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장 소생하는 빛 5화 결혼 피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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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결혼 피로연
"세레즈 35대 국왕 세느비엔느 Ⅰ세는 왕실의 모든 대소사를 관장할 의무가 있는 성전의 최고 수장으로서 금일 성혼한 크레힐트 레 마르소비야 공녀와 글렌스미트 레 폰다 공자에게 진심 어린 축복을 내리노라! "
세느비엔느의 축복으로 장장 세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이 호화로운 결혼식의 모든 공식적인 행사가 종료되었다.
본래 혼인식은 국왕이나 태자의 국혼이 아니고서는 한 시간 안에 약식으로 끝내는 것이 상례였지만, 이번 경우는 그 당사자가 왕실 어른인 마르소비야 대공비 테오도라의 하나뿐인 손녀와 여왕의 피붙이인 폰다 가문의 차기 후계자의 결합일 뿐만 아니라, 그 만남에서 혼례에 이르기까지 치밀하다 싶을 정도로 완벽히 여왕의 주선 하에 이루어진 예식이었으므로 그 모든 의례적인 절차를 다 밟아가며 성대하게 치러진 것이다.
"정말 성대하군요. 저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랍니다."
"글쎄 말이에요. 도성에서의 피로연에 여왕 폐하의 축복이라니. 이런 성례를 보는 게 대체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요."
"기대했던 것 이상입니다. 그나저나 저기 보셨어요? 왕실 어른들께서도 모두 참석하셨다던데요."
"네. 폐하께서 친히 사절을 보내 전국 각지의 공경에게 참석을 명하셨다 하더군요. 오랜만에 뵙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에요. 아아, 오늘 저녁 연회가 정말이지 기대된답니다."
여왕이 곧바로 결혼 피로연에 들어갈 것을 공표하자, 초대된 귀족들 사이에서는 화려한 식전에 대한 찬사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비록 태자는 이 자리에 없지만 그래도 아체프렌의 약혼녀라는 공적 위치를 고려해 준 듯, 특별히 상석에 마련된 초대석에 앉아 집전되는 모든 절차를 가만히 지켜보던 스와닐다 레 그윈 공녀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들려온 감탄에 동조를 표했다. 확실히 이만하면 거의 국혼 수준이다.
저들의 말 그대로 세레즈 3대 영지의 주인들-빌레니스의 프리초프, 폰다의 안타미젤, 콜드베폰의 뮤켄-은 물론, 여간해서는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프라이드 높은 왕족들까지 모두 이 결혼식의 주인공들을 축복하기 위해 참석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크레힐트와 글렌스미트는 식전 마지막에 국왕의 축복까지 받았다.
세레즈의 국왕은 정치적인 지배자일 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이긴 해도 세레즈 내 열두 신을 모시는 신전의 최고 신관을 겸하는 신성불가침의 위치에 서 있다. 그런 만큼 결혼식 당일 국왕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은 어지간한 귀족들로서는 감히 꿈도 꾸어보지 못할, 그러나 당사자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영예가 되는 셈이었다.
"부러울 것 없는 결혼식을 올리셨으니, 저 두 분께서는 지금 얼마나 행복하실까."
연회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막 몸을 일으켜 세운 스와닐다의 귓가에 부러움으로 가득 찬 누군가의 목소리가 다가와 박혔다. 어쩐지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가득 쥐고 있던 모래알들이 일제히 빠져나가는 것 같은 허망함이 몰려 들었다.
'아아. 아체프렌 전하께서만 이 자리에 계셨다면, 이들의 찬사 속에서 눈이 부실 만큼 찬란한 조명을 받는 건 나였을지도 모르는데. 하늘에서 내리는 눈보다도 더 하얀 순백색 드레스를 입고,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아름답고 순결한 신부가 되는 건, 저기 저 크레힐트가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르는데······.'
스와닐다는 힘없이 몇 걸음을 떼어내어 도금양이 휘감겨 있는 대리석 기둥에 손을 짚고 섰다.
'이제 내게는 두 번 다시 그럴 기회조차 찾아들지 않겠지. 태자 전하 곁이 아니라면, 나는 어느 누구의 옆에도 서지 않을 테니까.'
스와닐다는 시선을 떨어뜨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위로 솟아오르지 못한 채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그 희미한 한숨 소리가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아체프렌 전하의 손을 잡고서 일생에 단 한 번 있는 그 신성한 언약을 세레즈의 모든 신 앞에서 내 입술로 맹세할 수 있는 날이 찾아오기만을··· 전하를 처음 뵌 그 순간부터 줄곧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었는데. 이제 내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거야.'
어쩐지 눈시울이 젖어 드는 느낌에 스와닐다는 손수건을 꺼내 들어 눈가를 살짝 내리눌렀다. 그리고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심정을 애써 가다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비록 아체프렌은 지금 자신 곁에 없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테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무방비 상태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스와닐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연회를 참석해야 했다. 정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올 때까지는 의연하고 기품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세레즈 내에서 유일하게 아체프렌 곁에 섰던 여자답게, 제국 최고 신분의 공녀답게. 그것이 재상의 딸, 스와닐다의 모습이다.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타이르며 걸음을 옮겨 놓았다.
"이런, 스와닐다 공녀가 아니십니까?"
등 뒤로 다가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스와닐다는 몸을 돌렸다. 뒤돌아선 그녀의 시야 가득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 다가온 브라우웰 라 아르헨돌프 공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선대왕이었던 카르세오 Ⅴ세의 누이동생인 안젤리아나 노이에 벤 세레스티아, 현 아르헨돌프 공작부인인 안젤리아나 공주와 현 베케이노 영주인 헤라이더 라 아르헨돌프 공의 외동아들인 브라우엘은 적지 않은 왕족 중에서도 사촌지간인 아체프렌과 유독 사이가 좋아 그의 약혼녀였던 스와닐다와도 친근한 사이였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자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그는 시원시원한 음성과 마찬가지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가득 쾌활한 미소를 담은 채 빠른 발걸음으로 스와닐다에게 다가섰다.
"이게 대체 얼마 만입니까? 오랜만에 왕실 연회에 참석하니 좀처럼 뵙기 힘든 공녀를 다 뵙는군요. 영광입니다."
아르헨돌프는 스와닐다의 손등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뵙기 힘든 분은 제가 아니라 공자님이시지요. 귓결에 커런스로 여행을 가셨다는 소문이 들려오던데, 본국에는 언제 돌아오셨는지요?"
"나흘 전에 돌아왔습니다. 며칠만 도착이 더 늦어졌다면 테오도라 할머님께 불호령을 맞을 뻔했어요. 육촌 누이의 결혼식도 그냥 지나치는 못된 오라비라고 말이지요. "
그는 씩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어색함 없이 농담을 건네는 아르헨돌프를 대하니, 스와닐다의 우울했던 기분도 조금은 희석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공녀님께서 제 신변에까지 이렇듯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이시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는 데요. 조금 더 빨리 알았다면 아체프렌이 선수 치지 못하게 했을 텐데. 이런 미녀를 눈앞에서 빼앗기다니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
누가 들어도 농담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장난기가 짙게 배어든 목소리였다. 평소 같았다면 상대의 말속에 들어가 있는 아체프렌이라는 이름이 스와닐다의 가슴에 아픈 멍울을 드리울 법도 했건만, 마치 며칠 여행이라도 떠난 사람을 가리키듯 아체프렌을 가볍게 입에 올리고 있는 아르헨돌프를 보니, 그가 세상에 없다고 단정 짓고 있었던 자기 자신의 생각이 지나쳤다는 인식을 넘어 우습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밤마다 창 밑에서 세레나데를 부르는 청년은 없습니까? 약혼자의 질시 어린 눈도 없는데 그런 즐거움이라도 만드시지 않고. 아직 그런 청년이 없다면 저라도 그 후보가 되어볼까요? 공녀께서 허락만 해주시면 그레안 성 옆에서 노숙하는 일이 있더라도 제가 매일 밤 사랑 노래를 불러드리겠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짓궂으시네요."
그리 말하며 미소짓는 스와닐다를 아르헨돌프는 부드럽게 응시했다
- 작가의말
봐주시는 분들도 늘어나고 추천수도 올라가서 기쁜 맘에 9월 연참대전에도 참가할까 하고 생각중입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연참 성공 딱지 2회차 달고 싶네요. 마음 속으로나마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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