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미치광이의 노래 5 서색이 깃든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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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색이 깃든 하늘
르메아는 어둠 속에서 휘청거리며 물통을 옮겼다. 성장환경이 좋지 못해 또래보다 왜소하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고작 물통 무게 하나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백부장을 따라 나가 한참 동안 시달린 탓인지 좀처럼 몸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피로에 절고 지친 몸은 쉬기를 호소하고 있었으나 르메아는 육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발을 힘겹게 놀렸다. 체력이 바닥이 난 탓에 몇 번이나 물통을 땅에 내려놓고 이마 위로 배어드는 식은땀을 훔쳐야 했지만 르메아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달빛 아래 지독하게 멀게만 느껴지는 거리를 가늠한 뒤에 그는 터진 입술을 꼭 깨문 채 다시 물통을 들고 무거운 걸음을 떼어놓았다. 수십 차례 그 과정을 반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르메아는 어둠에 휩싸인 공터를 가로질러 결국 청년이 매달려 있는 높다란 단 가까이 이를 수 있었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드러난 청년의 상처는 언뜻 보기만 해도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출혈이 멈추지 않은 까닭에 흘러내린 피로 바지마저 온통 검붉게 젖어있었다. 이대로 피가 멎지 않는다면 청년은 필시 사흘은커녕 내일까지도 버티지 못할 터였다.
‘살려내야 해.’
르메아는 눈시울을 소매로 쓱 훔치고는 단을 올라 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물을 떠서 땀이 배어들었을 손을 씻은 후 단 위에 올라앉아 허리춤에 두르고 있던 보자기를 풀었다. 그 안에서 나온 건 깨끗한 무명천이었다.
이왕이면 상처 부위를 감쌀 수 있는 붕대가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본보기로 삼으려고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게 청년을 매질한 세레즈 측이 그에게 제대로 된 치료를 해줄 리가 없었다. 그들에게 코네세타 출신의 광산 노역자의 목숨 따위 파리 목숨보다 하찮았다. 단 한 명을 희생시켜 다수의 코네세타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면 그 한 명의 생명을 아낄 이유가 그들에게는 전혀 없었다.
어느 모로 보아도 세레즈 측으로부터 붕대나 상처에 바를 약을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르메아는 부질없는 욕심을 버렸다. 그는 그래서 처음부터 깨끗한 천을 부탁했다. 그나마도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할까 내심으로 조바심을 쳤으나, 다행히도 백부장은 르메아가 제법 마음에 든 눈치였다.
르메아는 천을 이로 물고 결대로 찢어 물에 적신 후 청년 근처로 다가갔다. 맞는 와중에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고 버티더니, 입술이 다 터져있었다. 르메아는 조심스럽게 젖은 천을 청년의 입가에 가져가 댔다. 짓씹어서 찢긴 상처에 물이 닿았으니 따갑고 쓰라릴 법도 한데도, 청년은 한 번 놓은 의식을 쉬 되찾지 못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런 모양이었다.
약간 주저하던 르메아는 손으로 그의 입을 벌려 젖은 천을 청년의 잇새로 밀어 넣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수분을 섭취했으면 했다. 그리고 그건 혹시 그가 지혈작업을 하는 와중에 의식을 찾을 경우, 느낄 고통으로 이가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다시 물통 근처로 돌아온 르메아는 나머지 천을 찢어내어 상처 부위를 압박하기 쉽게 손에 감싼 뒤 가장 깊은 상흔이 남은 청년의 어깨 부위를 꾹 눌렀다.
정신을 잃은 그를 폭이 넓은 구멍이 뚫린 나무 차꼬에 선 채로 매달면 어쩌나 우려했던 것과 달리, 청년을 끌고 온 세레즈 병사들은 그에게 최소한의 온정을 베풀었다. 목과 사지가 기둥과 바닥에 있는 쇠사슬에 각각 묶인 건 르메아의 예상대로였으나,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체중을 분산시킬 수 있도록 무릎이 꿇려진 채였고, 쇠사슬의 길이도 짧아 체중이 과하게 한쪽으로 쏠리지도 않았다. 채찍질 당한 등이 단 아래에서도 보이도록 뒤돌아 앉은 자세라 청년보다 키가 작은 르메아가 그를 치료하기에도 수월했다.
르메아는 젖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청년의 어깨 부위를 압박했다. 부상이 깊어 출혈이 쉬 멎지 않았다. 상처 부위를 누르며 지혈작업을 하는 르메아의 이마에 진땀이 흐를 정도였다. 손에 감싼 천이 핏물을 잔뜩 머금었다. 몇 번이나 천을 갈아가며 한참 동안 매달린 끝에 출혈이 좀 줄어들자 르메아는 천을 길게 찢어 청년의 왼쪽 어깨에서 반대쪽 가슴에서 등허리에 걸쳐 길게 싸매주었다.
르메아가 천을 찢어 청년의 상처를 붕대처럼 감싸준 걸 보면 세레즈 병사들이 분노하여 오히려 청년에게 분풀이를 하려 할 수도 있기에 처소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풀어야겠지만, 출혈이 잡힐 때까지만이라도 묶어주고 싶었다. 달빛 아래서 부상 부위를 감싼 무명천 위로 혈흔이 스미어나오는 걸 르메아는 속상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아까보단 피가 덜 나는 것 같아. 이대로 새벽 전에 멎어야 할 텐데.’
르메아 같이 빈민들이 몰려 사는 마을에는 의원이 없었다. 설령 의원이 있었다손 쳐도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어려운 르메아가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여 르메아는 크눅 때문에 생긴 상처를 스스로 돌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지혈하는 법도, 화상을 다루는 법도 몰라 상처가 그대로 몸에 남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요령이 붙었다.
크눅과 함께 한 시간은 르메아에겐 고문과 같았지만, 지금만큼은 고맙기도 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청년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듭 채찍질을 당한 어깨 부위는 좀처럼 지혈이 되지 않아 애를 먹었지만, 다른 상처는 금방 피가 멎었다. 이제 모든 건 청년의 체력에 달려있었다.
“제발 마셔요. 조금이라도. 그래야 살 수 있단 말이에요···.”
여기저기 찢기고 쓸린 상처 부위를 닦아준 후 르메아는 청년의 입가에 물려주었던 천을 꺼내어 깨끗한 물에 적셔 청년의 입가로 흘려 주었다. 의식이 없어 턱밑으로 주르륵 흐르는 물이 안타까웠다.
르메아는 초조한 눈길로 희뿌옇게 변해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해가 뜨기 전에 막사로 돌아가야 했다. 아침 점호 전에 가 있지 않으면 세레즈 측이 막사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을 핍박할 터였다.
그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돌아가기 전에 르메아는 청년에게 할 수 있는 한 조금이라도 물을 마시게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돌아가고 나면, 청년은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할 터였다. 그렇게 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제발······.”
그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았음일까. 청년의 목울대가 약간 움직이는가 싶었다. 착각이었나 싶었을 때, 청년이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며 힘없이 눈을 떴다. 밤을 지새우며 상처를 돌보면서도 이대로 실혈사하면 어쩌나 걱정이 컸던 만큼 자신이 돌아가기 전에 의식을 되찾자 안도감이 가슴 가득 빼곡하게 들어차며 눅진하게 땀이 밸 만큼 지친 육신의 피로를 덜어냈다.
“다행이다···. 아, 물!”
르메아는 깨끗한 천을 흥건히 적셔 청년의 입가에 대주었다.
“힘들겠지만 조금이라도 삼켜봐요. 피를 아주 많이 흘렸어요.”
의식이 없을 때와 달리 청년은 르메아가 주는 대로 조금씩, 조금씩 물을 삼켰다. 고통에 흐릿해졌던 눈빛에도 기운이 차츰차츰 돌아왔다.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겪고 나서도 청년의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르메아 주변의 누구도 청년과 같은 눈빛을 지니지 못했다. 마주친 청년의 눈에는 암담한 주위 환경에 대한 체념도, 저를 사지로 몰고 갈 정도로 극심했던 고통에 대한 공포도 없었다. 남루한 현실에 해어지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 눈빛이, 르메아는 강하고 아름답다고 느꼈다. 어쩐지 그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청년이 이 상황을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청년은 이대로 고통에 져서 이런 곳에서 이름 없이 죽을 사람이 아닐 것 같았다.
충분할 정도는 아니겠으나 어느 정도 목을 축인 청년이 르메아를 쳐다보았다.
“···가.”
청년의 입술이 작게 달싹이는가 싶더니 갈라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돌아가라. 그 한 마디에 실린 뜻을 르메아도 헤아릴 수 있었다. 자신이 그러하듯 청년 또한 르메아를 근심하는 것이리라. 저의 곁에 있다가 해코지를 당할까 우려하는 그의 마음이 전해져서 르메아는 젖은 눈으로 웃었다. 지금 누가 누굴 근심하는 것인지.
“되도록 상처 부위를 감싸주고 가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오히려 군사들이 괴롭힐 수 있으니 풀게요. 부상이 깊어서 아플 수도 있어요.”
르메아는 청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어깨를 감쌌던 천을 풀었다. 피와 찢긴 살점이 단단히 감쌌던 천에 들러붙어 찢겨 나왔지만, 청년은 반듯한 미간을 찌푸렸을 뿐 조용히 참았다. 인내심이 대단했다. 르메아는 피로 물든 천을 물통에 넣고 주섬주섬 단 위를 치운 뒤 일어났다.
“있다가 저녁에 다시 올게요.”
“오지 마.”
“있다 봐요.”
곧바로 되쏘아져 오는 만류를 무시한 채 르메아는 한결 홀가분해진 심경으로 돌아섰다. 서색이 깃든 하늘이 돌아선 르메아의 등 뒤로 차츰 밝아오고 있었다.
- 작가의말
추천 감사합니다. 정말 기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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