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탈출 3화 의외의 조언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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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의외의 조언 下
"드디어 내일로 다가왔군."
에스피아는 타닥대며 타오르는 장작들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시블리스에 도착한 지 벌써 이틀째. 에스피아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져서 그녀는 도성에서부터 자신을 따라온 수행원들 중 시녀 한 명과 슈레디안을 데리고 내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지만, 회담이 개최되지 않은 이상 그녀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낮인지 밤인지 확연히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둑어둑한 방 안에 틀어박혀 정해진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을 뿐. 이제 지루한 시간도 거의 다 흘러가 오늘 저녁만 지나가면 회담이 열리는 것이다.
"아시지요, 지난번과 상황이 달라졌다는 건."
그다지 길다고 할 수 없는 침묵 끝에, 슈레디안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영악한 사냥감은 동일한 미끼에 두 번 걸려들지 않습니다."
상체를 앞으로 약간 기울인 채 앉아있는 슈레디안의 오른뺨이 불빛의 붉은 기운에 물들어 복숭앗빛을 띠고 있었다. 섬세할 정도로 긴 그의 속눈썹이 어둠 속에서도 별빛처럼 선명하게 빛난다. 장작개비를 주시하고 있는 슈레디안의 푸른 눈동자는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읽어낼 수 없을 만큼 깊은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시원하게 뻗어내린 콧날을 거쳐 핏빛을 머금은 듯 붉은 입술로 시선을 내려가던 에스피아는 어쩐지 한숨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다소 주제넘은 참견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본격적인 회담이 열리기 전에 전하께서는 작금의 상황에 대한 입장정리부터 하셔야 할 것입니다. 비단 코네세타 내부사정뿐 아니라 세레즈와 커런스의 존재까지도 고려해서 말이지요. 그런 후에 시블리스에 대한 공략을 개시하지 않는다면, 이번 교섭은 성공할 확률보다는 실패할 공산이 더 커질 테니까요. "
에스피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지난번 협정으로 그들의 기대치도 높아져 있을 테니. "
이번 타협이 지난번보다 더 어려운 자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적대적인 시블리스를 설득해 세레즈로의 원정에 종군시킨 그녀의 능력에 대해 찬탄을 보내고 있었지만, 사실 그건 어느 한 편도 불리할 것 없는 교환 조건을 내세운 약정에 불과했을 뿐이다.
에스피아와 체결한 협정에 따라 시블리스는 원칙적으로 관여할 필요가 없는 전쟁에 군대와 장군을 파견하는 의무를 이행했으니,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성의에 대한 반대 급부를 청구할 터이다.
에스피아 자신은, 급부 이행에 대하여 기대치가 높아져 있는 그들을 상대로 가급적 자국의 손해를 최소화하면서 이전 협정의 결과를 무마시켜야 할 입장에 처해 있었다. 그에 더하여 가능하다면, 이참에 시블리스를 코네세타의 품 안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 만한 기반 역시 만들어 놓아야 한다. 비록 부왕이나 신료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만만한 태도를 취해온 그녀였지만, 자신의 막중한 사명을 알고 있는 만큼 정해진 회담일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어깨가 무거워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 에스피아였다.
"아니오. 어떤 상황에서도 이번 일을 지난 번 협정과 연관시켜선 안 됩니다. "
무어라? 순간적으로 슈레디안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에스피아는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전하께서는 시블리스를 얻고자 하시겠지요? 세레즈와의 전쟁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막심한 상태에서 시블리스의 이반이 주는 파장은 그 이전과 비할 수도 없을 테니까요. "
우연으로라도 내심을 비춘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건만, 이 남자는 처음부터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앉아 있었던 것 같다. 허리를 펴고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똑바로 마주해 오는 그의 눈동자에, 숨이 막혀오는 듯했다.
푸른색 다이아몬드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그의 눈동자는 언뜻 투명해 보이면서도 깊이를 잴 수 없을 만큼 심오한 빛을 드리운 채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이 땅을 얻고 싶어. 아니, 꼭 그래야만 해. 내 백성들을 위해서. "
섬광처럼 날카롭게 빛나던 슈레디안의 두 눈에 일순 부드러운 빛이 스며드는 듯했다.
"그렇다면 더더구나 지난 협정의 책임 문제가 불거져 나오도록 내버려 두셔선 안 되지요. 그 일이 일단 화두에 오르면, 전하께는 승산이 없습니다. "
"그러면 어찌하란 말이지? "
에스피아는 거의 잡아채듯 입을 열었다.
"전제를 달리하십시오.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한 이행할 수 없게 된 급부에 대해서까지 전하께서 책임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코네세타는 이곳에 어떤 의무감을 가질 만큼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지요. 그리고 전하께서도 이들에게 사과하기 위해 여기까지 오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창을 두드리는 세찬 바람 소리에 묻혀질 듯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이어지는 그 말에 머릿속이 크게 소용돌이치는 느낌이었다.
현재 코네세타는 세레즈의 포로 맞교환 제의를 거부한 상태다. 세레즈에 억류되어 있는 코네세타 상부 장수들 중에는 시블리스 출신의 하우제이드 장군이 있다. 자금 사정이 어려운 시블리스를 대신하여 하우제이드 장군의 몸값을 대신 지불해 줌으로써 에스피아는 이들과의 협정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지금 슈레디안은 그것을 보조적인 수단이 아니라 협정의 주요 무기로 사용하라 제안하고 있었다. 어차피 약조된 사항에 따른다면 전쟁이 끝난다면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긴다면이라는 조건이 붙어있었으니까.
코네세타가 전쟁에서 패배한 지금 급부 이행을 위한 전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으니 의무 불이행이 양자 간의 신뢰를 해치는 건 아니다. 시블리스가 코네세타와 다른 독립적인 존재라는 대전제 하에 장수의 몸값 지불 문제를 그들의 선택 문제로 남겨둔다면, 보상금을 지불할 만한 여력이 없는 시블리스로서는 코네세타 쪽이 자신들을 대신해 움직여 주길 바랄 것이다.
"우리가 응당 책임져야 할 포로 교환의 문제를 이들의 선택 문제로 바꾸라는 것인가. "
이 상황에서 시블리스가 에스피아의 제안을 받아들여, 코네세타가 그들을 대신하여 하우제이드의 몸값을 지불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그들 스스로 코네세타에 귀속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혹여 그들이 자신의 제안을 거부한다손 치더라도, 코네세타는 시블리스에 대해 그외의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는 만큼 손해날 것이 없는 상황인 셈이다. 슈레디안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바로 이것이었다.
"예, 전하. "
그의 대답은 어떤 확신을 담고 방 안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비록 그들은 자신들이 아쉬울 것 없는 상황에 있다 하였으나, "
지독할 정도로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며 그는 싱긋 웃었다.
"상관없는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던 그 순간, 이미 그물망에 걸려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달아날 기회가 주어진다 하여도, 결국 전하의 손아귀 안에 떨어질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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