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장 금빛 여명 6화 매듭짓기 上
25장 금빛 여명
6. 매듭짓기 上
금방 돌아오겠다며 새벽같이 지구 관사로 떠난 슈레디안은 하루가 꼬박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저무는 석양 아래 무리 지어 앉은 인부들은 어두운 얼굴로 수런거렸다.
나이는 젊으나 슈레디안은 인부들의 구심점이었다. 신분을 감추고 있었을 적에도, 그리고 사태 해결을 하겠다고 나서며 제 신분과 이리 온 목적을 밝혔을 적에도 그는 이곳 사람들의 흔들림 없는 지도자였다. 지배하기 위해 이끈 것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더더욱 슈레디안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단 한 명의 절대적인 구심점이 사라지자 그들은 막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졌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고, 어둠이 깔리며 가슴 속 깊이 불안도 깊어졌지만 오랜 시간에 걸친 상론은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 밤이 이슥해져서야 그들은 슈레디안을 믿자고, 그를 믿고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매듭을 짓고 자리를 파했으나,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불안한 감정마저 가눌 수는 없었다.
밤새 뒤척거리던 이들은, 이튿날 새벽빛이 밝자마자 세레즈군이 세워놓은 망루 위에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은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르고 주변이 온통 환해질 무렵 채석장으로 다가오는 노틸라드 상비군의 부대를 보았다.
기다린 슈레디안에게서는 아무 소식이 없고 군부대가 접근하자 사람들은 한순간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오는 무리가 공격이나 진압을 위해서라기에는 지나치게 소규모였기에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누른 채 그들을 맞이했다.
뜻밖에도 채석장에 도착한 노틸라드 상비군은 공터에 묶여 있는 카이아 파견대의 장교와 하사관들을 보고도 별반 격노하는 기색 없이 무심히 지나쳤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코네세타인들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본인을 노틸라드 영지의 부사령관이라고 소개한 앳된 얼굴의 장수는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어린 부사령관은 유려한 코네세타 말로 본인은 슈레디안 크론케이터와의 협상 결과를 알려주고자 이곳을 찾아왔으며, 채석장의 인부들에 대한 공격 의도가 없다고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들을 한데 불러모은 뒤 협상 결과를 발표했다.
“금일 부로 카이아의 채석장은 노틸라드 상비군의 지휘 아래 들어갈 것이다. 크론케이터가 내세운 코네세타 측의 요구가 객관적으로 크게 부당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바, 그 정도의 의견조차 사전에 조율하지 못하여 소요를 방과한 기존 카이아 파견대는 채석장에 대한 지휘권을 보유할 만큼의 능력이 없다고 간주, 해산하여 상비군의 휘하에 편제한다. 이는 간밤에 이미 장계의 형태로 조정에 올라갔으니 추후로도 변동사항은 없을 것이다. 물론 지휘권 이양에 대한 외관상의 명목은 '가이샤드의 습격'이다. 갑자기 공격해 들어온 유목민족에 맞서 카이아 파견대와 코네세타 인부들은 분전하였으나 불행하게도 파견대의 대장과 하사관들 대부분이 전사하고 코네세타 인부들 역시 상당수 죽거나 다친 것으로 기록되었고, 이와 같은 사태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관사의 상비군 일부가 이곳에 주류하기로 결정되었으니 모두 그리 알도록 하라.”
하일리겐은 흡사 모국어처럼 능란하게 코네세타어를 구사하는 메이샤드에게 시선을 준 채 입술을 비틀었다. 가이샤드의 습격이라니, 문제없이 장계를 올리기 위해 지어낸 명분이라고 하기에는 영악하기 짝이 없는 술책이었다.
그 발언은 폭동을 일으킨 코네세타인을 지키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외려 그건 부차적인 목적에 가까웠다. 미드프레드가 부임하기 이전, 노틸라드는 영지의 절반 넘게 유목민족에게 빼앗긴 바 있었다. 그 당시에 광산도 적의 수중으로 넘어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이샤드가 다시 이곳을 노린다고 해도 조정에서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있을 법한 개연성을 가지고 조정을 속여 자연스레 지휘체계가 다른 카이아 파견대를 밀어내고 상비군을 주둔시켜 광산을 장악한다. 그 속셈의 이면에 있는 것은 바로 이곳에서 나오는 방연석이었다.
카이아는 노틸라드에서 길라시안 영지에 이르는 거대한 산맥이었고, 이곳의 채굴장에서는 조정에서 요구하는 철 외에도 여러 가지 광석이 다채롭게 나왔다. 도성의 세느비엔느는 무기를 만들기 위한 철광석 외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방연석을 잘 제련하면 납과 은을 채취할 수가 있었다.
세레즈에서는 광업이 발달하지 않은 까닭에 방연석이 쓸모없는 돌멩이 취급을 받으나, 커런스나 코네세타의 숙련된 기술자에게는 방연석은 그 자체로 돈이나 다름없었다. 고작 3개월밖에 광산 노역을 하지 않은 주제에 어떻게 엇비슷해 보이는 광물 가운데서 방연석을 알아봤는지 실로 놀라운 일이나, 만약 아체프렌이 은 제련 방법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실행할 기술자를 데려올 수 있다면 카이아는 그가 반드시 얻어야 할 땅이었다. 이렇게 아무런 군사 행동 없이 이 땅을 획득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 할 만했다.
“조정에 보고된 장계대로 ‘가이샤드의 습격으로 부상자가 많아’ 이번 상납은 부득불 연기되었으며, 그 불운한 사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감축된 인원에 따라 상납량도 기존의 1/3로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개인당 일일 철광석 채굴량도 기존의 절반 이하인 수레 2대분으로 조정하고자 한다.”
하일리겐은 카이아에서 은을 채취하리라 하였을 때 아체프렌의 의도를 읽었다. 신분을 감추고 있을 적에도 범상치 않은 자라 여기긴 했지만 그는 미드프레드를 만나 제 신분증명을 끝내자마자 곧바로 보위 계승을 위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방연석에서 채취한 은은 전쟁을 위한 그의 자금줄이 되리라.
과연 세간의 평대로 태자 아체프렌은 식견도, 행보도 남다른 인물이었다. 태자의 실종이 길어지며 왕국의 세력판도는 세느비엔느와 폰다 대공에게 기울어져 있었으나, 불리한 정황에서도 침착하게 해야 할 일을 찾아 지체 없이 실행에 옮기는 그를 여왕이나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안타미젤 왕자가 이겨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도성의 귀족들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내게서 돌아섰고, 북부는 군부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나 이곳의 주둔군은 원래부터 세느비엔느의 비호를 받아 성장한 조정의 무관 귀족 세력에 기반해 있다. 그리고 상인 출신 영주가 많은 남부는 내가 승리를 확신시켜주지 않는다면 결코 내게 협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한테는 세느비엔느와 안타미젤에게 없는 정당성이 있으니, 내게도 이 정도 장애쯤은 있어야 공정한 싸움이라 하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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