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장 풍운재자 4화 싸움준비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4. 싸움준비
“두령, 괜찮은 먹잇감이 하나 보이는데!”
체구가 작고 날다람쥐처럼 움직임이 민첩한 데다 시력 역시 남들보다 좋은 토야가 범장(帆檣) 꼭대기에 매달린 채 쾌활하게 소리쳤다. 지난 약탈이 바로 어제 새벽의 일이었다. 아직 만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또 싸움이 벌어질 판이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초원의 정복자인 가이샤드의 전사답게 토야는 그저 흥이 나는 모양이었다.
“어디 배 같아?”
키타이가 갑판 위에서 고개를 들어 올리며 목청을 높였다.
“모양이 세레즈 놈들 같은데?”
흡사 한 마리의 원숭이처럼 두툼한 기둥에 매달린 밧줄을 타고 내려온 토야가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아 갑판에 착지하며 답했다.
“크기는?”
“우리 배보다 훨씬 작아, 상선은 아닌데, 아직 어둑해서 확실히 잘 모르겠어. 군선 같기도 하고. 하지만 어차피 두령이 배만 훔치면 된다 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
토야의 발언에 아무렇게나 너부러져 있던 이들이 흥미를 표하며 몸을 일으켰다.
“뭐, 군선 같다고?”
“이야, 그러면 모처럼 제대로 몸 좀 풀어보는 건가?”
“그러게, 상선을 공격하는 건 약자를 괴롭히는 거 같아서 내심 찜찜했다고.”
“그런 놈이 계집애들 목에 걸린 패물까지 깡그리 빼앗냐?”
“그렇지만 그 목걸이는 정말 비싸 보였단 말이야.”
“다들 진정해. 설령 군선이라 해도 선원 다 포함해도 채 백 명도 못 탈 만큼 작은 배던데.”
“뭐야? 겨우 백 명? 내 코딱지보다도 쪼끄맣네.”
“흐응, 오랜만에 힘 좀 써볼까 했더니, 그 정도면 한 입 거리도 안 되겠네.”
“맞아. 세레즈 놈들은 바다 위에는 비루먹은 당나귀보다도 쓸모없다던데. 지난번에도 코네세타랑도 붙었다가 바다에서 완전히 작살났잖아?”
“쪽수만 많지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놈들이 없어. 사내새끼들이 얼굴만 허여멀겋게 떠서는···.”
“그게 어디 세레즈 뿐이냐? 검 하나 다룰 줄 모르는 건 커런스 놈들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책상물림 내륙 놈들은···. 모름지기 사내라고 하면 나처럼 울끈불끈 튀어나온 근육이 있어야 힘도 쓰고 그러지.”
자기들까지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소리에 이사크는 못 말린다는 혀를 차고는 토야를 쓱 돌아봤다.
“방향은?”
“1시 쪽, 이동 방향을 봐서는 우리처럼 남부 영지로 향하는 듯.”
“그래? 1시 쪽이고 방향이 같다면, 굳이 우회할 필요 없이 이대로 속도를 높여 배의 후미를 강타할 수도 있겠군.”
이사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세레즈 연안에서 제법 떨어져 있는지라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지만, 항해 시간을 감안할 때, 세레즈 서남쪽 펜데스칼 영지는 이미 지났을 법하였다. 이 정도 위치에서 1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 군선이라면, 저 배의 최종 목적지는 로크라테가 아니라 하크스 영지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크스 영지라, 마침 잘 되었네.’
쉬쉬하면서도 알음알음 퍼져 나가고 있는 풍문에 따르면, 죽은 줄 알았던 세레즈의 태자 아체프렌이 하크스 영내에 머물고 있다 하지 않던가. 일이 술술 풀리고 있었다. 태자가 있는 곳이라면 필시 소문이 자자한 미드프레드란 놈도 조만간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사크는 여러모로 그녀석이 궁금했다.
해적으로 떠돈 2년 동안, 그리고 그 이전 국경지대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과 싸워왔다. 싸움과 약탈이 일상인 가이샤드의 문화와 달리 정착 문화를 보유한 세레즈와 커런스의 사내들은 지독하게 나약했다. 그런 나라에서 근 백여 년 만에 나타난 군사 영웅이다. 패색의 짙던 전장에서 오합지졸 같은 세레즈 군을 끌어내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목하는 이는 자신만이 아니었다. 세레즈 국경지대에 부임했던 장수들을 잡초 베듯 베어온 아비조차 그 작자가 노틸라드에 부임한다는 소문에 잔뜩 촉각을 곤두세웠음을 이사크는 분명히 기억했다.
본디 소문이라는 것은 말을 더해가면서 부풀려지기 마련이었고, 전쟁 같은 환란기에는 영웅이 필요한 법이었기에, 처음에는 응당 미드프레드에 대해서도 정치적인 연유에서 다분히 부풀려졌으리라고 짐작했다. 이제 갓 성인식을 치른 녀석이 부상까지 입은 몸으로 유목민족이 난립하는 노틸라드 영지에서 심지어 부족한 군사를 가지고 대체 뭘 할 수 있겠나 무시하는 기분도 없잖아 있었다. 실제로도 그 녀석은 아비의 우려가 기우였다는 듯 영지 안에 한동안 쥐죽은 듯 엎드려 있었다. 놈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이사크가 역시 세레즈의 대다수의 서생들처럼 전쟁영웅이라던 자 역시 복지부동이라고 코웃음을 치려던 찰나였다. 흡사 세찬 노도와 같은 기세로 그 녀석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영내에 있는 유목민족을 일거에 몰아냈다. 확실히 난 놈은 난 녀석이었다.
이사크는 며칠 전에 전서용 매를 통해서 받았던 소식을 기억했다. 이복형인 이사드렛이 장악하고 있던 카이드라 평원을 빼앗겼다는 소식이었다. 본인과는 결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이사드렛은 혈연관계를 떠나 그가 인정하는 몇 명 안되는 타고난 전사였다. 그가 그대로 초원에 남았다면 아비의 자리를 두고 가장 위협적인 적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는.
카이드라 평원을 빼앗겼다면 아비 역시 간담이 서늘해졌을 터였다. 일단은 형제의 원수이고, 겁을 모르는 부친을 난생처음으로 긴장시킨 적이다. 상대보다 약하면 죽는 게 당연하다 여기는 이사크라 할지라도, 상대가 궁금해지고 기회가 된다면 제대로 맞붙어 보고 싶다 여기는 건 당연했다.
세레즈의 여왕이든, 태자이든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왕위 다툼이야 누가 이기든 이사크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 무료함을 달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싸움터일 뿐이었다. 이왕지사 이 내란을 통해 형제의 원수를 제 손으로 갚을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테고 말이다.
이제 갓 스무 살의 혈기왕성한 전사의 피는 이사크를 전장으로 부르고 있었다. 수백 번 전장에서 그의 날개가 되어준 직감이 그에게 외치고 있었다. 조만간 그 전쟁영웅이라던 미드프레드와 조우할 수 있으리라고.
“마침 바람도 좋고, 잘 됐다. 키타이, 처자는 놈들 깨워라. 동이 틀 무렵 공격하자.”
“응. 두령.”
“나는 뭘 할까. 포를 꺼내놓을까?”
“미쳤냐, 토야? 배를 탈취하겠다고 하고서 다 부숴놓으면, 판자때기 타고 입항할 참이냐.”
이사크는 혀를 찼다. 뭐든 하고 싶어 하는 의욕은 좋은데, 가끔 토야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는 게 문제였다.
“다들 잘 들어. 오늘은 포를 쓰지 않는다. 충각으로 적의 선미를 박고, 그걸 타고 건너가서 백병전으로 배를 탈취한다. 어차피 우리도 배를 움직일 수 있으니 선원이고 뭐고 살려둘 필요 없다. 싹 다 쓸어버려.”
이사크의 말에 잠에서 깨어난 무리들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작가의말
오늘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5화도 내일 아침에 연재될 듯합니다.
항상 봐주시고 피드백 남겨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