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장 흐르는 별 1화 사절 데니아크
30장 흐르는 별
1. 사절 데니아크
“이걸 내게 전하라 하였단 말인가?”
“예, 이 서한을 대공 전하께 직접 전해 올리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도성에서 안타미젤의 대관식을 알리는 파발을 맞았을 때부터, 노틸라드에서 이 소식을 알게 되면 콜드베폰으로 무언가 연락을 해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터라 뮤켄은 그다지 놀라지 않은 기색으로 미드프레드의 서한을 전해 들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네. 서한은 내 분명히 받았다고, 그리 말씀 올리게나.”
일단 노틸라드에서 도착한 병사를 되돌려 보낸 후, 뮤켄은 서한 전달용 통을 개방하고 그 안에 동그랗게 말린 서한을 꺼내들었다. 기다란 종이 위에 적혀있는 글귀는 겨우 다섯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길이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었다. 안타미젤의 대관식 소식 이후 노틸라드는 곧장 계엄을 선포했다는 것과 자신은 태자 전하의 신변이 염려되어 하크스로 내려간다는 것, 영지의 두 장군에게 전권을 대리하였지만 노틸라드와 북부 지구에 급박한 일이 발생한다면 대공께서 모쪼록 알아서 잘 주선해달라는 것, 마지막으로 어렵사리 맺어놓은 북부 영지들과의 연계에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여 달라는 부탁이 바로 그것이었다.
급히 휘갈겨 쓴 듯한 필체로 미루어 보아, 미드프레드는 자신에게 이 글을 쓴 것과 거의 동시에 움직인 듯싶었다. 언제나 느끼고 있는 바지만 감탄할 만큼 기민한 행동력이라고 생각하며 뮤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밖에 있는 병사에게 수비대장 케니하크를 부르도록 지시했다. 여왕이 공식적으로 전 영지에 파발을 띄워 안타미젤의 대관식을 선포함으로 인해 자신들로서는 선수를 빼앗긴 셈이 되었지만, 이대로 어물쩍 물러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찾으셨습니까.”
뮤켄은 케니하크에게 노틸라드에서 온 서한의 내용에 대해 짧게 언급한 뒤, 콜드베폰 역시 움직일 때가 왔음을 단호한 음성으로 알렸다. 아체프렌이 돌아온 그 시점부터 정해져 있던 전쟁이다. 이미 피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승리를 위해 고삐를 늦춰서 안 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임무였다.
“지금부터 콜드베폰도 전시 특별 계엄 상태에 들어간다. 상비군을 총동원하여 출입 선박을 단속하고 경계를 엄중히 하라.”
“예, 전하. 분부대로 지금 곧 영내에 경계령을 내리겠습니다.”
자신의 뜻을 읽어낸 듯 두 말 없이 대답하고 자리를 나서는 케니하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뮤켄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아체프렌에게서 받은 두 번째 요청, 즉 태자의 대리인 자격으로 커런스에 사절을 보내는 일을 실행에 옮길 때가 온 듯 했다. 마음을 굳힌 뮤켄은 그 책임자로 결정해 두었던 데니아크 경을 불러들이라 명령했다.
아체프렌으로부터 사신 파견 요청을 받고나서 그 막중한 임무를 맡아줄 인물에 대해 줄곧 고심하고 있던 뮤켄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온 이는 다름 아닌 그의 형 피엘 레 콜드베폰 공이었었다. 세레즈 내 중상류계층의 무수한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고 있던 형의 소개로 뮤켄은 믿을 만하다는 사람을 대여섯 명 정도 만나본 끝에, 이스글론 영지 출신의 마유엘 레 데니아크 경의 자신감 있는 태도와 그 흔들림 없는 어조에 신뢰를 느껴, 그 일에 대해 사전 의논을 해두었던 것이다.
이렇게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노라니, 사신 파견 이야기를 처음 그에게 꺼내던 보름 전의 일이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당신의 대리인 자격으로 커런스에 사절을 파견하라 하셨습니다.”
뮤켄의 진중한 목소리 못지않게 진지한 얼굴로 데니아크 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분의 입장으로서는 지극히 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뮤켄은 입안이 바싹 마르는 듯한 느낌에 찻잔을 들어 목구멍을 축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저는 태자 전하의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그 분께서 제게 하신 말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아체프렌이 사신 파견 문제를 자신에게 처음 꺼냈을 때도 그랬지만, 뮤켄은 태자의 심중을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어차피 그 뜻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공연히 본인의 해석을 담아 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아체프렌이 전하고자 했던 심오한 뜻을 곡해할 소지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태자의 그 말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정도(正道)를 걷기로 다짐한 뮤켄의 마음을 데니아크 역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듯, 그도 자세를 단정히 바로 잡았다.
“예, 말씀 받잡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왕위 계승자인 아체프렌 듀피겔드 벤 세레스티아 태자 전하 당신의 정당성을 커런스에 크게 역설하라 지시하셨습니다.”
“지당하신 분부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얼굴에서는 심각한 그늘을 지우지 않은 채 낮게 되뇌며 데니아크는 눈앞의 찻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 다음으로, 그분께서는 이번 내란에 커런스가 조력할 의향이 있다면 그 지원을 거절하지는 않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푸훗-”
데니아크는 입가로 가져갔던 찻잔을 거의 떨어뜨리다시피 내려놓았다. 그는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입술 언저리를 닦아내며 의례적인 사과의 말을 늘어놓았지만, 이미 데니아크 경의 얼굴에서는 진중한 기색이라곤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묘하게 빙싯거리는 웃음기가 감도는 그의 얼굴을 의아한 듯 쳐다본 뮤켄은 낮게 헛기침을 몇 번 해서 주의를 환기시킨 다음, 아체프렌의 마지막 발언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조력이 어렵다고 판단될 시 상호간에 불간섭의 원칙을 존중해 달라 하셨습니다. ”
“푸하하하핫···”
순간적으로 그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 듯싶더니 갑작스러운 폭소가 데니아크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어찌 본다면 통쾌하다고 할 만한, 전혀 사양이 없는 시원스러운 웃음소리에 뮤켄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웃으라고 한 이야기도 아니고, 남은 잔뜩 심각하게 말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웃어버리다니, 이건 무례도 보통 수준의 무례가 아니지 않는가? 이게 웃을 일인가 싶어 화가 치밀어 오르던 참에, 데니아크가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잔뜩 붉어진 얼굴로 사과를 해왔다.
“흠흠. 아,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일단 사죄는 표했지만, 좀처럼 웃음이 가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웃느라고 안면에 피가 몰려 있던 그의 얼굴이 그나마 평소와 엇비슷한 색을 찾았다 싶었을 때에야 비로소, 데니아크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만. 그런 것에 비해서는 굉장히 여유로우시고··· 뭐랄까, 음. 상당히 뻔뻔하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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