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6장 사나운 새벽 1화 정치적인 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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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사나운 새벽
세레즈력 387년 10월
세레즈 남부탈환군의 총사령관 안타미젤 폰다 벤 세레스티아,
예하 지휘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드프레드 그론레이를 세레즈군 총참모장으로 삼고
전상으로 인하여 후방으로 이송된 하인리히 라 프델로드를 대신하여
마세르 라 뮤켄을 본영 부대 사령관에 임명하다.
-제국력 연대기 세느비엔느 열전 발췌
1. 정치가로서의 안목
미드프레드는 꼿꼿하게 서서 하나둘 자리를 빠져나가는 본영 참모들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지막 한 명이 입구의 천을 걷어내고 나가던 순간까지 숨도 쉬지 않고 그들을 응시하던 그는 그 후에야 짧은 한숨을 토해내며 그 곁에 있던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매번 전쟁이로군요. "
손으로 이마 언저리를 감싸 쥐고 있던 미드프레드는 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하여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방금 나간 참모들과 엇갈려 들어온 모양인지 군막 안으로 한걸음 들어선 뮤켄이 시선을 입구 쪽으로 던지며 물어왔다.
“이번에는 또 뭐가 문제랍니까? ”
“군 대치 문제로 언쟁이 있었습니다만, 심려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늘 있는 일인데요.”
“부대 사령관들의 반감이야 둘째 치고, 참모들까지 불만투성이니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군요.”
뮤켄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미드프레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들고 온 몇 가지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문을 열었다.
“적정을 살피기 위해 내려보냈던 정찰이 돌아왔습니다.”
미드프레드는 뮤켄이 내려놓은 서류를 집어 들면서 민망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정찰의 운용은 본디 참모진의 소관인데, 제가 능력이 부족해 장군께 부담을 얹혀 드렸군요. 면목이 없습니다. ”
“누가 하든 해야 할 일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야말로 갑작스럽게 참모부에서 나오게 되어 각하께 부담을 끼쳐 드렸으니 이렇게라도 도와야지요.”
안타미젤이 미드프레드를 세레즈 본영의 총참모장으로 임명한 것은 근 보름 전쯤의 일이었다. 그나마 총사령관의 자리를 위임하겠다는 안타미젤의 파격적인 선언에 대한 대안으로 결정된 사안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부대 사령관들이 그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나흘 가까이 지속된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겨우겨우 미드프레드의 총참모장 임관 절차를 마무리 지은 안타미젤은, 차도의 기미 없이 악화되어 후방으로 이송된 프델로드 장군을 대신할 본영 사령관 자리에 뮤켄을 앉혀버렸다. 반발의 여지도 없이 몰아치듯 내린 단안이기도 했거니와, 미드프레드의 문제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터라 말 많은 부대 사령관들도 뮤켄의 임명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만한 반발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미드프레드 문제에 대한 부대 사령관들의 불만의 목소리도 차츰 잦아들어 본영의 상황이 안정되어 가는 작금의 현황이었다.
“이대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스러운 기운이 절로 묻어나는 목소리에 문득 미드프레드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었다. 어찌 보면 뮤켄의 염려는 지극히 당연했다. 처음부터 도중에 뛰어든 격인 미드프레드와 본영 참모들간의 관계는 그다지 돈독하다고 할 수 없었다. 몇 번인가 군공을 세웠다고는 하나 참모진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와중에 작위조차 없는 미드프레드가 이번에는 안타미젤의 신임을 무기로 총참모장의 자리에 올랐으니 그들로서는 속이 쓰릴 만한 상황이었다. 미드프레드로서도 지시에 따라 수족처럼 움직여주어야 할 수하들이 사사건건 반발하고 나오니 양측 간에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본진 도착 이래 안타미젤의 직속 보좌로 얼마간 미드프레드와 함께 참모진에 몸담고 있어 이러한 내막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뮤켄으로서는 부대 사령관들의 반발과 더불어 참모장인 미드프레드와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할 참모진의 이반이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적군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 참모부가 다소 소란스러운 것은 사실이나 그도 조만간 잦아들겠지요. 걱정 마십시오. ···그보다 적군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적의 본영에는 아직 이렇다 할 만큼의 가시적인 움직임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크스 영지에 있던 몇몇 부대가 이동해 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듯합니다. 얼마 전 해군의 합류 소식도 그렇고 지금껏 내버려 두고 있던 하크스의 군대까지 불러 모으는 것이 지난번의 실패를 만회하는 것 이상으로 크게 부딪쳐올 심산이 아닌가 합니다만. ”
“하긴 그들이 전면전을 선택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지요. 승승장구하다가 펜데스칼과 그레안 접경지대에서 뜻하지 않게 발목이 잡혀 있는 형국이니까요. 일전의 보급대를 공격 받는 일도 타격이 클 테고요.”
미드프레드는 뮤켄이 들고 온 몇 가지 서류를 가지고 책상 쪽으로 옮겨가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에 대한 대비는 해야겠지요. ”
뮤켄은, 책상에 단정히 앉아 여러 가지 서류와 참모진과의 회의 내용을 종합해 안타미젤에게 올릴 최종 보고서를 작성하는 미드프레드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한마디했다.
“후방의 문제는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후방이라면, 재상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예. 그쪽 병력이 육만 가량 된다고 하던데. 합류시키지 않고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실 생각이십니까? ”
“글쎄요. 현재로서는 굳이 그레안의 군대를 움직일 필요는 못 느낍니다만. 이리로 끌어내리려 한다 해서 순순히 내려올 분도 아니고. 모르긴 해도 안타미젤 전하께서 친히 재상께 서한을 보내어 합류를 청하신다면 모를까, 그 전에는 그분 스스로 이리 내려올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아마도 그대로 후방에 머물다가, 아군이 이기든 지든 세력 판도가 확실시되면 그때서야 움직이시겠죠. ”
내팽개치는 듯한 미드프레드의 말투에 일순간이나마 뮤켄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실제로 재상이 이끌고 있는 육만이라는 병사들은 아군의 본진에 합류한다 해서 전력에 크게 보탬이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재상은 전쟁이라고는 경험해 본 바 없는 문관 출신이고, 그렇다 해서 같은 이유로 그가 군 통솔권을 실전을 담당한 야전 사령관들에게 이양하리라는 예상은 아무리 낙관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합류한다 해도 우리가 그 군대를 자유롭게 쓸 수 없다면, 그건 이미 끝난 이야기가 아닐까요. 하지만 장군의 말씀대로 하크스에 주둔하고 있던 공략 부대가 적의 본영으로 이동해 오고 있다는 정보가 사실이라면, 재상군의 합류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검토해봐야겠지요.”
펜을 움직이는 손길을 멈추지 않은 채 말을 끝내는 미드프레드의 목소리에는 후방의 재상군 따위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라는 느낌이 짙게 배어들어 있었다.
“물론 전쟁 수행 시에도 그렇겠지만, 전후에도 재상님은 매우 중요한 변수가 될 겁니다.”
‘그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무슨 당연한 소릴······.’
하고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려던 미드프레드는 문득 손놀림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새삼스럽게 뮤켄이 재상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어림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지금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의 자신의 거취 문제인 것이다.
“각하께서 진정으로 전쟁의 공훈에 대한 대가를 얻길 원하신다면, 무엇보다도 전투 이후에 재상님을 한편으로 잡아 두는데 주력하셔야 할 겁니다. 출전군의 사령관들과 참모들의 반감을 일소하지 못하는 한, 전하께서 내려주신 총참모장이라는 지위도, 그리고 전하의 발언도 각하께 힘을 실어주지 못할 테니까요.”
“그래서 발언권이 큰 귀족의 뒷배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까. ”
미드프레드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재상님을 제외하면 세레즈의 고위 귀족 중 각하의 편이 되어줄 가능성이 있는 자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미드프레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의 조용한 미소가 아니라, 사령관 임명 이후 처음 보는 시원스러운 웃음이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빈털터리인데요. 소문이 자자한 타산가인 재상 각하를 포섭하려면 그럴 법한 교환조건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왜 그분을 추천해드렸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그 교환상품이라는 것이······.”
뮤켄은 확신이라도 하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재상께서는 그걸 모를 분이 아니지요. 그러니 본인의 가치를 믿고 진심으로 설득해보십시오. 마음속 전부를 보여드릴 심산으로 말입니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건 아직 장군님의 수양이 부족하다는 증거겠지요. ”
“이거 아픈데요.”
농담과도 같은 한 마디였지만, 뮤켄을 응시하는 미드프레드의 표정은 더할 수 없이 진지해져 있었다.
“언젠가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여왕께서는 태자 전하께 쉽게 왕위를 내어주려 하시지 않을 공산이 큽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태자 전하께서 무사히 돌아오신다는 대전제 하에서의 일입니다만. ”
맞는 말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번 전쟁의 대의명분이 아체프렌을 시해한 코네세타에 대한 복수전에 있다고 알고 있지만, 기실 그것은 여왕의 내심이 아니었다. 이 전쟁은 왕위 계승권을 안타미젤에게 넘겨주기 위한 하나의 절차에 불과할 뿐이다. 전쟁 경험도 없는 이제 열 다섯 살의 소년을 총사령관의 위에 앉힌 것이 그 극단적인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상황이니만큼, 이미 아체프렌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여왕이 그가 돌아온다 하여 순순히 왕위를 내어줄 리가 없었다. 왕위는 고사하고 돌아온 태자를 가짜로 몰아붙일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우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나, 만일 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각하께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는 올라 있어야 태자 전하를 보필하기에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상황에서도 재상 각하를 포섭해두는 것은 전력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미 재상께서는 안타미젤 전하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만.”
시종일관 진지하던 뮤켄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스와닐다 공녀가 계시질 않습니까? 물론 각하께서 말씀하셨듯이 현재 재상께서는 지금 두 분 전하의 기량을 자로 재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공녀께서 계시는 한 결국은 태자 전하 쪽으로 올 겁니다. ”
스와닐다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가 아닌가. 따지고 보면 그 타산가인 재상을 계산 없이 잡아둘 수 있는 것은 역시 딸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곧이어 뮤켄에 대한 감탄으로 이어졌다. 그를 향한 미드프레드의 눈빛에 감동의 빛이 어리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뮤켄은 낮지만 확고한 음성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멀리 내다보고 행동하십시오. 후회하시지 않을 선택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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