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장 금빛 여명 7화 매듭짓기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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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 금빛 여명
7. 매듭짓기 下
귀한 자리에 놓여 떠받들려 자라 세상 물정 모르는 다른 왕족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발언이었다. 마치 타인의 일인양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면서도, 그로 인하여 전혀 주눅이 들지도 않는다. 불리한 정황 따위 얼마든지 부수고 앞으로 나아가가겠다는 듯 자신만만한 아체프렌의 말이 아직까지도 방금 일처럼 하일리겐의 귓가에 쟁쟁했다.
어제 미드프레드에게 슈레디안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그를 따라 옥사로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자신이 학대했던 코네세타인 슈레디안이 신분을 감춘 세레즈의 태자 아체프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하일리겐은 한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이 제거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감옥이 아닌 관사의 방안에 유폐되었지만 긍정적인 기대는 한 톨도 하지 않았다. 탈출을 꿈꾸지 않은 건 잡힐까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라 사는 게 재미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젯밤 하일리겐이 끌려간 곳은 처형장이 아닌 태자 앞이었다. 자리를 물리라 명한 아체프렌은 하일리겐에게 가타부타 없이 바로 카이아에서 채취되는 방연석을 언급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사람을 대하는 태도라 하일리겐 쪽이 도리어 기가 찰 정도였다. 비록 몰랐다 하나 불경죄를 지은 죄인을 어찌 죽이시지 않느냐는 저의 반문에 아체프렌은 감정이 실리지 않는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여 후회한다던 네가 슈레디안이란 코네세타인을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의 안위를 포기하여 내게 기울었음을 보인 바 있고, 너는 죽음이 무섭지 않다 하였으니 지금 네게 가장 큰 벌은 죽음이 아닐 것이며, 태자로서 나는 이 사태를 완만하게 정리하고 시간을 벌기 위해 카이아 파견대의 백부장이란 인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왕이 될 자로서 하일리겐, 너의 식견과 판단력이 탐이 난다. 내 나의 새로운 세레즈를 위해 너를 개처럼 부릴 것이니, 내게 봉사하는 것으로 너는 그간 네가 지은 죄를 갚도록 하라.’ 그건 선택도 부탁도 아닌 명령이었다, 거절조차 상정하지 않은. 그러나 아체프렌이 말했던 것처럼 저는 이미 그가 자국민이 아닌 적국의 귀족이라고 착각했을 때에조차 슈레디안에게 제 목숨을 건 바 있었다. 슈레디안이건, 아체프렌이건, 그는 저를 감탄시킨 유일한 인물이었다. 신하로 태어나 섬길 주군을 선택할 수 있다면, 자신에게 어차피 이 이상의 선택은 없었다. 하일리겐은 아마 주군에게 채찍질을 하고도 아무 처벌 없이 무사히 살아남은 신하는 자신이 유일할 것이라 생각하면서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신이 일할 세레즈가 부디 지금보다 훨씬 재미난 곳이 되기를 바라나이다, 국왕 폐하.’ 그렇게 하일리겐은 아체프렌에게 공식적으로 귀의했다.
“대신 추가로 그대들에게 방연석 채굴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는 바이다. 이는 강제할 의사가 없다. 다만 위 조건에 적극 협조하여 수레 1대 이상의 방연석을 꾸준히 채굴해내는 자에게는 특혜가 주어질 것이다. 우리는 방연석 채취에 적극 협조한 노역자들을 3년 후 채석장 노역에서 해방해줄 계획이며, 그들의 바람에 따라 3년 후 코네세타로 귀환하기 위한 자금을 보조하거나 혹은 세레즈에 정착하기 위한 자금을 지원해줄 요량이다.”
코네세타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레즈 측이 제안하는 협상안은 기존에 코네세타인들이 원하던 것 이상으로 좋은 조건이라,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소요를 일으켰는데도 아무런 책임추궁도 하지 않았고, 원하는 것 이상으로 상납량도 대폭 줄여줬을 뿐만 아니라 저들은 그들에게 귀국이라는 꿈같은 조건까지 제시했다. 협력이라는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한다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30년 뒤도 아니고, 그것도 3년 후에. 사람들은 감격으로 흡사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또한 16세 미만자와 60세 이상의 고령자는 노역 대신 배식병이나 위생병으로 배치전환될 것이다.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군의 한 명이 이곳에 상주할 것이고, 식사는 세레즈군의 식단과 동일한 수준으로 상향 조정될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 철광석 채굴은 오후 2시까지만 진행하고 그 이후 해가 질 때까지 모든 인부들은 본인들을 위한 숙소 건설에 투입될 예정이다. 숙소가 완성될 때까지는 기존 막사에서 숙식할 것이니 모두 더 안전한 작업환경조성을 위해 적극 협조하기 바란다. 여기까지가 그대들의 대표인 슈레디안 크론케이터와 협의된 바이다. 그 외 작업 환경 개선을 위한 의견 개진이라면 열린 마음으로 수용할 의향이 있으니 자유롭게 말하도록.”
메이샤드가 이렇게 말을 맺자, 그와 함께 폭동의 일선에 나섰던 세 번째 막사의 책임자 알도가 손을 들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슈레디안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어째서 함께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는 어제 처형되었다.”
메이샤드의 냉정한 대답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곳곳에서 격앙된 음성이 터져나왔다.
“예?! 하, 하지만 이번 사태에 대해 저희들에게 아무 책임을 묻지 않기로···.”
“유목민의 침입으로 인한 소란인 걸로 상부에 보고하시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하지만 우리가 너희들을 어떻게 믿나?”
메이샤드의 냉랭한 한마디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관대한 처우에 그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이 세레즈이며, 저들에게 자신들은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는 적대국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너희들의 처우 개선에 대한 기본적인 착상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슈레디안 크론케이터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주류군을 장악하고 폭동을 일으켜 지구 사령관을 상대로 협상을 제안할 정도로 지도력이 있는 자를 그냥 돌려보내어 너희들과 함께 있도록 한다면, 금일과 같은 사태가 또 벌어지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을 터. 우리는 위험인물을 제거하여 채석장을 안정적으로 운영해야 할 책무가 있다. 그 스스로 너희들에게 아무 문책도 하지 않는다는 것과 나머지 협상 조건의 이행을 전제 조건으로, 모든 책임을 지겠다 나서 그를 처형하는 것으로 사태들 정리했다만, 추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시, 우리 측으로서도 관용 정책을 유지할 수 없음을 명심하라.”
할 말을 다한 메이샤드는 망연히 굳어져 있던 코네세타인들이 하나둘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단상에서 내려왔다. 슈레디안 크론케이터는 이 사건과 함께 사라져야 한다며, 그들의 마음 속에 슈레디안을 지우라고 한 태자의 명은 이로써 충실히 이행된 듯 보였다.
- 작가의말
25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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