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출병은 어렵다는 신료들의 주장이 강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침공을 받고서는 이제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내어야 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윤승훈의 장계는 이러하였다. '4 월 12 일 조선군 4000 명은 북진(北進)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4 월 15 일 새벽에 기습작전을 개시하여 여진 무리의 7 개 마을 주변 40 리(16 킬로미터)를 초토화 시켰으며, 가옥 1000 여 채와 가축과 들판의 곡식마저 불살랐다. 적병 110 명의 목을 베었다.' 장계의 마지막은 '마을을 다 쓸어버리고 빈터를 만들었다. 보기에 장쾌하였다.'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이로써 야인 여진의 무리는 더 이상 국경을 넘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광해왕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함경도에 주재하는 지방군 주둔 총 군병 수는 약 1 만이며, 그 이상의 군병은 없다는 것을. 장부에 있는 수치는 모두 거짓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7 도의 상황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다시 왜병이 쳐들어온다면 부산진에서 20 일 만에 도읍 한성(漢城)을 또 다시 유린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 왜란으로 조선국은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교훈은 아무 것도 없었으며, 왜란 전과 변한 것이 있다면 단지 궁전 터에 불에 타고남은 숯덩이들만 있을 뿐이었다. 왜란이 끝난지 10 년, 왕은 아직도 정릉동 행궁에 머물고 있는 것이었다.


광해왕은 다시 한잔 그리고 또 한 잔의 노주를 따라 연거푸 마셨다. 이제 더 시간을 거슬러 올랐다. 왜란 중에 분조를 이끌고 국토를 돌아다니며 둘러본 백성들의 삶의 현장이 떠올랐다. 피난 길이라도 떠나는 백성들은 오히려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는데 왜 백성들은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결국 왕이 잘못하여 그리 된 것이었다. 광해군은 이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함께 하는 신하들은 이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에게 세자 광해군의 먹을 것부터 내놓으라고 호통을 쳤다. 그렇게 약탈하다시피 하지 않으면 세자 자신도 굶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하들을 말리지 못하였으나, 차마 그들에게 뺐은 쌀로 지은 밥이 목구멍을 잘 넘지 못한 때가 많았다. 또 지방의 유지(有志)가 군량미 쌀을 내어줄 적에 정말 그 일이 귀하고 고맙게 여겨졌었다.


광해왕은 다시 쓴 맛의 노주 한 잔을 따라 마셨다. 부왕은 의주 몽진 길에서 돌아와 환궁을 한 다음부터 기분이 오락가락 하였던 것인가? 갑자기 양위(讓位)를 하시겠다는 명을 내렸다. 세자로써 부왕의 앞에 돗자리를 펴고 석고대죄(席藁待罪)를 하여 양위의 뜻을 거두시게 하였다. 이후로도 십 여 차례 양위소동은 되풀이 되었다. 세자는 때로는 물도 음식도 거른 채로 이틀 사흘을 엎드려야 하였다. 이렇게 한번 열병을 치루자면 몸이 망가지면서 세자가 된 것을 후회하기도 하였다. 김씨 궁인이 때때로 물에 젖은 수건을 가져다가 타는 입을 적셔주었었지, 그 때는 그녀 밖에 그런 일을 해줄 사람이 없었음을 추억하였다.


광해왕은 다시 한잔 그리고 또 한 잔의 노주를 따라 연거푸 마셨다. 형 임해군의 일이 다시금 생각났다. 왜란 중에 임해군과 순화군(順和君)은 역시 따로 행로를 정하여 군량미와 의병을 모으기로 하였으나, 임해군과 순화군은 백성들을 괴롭혔다. 광해왕은 자기가 분조를 끌고 가서 쌀을 빼앗듯이 얻어야 끼니를 이을 수 있었음을 기억하며, 두 형제를 얼마간 이해도 하였다. 그런데 핍박받은 백성들이 두 형제를 잡아서 왜국 장수에게 넘겨주는 일이 일어났었다. 두 왕자는 이덕형이 왜장(倭將) 가등청정에게 외교하여 풀려났으나 그 후로도 두 형제의 악행이 계속되었다. 백성들 중에 해마다 열 명 이상이 형제에게 대들다가 맞아죽었다는 것인데, 백성들이 오죽하면 왕자에게 대들었을까?


광해왕은 다시 한잔 그리고 또 한 잔의 노주를 따라 연거푸 마셨다. 이제 더 이상 마시면 안될만큼 취기가 올라왔다. 광해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누웠다. 어렷을 적의 형 임해군이 생각났다. 그 때 아마도 형은 열 살 쯤 때였다. 그 전에는 동생인 자기를 보면 눈빛이 부드러웠으나, 이 때부터 형 임해군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 때 무렵 형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광해왕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광해왕은 오른손을 들어 행여 누가 볼새라 얼른 눈물을 훔쳤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몰래 사병을 키우다니 형 임해군은 정말 왕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광해왕은 조련된 군병 일만 명, 아니 오천 명만 있으면 한성을 바로 장악할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조선국왕의 자리가 잘해내기에 결코 쉽지 않은 자리이며, 욕심낼만큼 좋은 자리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광해왕은 수많은 인생의 굴곡을 헤쳐온 지혜를 갖은, 두려워 할줄 아는 그리고 가장 정력이 활발하다는 34 세의 장부였음이다.


광해왕은 일어나서 다시 노주 한 잔을 따라 마셨다. 그리고 형 임해군의 눈빛이 변하였던, 그 열 살이 된 자기의 장자, 세자 수(脩)를 떠올렸다. 또 자신의 열 살 때를 떠올려보았다. 자신의 경우 열 살 때에는 별 일이 없었음을 기억할 수 있었다. 미래에 대한 생각도 특별히 하지 않았으며, 그냥 도학공부를 적당히 열심히 하였던 기억이 났다. 이제 열 살이 된 세자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좋을까?


격물치지(格物致知)란 실물에 접해서 앎을 얻는다는 뜻인데, 물(物)이란 바로 삶을 뜻하는 것이리라. 세자에게 삶이 무엇이라고 가르쳐야 할까? 형 임해군의 삶은 괴로움일 것이었다. 괴롭지 않았다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괴롭히지 않았을테니까. 그런데 정말 삶은 괴로움일까? 광해 자신의 경우는 어떤가? 자신의 삶 역시 괴로움이었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삶 역시 괴로움인 것을 알았으므로 주변 사람을 가급적 괴롭히지 않도록 노력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에선 즐거움은 별로 없었다고 회상을 하였다.


열 살 된 세자에게 물어볼까? 너는 삶이 즐거운가 아니면 괴로운가 하고 묻는다면 아들은 뭐라고 대답할까? 삶은 다음 셋 중에 하나일 것이다. 삶은 즐거움이거나, 괴로움이거나, 즐거움과 괴로움의 중간일 것이다. 광해왕은 과거는 물론이고 미래의 자기 생에서도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은 많을 것임을 자기가 세자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 이미 각오하였었다.


광해왕은 불가(佛家)의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말을 읖조리면서, 신하 허균을 떠올렸다. 허균은 불자(佛子)는 아니었으나 불심(佛心)이 깊은 사람인 것을 광해왕은 이미 알고 있었다. 공맹의 도를 입에 달고 있는 신하들은 말과 행동이 서로 달랐으나, 본인들은 그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사서삼경을 만번 읽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충성을 바친다고 하면서 조금 섭섭하면 즉시 사직상소를 내던지는 신하들에게 충성은 무엇일 것인가? 향촌에 면세 전답이 있으니 그들에게 벼슬이란 언제든 그만 두어도 될 명예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허균 같은 신하는 자기가 갖고있는 불심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법당에 출입하면 모두 불제자인가? 염불하고 참선하면 모두 불제자인가? 불제자이면 또 어떤가?


하지만 허균의 거짓없는 점을 좋게만 여기기에는 두려워할 줄 모르는 허균의 당돌함이 개운치 않은 감으로 남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이 크기에 거짓으로 포장하여 위선을 하며, 어떤 사람은 두려움이 없기에 진실하고 또 당돌할 수 있는 것이었다. 왕이 스스로 담대하지 못하면 위선으로 충성하는 신하들을 가까이 하게 되나, 스스로 담대하게 떨치고 나서면 진실하게 나라를 위하는 신하들을 가까이 할 수 있을 것임을 광해는 생각하였다. 나는 허균을 가까이 하리라.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광해왕은 술에 골아 떨어져 잠이 들었다.


** **


자기도 모르게 선잠이 들었던가? 정수훈은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초저녁일 뿐인데 아주 오랜 시간을 잠들어 있었던듯 느꼈다. 그리고 허균을 통해서 전해들은 조선국왕 광해의 지나온 과거 이야기가 소록소록 기억났다. 정수훈의 가슴 속에서 무엇인가 불끈 솟았다. 조선국에서 일어난 일이 명국에서 일어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자기의 사위 복왕이 지금은 태자가 아니지만 그래도 황제가 절대 되지 못할 운명은 아닐 것이다. 지금의 태자가 조선국의 장자처럼 못된 짓을 저질러서 신하들에게 배척받기만 하면 조선국에서 일어난 일이 가능하리라는 깨우침이 가슴 속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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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흑룡은 은하수와 흑룡강이 되었다 15.10.15 561 5 15쪽
88 보이지 않는 전쟁 15.10.15 570 6 14쪽
87 사람은 하늘이다 15.10.14 584 5 15쪽
86 으뜸이 되는 가르침 15.10.14 1,033 4 13쪽
» 광해왕(光海王)의 회상(回想) 15.10.09 832 6 18쪽
84 명(明) 사신(使臣) 조선(朝鮮)에 가다 15.10.08 831 6 15쪽
83 하남지부가 분쟁을 중재하다 15.10.07 647 8 13쪽
82 은(銀) 25만 량과 견(絹) 25만 필의 세폐(歲幣) 15.10.06 794 6 15쪽
81 황태자가 매를 맞은 문제 15.10.05 696 10 13쪽
80 다섯 가지를 통하게 하라 15.10.03 816 8 14쪽
79 오장육부(五臟六腑) 15.10.02 795 8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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