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백룡어복 4-5화 현실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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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현실의 무게
눈에 익어버린 지 오래된 어둠 사이로 피곤함과 굶주림에 지쳐 잠든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온다. 멍하니 그들을 쳐다보던 슈레디안은 자신 역시 그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이 밀려오는 허기와 함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곰팡이가 쓸기 직전의, 딱딱하게 굳은 빵을 먹느니 차라리 굶어버리겠다 생각했는데, 굶주림의 고통이 상상외로 크다는 사실에 그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출항한 이후 지금까지 몇 번이나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했는지. 이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지? 그저, 남부에서 북부로 가는 것뿐인데 왜 이리 오래 걸리냔 말이야. 차라리 도착할 때까지 깨어나지 않은 채 줄곧 잠들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비좁은 공간 탓에 눕기는커녕, 몸을 잔뜩 쪼그린 채 새우잠을 잔 탓인지, 온몸이 여기저기 욱신거리지 않는 곳이 없다. 물론 빈 속이 쓰라린 것도 무시 못할 고통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슈레디안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몸이 묶여 있어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이었다.
발목의 족쇄는 내버려 두더라도, 그저 손목이라도 풀려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신이 완전히 지쳐버린 듯한 느낌. 슈레디안은 길게 숨을 몰아쉬며 물먹은 솜처럼 잔뜩 늘어진 몸을 추슬렀다.
원망스럽게 선실 입구를 노려보고 있던 슈레디안의 귓가에 문득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갑판 위로 병사들이 이리저리 가쁘게 오가는 기척이 느껴지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항구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아무렇게나 잠들어 있던 사람들도 그 소란스런 움직임을 느끼고 하나 둘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입항 시의 충격음이 나고서 얼마 안 가, 정면에 있는 선실 문이 활짝 열렸다. 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의 눈부심에 슈레디안이 고개를 돌렸을 때, 한 병사가 거친 세레즈어로 도착을 알렸다.
"모두 기어 나와!"
병사들의 재촉에 사람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한다. 선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빠져나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움직일만한 공간이 확보되자, 슈레디안 역시도 여기저기 쑤셔오는 몸을 추슬러 힘겹게 일어섰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발목에 묶여 있는 묵직한 쇠사슬의 무게가 며칠간 제대로 먹고 마시지 못한 자신의 몸을 내리누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갑판 위로 올라서자마자 차가운 바닷바람이 얼굴에 와닿는다. 아직 봄의 기운이 이 땅까지 옮겨오지는 않았는지, 맨 얼굴에 부딪쳐 오는 바람은 살갗을 찌르는 듯 날카롭기만 하다. 싸늘하고 추운 공기에 잔뜩 움츠러든 데다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태양이 망막을 어지럽혀 약간의 현기증마저 일어난 슈레디안은 한동안 움직일 생각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빠릿빠릿하게 걷지 못해! "
배려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거친 말투에 치여 슈레디안은 걸음을 다시 옮겨 놓았다. 묵직한 쇠사슬의 무게를 느끼며 한 다섯 걸음 정도를 떼어놓았을까 싶었을 때였다. 늘어서 있던 병사 중 하나가 그를 불러 세웠다. 대꾸할 기력조차 없어진 슈레디안은 조용히 몸을 돌려 상대를 응시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선 그 병사는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꺼내 슈레디안의 손목을 구속하고 있던 굵은 밧줄을 끊어주었다.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것 마냥 자신의 손목 위에 선명하게 잡혀 있는 밧줄 자국에서 시선을 떼어낸 슈레디안은 자유로워진 손을 위아래로 가볍게 털면서 사람들이 몰려서 있는 곳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이제 편한 여행은 끝이다. 여기서부터는 도보로 갈 테니까."
그것이 편한 여행이었다고? 이미 자신을 비롯한 사람들은 지칠 대로 지쳤건만.
도열해 있는 사람들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느긋하게 말하는 험상궂어 보이는 무관에게 슈레디안은 표현할 길 없는 분노를 느꼈다. 피부를 할퀴는 듯 매서운 바람보다도, 발등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쇠사슬보다도 더 암담하고 싸늘한 현실의 무게가 그 자신을 숨 막히게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5. 채석장 방문
"카이아에 말입니까?"
미드프레드는 하겔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코네세타에서 도착한 광산 인부들이 오늘 오전 중으로 노틸라드에 도착할 것이라는 도성의 연락을 받은 것은 어제 해질 무렵의 일이었다. 그 일로 미드프레드는 지금 노틸라드 최대의 광산인 카이아로 가봐야겠다는 말을 휘하 장군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그 말을 듣고만 있던 메이샤드가 표나게 굳은 얼굴을 한 채 한 걸음 다가섰다.
"제가 대신 다녀오겠습니다. 만일 각하께서 허락하신다면. "
그런 일로 사령관인 미드프레드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지 않느냐, 는 말을 메이샤드는 완곡히 돌렸다.
여왕이 내린 유목민 소탕 명령에 따라 가이샤드족으로부터 카이아 산맥을 비롯한 영지의 북쪽 땅을 되찾은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군사력을 동원하여 영지를 차지하고 있던 유목민들을 깨끗하게 몰아냈다손 쳐도, 아직은 치안이 안정될 시점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으로 어이없이 점령지의 상당 부분을 빼앗겨 한창 이를 갈고 있을 가이샤드 족이 언제 또 침공해 들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한 곳을 아직 부상이 완치되지도 않은 몸으로 돌아다니다가 행여나 호전적인 유목민족의 습격이라도 받게 된다면.'
단순한 가정만으로도 메이샤드는 눈앞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미드프레드는 그런 자신의 걱정은 안중에도 없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폐하의 지시도 있었으니 직접 다녀오려 합니다. "
미드프레드가 그저 자신의 한 마디에 선선히 물러날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았지만, 이 순간 그의 대답은 정말 의외였다. 자신은 물론 여기 있는 나머지 두 사람 모두 미드프레드가 부임하자마자 만사를 제쳐두고 아체프렌의 행방을 찾기 위한 준비에만 골몰해 있었던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내막을 다 아는 자신들 앞에서 태연한 척, 새삼스럽게 여왕의 명령을 운운하다니. 속이 들여다 보이는 짓이 아니냐고, 메이샤드는 예전 같았으면 입에 올렸을지도 모를 심술궂은 생각을 했다.
"그러면 제가 각하를 보좌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 시점에 카이아에 홀로 다녀오신다는 건···."
비단 적의 공격을 받지 않더라도, 이대로 나갔다가 행여나 낙마라도 하게 되면 큰일이라는 걱정이 들어 메이샤드는 일단 그리 덧붙였다.
"얼마 전의 군사 행동으로 영내 분위기가 아직까지 어수선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지구 사령관과 부사령관이 한꺼번에 관사를 비울 순 없지요. 내 보좌는 부관이 해줄 겁니다. "
이의나 반론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때는 상대가 그 누구건 간에 말투가 평소보다 한층 더 깍듯해지는 미드프레드라는 점을 알기에, 메이샤드는 낮게 한숨을 깨물었다.
미드프레드가 이렇게 격식을 갖춘 말투로, 그것도 이름 대신 직함을 사용하여 대답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그 결정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부사령관과 하겔 장군에게는 이곳의 수비를 맡기겠습니다. 가급적 빨리 돌아올 테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방비를 철저히 하는 것 잊지 말기 바랍니다. "
경솔한 출격은 금하겠다는 표현을 완곡하게 돌려 말한 후, 미드프레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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