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핏빛 긍지 5화 출격 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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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출격 허가
“내 경솔한 출격은 엄금하겠노라 일렀을 텐데.”
하크스 영주 로엘 공은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망설임 없는 대답이 내쏘듯 곧바로 튀어나온다.
“그러나 이런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게다가······.”
영주는 고개를 흔들고 싶은 심정을 눌러 참고는 느릿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아아, 적군의 이동을 기회 삼아 기습하겠다는 이야기라면 충분히 이해했네. 내 묻고자 하는 바는 그 다음은 어찌하겠냐는 것일세.”
더할 수 없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한 채 서 있는 젊은 수비 대장의 얼굴을 한참 동안 응시하던 로엘 공은 어색하게 잠긴 분위기를 환기해 주려는 듯 낮은 헛기침을 두어 번 내뱉었다.
“출격 요청을 할 때에는 어느 정도 생각이 잡혀 있겠지. 그래 장군은 이번 출격으로 얼만큼의 희생이 생기리라고 보는가? ”
평온한 말투였지만, 슈발츠를 향한 영주의 눈빛은 완고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단번에 안 된다고 잘라버리는 것 이상의 완강함이 서려 있는 눈동자였다.
아무리 기습 작전이라 한들 적군과 맞붙어 싸우는 이상 공격하는 쪽이라 해서 피해가 전혀 없을 수는 없는 일, 그 점은 영주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더불어 눈앞에 선 이 젊은 장수가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태연한 얼굴로 `일정 정도의 손실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회피성 대답을 하지 못할 성품이라는 것 역시도.
“적은 아군보다 수적으로 압도적인 우세에 있다. 아군 한 명과 적군 한 명의 비중이 다르다는 것을 진정 모르는가?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으로 아군 병사 하나가 죽는다면, 그건 스무 명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번 출격으로 오십 명 정도가 죽거나 부상 당한다면, 아군에게는 천 명이라는 막대한 손실이 생기는 것이다.”
“용서하십시오. 하오나 소관 이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적의 진영에···!”
“레젤니크 라 슈발츠.”
로엘 공은 일부러 강한 어조로 부하 장군의 항변을 가로막았다.
“적의 진영에 뭐가 있다는 게지? 그대가 하려고 하던 말이, 이 성의 수비대장으로서의 발언이 맞는가?”
마주친 눈빛이 흔들렸다. 무거운 침묵이 경직된 공기 사이로 흩어지고 있었다. 슈발츠는 결국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아랫입술을 사려 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흡사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한참 만에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소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 말을 꺼낸 뒤, 슈발츠는 스스로의 격앙된 감정을 다독이듯 깊게 숨을 들이켰다. 잠시 후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사령관으로서 감정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정리에 휩쓸리는 못난 모습을 보여드렸으니 무어라 꾸짖으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미세하게나마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나 딱딱 끊기는 듯한 말투,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경직된 자세 등, 그것은 어느 모로 보나 승복의 뜻은 아닌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자신을 향한 슈발츠의 얼굴은 어떤 결심을 하고있는 듯, 묘한 비장함까지 감돌고 있었다.
“장대에 매달린 이가 문제로군······.”
혼잣말처럼 내뱉은 중얼거림에 일순 슈발츠의 어깨가 움찔한다. 로엘 공의 뇌리에 첩자 발각 소식이 전해졌을 때의 슈발츠의 반응이 또렷이 스쳐 갔다.
‘저 불같은 성정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이대로 돌려보낸다면 혼자서라도 나가려 하겠지. 이제는 별도리가 없는 것이다. 아끼는 장수 하나 버릴 셈이 아니라면 내가 한 발짝 물러나는 수밖에. ’
영주의 입술 새로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화약 사용을 허가한다. 단, 출격 군의 수는 이백으로 제한하라. 대신 기병을 운용하건, 보병을 운용하건 개의치 않겠다.”
“영주님···!”
회색빛 섞인 슈발츠의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어리고 있었다. 영주는 그 시선을 외면하듯 두 눈을 감고는 깊게 잠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내 원병 요청 글을 써줄 테니 지금 당장 몸이 날랜 군사 두어명을 로크라테 영주와 아나브릴 방어군으로 보내게. 전력 손실이 없는 로크라테 상비군과 아나브릴 방어군의 병력이 협조해준다면, 하크스 영지에서 이동 중인 적의 부사령관의 부대를 기습하고 내친김에 하크스 공략 부대 진영도 무력화시킬 수 있을 걸세.”
영주의 계획을 읽은 슈발츠의 얼굴이 환해졌다.
“전면전을 위해 이동하는 부대를 공격하여 적의 부사령관의 발목을 붙들고, 저희와 아니브릴 방어군이 합심하여 하크스 공략 부대를 격파하면, 이동을 결심한 클리어트의 부대 외에 후방에 충분히 병력이 없는 적으로서는 크게 당황할 것입니다. 그러면 로크라테와 펜데스칼의 백성들과 성주들도 고무되어 산발적인 저항을 하기 시작하겠지요.”
영주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지. 그러므로 이번 출격은 그를 위해 현재로서는 우리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의 무기고 격파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네. 표면적으로는 적진 파괴의 대의를 내세워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도록. 잊지 말게. 도량이 큰 장수는 한 번의 행동으로 여러 가지 효과를 얻는다는 것을.”
6. 로크라테의 반격 上
“아군의 표식이 붙지 않은 전서구가 영주께 날아왔다고 들었소. ”
노크조차 없이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로크라테의 본성 노이부르크에 머물고 있는 코네세타 주둔군의 지휘관 슐리안 호텐이었다. 그의 무례한 행동에 영주 콜틴의 근위 기사들은 불쾌한 기색으로 눈썹을 치켜세웠지만, 영주가 손을 가볍게 들어 제지하자 씨근덕거리는 숨을 삼키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영주의 부하들이 저를 노려보고 있어도 호텐의 고압적이기 그지없는 태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내용을 미리 검시하지 못하였으니 전서를 보여주시오.”
전투조차 없이 적에게 항복하여 산 채로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배신자로 낙인찍힌 콜틴이었으나, 이것이 모두 영내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고, 수확기의 농작물을 수호하기 위한 그의 뼈아픈 고뇌의 산물이었음을 아는 로크라테의 가신들과 영지의 노이부르크의 기사들은 영주를 여전히 존경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들에게 주군이 당하는 모욕은 그 자신에 대한 것 이상의 상처였으나, 정작 당사자인 콜틴이 자제하고 있는 마당에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어 그들은 그저 이를 악물고 참고만 있었다.
실제로 로크라테의 영주는 겉으로는 온유한 태도를 고수했지만, 보급로의 난항을 겪는 적군의 사정을 잘 알면서도 이런저런 구실로 보급을 거절하기 다반사였다. 물론 그때마다 영주 콜틴이 생명의 위협을 받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수확기의 농작물을 불태우면서까지 죽기 살기로 저항을 계속하는 하크스는 말할 것도 없고, 양군을 다 합쳐 50여만 대군의 전장이 되어 버린 펜데스칼의 대평원을 보급지로 이용하기 곤란해진 적군으로서는 로크라테마저 버릴 수는 없었다. 전쟁 초반 발 빠른 결단으로 영내의 안전을 지킨 영주에 대한 신망이 높다는 것을 익히 아는 호텐으로서는 외관상으로만 고분고분할 뿐,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콜틴이 괘씸해도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책상 위에 있는 전서가 바로 그것이오. 보고 싶다면 얼마든지 보시오.”
하등 거리낄 것이 없다는 양 콜틴은 책상 가운데 펼쳐진 자그마한 서한을 가리켰다. 두어 시간 전쯤 받은 하크스 영주 크리스티앙 레 로엘 공의 전서가 그 위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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