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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金舶
작품등록일 :
2015.07.09 08:42
최근연재일 :
2015.11.03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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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08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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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5쪽

명(明) 사신(使臣) 조선(朝鮮)에 가다

DUMMY

만력 36 년 (무신년 1608 년 임) 7 월 8 일 저녁무렵, 아직 날씨는 한 여름과 다를바 없이 무더웠다. 하남부 낙양성 정가장의 장주이며, 신사인 정수훈은 명나라 사신단의 시무(時務)라는 임시직 종사관으로 참여하여 조선국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지난 4 월 초에 북경을 출발하여, 일을 마치고 북경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으며, 그리고 이제 약 15 일 후면 북경에 도착할 것이었다. 지금은 말을 타고 하루 길을 와 광령위(廣寧衛)의 역참에 도착한 것이었다.


봉국(封國) 조선에서는 선왕(先王) 이연(李 日+公 선조의 이름)의 뒤를 이어 서차자(庶次子) 이혼(李琿 = 광해군의 이름)이 왕위에 올랐으니, 혼을 왕으로 책봉해달라고 사신이 왔었다. 북경 조정은 지난 이십 여 년 전부터 국본지쟁(國本之爭 = 태자책봉을 두고 번진 논쟁)이 있었다가 7 년 전에 서장자 주상락이 태자가 되었으며, 서차자 주상순은 하남부 낙양으로 분봉(分封)하였었다. 명의 조정은 이번에도 외번(外藩) 조선국에서 서장자가 아닌 차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조선국에서 서장자가 왕위를 사양하였다는 주청사(奏請使)의 변명에서 빈틈을 찾아내고 의심하였다. 서장자인 진(津 삼수 변 대신 임금왕 변 = 임해군의 이름)은 정신이 혼미한 자로써 왕위를 이을 수 없는 자인데, 그것을 알고서 스스로 양위(讓位)하였다는 조선사신의 말에 전후의 모순이 있었던 것이다. 정신이 혼미하면 사리판단이 흐려서 양위할 생각을 어찌 할수 있겠는가 하는 예부(禮部) 낭중(郎中)의 반문(反問)에 조선사신은 대답을 머뭇거렸던 것이다. 명의 조정은 차자인 혼(琿 = 광해군의 이름)이 즉위한 과정을 다시 조사하기로 하여 이번 사신단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정수훈이 손을 써서 이 사신단에 참가하려했던 이유는 도학(= 유학)이 왕성한 조선국에서 장자가 아닌 차자가 즉위한 실정(實情)이 궁금해서였다. 정수훈은 낙양에 봉지를 받고 내려온 복왕에게 자신의 딸을 첩으로 주었으며, 이로써 복왕의 장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무슨 사정이 생겨서 복왕이 황제가 된다면 자신은 국구(國舅 = 임금의 장인)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명국에서는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로 황제의 선호와는 달리 복왕이 태자가 되지 못하였는데, 명국보다 도학이 한 뼘 더 높다는 조선국에서 차자가 즉위한 데에는 어떤 사정이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하루 여정에 시달린 몸을 씻고 석반(夕飯)을 먹은 후, 정수훈은 시원한 곳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 생각에 잠겼다. 사신단은 6 월 15 일에 조선국 도읍 한성(漢城)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6 월 20 일에 양위를 하였다는 장자 이진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양위하게된 사유와 경위를 직접 본인의 입으로 말하였으나 그것이 강제에 의한 것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잠시 접반사를 물리치고 독대한 자리에서 서장자 진은 방금 전과는 정반대로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말하며 명 사신에게 구원을 부탁하였다. 정사(正使)인 요동도사 엄일괴는 아무 말이 없었으나, 정수훈이 옆에서 보건데 차자 이혼의 책봉에 대한 인준이 어려울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정수훈은 어떻게든지 조선국에서 장자 아닌 차자가 즉위한 사례를 만들어보고자 하였다. 그렇게 한다면 혹시 명국에서도 어떤 변화가 일어나서 자신의 사위인 복왕에게도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해보았던 것이다. 어떤 일을 추진하는 데에 가장 일반적인 방도는 일에 합치하는 조건은 자꾸 크게 돋보이게 만들 것이며, 불합치하는 조건은 자꾸 소소하게 만드는 것이다. 정수훈은 조선국에서 차자가 즉위한 일이 사소한 일이나 한번 되도록 하리라 그런 작전을 세웠다. 정수훈은 차사(次使)인 태감(太監) 만애민에게 그런 의견을 말하였다. 조선국의 바라는 것을 주고 그 대신 뇌물을 잔뜩 받아내면 어떻겠는지 하는 것이었다. 태감 만애민과 정수훈은 의견 일치를 보았다. 정수훈은 조선국에서 은자 십만 량을 받아낼 일을 맡고, 만애민은 정사인 엄일괴를 설득하는 일을 맡았다. 그리하여 이혼의 책봉이 인준되도록 명의 조정을 설득하자는 것이었다.


정수훈은 추관을 하다가 그만두고서, 다른 신료들의 은자를 맡아서 불려주는 일을 시작하였었다. 은자는 땅에 묻어두면 10 년이 지나도 그대로일 뿐이지만, 정수훈에게 맡겨두면, 은자가 매년 1 할 씩 불어났다. 정수훈은 이미 유력한 신료들과 태감들 이십 여 명과 관계를 맺어서,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다. 정수훈은 맡은 은자로 전토를 구입하여, 거기에서 나온 소출로 이자 불려주는 일을 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상방에 은자를 넣어서 상업에 동업을 하며 은자를 불리기도 하였다. 태감 만애민 역시 정수훈에게 은을 위탁한 신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정수훈은 지난 몇 달간의 행차에서 자기가 얻은 소득을 살펴보았다. 첫째는 뭐니뭐니 해도 조선국의 서차자인 이혼을 왕으로 책봉되도록 거의 만들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소관 은자를 5만 량 맡았다는 것이다. 엄일괴는 만애민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였으며, 자기 몫의 은자 3만 량을 정수훈에게 맡겼다. 또 만애민도 자기 몫의 은자 2만 량을 정수훈에게 맡겼으며, 나머지 5만 량은 북경에 있는 신료들에게 분배할 것이었다. 셋째는 조선국의 신하 중 허균(許筠 홍길동전의 작자)이라는 친구를 만났다는 것이다. 허균은 명민한 학자이며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써 충분히 자기와 벗이 될만한 사람이었다. 특히 도학의 나라 조선에서 출생에 따라 신분을 차별하는 것은 부조리하다는 신념을 허균은 갖고 있었다.


정수훈의 허균에 대한 생각은 다시 이어졌다. 허균은 정수훈 보다 두 살이 적었으나, 대화를 나누다가 흉금(胸襟 속깊은 마음)을 여는 사이가 되었다. 허균은 조선국왕의 심복으로써 왕의 심중까지 잘 헤아리고 있었으며, 정수훈은 허균을 통해서 책봉인준이 꼭 되어야 하는 조선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어 책봉의 인준을 위해 애쓰기로 약속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일이 잘 마무리 되었으며 조선국에서는 이덕형을 진주사(陳奏使)로 하여, 귀국하는 명국 사신단과 함께 북경으로 가도록 하였다. 아직 세자책봉조차 받지못한 이혼(광해군)을 국왕으로 책봉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허균에게서 일의 전후를 보고받고는 광해왕은 명국에서의 책봉 일이 잘되리라는 희망을 마침내 갖을 수 있었다.


** **


만력 36 년 7 월 8 일 해질 무렵이었다. 아직 날씨는 한여름 마냥 무더웠다. 정릉동 행궁의 별실에서 조선국왕 광해는 주위를 물리치고 혼자서 독한 노주(老酒 서민들의 술) 한 잔을 따라 마셨다. 입안이 씁쓰름하였으나 그 쓴 맛으로 광해왕의 마음은 조금 달래지는 것 같았다. 옆자리의 서안(書案 = 앉은뱅이 작은 책상)에는 대사헌(大司憲) 정인홍(鄭仁弘)이 올린 차자(箚子 = 간단한 상소문)가 놓여 있었다. 광해왕은 그 상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상소(上疏)의 내용은 지금은 왕이 칼을 들어야 할 때이며, 형 임해군에 대해 법대로 치리(治理)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었다. 죄인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면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것이므로 죽이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었다. 형의 반역심은 사병을 양성하여 반역을 도모하였음이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으며, 법대로 한다면 죽음 이외의 다른 길은 없었다.


하지만 신하들 중에서 상당수는 은혜를 베풀어 죽이지는 말아야 한다는 상소를 줄줄이 올리고 있었다. 그것이 육친(肉親)을 대하는 방도로 옳다는 것이었다. 유교의 이념에는 꼭 지켜야할 두 개의 가치가 있었으니 그것은 인(仁)과 의(義)였다. 그러나 이 두 개의 가치가 서로 충돌할 때에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지금 조정 공론의 핵심이었다. 인을 주장하는 신하들의 면면은 과거 형세가 어렵던 세자 시절에 자기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이 더 많았으며, 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려운 때에 자신에게 용기를 주고 보호막이 되어주었던 사람들이었다. 정인홍만 하여도 자기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싸워주었던 대신이었다. 그러나 광해왕은 정인홍의 뜻에 벗어날망정, 이제 형 임해군을 죽이지는 않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다시 쓴 맛의 노주 한 잔을 따라 마셨다. 그리고 입맛을 음미하다가 지난 달포 간의 일을 생각해보았다. 6 월 15 일에 상국(上國) 명나라의 사신이 한성(漢城)에 들어왔었다. 정사는 요동도사(遼東都司) 엄일괴, 차사는 환관 만애민, 그리고 시무(時務) 정수훈이 자기의 왕위 승계가 적법하였는지를 검사하려고 왔던 것이다. 자기를 지지하는 신하들은 임해군을 핍박하여, 스스로 자신의 결함을 내보이고 양위하였다고 말하도록 시켰다. 그래서 임해군은 안치되어있던 강화도를 떠나 마포에 와서 6 월 20 일 명나라 사신을 직접 만나서 시킨대로 말하였던 것이다. 명나라 사신들은 임해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정인홍은 이 때에도 임해군이 왜란 시절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패덕한 언행을 수없이 저질렀음을 말하고 도저히 왕재(王才)가 아니어서 신하들이 물리친 것이며, 차라리 죽여서 죄인 임해군의 머리통을 떼내어 명나라 사신에게 보여주자는 말까지 하였었다. 정인홍의 말대로 하게되면 자기의 하나뿐인 친형은 죽어서도 영원히 치욕을 벗지 못할 것이었다.


광해왕은 다시 생각하였다. 명나라 사신 접대를 맡은 허균은 명나라 사신을 따라온 시무(時務 임시 종사관) 정수훈(呈守訓)이란 자를 만나서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천만다행의 일이었다. 허균은 표면적으로 내세울 수 없는 사실 내막을 정수훈에게만 말하고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명나라 조정의 신료들은 조선국에 대해 좋지않은 견해를 갖은 사람들이 많았다. 왜국의 침공을 받은 조선국을 구원하려고 퍼부은 은자 이백만 량 때문에 명국 재정이 힘들어졌으며, 그런 이유로 웃는 얼굴조차 밉게 보이는 형편이었다. 명나라는 서장자(庶長子)로 황태자를 삼았으나, 봉국(封國)인 조선은 끝내 서장자인 임해군을 세자로 세우지 않았음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정수훈은 조선국의 형편을 이해하여 주었으며, 차자(次子)일지라도 자질이 뛰어난 왕자가 왕위를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정수훈은 북경에 돌아가서 명나라 신료들을 설득할 때 쓸 뇌물로 은자 십만 량을 요구하였다. 조선의 왕과 조정은 이것을 의논하여 은자를 주고 명 조정을 달래는 방도를 택하였다. 관고에 은자가 6만 량 밖에 없어서 4만 량 어치의 인삼을 더하여 십만 량을 채워 주었다. 그리고 좌의정 이덕형을 명 사신 일행과 함께 보내서 광해왕의 책봉을 받아오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덕형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에 가서 원군(援軍)을 데려오는 일을 성공시켰으며, 명국의 엄일괴 등 사신단에 대응하여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에 따라가서, 명나라 조정을 설득하여 책봉 인준되도록 하고, 그 해 12 월 17 일 한성에 돌아왔다. 또 허균은 광해군 시절 명나라와의 외교에 핵심 역할을 하였고, 이후 사신으로 명나라에 세 차례 다녀오게 된다.]


광해왕이 허균(許筠)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는 대충 다음과 같았다. 명사(明使) 엄일괴가 임해군을 만난 후로 허균은 정수훈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둘이서 대화를 나눌수록 아주 호감을 느꼈다. 정수훈은 유교 이념의 지배에서 벗어나 아주 자유로운 생각을 갖은 사람이었으며 허균 역시 자유로운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었다. 유교의 편협한 이념은 사람에게 불필요한 억압을 주는 것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였으며, 특히 적서의 차별에 대한 부분에서 서로 배짱이 맞는 셈이었다. 시무 정수훈은 추관(推官 정7품직)이라는 관직을 얼마간 하였다가 물러나서 낙양의 신사로 있다고 하였는데, 금번 사신행렬에 참가하였다는 것이다. 허균은 입을 열었다.


"정대인께서 조선의 입장을 잘 이해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공자(孔子)님께서 정말 적자와 서자의 차별을 그렇게 하라고 하셨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으리라 봅니다. 예를 지키는 선에서 적당히 하라는 뜻이었다 봅니다. 허대인께서도 아시겠지만 공자님 역시 적자가 아니셨지요. 그래서 어렸을 적에 온갖 수모를 다 당하셨는데, 오늘날 도학에서는 공자님의 말씀이 왜곡되어 전해지는 것이 아주 허무한 일입니다."


"그렇지요. 출생을 엄밀히 따지자면 공자님은 서출도 못되는 것입니다. (공자의 생모는 정식으로 첩이 되지도 못하였음을 말한 것) 그런데 누가 출생신분 따지는 것을 도학에 잘못 끌어들여서 수많은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었지요. 사람은 출생이 문제가 아니라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그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 아니 그보다 무엇을 할 수 있었고, 무엇을 해내었느냐 그것이 중요할 것이지요. 사람은 그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 했어요. 우리가 공자님을 존경하는 것은 공자님의 가르침이 위대하기 때문이지요. 오늘날에 와서는 공자님의 출생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지요."


허균은 임해군의 오래된 비위사실(非違事實)을 말하고, 15 년 전 왜란이 일어난 때부터 광해왕의 등극이 조선국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자세하게 말하였다.


"정대인께 제가 조선국 사정에 대해 좀 부끄러운 것까지도 말씀 드렸으니, 이해를 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정대인께서 조선국을 위해 방도를 만들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예, 허대인께서도 짐작하시겠지만, 명 조정에서 조선국에 대해 오해하는 신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을 설득하자면 다소간 은자가 필요한데, 이런 말 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허균은 광해왕에게 은자 십만 량을 원한다고 전하였으며, 영의정 이원익 이하 이정구, 이덕형 등의 동의를 얻고, 은자와 인삼을 준비하여 건네주었다. 이렇게 하여 강경론자인 정인홍과 북인들의 주장하는 바 임해군의 머리를 잘라서 명국 사신에게 보여주자 했던 의견은 그냥 묵살되었다. 이로써 광해왕은 친형을 죽이지 않게 되어 한시름 놓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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