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장 소리 없이 흐르는 물 4화 정당한 길
4. 정당한 길
"물론 그런 면도 무시할 수는 없지. 확실히 지금 상황에서 태자 전하께서 노틸라드에 계시는 건 그리 좋지 않은 일이야. "
뮤켄은 어쩐지 한숨이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가 우려하고 있는 바는 노틸라드라는 지역의 특수성과 주변 정황보다도, 그곳의 군사령관인 미드프레드 개인에 대한 것이었다.
"노틸라드도 노틸라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지금 전하의 곁을 미드프레드 장군이 지키고 있다는 점일세. "
"예? 하지만, "
미드프레드가 어떤 사람인지 뮤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부하들에 대한 포용력과 흔들림 없는 자신감, 무서운 절제력과 초인적인 인내심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독특한 매력과 스스로 원하는 바를 충분히 움켜쥘 수 있을 만큼 탁월한 군사적 재능까지. 적어도 외관상으로 그와 견줄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장군감은 삼국을 통틀어도 손으로 꼽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미드프레드가 뮤켄의 눈에는 언제나 위태위태해 보였다. 뮤켄의 판단으로는, 미드프레드라는 인물은 근본적으로 어디로 튈 지 그 방향조차 짐작할 수 없는 공과 같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 자리에 있는 페르겐드와 케니하크는 그런 자신의 평가에 아연해 할 지 모른다. 사실 그의 그런 충동적 기질마저도 전시의 긴박 상황에서는 긍정적으로 작용해 왔고, 또한 그에게는 그 단점을 덮을 수 있을 만큼 장점도 존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미드프레드 그론레이, 장군으로서 그 최대의 강점은 바로 그 타인의 의견을 진정으로 존중할 줄 아는 마음씨와 스스로 잘못했다고 생각되면 한 발짝 물러날 수도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고 뮤켄은 항상 생각해왔다. 이러한 강점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드프레드의 충동적인 기질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 굉장한 것이었다.
문제는 미드프레드에게 있어 영순위는 언제나 아체프렌 왕자라는 사실이다. 아체프렌이 그에게 있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라면 미드프레드는 그를 지키기 위해 무슨 행동이라도 할 것이다. 즉 태자를 위해 미드프레드는 자제력을 잃고 얼마든지 맹목적으로 변할 수 있었다. 예전의 아체프렌이었다면 미드프레드의 단점마저도 잘 감싸주었겠지만, 지금 그는 몸도 전부 다 회복된 게 아니고, 설상가상으로 아직 기억조차 완전치 않다고 하지 않는가. 현 상태의 미드프레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은 존재였다. 만약 그가 폭발했을 때, 그를 제어할 자가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노틸라드에 위험 요소가 내재하고 있음을 알면서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뮤켄은 왕자에게 하크스 행을, 달리 말해 가급적이면 미드프레드와 떨어지는 방안에 대해 고려해 보라고 권고하고자 한 것이다.
"태자 전하시라면, 그저 하크스 행을 권유해드리기만 해도 전부 다 이해하실 걸세."
페르겐드는 희미하게 웃었다. 확고한 믿음이 깃든 있는 뮤켄의 발언이 이렇듯 당연하게 수긍이 되는 건, 페르겐드 자신 역시 아체프렌을 만나봤기 때문일 것이다.
"전하께서는 태자 전하를 만나보신 적이 있습니까? "
"아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뵈었었지. 연회장과 왕궁에서······. 자네도 노틸라드에서 태자 전하를 뵌 적이 있겠지. 그래, 전하를 뵙고 난 느낌이 어떻던가? "
페르겐드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에스피아 공주님을 아십니까? "
"물론이네. 코네세타의 왕위 계승자 아닌가. "
코네세타의 유일무이한 공주이자 합법적인 국왕위 후계 이스빌렌 대공, 에스피아 엘리노어 데 코네세타. 페르겐드가 그녀를 만나 본 것은 딱 한 번뿐이었지만, 그 단 한 번의 만남은 3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은 채 선명히 남아 있었다.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조차 그녀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말 그대로의 당당함에 탄복한 이후, 페르겐드는 그녀 이상의 왕족은 존재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였다.
"공주님을 처음 뵈었을 때, 저는 그분께는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
그러나 아체프렌을 만났을 때, 페르겐드는 그런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이적이라 할 만큼 또렷하고 확실한 자신감이 뒷받침된 기품 있는 태도와 곁에 있는 이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아버린 호소력 있는 목소리. 실신해 있을 때 언뜻 느꼈던 것처럼 곁에서 보기 안타까울 정도로 창백한 안색마저도 묘한 매력으로 작용하는 것 아닌가. 군사령관 미드프레드에게서 느껴지는 위엄과는 전혀 다른 빛깔의 위엄이 아체프렌의 전신에서 넘쳐흘렀다.
그를 대한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자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본인이라면 과연 저토록 당당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곧이어 '왕이 될 사람은 저런 사람이어야만 하는구나' 라는 찬탄 어린 납득으로 변해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미드프레드가 아체프렌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이유가 그저 인사에 불과한 그와의 짧은 만남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절실하게 이해가 되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태자 전하를 뵈었을 때··· 저는 이 분은 뼛속까지 왕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뼛속까지 왕족이라. 확실히 가볍게 흘려 넘길만한 표현은 아니로군.'
페르겐드의 발언에 뮤켄은 빙긋 미소지었다.
코네세타인인 페르겐드가 한 번의 만남으로 아체프렌을 그리 평가할 정도라면, 태자의 건강 상태가 자신이 걱정할 만한 수위는 넘겼다는 것이리라. 그러면 다음 일들을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뮤켄의 귓가에, 단호한 울림을 하고 있는 케니하크의 목소리가 부딪쳐 왔다.
"지금 전하의 귀환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
"사령관님과 부사령관님, 주재 무관 하겔 장군, 그리고 신분을 모르는 채로도 전하를 구명했던 광산의 장교 한 명, 그리고 여기 계신 두 분이 전부입니다. "
옥사에서 미드프레드와 아체프렌의 만남을 목격했던 하일리겐은 태자 아체프렌의 사람이 되었고, 광산에서 해산된 하사관들은 관사에 끌려온 뒤 외관상 폭동을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다. 광산에 있는 코네세타 인부들은 모두 그가 아체프렌이 아니라 본인이 쓰던 가명대로 슈레디안이라고 알고 있으며, 미드프레드 역시 그들에게 사건의 주모자였던 슈레디안 크론케이터는 이 사태를 확대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처형했다 공표했으니, 그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은 결국 노틸라드 상부의 장군들과 뮤켄과 케니하크뿐인 셈이었다.
비공식적이라고는 하지만 여왕과 아체프렌이 왕좌를 두고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니만큼 아직은 그의 존재가 여러 사람들에게 노출되어선 안 될 것이다. 만에 하나 그의 귀환 소식이 세레즈 전역으로 퍼져나가 여왕이 섣불리 아체프렌을 건드릴 수 없는 상태가 되지 않는 한. 그렇지 않을 경우, 여왕은 공식적인 왕가의 입장 표명-펜데스칼 전쟁의 대의명분이기도 했다-을 빌미로 왕족 모독죄로 그를 옭아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같이 아체프렌이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라도 한다면, 여왕으로서는 아체프렌을 제거할 좋은 명분을 갖게 되는 셈이었다. 왕위 계승자의 안위를 보장하기 위해서 이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아체프렌에 대한 정보가 왕실에 입수되면 세느비엔느는 살수까지 동원할 인물이었으니까.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은 이미 필연적으로 다가올 여왕과 왕자의 대립 구도가 확실시되기까지는 이 소식을 비밀로 지켜가기로 다짐했다.
경솔하게 움직여서 혹시나 아체프렌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그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그들은 눈빛으로 다시금 서로에게 강조하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
페르겐드를 배웅하고 다시 집무실로 돌아오자,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케니하크가 곧장 뮤켄의 의사를 물어왔다. 케니하크의 그 질문이 겉으로 표현된 것 이상으로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뮤켄은 직감적으로 깨달았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태자 전하를 따라야겠지."
그런 뮤켄의 반응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 딱 부러지는 듯한 케니하크의 대답이 주저함 없이 곧장 되돌아왔다.
"불리해질 겁니다."
이 한마디 이상으로 아체프렌의 귀환에 대한 케니하크의 입장을 분명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으리라. 사실 케니하크는 아체프렌의 귀환에 특별한 의미부여를 할 위치에 서 있지 않은 것이다. 그에게 있어 최우선적인 것은 뮤켄의 의사일 뿐. 그 점을 알고 있기에 잠시 뮤켄은 짧지만 분명한 어조로 다시 한번 자신의 뜻을 표명했다.
"하지만 승산이 적다는 이유로, 정당한 길을 외면할 수는 없지. "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케니하크는 정중히 허리를 굽혀 보였다.
"대공 전하의 뜻이 확고하다면, 저 역시 그분을 따를 것입니다. 그것이 제 도리일 테니까요.“
- 작가의말
급한 대로 회차 정리 끝났고, 중간 중간 조금 더 장면 삽입해야 할 부분이 몇 군데 있어서 앞부분이 다 처리될 때까진 매일 하루에 한편씩만 수정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제조선생님 멋진 추천글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황제의 길 연재하면서 처음으로 후원금이란 과분한 선물도 받게 되어 굉장히 가슴이 뭉클했어요.
꾸준히 봐주시는 분들께.
수정이 다 되고 연재가 정상화 될때까지 -물론 조금씩 글이 바뀔 예정이긴 하나 - 지루하시겠지만, 최대한 빨리 매듭지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믿고 조금 더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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