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장 내일의 시 4화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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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폭동
“이거 영악하게 봤는데, 영 실망이야. 눈으로 본 것만으론 교훈이 안 되나 보지?”
하사관이 슈레디안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채 이죽거렸다. 시기상조라는 걸 알면서 맞설 수는 없었다.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는 어떤 수치라도 이겨내야 한다. 슈레디안은 삽을 쥔 손에 힘을 실은 채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온순하게 굴면 그래도 끝까지 모질게 굴지는 않지 않을까 싶었으나 하사관은 처음부터 순순히 돌아갈 심산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불쾌하게 들러붙는 잔인한 쾌감이 깃든 얼굴 앞에서 슈레디안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어차피 자기 자신 하나의 반항은 이들에게 전혀 위협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이런 곳에서 개죽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살자.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아직, 나는 아직 미드프레드를 만나지도 못했어. 그러니까 지금은 조금 더 참자. 참는 거다.’
슈레디안은 낮게 숨을 들이켰다.
“놓아주십시오. 마감까지 할당량을 맞추려면 일해야 합니다.”
슈레디안은 거슬리지 않을 만큼 정중하게 부탁했지만, 그마저도 심기가 뒤틀어졌는지 하사관은 인상을 구기며 흉흉하게 내뱉었다.
“시건방지게, 누구한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냐.”
그가 슈레디안의 머리칼을 낚아채듯 움켜쥐고 뒤로 확 잡아당겼다, 어설픈 자세라 미처 다리에 힘을 싣지 못하고 있던 슈레디안이 그 억센 손길에 이끌려 그대로 나자빠졌다, 슈레디안이 흙바닥 위로 나뒹구는 것과 르메아의 입에서 비명 같은 부름이 튀어나온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형···!”
그 하사관의 채찍이 이번엔 르메아에게 날아들었다.
“아아악! 자, 잘못했어요···!”
단 한 대만으로 르메아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고, 그 다음 순간 슈레디안은 채찍의 긴 꼬리 안으로 파고들어 르메아를 감싸 안았다. 모후께서 돌아가신 사건은 슈레디안에게도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날 이후 그는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저로 인해 다치고 희생하는 걸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어깨에서부터 왼팔에 이르기까지 화끈거리는 통증이 퍼져 나갔다. 연거푸 서너 대의 채찍이 그대로 슈레디안의 상체로 날아들었다. 슈레디안은 이를 악물어 욱신거리는 통증을 삼켰다. 적극적인 저항 없이 쏟아지는 채찍 세례를 맞고만 있자, 하사관이 재미없다는 듯 손을 내렸다. 슈레디안은 품 안에서 덜덜 떠는 르메아를 단단하게 붙든 채 고개를 들었다. 간신히 수습한 표정이 가슴 속에서 격하게 휘몰아치는 분노로 인해 깨져버리지 않도록, 그는 위태로운 기로에 놓여있는 스스로를 필사적으로 타일렀다.
“아직 이 아이는 어리고 약합니다. 할당량을 감당하기에 벅차 보여서, 기합을 받게 되더라도 제가 받는 게 나을 거라 여겨서 그랬습니다. 잘못한 것은 저 아닙니까. 그러니 이 아이, 르메아에게는 부디 관용을, 부탁드립니다.”
“아주 애틋해 죽는군? 너도 저 어린 새끼와 배 좀 맞춰 봤나?”
저열한 언사에 어쩔 수 없이 슈레디안의 얼굴에 강한 혐오감이 떠올랐다.
“내 앞에서는 박히면서도 찔찔 짜기만 하더니. 너한테는 저 어린 새끼가 제법 살랑거렸나 보지?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구멍 동서라 해도 그리 겁 없이 나댈 수 있을 리가.”
상대가 제대로 배우지 못한, 그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흔하디 흔한 이 땅의 어리석은 백성이라는 걸 알기에 저를 학대하고 수치스럽게 만들어도 모두가 저의 죄라 여겨 그대로 눌러 참아온 슈레디안이었다. 왕이 될 자신이, 제 백성이 모르고 저지른 죄를 이유로 그들을 박해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저를 키워낸 세레즈를 사랑했고, 이 땅의 백성을 지키는 것을 저의 사명으로 알고 자라왔다. 그에게 있어 세레즈의 백성들은 아무리 아름답고 진귀한 보석보다 더 귀하고 빛나는 존재들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가 배워온 제왕학은 그에게 어리석은 자는 깨우치고, 가난한 자는 배불리 먹이고, 천성이 모진 이는 교화시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기에 그는 온 힘을 다하여 지켜야 할 백성을 스스로의 잣대로 나누어 지킬 가치가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누는 법 따위 알지 못했다. 슈레디안은 그것을 왕이 될 저의 도리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 저 자가 하는 말은 왕위 계승자로 나고 자란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치욕이었다. 여태까지 그 누구도 저자처럼 저를 욕보인 적은 없었다. 르메아를 감싼 슈레디안의 손이 차갑게 식었다.
“일하지 못하는 손 따윈 쓸모없지. 하지만 구멍은 제법 쓸만했으니, 사지를 갈라내고 묶어서 평생 노리개로 삼을까 보다.”
하사관이 채찍을 내던지고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뽑혀 나오는 쇠붙이 소리에 품 안의 르메아가 덜덜 떨었다. 슈레디안은 머리 위로 날아드는 칼날을 맨손으로 잡았다. 하사관이 비릿하게 웃으며 칼날을 조금 움직이자 손바닥 살이 베이며 붉은 피가 날을 타고 흘렀다.
“비켜라, 금발. 그렇지 않으면 네 놈도 똑같은 꼴이 될 거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슈레디안은 통증 따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칼날을 저의 쪽으로 휙 잡아당기며 날아오르듯 사내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슈레디안의 난데없는 행동으로 주위는 숨 막히는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멈춰버린 것 같은 시간 속에서 품에 안은 것처럼 슈레디안의 등 뒤를 감싼 하사관의 손에서 장검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뜻밖의 사태에 어느 누구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어느 사이엔가 일손을 놓고 구경꾼이 되어버린 인부들의 호기심과 두려움 섞인 시선 속에서 슈레디안은 그 후로도 한참을, 아주 작은 미동조차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하사관의 입가에서 주르륵 흘러나온 핏방울이 슈레디안의 어깨 위로 떨어지고나서야 비로소 그는 겹쳐져 있던 사내의 몸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앞으로 굽혀진 그 병사의 복부에는 언제 꺼내 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날카로운 곡괭이 조각 하나가 깊게 박혀 있었다.
“너, 너 이 자식···.”
금방이라도 밖으로 터져 나올 듯 격하게 뛰고 있는 심장 박동에, 가슴이 뻐근하게 울려올 지경이었다.
자신의 백성에게 살의를 품은 채 가한 최초의 가해행위, 슈레디안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만히 내리눌렀다. 그가 저에게 가한 치욕과 제가 그 대가로 거두고자 하였던 그의 목숨, 그 두 개가 등가관계라고는 슈레디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슈레디안은 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는 피로 물든 손을 움켜쥔 채 복부를 감싸며 멈칫멈칫 물러나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직접 당해보니 어떠냐.”
상대를 쏘아보는 슈레디안의 눈이 분노인지 쾌감인지 뭔지 모를 푸른 불길을 머금은 채 미친 듯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파? 고통스러운가?”
입술 끝만을 살짝 들어 올린 채 살이 빠져 파리해진 얼굴로 차갑게 미소 짓는 슈레디안의 모습은 그야말로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자신 안에도 옥좌를 친족들과 신하들의 피로 붉게 물들이며 이 나라를 지탱해온 세레스티아 왕조의 역대 국왕들과 같은 가학적인 광기가 도사리고 있었음을 슈레디안은 제 안에서 일렁이는 뜨거운 기운을 통해 싫어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천민으로 끌려왔으니 마음 내키는 대로 다뤄도 된다고, 그래도 꼼짝하지 못할 거라고, 그리 생각했나? ”
슈레디안의 그 발언은 가슴 속 깊숙한 곳에 억눌러 왔던 감정의 한 끝을 건드려 오는 호소력있는 울림으로 채석장에 울려 퍼졌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슈레디안은, 상대가 떨어뜨린 검을 집어 들어 곡괭이에 찔린 채 뒷걸음질 치는 그 하사관을 길게 베어냈다. 살점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피를 뒤집어쓴 채로 슈레디안이 귀기 서린 얼굴을 하고서 덧붙였다.
"착각하지 마라. 나와, 여기 있는 코네세타인들은 네놈들 소유의 물건이 아니다."
낮지만 힘이 실린 코네세타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코네세타인들은 의식적으로 밀어두었던 인간으로서의 자부심과 죄책감이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느끼고 있었다.
“맞아!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래, 이 자식들아! 우린 짐승이 아니야!!”
개개인만으로는 얼마든지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해왔던 이들이 말 그대로 거대한 폭포가 한 번에 쏟아 내렸다. 슈레디안과 다른 인부들을 닦달하며 윽박지르던 하사관들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증오로 불타는 수십여 개의 눈이 그런 그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사람들의 분노 앞에서 의연함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폭동을 일으키다니, 모, 모두들··· 후회하게 해줄 테다!"
“이 개새끼! 네 놈이나 후회하게 해주마!"
한 발짝 한 발짝 물러나던 세레즈 병사들이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며 돌아서 달아나려 하자, 그 자리에 있던 인부 하나가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던 분노를 여지없이 드러내며 그에게 덤벼들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채석장을 감독하던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처절한 비명와 함께 누군가의 붉은 핏방울이 이미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노틸라드의 어두운 저녁 하늘 위로 선명한 곡선을 그리며 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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