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새벽이 움직이는 소리 2화 잃은 것이 너무 많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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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잃은 것이 너무 많은 전쟁
“폐하. ”
“아직 못 다한 말이 있다면 개의치 말고 계속하라. 일리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
부왕의 진지한 어조에 에스피아는 그가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국왕으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부친의 기력이 쇠하기 전에 국정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배우고 참여해 두는 것이 얼마 후면 열여덟 살이 되는 그녀의 욕심이요, 소망이었다. 그리하여 코네세타를 세운 선대에 부끄러움이 없는 여왕이 되는 것, 그것만이 에스피아의 목표였다.
"폐하, 신이 그 자리에 없었고 또 무관 출신도 아닌 까닭에, 전시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겠으나, 총사령관이 전사하고 대장군 휘하의 본영의 병력의 6할 이상을 상실하고, 한 때나마 그의 지휘 아래 있던 첸트로빌 공략부대가 전멸하다시피 한 마당에 부사령관과 그 휘하의 해군의 피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일입니다. 승패에 대한 처분에 앞서 이에 대한 원인 규명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의 성급한 생각인지요."
그러나 딸의 이야기는 아까 하던 것과 연장선상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자신의 짐작에서 전적으로 벗어났다고 할 수 있는 그 발언에, 로그스트 Ⅵ세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래, 네가 클리어트와 제크로웰을 번갈아 쳐다보던 것은 이 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구나.’
딸의 불만을 훤히 꿰뚫어 보며 그는 만족스러운 기분과 함께 알 수 없는 아쉬움을 느껴야 했다. 마냥 어리게만 보았던 이 사랑스런 외동딸에게 국정을 넘겨도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로그스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마음속에 교차하는 상반된 감정을 수습하고 있었다. 소중히 보듬어 왔던 작은 새가 높은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것 같은 허망함이 그녀에 대한 뿌듯한 신뢰감과 함께 전신을 휘감았다.
에스피아의 말은 처벌하려면 클리어트만 처벌하라는 의미였다. 상관의 명령이 절대적인 전시에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에 패전의 책임을 함께 물어 기타 장군이나 병사들, 혹은 대신들의 반발을 무마하겠다는 뜻이다. 한 번의 행동으로 두 가지 효과를 함께 보겠다? 공식석상에 참여해 국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배운 바가 없는 그녀가 이미 국왕으로서의 정치적 재질을 한껏 보이고 있었다.
“클리어트 장군. 이스빌렌 대공의 질문에 대한 그대의 답변을 듣고자 하오. ”
어투는 부드러웠으나 그 말 자체에 이미 규탄의 의미가 짙게 깔리고 있었다. 클리어트는 국왕의 화살을 받고 나서도 별다른 기분이 들지 않았다. 왕실에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아니 세레즈에서 후퇴를 결심하던 그 순간부터 그는 죽을 것을 각오했다. 패장의 몸이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으랴. 죽으라면 죽을 수밖에. 완전히 체념한 상태로 그는 이 자리에 섰다. 그랬기 때문에 에스피아가 관대한 처분을 내릴 것을 주장하던 그 순간에도 그는 살아날 가능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저 제크로웰처럼 전면전에 참가도 못해 본 것이 착잡했을 뿐이었다. 그는 바닥에 댄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본의는 아니었다고 하나 대장군의 명령을 거역하여 수많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 이 자리를 빌어 시인합니다. 폐하의 군대를 무익하게 희생시킨 당장 죽어 마땅한 죄인이 무슨 변명을 아뢰올 수 있겠습니까. ”
이 발언은 클리어트로서는 더 갖다 붙일 것도 없고 뗄 것도 없는 솔직한 심정의 토로였다. 어차피 죽을 각오를 한 이상 구차하게 이렇게저렇게 변명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더이상 하크스에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뒤늦게 군사를 돌려 본진으로 향하던 길에 밀시언의 5만 대군과 로크라테 상비병에게 발목을 잡혀 지체되었다는 것도 그저 이 자리에서는 핑계에 불과했다. 기습에 잘 대처하였고, 분투를 통해 그들의 포위를 뚫고 간신히 본진에 도착했을 때에는, 전면전이 끝나고 이미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이후였다. 결심만 했다면 병력 피해가 별로 없는 휘하의 해군과 제가 이끌고 온 군사들을 데리고 세레즈를 재공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클리어트는 도저히 그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계속되는 불패의 신화로 인해, 마치 불사의 존재로까지 여겨지곤 했던 크리스토퍼 라콘의 시신과 상처 입은 처참한 몰골의 제크로웰과 클라인의 모습을 보면 도저히 후퇴를 고려하지 않고는 베길 수 없었다.
라콘의 전사가 아군의 사기에 미쳐올 그 파문도 걱정되었고, 코네세타에는 지휘가 가능한 장수들의 수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건 세레즈 역시 마찬가지의 일이라고는 했으나, 그래도 그쪽에는 라콘과의 대결에서 대승한 젊은 장수 -제크로웰의 말을 빌리면 그가 적의 총참모장이라고 했다-가 건재했으며, 총사령관인 안타미젤 역시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리고 전면전에서의 승리를 거둔 후, 자신의 기습 생각을 원천 봉쇄라도 하듯 그레안 영지에 있던 재상의 군대가 아래로 내려와 세레즈의 본영에 합류해 있었고, 어찌어찌 포위망을 뚫고 본진에 도달했지만 후방에는 코네세타를 배신한 로크라테의 상비병과 밀시언 장군이 이끄는 아나브릴 방어군의 5만 대군이 존재했다. 보급은 잃었고, 병력 차에 있어 우위에 있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 대장군 없이 계속 전투를 지속해 나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병력 피해가 동등하다고 해도 승세를 타고 있는 적군을 막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결정이 회피성의 농도가 짙다는 것을 알면서도 단호하게 후퇴를 명령했다. 무익한 전투로 피해를 막고 한 명이라도 더 살려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사령관의 임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병력 피해는 어디까지나 전사자를 비교하는 것인데, 부상병에 비해 군의관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펜데스칼에 아군을 계속 내버려 두었다가는 전상병들이 모두 전사자가 될 판이기도 했으니 하루라도 빠른 후퇴가 그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는 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의 재빠른 결심으로 목숨을 건진 병사들이 수천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솔직하게 잘못을 시인하는 클리어트를 내려다보는 로그스트 Ⅵ세의 마음에 착잡함이 어리고 있었다. 그 능력을 높이 사 이제 삼십대 초반의 나이의 그를 해군 총사령관으로 삼았던 것인데.
대장군 라콘이 죽고 코네세타를 뒷받침하던 많은 장수들이 죽거나 포로가 되어 코네세타 군부에는 구멍이 뚫려버렸다. 이 상황에서 클리어트마저 버리면 그 많은 자리를 이제 누구로 채워야 할 것인가. 라콘의 세대를 이을 다음 세대들의 젊은 장수들의 태반 이상을 이번에 경험을 쌓게 한다는 명목으로 대거 출전시켰던 것인데, 지고 돌아온 그들을 파격적으로 진급시켜 상관들의 자리를 채우게 할 수도 없고.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그저 머리가 지끈거릴 뿐이었다.
로그스트 Ⅵ세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려 했을 때, 조용한 음성이 그의 행동에 제동을 걸었다.
“자비로우신 폐하의 은덕에 기대어 이 불충한 신, 감히 아뢰는 바입니다. 펜데스칼의 대접전 후 아군의 사령부가 전면 붕괴된 상태에서 부사령관마저 없었다면 아군의 병력 피해는 2할 이상 늘었을 것입니다. 대장군이 전사하고 혼란에 빠진 아군의 뒷수습을 한 이가 바로 클리어트 장군입니다. 하오니 차라리 바로 곁에서도 대장군을 지키지 못한 소장의 목숨을 거두시고 부디 부사령관에게는 관대한 처분을 내리시길 신 제크로웰, 폐하 앞에 엎드려 소망하옵니다."
그 음성은 제크로웰의 것이었다. 부상으로 인해 평소의 패기는 잃었지만 고요하다 싶을 정도의 그 낮은 음성에는 이상한 호소력이 실려있었다. 로그스트 Ⅵ세는 대꾸 없이 라콘이 총애하던 청년 장군을 내려다보았다. 제크로웰의 한 마디는 어쩌면 자신이 가장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클리어트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있었던 전우의 한 마디가 무엇보다 힘이 되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플라노크 클리어트를 해군 사령관장에게서 해임하여 엘드리퓨 지구 치안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아르카디 제크로웰은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무기한 근신에 처하노라. 처소에서 부상을 다스리며 대기하라."
두 장군은 고개를 공손히 숙였다.
에스피아의 강력한 주장이 있긴 했으나 이토록 가벼운 처분을 받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제크로웰은 자신에 대한 처분이 감사하다고 생각되기보다는 그저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패전에 대한 문책도 문책일뿐더러, 일단 클리어트를 변호함으로써 자신은 원칙적으로 불경죄에 해당하는 죄를 하나 더 지은 셈이었으니 말이다. 클리어트를 두둔하는 일은 그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한 일이었다. 설령 양자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죽을지라도 그는 클리어트가 왕위 계승자에게 오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클리어트의 신속한 후퇴 결정과 그에 못지않는 사후 처리 능력이 없었다면 대다수의 전상병들은 전사자로 바뀌었을 테니 병력 피해가 2할 이상 늘어났을 거라는 그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는 패전의 사후 처리를 혼자서 도맡다시피 한 클리어트가 이런 식으로 탄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그 사실을 알아주길 바랐다. 그런데 주군은 자신의 그러한 뜻을 저버리지 않았을뿐더러, 근신처분은 그저 말일 뿐, 부상이 완치되는 즉시 현역에 복귀시키겠다는 의미 아닌가. 걱정말고 완쾌에 신경을 쓰라는 사려 깊은 주군의 명령에 한없이 감사를 느끼며 고개를 숙인 제크로웰에 비해 클리어트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가셔 있었다.
제크로웰의 간언 덕에 사형을 면한 그 역시 이 처벌이 극형에 처하는 것에 비하면 관대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해군 사령관장에서 지구 사령관으로 강등되는 것은 클리어트에게 있어서 귀족에게서 평민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충격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위치라고 스스로를 질책하며 클리어트는 이를 악물었다.
“크리스토퍼 라콘의 장례를 대장군의 예로 치르도록 하고, 그 유가족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내리는 바이다. ”
로그스트 Ⅵ세는 그렇게 명령하고 해산을 명했다. 물러가는 대신들의 뒷모습을 굽어보며 그는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곧 세레즈가 승전국의 위용을 내세우며 패전의 책임을 묻겠다고 나설 터인데, 그렇다고 하면 또 얼마나 많은 피해보상을 해야 한단 말인가. 비록 전쟁이 코네세타에서 벌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세레즈가 요구할 피해보상액을 모두 지불하고 나면 백성들의 생활이 파탄에 빠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실한 것이 너무 많은 전쟁이다.'
그렇게 뇌까리며 로그스트 Ⅵ세는 무겁게 몸을 왕좌에서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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