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미치광이의 노래 7 모멸감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7. 모멸감
"이상! 해산해라! "
작업 종료 명령이 떨어지자, 전신을 엄습해오는 급격한 피로감에 슈레디안은 근처에 감시병이 있다는 것도 잊은 듯 휘청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침에 말간 감자 수프를 조금 떠먹은 것만으로 온종일 버티는 건 확실히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이기 어려울 만큼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린 몸이 깊고 깊은 나락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듯 한도 끝도 없이 늘어졌다.
'일어서야지. 녀석들 눈에 밟히기 전에.'
일어서려던 슈레디안은 다음 순간 전신을 덮쳐오는 현기증에 다시금 바닥에 나뒹굴었다. 지독하게 어지러웠다. 닷새 전 가혹한 채찍질에 찢긴 등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며칠째 제대로 먹지 못한 빈속은 미친 듯이 울렁거렸다. 불편한 흙바닥에서 몸을 웅숭그린 채 밤을 지새워 수면 또한 불충분한 까닭인지 눈앞이 핑글핑글 돌고 마디마디에 힘이 쭉 빠졌다. 상체를 세워 앉아있기도 힘이 들었다.
이 상태로 채굴 작업을 끝까지 마칠 수 있었던 것이 도리어 신기할 지경이었다. 슈레디안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은 아찔함을 느끼며, 느릿느릿 작업을 위해 덧대어 놓은 기둥 가까이 다가갔다.
주위에 있던 인부들이 하나둘 자신들의 숙소 쪽으로 걸음을 옮긴 후로도 한동안 슈레디안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나무 기둥에 기대앉아 있었다. 비록 평소보다 반 시간 정도 이르게 작업이 끝났지만, 여느 곳보다 낮이 짧은 산 아래라 그런지 작업장에는 어느덧 어슬어슬하게 어둠이 찾아들고 있었다.
"이봐! 너 뭐야? 왜 그러고 있어?"
‘내 발로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는 가급적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는데. 재수 없게 또 걸려든 것인가.’
부러 튀는 짓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어도 절로 눈길이 갈 만큼 확 튄다는 르메아의 말대로 세레즈 병사들은 유독 자신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었다.
작정하고 학대를 하고자 하는 이들을 대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고분고분한 태도로 괴롭힐 만한 빌미를 주지 않는 것이라고 르메아는 말했지만, 가까워져 오는 발걸음 소리에 부지중에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눈꺼풀을 들어 올릴 만큼의 기력조차 없었다.
“다쳤나? 왜 주저앉아 있어?”
마음 같아서는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심경으로 자리에 앉아 있고 싶었지만 슈레디안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서 다치거나 병에 걸린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이제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습니다.”
후들거리며 일어선 슈레디안은 저를 바라보고 있는 중년의 하사관을 향해 공손한 태도로 답했다. 흠잡을 데 없는 세레즈 어에 상대가 다소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사관은 가만히 슈레디안을 훑어보았다. 모진 채찍질 때문일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빛나는 것 같던 아름다운 얼굴이 며칠 만에 핼쑥하게 빠졌다. 살이 내린 탓에 이목구비가 한층 더 날카롭게 변하고 안색 또한 병적일 만큼 파리했으나, 도리어 그 모습이 귀기 서린 매혹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인의 수가 압도적으로 부족한 국경지대인 탓에 저항할 수 없는 피지배계층을 상대로 한 계간이 군부대의 악습처럼 자리잡힌 상황이었지만 그쪽으로는 전혀 성향이 없는 그로서도 청년이 사내새끼 주제에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는 동료들의 쑥덕공론에 마뜩잖은 기분으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만년 욕구불만에 가득 찬 동료들이 저 청년을 유독 갈구지 못해 안달하는 것도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하사관은 무심한 태도로 짧은 경고를 남기는 것을 택했다.
“이제 곧 취침 점호를 시작한다. 너 하나 때문에 공연히 시끄러워지지 않게 처소로 돌아가도록. 두 번 관용은 없을 거다.”
“예. 감사합니다.”
청년은 차분하게 고개를 숙였다. 죽기 직전까지 채찍질을 당하고 며칠간 공터에 묶여 온갖 수치를 당한 이후 청년은 눈에 띄게 유순해졌다. 하루아침에 뒤바뀐 청년의 태도를 두고 역시 말귀를 모르는 짐승에게는 역시 매가 약이라고 동료들은 비웃었지만, 그는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만큼 나이를 먹었다.
청년의 온순함에는 품 안에 비수를 감추고 있는 것 같은 찝찝함이 깃들어 있었으나, 외관상 얌전하게 구는 이상 문책할 명분이 없었다. 원해서 저런 생김으로 태어난 것도 아닐 텐데, 동료들의 성적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버린 청년을 다소 가엾게 여기는 입장의 그는 모질게 구는 동료들의 괴롭힘에도 청년이 지금처럼 온순하게 대처를 해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버려 두고 가도 청년에게 도망칠 기운도 의지도 없다는 걸 간파해 낸 그는 말 없이 먼저 몸을 돌렸다. 어울리지 않게 배려심을 발휘하고 떠난 상대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던 슈레디안의 무표정한 얼굴에 싸늘한 조소가 떠올랐다.
그 병사마저 사라지자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한 작업장은 한층 더 깊은 침묵 속으로 잠겨 들었다. 그 정적 사이로 밀려드는 음산하고 적막한 암흑에 슈레디안은 두 눈을 감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겨우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겨우겨우 바람막이나 될 것 같은 천막 안에서 몸을 웅크린 채 새우잠을 자며, 수프라 할 것도 없는 멀건 죽 혹은 말라 비틀어지기 직전의 빵이나, 그게 아니면 썩기 직전의 볶은 콩을 먹으며 코네세타 인부들이 강제 노동을 하기 시작한 것도. 아직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따스한 침대나 음식다운 음식들은 아득하니 멀게만 느껴졌다.
피치 못할 상황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채석장 인부들의 틈바구니 끼어들었지만, 그건 그 당시로서는 코네세타를 떠나 세레즈로 오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었다. 세레즈의 로크라테 영지에서 내렸을 때도 저항하고 탈출하고자 했다면 고작 병사 서넛을 이기지 못할 그도 아니었지만, 승선할 배의 최종 목적지가 노틸라드였기에 슈레디안은 일부러 사지가 묶인 채 이곳으로 끌려오는 것을 택했다. 모두가 그의 선택이었고, 의도를 담은 행동이었으나, 슈레디안은 세레즈에 발을 내딛던 그 순간까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 이렇듯 참담하고 끔찍한 것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에스피아의 곁을 벗어나 세레즈로 오기만 하면,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미드프레드를 만날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곳으로 끌려와 강제 노역이나 하고 있다니. 슈레디안의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머물었다.
사실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처해있는 객관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아직 탈출하지 못한 채 이 지옥 같은 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보다도, 며칠 되지 않아 손가락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강도 높은 노역을 하고 있다는 것보다도, 꿈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비인간적인 처우에 적응하고 있는 스스로가 더더욱 끔찍했다. 노예로 끌려온 게 아닌데도, 여기 있는 다른 천민들과 마찬가지로 부당한 폭력과 대우 앞에 침묵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슈레디안은 정말 몸서리쳐지게 혐오스러웠다. 그야말로 근근이 이어지고 있는 카이아에서의 시간이 조금씩 늘어날수록 자기 자신이 인간이 아닌 것이 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슈레디안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불쾌하게 들러붙는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과 자괴감을 애써 떨쳐 내기라도 하려는 듯.
언제까지나 이런 곳에 머물러 있어선 안 된다. 이렇게 바보같이 살기 위해 그리 아등바등 코네세타를 떠나 온 게 아니니까. 어떤 식으로든 다음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회는 단 한 번, 실패도 있을 수 없었다. 탈출도, 항거도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그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곳에 있는 압도적인 다수, 코네세타인들의 협력이 절박했다. 그러나 대체 어떤 방식으로 평생토록 학대와 핍박에 길들어진 수동적이고 아둔한 코네세타인들을 일깨울 수 있단 말인가. 슈레디안은 엄습해오는 막막함을 느끼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 작가의말
인성갑인 르메아 덕분에 아직도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슈레디안이 사람이 되는 파트인지라 23장은 내용이 많이 어둡습니다. 취향이 매우 극렬하게 갈릴 수 있고 앞으로 전개되는 스토리 중에서는 최대의 고구마파트인지라 봐주시던 분들도 다 떨어져 나갈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전개상 꼭 필요하다고 느껴 각오하고 쓰는 파트인지라 저도 연재하면서 이번 파트는 많이 신경이 쓰입니다.
24장에 슈레디안이 성장이 끝나 무사히 미드프레드를 만나고 그러면 다시 분위기가 반전될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