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새벽이 움직이는 소리 7화 보상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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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보상처리 계획
세레즈가 요구해온 전후 보상 문제의 해결을 둘러싸고 일어난 파란이 사그러들 기미 없이 확대되어 코네세타 상류 사회가 들썩이기 시작할 무렵, 에스피아는 개인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국무대신인 노스위크 공이 전국 각지로 내려보낼 포고문의 요체를 정하여 태자궁을 찾은 그 날 역시, 에스피아의 분주한 일정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침 일찍 시작되어 격렬한 논쟁 끝에 정오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끝난 조회에서 돌아온 그녀는 해가 뉘엿뉘엿 기울 저녁 무렵까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무실에 앉아 넓은 책상의 삼 분의 일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서류 더미 속에 파묻혀 있었다.
에스피아로부터 접견 허락을 받아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노스위크는, 자기가 들어선 것도 모른 채 서류에만 골몰하고 있는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는 탁자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스피아는 단정히 앉은 자세 그대로 두어 개의 문건을 더 처리한 다음에야 비로소 고개를 들어올렸다.
"기다리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노스위크 공."
여자 중에서도 비교적 높은 울림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한 공간 속에 또렷하게 메아리친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전하. 다망하신 와중에서도 이렇듯 접견을 허락하시니, 오히려 황공하올 따름입니다. "
본디 그 성질상 장황하기 마련인 왕실 예법이라고는 하지만, 이 순간 그의 발언은 그저 형식 뿐인 인사치레라기보다는, 그 자신의 진심을 토로한 발언이라 보는 편이 합당할 듯했다. 신료들의 수장이라는 이유에서 누구보다도 에스피아 가까이 있는 노스위크 공으로서는, 현재 그녀가 불평 한마디 없이 처리해 나가고 있는 업무량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일여 년 간의 경험으로 그 누구보다도 에스피아의 판단력과 사고력을 굳게 신뢰하게 된 그였지만, 국내의 전후 처리 문제까지 겹쳐서 최근 며칠간 급증한 업무량은 솔직히 근심스러울 정도였다. 자신을 비롯한 국무성과 내무성의 고위 관료들은 물론 예하 사무관들마저 폭주하는 잔무에 쩔쩔매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러한 것을, 불과 한 달 전에 열 여덟 번 째 생일을 맞은 어린 소녀가 버텨내고 있었으니. 물론 에스피아는 누군가가 연민 섞인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허용할 리 없었지만, 노스위크로서는 타고난 공주의 그것이라 할 만큼 드높은 그녀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한없이 미더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에스피아는 차분한 미소로 노스위크 공의 인사말에 대한 답례를 대신하고는 책상에서 일어나 집무실 가운데 있는 탁자 쪽으로 다가서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때마침 잘 오셨습니다. 그렇잖아도, 노스위크 공께 여쭙고 싶은 바가 있었답니다."
그녀는 그의 맞은편에 주저앉으며 먼저 운을 떼어냈다. 하루 종일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공문을 살피느라 지쳤을 법도 하건만, 자기 인형처럼 하얀 그녀의 얼굴은 어느 한구석 흐트러짐이 없었다. 비록 그녀 자신, 이제 막 성인식을 올린 어린 소녀에 지나지 않았지만, 언제 어떤 상황에서 마주하게 되더라도 평상심을 잃지 않은 단정하고도 의연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조정의 신료들이 그녀를 섭정에 준하여 받드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 성심성의껏 받들 것입니다. 하오나 그에 앞서 이것부터 살펴봐 주시지요. 폐하의 포고령에 따라 작성한 공문의 요체입니다. "
에스피아는 상대가 내미는 문건을 받아 들며 나직하게 물었다.
"각 영지에 파견할 자들은 정해졌습니까 "
"예. 대강의 인선이라면 결정되었습니다만. 달리 하명하실 일이라도 있는지요."
받아든 서류의 첫 장을 펼쳐들던 에스피아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올려 국무대신을 바라보았다.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지난번 전쟁 때 병사들을 차출하지 않은 지역을 중심으로 포고령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중첩되는 지역이 있어 백성들의 생계를 어지럽혀서는 안될 테니까요. 그리고 백성들이 공고문의 내용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을 만큼 시간적 여유를 두시고, 평민 중에서 지원자가 나올 경우 각 지역의 영주들에게 일러 받드시 보상을 해주도록 하세요. 의례적인 보상이 아니라 실질적인 지원 말입니다. 행여나 영주들의 가산이 부족할 경우엔, 왕실에서 그 지원을 맡을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보상 문제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도록, 단단히 주지시키도록 하세요. 그리 하면 자국 내에서 생활이 어려운 이민족계 백성들이 많이 지원할 것입니다."
"예,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국무대신께서도 이번 채석장 인부 건으로 국왕 폐하께서 가산의 일부인 사노(私奴)를 오백여 명을 차출하시고, 저 역시도 이스빌렌에 있는 제 노예들을 이백여 명 정도 내놓았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예, 전하."
긴장한 듯 대답하는 노스위크 공을 바라보던 에스피아의 단정한 얼굴에 슬핏 웃음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다음 말은, 그 웃음 띤 얼굴과 대비되어 한층 더 냉정하고 단호한 울림을 하고 있었다.
"왕실의 선례를 본받아 조정 신료들과 각지의 영주들도 가산의 일부인 노예들을 채석장 인부로 보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각기 그 재산 정도나 처한 상황이 다를 터이니 일괄적인 기준을 제시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하지만 저는 대신들과 영주들 모두 제가 흡족해할 만큼의 성의를 보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국무대신께서도 조정 대신들의 수반으로서 마땅히 그 모범을 보이시겠지요?"
예상치 못했던 에스피아의 발언에 안색이 약간 창백해지는 듯하였으나, 그래도 노스위크 경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물론이옵니다. 소신, 응당 그리 할 것이오니 심려 놓으십시오."
"공께서도 아시다시피 전쟁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막심합니다. 병사가 되어 출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무리하게 공출한 전쟁 물자 때문에 그들의 생계가 지극히 위태로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과중한 부담을 또다시 그들의 어깨 위에만 짊어지울 수는 없지요. 소위 나라를 이끌어 간다는 자들이 영광만 얻으려 하고 고충은 외면하려 든다면, 백성들이 어찌 우리를 믿고 따르겠습니까. 부족한 제 생각으로는 그러합니다만. "
아직 정식 절차를 거쳐 국정 대리에 오르진 않았지만, 이미 에스피아는 국왕의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노스위크 공은 평소보다도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소신, 미력하오나 전하의 높으신 뜻을 받드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제 뜻을 이해해주신다 하니, 감사할 뿐입니다."
가벼운 미소로 사의를 표한 뒤, 그녀는 다시 공문 쪽으로 시선을 내리고 그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혹시 누락된 부분이나 수정할 부분이 있다면 지시해주십시오."
"세레즈가 요구한 나이 제한 규정은 삭제하도록 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전쟁으로 장정들을 많이 잃은 코네세타 아닙니까. 지금의 우리는 그들의 요구 조건에 다 맞춰줄 만한 여력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 조항을 제외하면 이대로 공포해도 좋을 것 같군요. "
그녀는 탁자 위에 문건을 내려놓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난번 해전으로 상한 배 몇 척만 내어 달라고 군부에 요청해 주세요. 아직 수리에 들어가지 않은 게 있을 겁니다. "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만, 어찌 그런 지시를······."
"터트릴 작정입니다. 해상에서요."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일순 노스위크 공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듯했다.
"혹시, 이번에 세레즈로 보내는······."
"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하오나 전하, 이것은 일종의 약속과 같은 것이온데."
"원치 않는 전쟁으로 국가 간의 신의를 깨뜨린 것은 그들입니다. "
에스피아는 상대의 항변을 단호히 제지한 후, 다시 말을 이어갔다.
"가급적 그들의 요구 중 무엇 하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 제 솔직한 심경이나, 현재 우리 코네세타가 처한 여건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을 뿐. 저는 처음부터 그들이 요구한 머릿수를 다 채워 보내겠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휘스 경이 교섭 건으로 세레즈에 머물고 있긴 하나, 그들이 본국의 제안을 수용하든 수용치 않든 우리 코네세타가 보내는 인원은 많아야 사오천 정도 될 겁니다. 그 점은 폐하께서도 허락하신 일이니. 국무대신께서도 그리 알고 그만큼의 인원만 차출하도록 하세요. "
그녀는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어, 창가 쪽을 응시하다가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조만간 제가 사후처리를 위해 시블리스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공께서 각부에 일러 시급히 인가를 요하는 사안부터 올리라 지시해주세요."
- 작가의말
19장 끝
저도 사람이라서 선호 추천 받으면 정말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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