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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풋님의 서재입니다.

마갑을 만드는 천재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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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글

레드풋
작품등록일 :
2024.04.01 20:47
최근연재일 :
2024.05.20 22:05
연재수 :
5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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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792

작성
24.04.2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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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31화. 숲의 주인(2)

DUMMY

< 31화. 숲의 주인(2) >




‘나샤이데 님···?’


빛나는 나신의 여인.

그녀는 지금 나무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머리 위, 하얀 가지를 뻗고, 머리카락을 잎맥처럼 펼쳤다.


〖일어나라! 샤피람!〗


마녀의 집 한쪽을 버티던 버드나무가 부름에 답했다.

몸을 털며 일어난다.


꾸드드드득!!

우르릉!


가득 이고 있던 눈을 아래로 떨군다.

순간 눈폭풍이 일었다.

눈사태처럼, 하얀 눈의 파도가 쏟아졌다.

호수가 튀어 오르며 1층의 불은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뿌리가 땅을 가르며 거칠게 솟아오른다.


콰아아앙!

솨아아아아아!!

하얀 증기가 바닥을 따라 분지로 넓게 퍼졌다.


“꽈아악!”


눈을 가득 뒤집어쓴 파갈루는 가지 위에서 머릴 털었다.

지붕 위 라이칸들은 비명을 지르며 눈에 쓸려 떨어졌다.


치이이이이-.

쿠구궁!


그 안개 속을 가르며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였다.

바닥을 긁었다. 훑었다. 한 아름이나 될 채찍이 대지를 쓸며 휘둘러졌다.


-촤악!

“크아악!”

“깨앵!”


수십의 라이칸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하늘을 날았다.

정통으로 맞은 몇은 순간 사지가 끊어졌다.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쿠웅!!


마녀가 손을 뻗자, 낙엽이 날아들었다.

알록달록 황갈색과 붉은색, 녹색의 잎이 날아와 그녀를 감싼다.

밑으로 늘어지며 길고 넓은 드레스를 만들었다.

그녀의 옷은 파갈루의 색.

하얀 머리카락은 이제 사슴의 뿔이 되었다.


“와아···.”


톰 아저씨와 난 입을 담을 수 없었다.

돌아선 그녀는 나샤이데도, 데이샤나도 아니었다.

둘이 하나가 된 진짜 마녀.

마령 숲의 큰사슴.

그녀의 본모습이었다.


[후우우우.]


그녀가 그윽한 눈빛으로 말했다.


[모두 잘 해주었다.]


그녀가 손을 들자 집을 지키는 호수가 뒤집혔다.

굵직한 뿌리들이 물 위에 떠 있던 시체들을 삼켰다.

땅이 갈라진다. 도망치던 라이칸을 움켜쥐고 땅속으로 사라졌다.


“크와앙! 도망쳐라!”

“빠, 빠져나와! 어서! 숲이 깨어났다! 마녀가 살아났다.”


눈밭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죽순이 자라듯 가지가 솟았다.


스스스츗! 파밧!


“커걱! 컥!”


찔려 걸린 라이칸들은 새우가 튀듯 튀어 올랐다.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바둥거려봤지만, 소용없었다. 꼬치가 되었다.

피를 쏟아내며 숨을 놓고 금세 늘어졌다.


‘아!’


쿵!


천 살은 되었을 나무가 걷는다.

나뭇가지에 걸어두었던 거울이 귀걸이처럼 반짝거렸다.

이제야 모든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엔트···.’


마녀의 집을 지키는 거대한 버드나무.

그 나무가 깨어나 일어서 놈들을 쓸고 있었다.

나무는 도망치는 놈들을 용서 없이 짓이겼다.


꾸지직! 촤악!


“크아악!!”

“깨앵!”

“꺅! 도망쳐!”


모여 있던 파리가 흩어지듯 라이칸들은 도망쳤다.


[어딜 달아나느냐.]


마녀의 목소리엔 분노가.

그녀의 손을 따라 엔트의 손도 함께 움직였다.


[올 때는 자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아하!’


내 입에도 방긋 미소가 걸렸다.


콰가가가각!!


싸리 빗자루가 개미를 쓸 듯,

엔트가 라이칸을 쓸어간다.

버드나무의 가지는 천연의 채찍이었다.

분지의 눈밭은 금세 붉게 물들었다.


치열했던 전투가 무색할 정도로,

전투는 싱겁게 끝나고 있었다.




***




난 놈들이 도망치는 능선을 보고 있었다.

정말 잘 뛴다. 공격 올 때보다 더 빠르다.

발이 보이질 않는다.


옆에 서 있던 마녀가 말했다.


[모두 잡힐 거란다.]


이미 숲은 깨어났다.


도망치는 라이칸을 향해 숲의 마수들이 움직였다.

능선 너머로 언제 나타났는지, 산고블린들이 달리고 있었다.


“꾸꺄꺅!”

“꾸꺄꺄꺄!!”


긴팔원숭이처럼 나무를 타며. 이놈들도 빠르긴 매한가지다.

이내 놈들의 실루엣이 도망치는 라이칸의 머리 위를 덮쳤다.

거친 비명과 함께 진한 혈향이 능선을 타고 넘어왔다.


붉은 눈보라가 참나무숲 위로 흩날렸다.

하얗던 산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꽈악! 꽈악!”


하늘도 달라졌다.

새들이 까맣게 날아올랐다.


마치 엄청난 수의 정어리 떼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들이 땅을 휩쓸면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크아아악!!”

“깨애앵! 깨갱! 깽!”


그 정어리 떼에게 하늘로 잡혀 올라가면 끝이었다.

공중에서 분해됐다.

순식간에 새들의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구석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레빈!!”


난 정신을 차리고 쓰러져있는 레빈을 살폈다.


“괜찮아요?”

“괜찮다으웨엑!”


레빈이 한바탕 피를 쏟아내자, 마녀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라라라락!


“우웁!”


파란 나뭇잎들이 그에게 날아왔다.

그 수가 엄청나 한순간 레빈은 낙엽으로 된 사람으로 변했다.

그 안에서 알보칠로 목욕을 하는지,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렸다.


“크으아악! 잠시만, 잠시 아아악! 에퉤퉤!! 어흐! 어으읍!”


낙엽을 박차고 튀어나온 레빈은 멀쩡한 모습.

자기도 놀랐는지, 동그랗게 뜬 눈으로 팔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나았네?”


꺾였던 팔도, 기이하게 튀어나왔던 뼈도 정상이 되었다.


“허허허···.”


레빈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가지를 타고 나무 위로 올라가며 말했다.


[쉬고 있거라.]


우린 부서진 마녀의 집에서 숨을 골랐다.

라이칸과의 짧지 않았던 전투는 끝을 보이고 있었다.




***




마녀는 눈을 감고 숲을 관조했다.

숲의 마령들에게 서슴없이 명령을 내렸다.


척살, 복수, 포식.


자신을 노린 서쪽 산맥의 사악한 늑대들을 잡아 죽이도록, 잡아먹도록.

도망치는 놈들을 집요하게 쫓았다.


[흐음.]


그녀는 지금 숲이다.

하지만, 마녀의 영향력은 마령의 숲 끝까지.

서쪽의 마수트 산맥까지는 힘이 닿지 않았다.


[···그놈들. 참.]

“도망쳤나요?”

[그래. 하지만, 그 수가 많진 않구나.]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놈들만 겨우 숲을 빠져나갔다.

그 덩치 큰 대장 놈은 끝내 잡지 못한 모양이었다.


“집이 엉망이 되었네요.”

[괜찮단다.]


거대한 버드나무, 엔트가 돌아왔다.

그리고, 금방 집을 새로 만들었다.


가지를 뻗어 올리고 타버린 기둥들은 밖으로 빼냈다.

호수 위에 가득 떠 있던 라이칸들은 어느새 물 밖으로 밀려 나왔다.

형체를 알아보지 못하게 훼손된 시체는 땅속으로 집어삼켰다.


“테르. 이걸 좀 봐라.”


톰 아저씨와 난 놈들의 시체 사이를 돌며 병장기를 모으고 고철을 수집했다.


“이정도 양이라면 스승님도 엄청 좋아하시겠는데요?”

“하하하. 정말 그렇구나.”


한 번에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냉병기와 갑주가 쌓였다.

그중, 특별한 물건도 있었다.

그건 내가 발견했다.


“이놈이에요. 그리고 이것 좀 보세요.”

“응···?”


지붕 위에 올라 우리에게 불꽃의 화구를 던지던 라이칸 주술사.

놈은 머리가 완전히 부서진 채 아래턱과 긴 혀만을 남긴 모습이었다.

내 손엔 놈이 걸고 있던 목걸이.

레빈은 그걸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 목걸이! 마력이 있구나.”

“네. 저도 느껴져요.”


목걸이는 작은 소동물의 뼈와 이빨, 질긴 가죽 매듭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레빈이 여러 가지를 실험해 봤지만, 잘되지 않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난 모르겠는데? 그래도 특별해 보인다. 내 감으로도 이건 아주 귀하다.”

“음. 조금만 기다려보죠. 마녀님도 곧 정리가 끝날 거예요.”

“그래···.”


새로운 마녀의 집은 층수가 많아졌다.

공격을 대비한 시설이 추가된 느낌이었다.


그녀가 가지를 타고 내 옆으로 내려섰다.


[어떠니?]

“뭔가 아늑한데, 여기 들어오면 곧 죽을 거 같아요.”


그녀는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감이 좋구나.]


한마디로 말한다면 마녀의 새집엔 킬존이 생겼다.

함정으로 쓰일 공간이 중간에 추가된 모양새였다.

예전이 아늑한 시골집의 모습이라면 지금은 전장에 마련된 벙커 같았다.


나뭇가지들이 움직이며 깨진 도구들은 버리고, 흩어져 있던 고서와 마법구들을 챙겼다.


우린 그 모습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모든 상황을 마무리한 마녀는 나와 레빈, 톰을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고비를 넘겼구나. 고맙다.]

“아닙니다.”


그녀가 웃으며 낙엽을 불렀다.

소용돌이처럼 몸이 잎에 싸였다.


[내 역할은 끝났으니, 이후의 일은 이 아이에게 맡기마.]


쌓였던 낙엽이 무너지며 마녀의 키도 함께 줄어들었다.

사슴 같던 머리의 하얀 뿔도 긴 머리카락이 되어 아래로 떨어졌다.

덮고 있던 낙엽 드레스도 잎이 되어 흩날렸다.


예전의, 타투로 감싸인 소녀의 나신이 드러났다.


‘으앗!’


깜짝 놀란 난 다급하게 마녀의 로브를 찾아 그녀를 덮어 주었다.

긴 로브를 꼼지락거리던 소녀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쏙 내밀었다.


“고마워요. 테르.”

“아. 아닙니다.”

“후음. 하! 다행히 고비를 넘겼네요. 샬라얀 님까지 나오셨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가요?”


레빈은 깜짝 놀란 얼굴.


“앗! 그러면 방금 그분이 샬라얀 님이셨습니까?”

“네. 맞아요.”

“아! 귀한 분이 나오셨었군요. 몰랐습니다.”


레빈은 뭔가 아쉬운 마음으로 혀를 차며 고민에 빠졌다.

내가 궁금한 듯 쳐다보자, 레빈이 말했다.


“숲의 현자 샬라얀. 그녀가 마령 숲의 진정한 주인이란다.”


나샤이데의 표현으로는 저 거울 너머, 내면의 호수 깊은 곳에서 쉬고 계신 분이라고.

그러니까 진짜 마녀의 본캐란 말이었다.


‘그러면, 부캐는 데이샤나, 부부캐가 나샤이데?’


거참. 편하네.

천년을 넘게 살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 같았다.


피부에 새긴 엄청난 타투와 마법진, 그 출력과 유지비를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가 되었다.

가장 저출력인 나샤이데가 일상을 담당한다고 봐야 맞았다.


“나샤이데 님. 혹시, 이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


난 예의 라이칸 주술사의 목걸이를 꺼내 보였다.


목걸이를 받아 든 소녀는 이전보다 더 어려진 느낌.

이리저리 목걸이를 살펴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축기의 최상급 주술, 피의 힘을 이끄는 고대의 술식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테르.”

“네?”

“그 주술은 테르에게 도움이 됩니다. 혹, 심장의 마나. 키워볼 생각이 있나요?”


그녀의 입꼬리가 빙긋 올라갔다.

시선은 죽어 쓰러져있는 라이칸을 향했다.


피의 주술?


“저놈들 정도라면 큰 마맥을 심장에 만들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이죠.”

“아!!”


이···이걸, 받아?


내가 레빈을 바라보자,


“뭘 망설이는 거야? 얼른 받아야지! 내 마력은 성질이 있어 가지고 싶어도 못 한다고.”


그가 먼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샤이데는 그 뼈로 된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주었다.




***




피를 이용한 축기 술식은 야만의 방식이었다.

그것도 천 년 전부터 내려오던 고대의 주술이란다.

그래서, 이 목걸이는 당장 파괴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그래도 아까우니까, 써야죠!”


파괴하기 전, 마지막으로.


이미 죽어있는 저 라이칸의 마기를 한번에 끌어당기자는 말이었다.


“맞지. 어차피 그대로 두면 썩어 없어져버릴 텐데, 그러면 너무 아깝잖아?”


일전엔 눈밭에 마법진을 그리며 놈들의 피를 방어막으로 사용했었다.

그 피가 얼마나 마력을 많이 품고 있는지는 경험으로 알았다.


“부···, 부작용은 없을까요?”

“없을 겁니다. 단지 술자의 성질이 문제가 될 뿐. 아직 특성을 발현하지 않은 테르에겐 해당되지 않을 테고요.”


그녀의 주문에 따라, 나는 목걸이를 걸고 가만히 눈밭의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테르, 축기는 목걸이에서 가슴의 마법진으로 연동될 거예요. 목걸이의 줄은 좀 더 느슨하게 풀어줄게요.”


가슴에 그려진 두 겹의 마법진 위로 정확하게 목걸이가 걸렸다.


마수의 피에 녹아있던 마력이 목걸이를 통해 마법진으로, 그리고 그 마나는 다시 내 심장으로 흐르게 될 거라는 설명.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넵!”


그녀는 내가 앉아 있는 자릴 중심으로 지팡이를 긁으며 손쉽게 마법진을 그렸다.

파인 홈으론 대지에 스며들었던 놈들의 피가 천천히 모였다.


‘어?’


벌써 반응이?


우우우웅.


목을 타고 전해지는 찌릿한 압박감.


나샤이데가 마법진을 완성하기도 전에 벌써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묵직한 힘이 목걸이를 타고 올라온다.


가슴의 마법진으로 밀물처럼 흘러들었다.

꼭 거대한 아나콘다를 목에 걸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녀가 마법진의 마지막 획을 그었다.


“됐어요.”


마법진이 완성되어 하나의 사이클로 연결되는 순간.


우우우웅!


“어허허헉!!”

“가만히!”


광대한 격랑이 내 목을 감쌌다.

목걸이가 빛을 뿜어내며 살짝 떠올랐다.

엄청난 마나가 심장을 향해 몰려와 소용돌이쳤다.


“끄으으윽!”


그리고 나의 이성은···.


“커헉!”


어딘가로 빨려들 듯,

깊은 어둠 속,

아니, 그 속에서 터지는 빛의 섬광 안으로 끝없이 떨어졌다.

날아올랐다.




****




‘여긴···.’


어두침침한 원룸.

내 방이다.


어디서 주워 왔는지, 귀퉁이 깨진 밥상을 펼쳐두고서, 청년이 앉아 있다.

익숙한 어깨 선, 시원한 웃음 소리.


-하하하하!


혀를 옆으로 빼 물은 채,

청년은 스케치북에 뭔가를 열심히도 그리고 있었다.


-히히히.


‘아!’


‘저게 언제였지?’


오랜 기억 속, 청년의 스케치북엔 커다란 버드나무를 배경으로 마녀의 집이 그려지고 있었다.


‘왜 기억에 없었을까?’


분명, 저 그림, 그렸던 기억이 난다.


본 이후에야 생각이 나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방을 둘러본다.


벽에 가득 쌓여있는 삽화들은 모두 기억이 생생한데, 책장에 꽂혀있는 스케치북 속, 내가 그린 판타지는 안개처럼 뿌옇다.


기억이 엉망진창이다.


‘···막고 있어.’


누군가 그 기억을 찾아가지 못하게 막아놓은 느낌.


그 중세의 세상으로 환생한 후, 어떤 힘이 작동한 모양이었다.


-하하하. 완성!


청년이 그림을 끝냈다.


그림은 숲의 현자 샬라얀. 백발의 마녀다.

이 세계관, 최강의 캐릭터 중 하나였다.


등 뒤로 거대한 엔트와 병영처럼 생긴 3층의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완성된 그림이 천천히 넘어간다.


다음 장은 아무것도 없는 백지.


-좋아! 이번엔···.


나였던 청년이 그 백지를 불타는 눈으로 바라본다.


‘뭐였지?’


‘저기에 뭘 그렸지?’


‘기억이···.’


사삭.


둥글게.


한 획의 선이 인물을 그려낸다.


‘아!’


첫 번째 연필 선이 백지 위를 달렸을 때.


난 그 그림의 완성이 떠올랐다.


“!!”


내 입은 금세 미소가 지어졌다.


기억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직 그려지지 않은 소년의 이미지는 가부좌를 튼 채, 공중에 떠 있었다.

소년의 아래론 거대한 고대의 마법진이 붉은색 빛을 뿜으며 빛나야 맞았다.


소용돌이 치는 마나는 나선의 형태.

심장을 감싸 돌며 마나를 채워준다.


그 기억만큼은 선명하게, 이미 완성된 듯 눈앞에 보였다.


난 다시, 그 그림 속의 내가 되었다.




***




웅장한 바위가 비스듬히 서로 맞닿은 돌벽의 꼭대기.


-추아악!


산고블린 한 마리를 찢어 질겅질겅 씹고 있는 근육질의 라이칸스로프가 바위 아래 지쳐 널브러져 있는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흠!”


살아남은 놈들은 겨우 열 놈 남짓.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는 부하는 없었다.


특히, 부족의 주술사로 엄청난 재능을 발휘하던 ‘그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뼈아픈 손실. 화가 난다. 자동으로 비공이 울렸다.


“크르르르!!”


부하들의 꼴도 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생채기에, 갑자기 날아든 맹금류에 눈알이 뽑힌 놈도 있었다.

두 눈을 모두 잃은 부하 하나를 바라보았다.

훌쩍 바위에서 내려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보롭!”

“어흐흐. 대···, 대장. 나, 눈이···.”

“크흐흠.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거다.”

“살려줘. 대장!”

“너도 알잖아. 황혼의 길로 가라. 다시 건강한 사내로 태어나!”

“대장, 포션만 있으면! 포션만 있으면 돼! 나 살 수 있어! 난 살고 싶-”


퍽!


머리가 깨진 부하가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다른 부하들은 ‘그래. 뭐, 어쩔 수 없지.’란 표정.

굴러떨어지는 놈을 멀뚱히 바라본다.

입맛을 다시는 놈도 있었다.


덩치 큰 라이칸은 고개를 들어 능선을 바라보았다.

붉은 하늘, 천천히 떨어지는 해.

저 먼 숲, 짙게 느껴지던 피 냄새도 어느새 사라졌다.

그의 예민한 코로도 맡아지질 않았다.


‘돌아가자···.’


늑대를 너무 많이 잃었다.

실패를 보고하고, 패전의 책임을 져야 맞았다.

자신의 거취를 부족의 원로들에게 물어야 했다.


그리고 스치는 기억.


야만족 ‘콴드르’의 모습이 떠올랐다.


‘81개 부족이랬나?’


저 드넓은 서쪽 들판의 야만족 모두를 통일한 자.

족장들의 족장. 들판의 왕, 천 년만에 태어난 석양의 발톱이다.

그는 마녀를 잡아 죽이면 자신에게도 그 힘을 나누어준다고 말했다.


-마녀를 먹어라. 심장에 마나를 둘러라.


마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분명 냄새는 사슴이었는데 말이지···.’


입에 침이 고였다.


콴드르는 그 마녀를 천년 사슴이라고 말했다.

직접 맡았던 냄새도 분명 사슴이었다.

그리고, 늑대야말로 사슴의 천적이 아니던가.


‘천 년 묵은 사슴을 잡을 수만 있다면···’


자신도 늑대 족의 진정한 ‘콴드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뿌드드드득.


헛된 야망이었다.


전사 칠백을 잃었으니, 꿈도, 미래도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복수! 반드시 복수다.’


다시금 분노를 다스리며 마령의 숲을 바라보고 있을 때.

도망쳤던 숲에서 보라색의 빛이 하늘로 터졌다.


땅에서부터 솟은 빛은 하늘을 뚫을 듯 끝없이 쏘아졌다.


“뭐냐!”

“저··· 저저··· 저 빛은···.”

“아!”

“콴라의 빛?”


자신도 저런 빛을 본 적 있었다.

야만족의 왕 콴드르가 제국 기사의 목을 베고 보여주었던 권능.

〖석양의 발톱〗을 받았을 때, 그 몸에서 솟았던 광휘.


마력을 두른 심장을 만들어 준다는 바로 그 권능이었다.


‘어째서···.’


그리고 역시나.


붉은 하늘, 초승달처럼 둥글 달이 그 빛의 시작에 걸려있었다.


‘석양의 발톱’이다.


‘누구냐! 누가 권능을 깨우느냐!’


방어막의 안에 있던 놈들의 기억.

그 얼굴들이 스친다.


마법사, 용병, 그리고 꼬마.


분명히 그 셋 중 하나이리라···.


“놈의 심장을 먹겠다!!”


크르르르르!


욕망이 불타올랐다.


저 마나의 빛줄기처럼, 그의 분노도 하늘 끝에 닿아 있었다.

그자의 심장을 씹어야, 자신의 심장에도 마나의 불꽃이 타오를 것만 같았다.


라이칸스로프 대전사, 오루갈의 눈에선 불똥이 튀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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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40화. 출정 +7 24.05.08 11,009 312 16쪽
39 39화. 제자 사냥 +17 24.05.07 11,128 314 15쪽
38 38화. 요청 +13 24.05.06 11,345 329 15쪽
37 37화. 초대 +11 24.05.05 11,624 316 16쪽
36 36화. 라이칸 +22 24.05.04 12,051 349 15쪽
35 35화. 기습 +10 24.05.03 12,329 354 18쪽
34 34화. 만월의 밤 +18 24.05.02 12,960 375 17쪽
33 33화. 피난민들 +7 24.05.01 13,324 395 18쪽
32 32화. 서클 +18 24.04.30 13,553 404 15쪽
» 31화. 숲의 주인(2) +17 24.04.29 13,665 404 19쪽
30 30화. 숲의 주인(1) +15 24.04.28 13,757 413 19쪽
29 29화. 기묘한 동거(2) +17 24.04.27 14,040 417 20쪽
28 28화. 기묘한 동거(1) +15 24.04.26 14,190 437 16쪽
27 27화. 나샤이데 +17 24.04.25 14,602 463 21쪽
26 26화. 용병들 +13 24.04.24 14,879 435 18쪽
25 25화. 최전선 +15 24.04.23 15,093 405 13쪽
24 24화. 전송진(2) +14 24.04.22 15,378 403 15쪽
23 23화. 전송진(1) +15 24.04.21 15,286 436 16쪽
22 22화. 마갑의 시동 +15 24.04.20 15,734 401 19쪽
21 21화. 전장의 소식 +20 24.04.19 15,742 407 16쪽
20 20화. 작은 희망(2) +23 24.04.18 15,822 382 16쪽
19 19화. 작은 희망(1) +17 24.04.17 15,959 393 13쪽
18 18화. 시동 +14 24.04.16 16,655 403 16쪽
17 17화. 정령석 +19 24.04.15 16,947 437 15쪽
16 16화. 통수 +9 24.04.14 17,096 405 18쪽
15 15화. 갑주(6) +16 24.04.13 17,236 406 17쪽
14 14화. 갑주(5) +14 24.04.12 17,258 430 18쪽
13 13화. 갑주(4) +23 24.04.11 17,859 416 19쪽
12 12화. 갑주(3) +10 24.04.10 18,715 443 15쪽
11 11화. 갑주(2) +10 24.04.09 18,704 480 14쪽
10 10화. 갑주(1) +21 24.04.08 19,252 462 17쪽
9 9화. 화살(3) +10 24.04.07 19,666 469 16쪽
8 8화. 화살(2) +8 24.04.06 20,267 464 13쪽
7 7화. 화살(1) +22 24.04.05 21,045 491 20쪽
6 6화. 마녀(2) +20 24.04.04 21,506 518 13쪽
5 5화. 마녀(1) +18 24.04.03 22,423 521 17쪽
4 4화. 도제(3) +12 24.04.02 24,137 518 20쪽
3 3화. 도제(2) +12 24.04.01 24,235 518 13쪽
2 2화. 도제(1) +12 24.04.01 26,514 541 16쪽
1 1화. 달빛 대장간 +28 24.04.01 33,210 603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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