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광야의 봄 3화 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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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문
서서히 열리는 문틈 사이로, 책상 머리에 기대앉은 채 창가를 쳐다보고 있는 미드프레드의 뒷모습이 보였다. 들어서기 전의 노크 소리로 자신이 집무실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텐데도, 무슨 생각에 골몰해 있는 것인지 그는 미동조차 없이 서 있을 뿐이다.
하겔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령관의 시선을 따라 창 너머, 날카롭게 솟아오른 산맥 위로 천천히 드리워지는 땅거미를 바라보았다. 아까 복도에서 메이샤드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일까. 평소에는 거의 의식치 못하고 있었건만. 영지 전체로 펼쳐져 가는 어둠의 장막을 앞에서, 꼿꼿하게 고개를 곧추세우고 있는 어린 사령관의 두 어깨가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가냘프게 느껴진다.
“사령관 각하.”
하겔은 고개를 약간 흔들고는 그에게로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아, 하겔 장군이군요. "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어 손바닥으로 책상 모서리 한쪽을 짚은 채, 미드프레드는 빙글 몸을 돌렸다. 하늘에 떠있는 초승달마냥 단정하게 뻗은 눈썹 아래 위치한 아름다운 황옥빛 눈동자가 가만히 하겔을 쳐다본다. 무슨 일이냐고 되묻는 듯이.
하겔은 뚜벅뚜벅 사령관의 책상 쪽으로 걸어가 문서를 내밀었다.
"도성으로부터의 연락입니다. 대략 반시각 전쯤 파발로 도착했습니다. "
남자치고는 드물다 싶을 정도로, 섬세하게 뻗은 미드프레드의 눈매가 살짝 휘어진다.
"네. 고맙습니다. "
미드프레드의 시선이 공문에 쓰여 있는 글귀를 따라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하겔은 생각에 잠겼다.
하루가 멀다하고 쳐들어오는 유목민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두달이 넘도록 방치되던 노틸라드에 새로운 사령관이 부임한다는 소문이 전해져 온 것은, 미드프레드가 영지에 도착하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물론 자신에게는 사령관의 부임 소식보다는 강제로 차출되었던 병력에 대한 증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더 달가운 소식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때마침 도성으로부터 사령관의 임명에 대한 구체적인 공고문이 내려오면서, 새 사령관의 신상에 대한 갖가지 풍문들이 노틸라드 전역을 휩쓸고 다녔다. 개전 이후 줄곧 밀리며 지지부진하게 일년 반을 끌어온 전쟁에 백성들 모두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지쳐 있었던 터라, 전쟁을 극적으로 승리로 이끈 미드프레드는, 종전 협정에 의해 세레즈와 코네세타 사이에서 발발한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나기 이전부터 거의 영웅시되었다 싶게 그 위치가 급부상했다. 그리고 당연히, 이 새로운 영웅에 대한 소문은 제국 최북단에 위치한 노틸라드에도 빠지지 않고 전해져 왔다.
본디 전쟁과 같이 큰 소란이 있은 후에는 민심이 크게 흔들리는 법이기도 하지만, 말이라는 것이 으레 그러하듯 옮겨갈 때마다 부풀려지기 마련인지라, 노틸라드까지 미드프레드의 소문이 들려올 시점에는, 이미 그에 관한 신빙성 없는 이야기가 일파만파로 퍼져 나간 이후였다. 2m가 넘는 장신이라니, 대여섯 명이 들러붙어도 들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창을 휘두른다느니, 목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한 번 그가 입을 열면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들린다느니, 그의 검이 번쩍일 때마다 열 명씩 스무 명씩 나가떨어진다느니 당사자가 들었으면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허무맹랑한 말까지 영내에 떠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무심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떠들썩하게 들끓어오른 영내의 분위기와는 달리, 하겔은 새로 부임해 오는 이 젊은 영웅에 대해서 거의 기대를 품지 않았다. 기대는커녕 부하들이 그를 본 후 실망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라 여겼을 뿐이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었다는데, 실전 경험도 별로 없는 상태에서 한 번 만만히 보이면 제아무리 제국 전체를 들썩이게 할 만큼 드높은 명성이라 해도, 북부의 거친 병사들을 다룰 길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지휘관을 신봉해야 유목민과의 전투에 힘을 발휘할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런 하겔의 염려는 미드프레드의 첫 만남으로 깨끗하게 지워져 버렸다. 물론 항간에 돌던 소문대로 2m의 장신도 아니었고 목소리가 특별히 우렁찼던 것도 아니었지만, 아니 건장한 체격이긴커녕, 갑옷을 입지 않은 그의 몸은 오히려 가냘프다는 인상을 자아낼 정도로 호리호리한 체구였지만, 당당한 걸음걸이와 어떤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그의 태도는 실제 이상으로 키가 커보이게 했고, 맑고 깨끗한 그 음성에서도 사령관다운 위엄이 절로 느껴졌다.
불필요한 동작이 전혀 없는 단정한 태도와 마찬가지로 그는 부임 인사를 '잘 부탁합니다'라는 한 마디로 일축해 버렸으나, 미드프레드가 병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인사를 마칠 때까지 정렬해 있던 병사들은 최면에라도 걸린 듯 어느 누구 하나 실망한 기색을 표하지 않았다. 도리어 듣는 쪽이 아쉬울 만큼 짧은 그 한 마디가, 그간 노틸라드에 파견된 장군들의 끝을 모르고 늘어지던 장황한 설교보다 인상 깊었다 할까. 인사말이 끝난 뒤 누구 할 것 없이 터져 나온 커다란 환호와 함성은, 그가 이곳에 들어옴과 동시에 사령관으로서 병사들에게 인정받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무슨 일입니까. "
미드프레드가 읽고 난 공문을 다시 말아 책상 위에 내려놓는 것을 바라보며 하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달 말까지 가이샤드에게 빼앗긴 노틸라드 북부 영지를 되찾으라 하는군요. "
"이달 말까지, 말입니까?"
이달 말이라면, 기껏해야 보름 남짓 남았을 뿐이다. 빼앗긴 영지를 되찾는 것이야 주둔군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소임이었지만, 느닷없이 공문을 보내어 이렇듯 급박하게 영내의 적군을 전부 다 몰아내라니. 되묻는 하겔의 음성이 평소보다도 훨씬 더 차갑게 굳어 있었다.
현재 노틸라드에서 유목민의 손에 떨어진 영지는 영내의 5분의 2선. 지금 세레즈 군이 확보하고 있는 영지는 원래 크기에 절반을 조금 넘는다. 태자 아체프렌의 실종을 기점으로 하여 세레즈와 코네세타 양국의 신경전이 극대화되면서, 노틸라드의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칼레 장군이 수도로 소환되어 올라갔고, 그 이후 이곳에 부임했던 사령관을 네 명이나 잃으면서 가까스로 유지해 낸 것이 현재의 경계다. 그런데 그것을 겨우 이주일만에 전부 다 회복하라니. 하겔으로서는 기가 찰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내달 초순에 코네세타 쪽으로부터 채석장 인부들이 도착한다는군요. 전후 보상책으로 그들에게 요구했던 안건들이 타결된 모양이죠. 그러니 미리미리 카이아를 되찾으라는 뜻인 듯싶습니다. 광산이 있어야 노역을 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
기막혀 하는 하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릿하게 이어지는 미드프레드의 음성은 지극히 평온하기만 했다. 영지에 파견된 이후 지금껏 치안과 방어에만 치중하며 토벌 문제에 이상할 만큼 소극적이던 평소의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가능하다 보십니까? "
조금은 내던지는 듯한 느낌의 그 질문이 자신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던 순간, 하겔은 보았다. 고대의 석상처럼 균형 잡힌 사령관의 하얀 얼굴에 부드러우면서도 확신에 가득찬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야지요. 그러기 위한 주둔군 아닙니까. "
미드프레드는 잠깐 눈길을 떨어뜨려 책상 한 끝에 올려져 있던 가죽 서한을 들어올렸다.
"굳이 도성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하더라도 슬슬 움직이려던 참이었습니다. "
그것이 무엇이냐는 듯 쳐다보는 하겔 쪽으로 서한을 쭉 내밀며 그는 다시 한번 싱긋 웃었다.
"태자 전하의 행방을 찾기 위해 코네세타로 보냈던 병사들로부터 그분과 인상착의가 흡사한 자가 이스빌렌 근위대에 있었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이제 단서를 찾았으니 그 다음 일은 그리 멀지 않아요."
하겔의 시선이 서한 쪽에서 다시 자신 쪽으로 옮겨오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며, 미드프레드는 질릴 만큼 느릿한 어조로 천천히 덧붙였다.
"하지만 상황이 잘 마무리 된다손 치더라도, 지금처럼 협소한 곳에 전하를 모실 순 없는 노릇이지요. 영내의 급박한 사무처리도 다 끝났으니, 이제는 길을 닦아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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