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9장 새벽이 움직이는 소리 1화 종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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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전 보고
코네세타의 도성 크롬 빌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세레즈로 원정을 나갔던 코네세타 병사들이 귀환한 까닭이었다.
귀환병들이 도성 바로 옆에 위치한 항구 도시 이리아스몬에 도착한 것은 어제저녁, 패전 보고를 위해 지휘관급의 장군들이 도성 안으로 들어선 것은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유례없는 대 접전이었던 까닭에 출전 병력 자체도 대대적이었던 데다가, 그로 인한 전사자와 전상병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도성의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요인은 코네세타의 대장군 크리스토퍼 라콘의 부고 때문이었다.
코네세타 국왕 로그스트 Ⅵ세는 자신 앞에 고개 숙이고 있는 전군(全軍)의 부사령관이자 해군 사령관장인 플라노크 클리어트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눈길을 돌려 클리어트의 위치에서 두어 발자국 뒤에 예를 갖추고 있는 아르카디 제크로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방금 갑옷을 새로 갖추어 입고 나온 것처럼 말끔한 차림의 클리어트와는 대조적으로, 제크로웰의 갑옷은 여기저기 부서져 있었고 그의 몸에 난 수십 개의 상처에서는 지속적으로 핏방울을 떨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로그스트 Ⅵ세를 직접 알현할 수 있을 정도의 지위를 가진 상급 지휘관 중에서 본국으로 돌아온 장수는 이 둘뿐이었다. 총사령관이었던 크리스토퍼 라콘 전사. 전군前軍 2번대 사령관 에드와르 클라인은 부상을 입고 귀환 도중 사망, 중군 사령관 프릭베드 엘마빌, 후군 사령관 위트윅크 하우제이드 포로. 보다시피 전군 1번대 사령관 아르카디 제크로웰 부상. 최고 사령부의 핵심 장수들이 이런 상태니 만큼 그 휘하의 장군들이나 병사들 이야기는 꺼낼 필요조차 없었다.
전사자 수에 있어서는 세레즈 측이 코네세타보다 피해가 심각하다고 하나, 그건 결코 변명거리가 될 수 없었다. 이번 전쟁에 투여된 세레즈의 출진군은 대략 사십만여 명으로 압축하고, 코네세타 측의 출진군을 30만으로 계산하면 세레즈는 총 병력이 4분의 일을, 그리고 코네세타는 전체 병력의 5분의 일 가까이 상실했으니, 특별히 아군의 피해가 적었다고 말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닌 것이다. 그나마 라콘의 시신이라도 찾아왔으니 망정이지 대장군의 시신마저 세레즈에 빼앗겼다면 코네세타의 입지는 그야말로 설 자리조차 잃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선제공격을 한 의도는 이런 것이 아니었었다. 이런 손실이 있으리라고는 코네세타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상상도 못 했던 엄청난 피해 앞에 로그스트 Ⅵ세의 표정은 굳어 있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망연해진 감정의 표출이었을 뿐, 분노는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땅에 닿을 듯 깊숙이 고개 숙이고 있는 두 장군을 보는 로그스트 Ⅵ세의 눈동자 역시 분노의 감정은 실려있지 않았다.
하지만 패전의 책임을 사령관에게 묻는 것은 병가의 불문율인 만큼 클리어트나 제크로웰은 자신의 침묵을 태풍의 전조라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죽은 사람에게는 해당 안 되는 그 불문율을 살아온 사람에게 뒤집어씌워 또 다른 이 땅의 생명을 죽여야 하는가. 그 자신의 회의를 아는지 모르는지 대신들 역시 기죽은 모습으로 귀환한 두 장군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고 있었다.
세레즈의 안하무인 격의 태도를 묵인하고, 고개 숙였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이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을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어찌 생각을 해보아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무리한 출병이었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한. 모두가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하며 로그스트는 하나뿐인 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에스피아의 하얀 얼굴이 어느 때보다도 냉담해 보였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클리어트에게 한 번 향했다가 공평하게 분배되듯 제크로웰에게로 옮겨갔다. 국왕인 자신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그녀는 두세 번 그 동작을 반복하더니 고개를 약간 들었다. 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는 시선을 돌릴 생각을 하지 않고 똑바로, 마치 석고상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아버지를 응시했다. 문득 로그스트 Ⅵ세는 딸의 견해를 듣고 싶은 생각이 동했다.
“이스빌렌 대공. ”
그녀를 이스빌렌 대공이라 칭하는 것은, 이 자리가 공식적인 자리인 탓도 있지만, 그에 앞서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의 의견을 듣겠다는 국왕의 의지 표명이라는 것을 인지한 에스피아는 부친의 호명에 침착하게 답했다.
“예, 폐하.”
"왕위 계승권자의 자격으로 답해 보라. 그대가 짐이라면 사후 처리를 어찌하겠는지."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그녀 역시 명분만으로, 가뜩이나 피해가 극심한 코네세타 상부의 유능한 장군을 죽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승전을 가져온 장군에게 포상을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패전을 한 장군을 문책하는 것도 아군의 사기진작을 위해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임무였다.
에스피아는 다시금 시선을 클리어트에게로 돌렸다. 그 모든 사실을 다 떠나서 제크로웰과는 반대로 말끔한 모습을 하고 있는 클리어트의 모습이 그녀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패장은 꼭 다쳐서 오라는 법은 없었지만, 전면전이라면 코네세타의 전 부대가 나섰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부사령관쯤 되는 자가, 총사령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출전을 거부하다니. 에스피아는, 전쟁의 승패와는 별개로 그건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라고 여겼다.
“패전의 책임을 사령관에게 묻는 것이 병가의 상식이라 할지라도, 이미 대장군이었던 라콘 장군이 전사함으로써 죄를 대신했으니 이 일은 이 정도로 끝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차분한 느낌의 목소리가, 홀 안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던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로그스트 Ⅵ세는 딸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같는 것을 확인했으나 그 의견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혹시라도 있을 대신들의 반론을 미리 차단하는 효과를 더하여, 그녀가 그것에 대해서는 어찌 반응해 올지 궁금해진 것이다.
“일리 있는 의견이긴 하나, 한 번의 예외가 대대로 나쁜 선례로 남아 군대의 기강을 흐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법. 이번 일이 그리 번진다면 그대는 어찌 할 것인가?"
그 질문마저도 예상 속에 있었던지 그녀는 표정 변화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하게 빛나고 있음을 느끼며 그는 딸의 대답을 기다렸다.
“신의 미욱한 견해에 불과할지 모르오나, 현재 세레즈와 코네세타가 처한 입장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홀 안의 신료들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그 발언에 다소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세레즈는 전승국이고 코네세타는 패전국이니 그 차이가 없을 리가 없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 불과할 뿐 어떤 각도로 생각해도 의견일 수는 없는 것. 그렇다면 도대체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참석자 모두 의문과 기대를 품은 채 왕위 계승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공의 그 발언은, 세레즈와 코네세타에 전쟁의 승패 이상의 차이가 있다는 의미인 것인가.”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대장군을 잃었다는 점입니다. 우리 코네세타 군의 총사령관이었던 크리스토퍼 라콘이, 그간 그가 자국 내에서 세웠던 불패의 신화가 세레즈 출신의 무명 장수에게 무너져 버렸으니, 세레즈는 물론 시블리스 역시도 우리 코네세타 군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은 것인데, 힘든 전투를 겪고 나온 장수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언도하는 것은 세레즈의 농간에 한 번 더 걸려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평소의 에스피아답지 않게 격렬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 중 어느 곳에도 부정의 여지는 없었다. 단호한 결의가 실린 그 음성에서 로그스트는 다시금 지도자로서의 그녀의 면모를 보는 기분이었다.
"한 번의 실패를 가지고 그간의 모든 공훈을 무시한다면 그 누가 조국을 위해 싸우려 하겠습니까. 전쟁이 이번만으로 끝나리라는 보장이 없는데, 조국을 위해 나서길 거부하는 병사들을 데리고 전장으로 나가실 심산이십니까. 세레즈가 야욕을 버리지 않는 한 이번 전쟁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두 장군에 대한 처분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신중히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견해를 명백하게 밝히고 나서 구체적인 결정은 로그스트 Ⅵ세에게 맡긴다. 그리 행동함으로써, 자신은 아직 국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대신들에게 주지시키고 애초에 의견을 물은 부왕의 의도에 정확한 답을 마련한다. 에스피아는 아직 열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현명한 판단을 내린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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