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8장 소생하는 빛 1화 보이지 않는 감화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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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장 소생하는 빛
1. 보이지 않는 감화력
오늘도 태자 아체프렌은 활기차 보였다. 단정한 얼굴 위로 드러난 표정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사파이어보다 더 짙은 푸른 눈동자는 흥미를 담아 반짝거렸고, 마주 선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묻는 음성은 자상하고 다정한 울림으로 가득했다. 상석에 앉은 메이샤드가 한나절 내내 백성들의 시답잖은 이야기를 듣는 동안 눈에 띄게 집중력이 떨어진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토벌전을 위하여 예하 부장들을 이끌고 출진한 사령관을 대신하여 영내의 군권을 총괄하게 된 메이샤드는 혈기가 왕성하고 다혈질인 성격인 까닭에 한 자리에 그림같이 앉아서 상대의 이야기에 맞장구쳐주는 데에는 손톱만큼의 재능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열두 번도 넘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으나 태자인 아체프렌이 원하는 일이고, 만일의 경우 그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 최우선 임무였던 탓에 그는 혀끝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하품을 참고 있었다. 메이샤드는 다소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저보다 아래에 앉은, 그건 태자의 신분을 감추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아체프렌을 응시하다가, 문득 제 오른뺨에 다가와 붙는 페르겐드의 시선을 느끼고는 머쓱한 얼굴이 되어 시선을 돌렸다.
‘이거, 언제 끝날 거 같아요?’
메이샤드가 손짓 발짓으로 페르겐드에게 신호를 보냈다. 어린 부사령관의 괄괄한 성정 상 충분히 좀이 쑤실 만도 했고, 그 점은 페르겐드로 하여금 부사령관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참으로 애석하게도 그 역시 메이샤드의 애타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알지 못했다. 페르겐드는 쓴웃음을 지은 채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군의 메테르니히의 정성 어린 진료로 운신에 불편을 느끼지 않을 만큼 몸이 회복되자 아체프렌은 노틸라드에 부임했을 때 미드프레드가 했던 것과 엇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누구든 자랑할 만한 재주가 있거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가져온다면 그에 합당한 포상을 내리겠다는 공고를 내걸고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령관인 미드프레드는 낯선 이들이 들락거려서 관사의 보안이 약해지고 그에 따라 태자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까를 우려하였으나, 주군의 뜻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아체프렌이 백성들을 만나보는 것이나, 미드프레드가 신분 경력에 무관하게 인재를 채용하겠다고 한 것이나 그 궁극적인 목표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했다. 새 정권을 위한 일꾼 마련에 더하여, 부차적으로는 정보 수집.
페르겐드에게 의외였던 것은, 행위의 시도 그 자체보다 왕족인 아체프렌이 배운 바 없고 가난한 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진심 어린 관심을 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날 때부터 태자였고, 살아온 인생 내 남들에게 받들려 귀히 대접받으며 성장한 그가 어떻게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이들의 아픔에 진정 어린 공감을 보내며 며칠이고 변함없는 태도로 그들의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저들의 고충을 헤아려줄 수 있는지, 설령 그것이 겉으로 보이기 위한 위정자 특유의 위선이라 할지라도, 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해가 질 무렵 메이샤드는 거의 울상이 되어 버렸고, 한 사람만 더 만나자 하였다면 아침부터 꾹꾹 눌러온 그의 인내심이 다 터졌을지 모른다고 페르겐드가 진심으로 걱정했을 때, 아체프렌이 마침내 자리를 접고 몸을 일으켰다.
“즐거우셨습니까.”
자연스럽게 왼발 한 걸음 뒤로 따라붙으며 페르겐드가 건넨 물음에 아체프렌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즐거워 보이더냐?”
“어리석은 소신의 눈에는 그리 보였나이다.”
“이를 일러 즐겁다고 표현하여도 좋을지는 모르겠으나, 머리로 홀로 생각하는 것보다 저들을 만날 때 배우고 느끼는 바가 많아 내게는 몹시 유용한 시간이구나.”
그렇게 운을 떼어낸 아체프렌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메이샤드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나 때문에 부사령관이 공연한 고역을 치르고 있지 않느냐.”
뒤에 앉아있던 메이샤드가 지루해하는 표정을 봤을 리가 없건만, 마치 눈으로 보고 있었던 양 그는 운을 떼었다. 정곡이 찔려버린 메이샤드는 황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던진 농이었거늘, 그리 정색을 하며 받아치면 내 민망하여지지 않겠느냐.”
아체프렌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아직 어린 데다 상류 사회의 생리를 곁에서 체험한 바 없어 그러한 점에서는 순진하기 그지없는 메이샤드는 별달리 기이하다고 여기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페르겐드는 메이샤드를 비롯한 노틸라드의 예하 장수들에 대한 태자의 태도가 참으로 특이하기 이를 데 없다고 느꼈다.
원래 반골 기질이 강한 것은 북부인들의 특유의 지역색이었기에, 북부지구, 특히 노틸라드의 토착 세력의 장수들은 태자의 귀환을 과히 기뻐하지 않았고, 개중 몇몇은 회의적인 태도로 노골적인 반감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노틸라드는 국경지대임과 동시에 군사 주둔지이고, 저희가 미드프레드 장군을 저희의 사령관으로 인정한 것은 전장을 공유하며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아무것도 보여주신 바 없는 전하를, 저희가 대체 무슨 이유로 따라야 한단 말입니까?’
전혀 고르지 아니한 단어 선택도 충격적이었지만, 내용 자체도 과격하기 이를 데 없어 페르겐드는 내심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하관계가 분명하고 궁중 법도가 엄격한 코네세타에서는 왕위 계승자를 상대로 변경지역의 일개 장수가 꺼낼 수 있으리라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발언인 까닭이었다. 그러나 정작 공격의 화살을 받은 아체프렌은 태연자약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정당성은 그럴싸한 말 몇 마디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진심 또한 그러하다. 그대들은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나의 정치를 의심하고 경계하라. 그대들의 그러한 태도가 나로 하여금 만인지상의 아집과 독선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여 줄 것이니, 나로서는 그대들의 회의를 마다하고 거리낄 연유가 전혀 없다.’
미드프레드를 따르는 것과 태자를 따르는 것은 엄연히 별개라는 태도를 보이는 장수들에게 하는 발언치고는 참으로 대단한 포용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릇이 좁은 군주라면 자신이 아닌 제 수하이며 벗인 미드프레드를 따르는 장수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로 인하여 충직한 벗조차 질시하며 멀리할 법도 하건만. 아체프렌은 미드프레드를 아끼는 태도에 하등 변함이 없었고, 장수들의 마음을 얻는 일에도 일말의 조급함을 보이지 않았다.
어찌하여 장수들의 무례한 언사에 그토록 관대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냐는 저의 물음에 아체프렌이 돌려주었던 대답을 페르겐드는 방금 일처럼 기억했다.
‘내 미드프레드를 만나 내 곁에 두었을 때, 그는 반년이 넘도록 내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진심으로 내게 마음을 열기까지 몇 년이 걸렸으리라 생각하느냐? 하지만 저들은 맨 처음 나와 마주한 자리에서 솔직하게 스스로의 진의를 내보였으니, 이 싸움은 이미 내가 이긴 것이다. 나머지는 시간이 자연스레 해결해줄 것이다.’
태자는 변함 없는 태도로 이 시점에 자신이 해야 한다고 여긴 일을 해나갔고, 놀랍게도 그렇게 몇 달이 흐르자 아체프렌의 말처럼 굳게 닫혔던 장수들의 마음의 빗장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핍박과 굴종에 익숙해져 있었던 코네세타 출신의 인부들을 일깨워 카이아에서 봉기를 일으켰던 것처럼 태자의 감화력은 미드프레드의 카리스마와는 전혀 다른 빛깔로 천천히 노틸라드를 물들였다. 조급해하며 서두르지도 않았거니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하여 눈에 띄는 조처를 내린 것도 아닌데도 묘하게 보는 이를 감복시키는 그를 보면서 페르겐드는 아체프렌의 정당성은 비단 혈통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란 점을 분명히 깨우쳤다. 아체프렌은 선왕의 적장자라는 껍질이 없어도 충분히 스스로의 힘으로 군주가 될 수 있을 만한 인물이었다.
“내가 얻고자 한 인재들도 거의 다 얻었고, 듣고자 하였던 정보도 대부분 다 들었으니 금일로 부사령관의 곤욕스러움도 끝났다. 이제는 페르겐드, 그대의 수고가 절실하겠구나. 이 자들을 발탁하여 내 원하는 자리에 배치해 주길 바란다.”
아체프렌은 몇 장의 문건을 페르겐드에게 건네었다. 힐끗 쳐다본 것만으로도 내용이 상당히 세심하게 정리된 문서였다. 딱히 무언가를 적으면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언제 다 정리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정리와 배치는 코네세타 참모부에서 복무했던 시절, 페르겐드가 늘 하던 일이었다. 딱히 자신이 미드프레드를 따르게 된 연유나 과거의 경력에 대해 구구하게 언급한 바가 없는데도 누군가에게 어떠한 일을 맡길 때 참으로 적재적소를 잘 파악하는 왕자였다. 인재활용이 군주의 제1덕목이라면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고 그 재능을 주저없이 사용할 줄 아는 그는 천상 군주였다. 페르겐드는 감탄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맡겨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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