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장 내일의 시 6화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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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협상
사람들이 흩어지고도 한참 동안 슈레디안은 어둠이 까맣게 내린 공터를 서성이며 고민했다. 노틸라드 지구 관사로 연락을 취하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 방안이 있겠지만, 문제는 그와 코네세타인들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이대로 어둠이 물러가고 날이 밝으면, 그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사흘뿐이었다.
그는 사흘 안에 미드프레드를 만나, 여기 있는 코네세타인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고 채석장의 감독을 해온 세레즈 장교들과 하사관들의 신병을 문제 되지 않을 방식으로 처리해야 했다. 그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저의 신분에 대한 소문이 외부로 흘러나가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여기 있는 코네세타 인부들에게도, 채석장 감독 부대에도 이미 저의 얼굴은 실컷 노출되었다. 제 얼굴을 아는 그 무수한 이들을 제거할 수도 없고, 그럴 의중도 없는 슈레디안은 어떻게 하면 저의 존재를 이번 사건을 기화로 깨끗하게 지울 수 있을지를 고심하고 있었다.
급변한 정세 때문에 도성으로도, 다른 영지로도 갈 수 없어 세레즈에 도착하자마자 미드프레드가 있는 노틸라드로 오기로 결심했지만, 여기서 자신이 코네세타 인부들과 함께 넉 달 가까이 광산 노역을 했다는 점이 드러나면 세느비엔느는 저를 가짜로 몰아붙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설상가상으로 저는 미드프레드에게 연락을 취할 심산으로 코네세타인들과 함께 항거하여 광산 감독자와 병사들을 사살한 상황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의 눈에는 왕위 계승자가 적국의 백성과 통모하여 왕명을 받아 국역을 수행하고 있는 군장교를 죽였으니 내란을 일으켰다고 비칠 수도 있었다.
만약 채석장에 있는 코네세타 인부들이나, 광산 감독을 하던 군부대 모두를 버리고자 하였다면 하등 어려울 것 없는 문제였으나 지금 슈레디안은 코네세타인들의 대변인이 되어 있었다. 르메아와 아이네즈가 몇 번이나 사지에 몰렸던 저를 구해주었고, 이곳에 도착해서도 한마음이 되어 어려움을 같이 헤쳐온 코네세타 인들은 이제 슈레디안에게는 그저 적국의 백성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지만, 이성적인 그는 그것이 자신의 감정일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세레즈는 코네세타의 침공으로 1년 넘게 온갖 시련을 겪었고, 전화의 피해는 아직 채 가시지도 않았다. 수많은 자국민에게 코네세타는 엄연히 국적이었고, 그들의 증오는 정당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세레즈의 국왕이 되고자 하는 자신이 더 이상 슈레디안이란 이름으로 코네세타와 연관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슈레디안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내 신분은 미드프레드가 증빙해줄 것이다. 미드프레드를 만나면 나는 아체프렌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니 슈레디안이 사라지는 건 이 시점이 가장 적당하다. 하지만 작금과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가장 자연스럽게 퇴장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미드프레드와 주둔군을 이곳 카이아로 불러들이는 방안도 생각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은 이곳에서 저를 만나게 되면 조용히 아체프렌으로 돌아가겠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곧이곧대로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퍼트릴 수도 없었다. 그러면 자신이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저와 함께 해준 코네세타인들을 저버리는 꼴이 되어 버렸다. 조용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해결하려면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노틸라드로 향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관사로 간다 하여도, 코네세타의 슈레디안으로서는 영주권을 대리하는 군사령관 미드프레드를 바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방법을 고심하던 슈레디안은 어둠 속에서 살아남은 세레즈 군 장교들과 하사관을 묶어놓은 형벌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결심을 굳힌 채 그쪽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너 이 새끼··· 정체가 뭐냐.”
슈레디안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묶여 있던 세레즈 장교가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를 갈며 운을 떼어낸 이는 첫날 저를 형벌용 채찍으로 쳤던 바로 그 백부장이었다. 슈레디안은 몇 달 전과 입장이 전치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도 그게 궁금한가?”
슈레디안은 건조한 음성으로 반문하며 턱 끝으로 광산 총책임자의 수급을 턱으로 가리켰다. 너도 저리될 운명이라는 것을 암시하듯. 백부장이 입술을 틀어 올리며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죽음이 두려웠다면 국경지대에서 무인으로 살겠느냐? ”
“그도 그렇군.”
슈레디안은 별다른 이의 없이 수긍했다.
“살아남은 자 가운데 네가 가장 높은 자인가.”
슈레디안의 질문에 백부장은 마뜩잖게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후 흘러나온 답변은 슈레디안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네 놈이 검을 쓰는 걸 보고 알았다. 마구잡이로 배운 녀석이 아니란 걸. 정체를 밝혀라. 그렇지 않고는 내게서 그 어떠한 대답도 듣지 못할 것이다.”
“본인의 입장을 모르는가?”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고, 너희에게는 시간이 없다. 간혹 천민치고는 제법 영리한 것들도 있지만 이 상황에서 앞날을 내다보며 상황을 조율할 수 있는 머리를 가진 놈이라고는 너정도 밖에 없겠지. 어차피 내가, 그리고 여기 묶인 우리들 전부가 죽어 나간다 해도 너희들을 사흘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소리다.”
백부장은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이런 마당에 내가 뭐가 아쉬워 네게 숙이겠느냐? 지금 협조가 필요한 건 내가 아닌 네 놈일 텐데.”
과연 공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온 건 아니라는 듯 꽤나 예리한 안목을 지닌 사내였다.
“저기 있는 코네세타 인들을 살리고 싶다면 너야말로 속내를 내게 드러내고 도와달라 빌어야 할 거다. 머저리 같은 코네세타 놈들은 지금껏 네 맘대로 병신춤을 추게 만들 수 있었겠지만, 나는 저들과 다르다.”
“마치 내가 다른 이들을 조종이라도 할 수 있었다는 듯 말하는구나. 아쉽게도 나한텐 그런 능력 따윈 없다. 우리는, 너희의 가혹 행위에 분노하여 일어난 거다.”
슈레디안의 평온한 대꾸에 백부장이 기가 찬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이번 폭동은 네가 일으켰다. 네가 아니었다면 결코 일어날 리 없는, 일어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니 원흉은 너라고밖에 할 수 없겠지. ”
슈레디안을 향한 백부장의 눈에는 어떤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청년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을 이었다.
“코네세타인들은 우리가 핍박하기 전부터 이미 지배받는 것에 익숙했다. 이유 없이 매질해도, 그 매질로 눈앞에서 동료가 죽어 나가도, 입 한 번 벙긋대지 못하던 버러지 같은 것들을, 네가 바꾸어 놓은 거다. 빌어먹을, 세레즈어를 가르친답시고 몇 달을 버티더니 결국은.”
백부장은 입술을 짓씹었다. 가혹한 채찍질에도 신음 하나 내뱉지 않던 녀석이, 사흘이나 쫄졸 굶기고 상처 입은 몸을 땡볕 아래 짐승처럼 묶어 끌고 다녀도 물 한 방울 애걸한 적 없는 저 자식이, 벌에서 풀려나자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양 자신들 앞에 납작 엎드려 코네세타인들에게 세레즈 말을 가르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사람은 본디 쉽게 바뀔 수 없는 존재, 가혹한 학대에도 눈빛이 죽지 않았던 그가 하루아침에 돌변한 태도를 보여왔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저 청년을 마침내 굴복시켰다는 쾌감에 도취되어 대다수의 이들이 정작 보아야 할 이면의 것을 무시했다.
백부장은 부글부글 끓는 속으로 멍청한 광산 감독자를 욕했다. 코네세타인들에게 말따위 가르치게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고, 설령 말을 배우게 하더라도 가르치는 자가 저 청년이어서는 안된다고 그는 한사코 주장했지만, 제 우둔한 상관은 그의 충언을 듣지 않았다. 수업 시간 내 감시하던 것도 풀어주더니, 종국에는 취침 점호도 건너뛰었다. 그 결과가 오늘의 사태로 이어진 것이다. 죽어 마땅한 새끼였다. 겉으로 보이는 것밖에 보지 못한 우둔하고 무능한 자가 이끄니, 고작 저따위 새끼의 농간에 놀아나 이 사달이 나지 않았는가.
“나는 네게 채찍을 들었던 그 날 너를 때려죽였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저를 죽이지 못해 후회한다는 사내를 앞에 두고, 슈레디안은 마음이 바뀌었다. 살리고 싶다고. 성미는 잔혹했지만 식견이 탁월하고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난 자였다. 고작 채석장 감독이나 하기에는 타고난 그릇이 아까웠다. 관사로 향할 때까지만 그를 이용하고자 하였던 마음을 접은 채 슈레디안은 차분히 답했다.
“나는 슈레디안 크론케이터, 전 밀로타 영주의 후손이자 코네세타의 왕위 계승자 에스피아 엘레노어 데 코네세타, 이스빌렌 대공의 친위대원이며 직속 수행원이었다. 남의 성명을 물었다면 본인의 것도 밝혀야겠지. 귀관의 관등성명은?”
“···이거 내 생각보다 더 거물이었군 그래.”
그가 경련하듯 웃었다.
“나는 세레즈 중앙군 휘하 북부지구 방위군 소속 장교이며 카이아 파견대 백부장 빈센트 라 하일리겐이다. ··· 그래 네 녀석이 원하는 바가 뭐냐.”
“광산 노역에 대한 전반적인 관할권이 세느비엔느 섭정에게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성도로 이 소식이 들어가면 여기 있는 코네세타인들의 안위를 보장할 수가 없다. ”
여왕을 자처하고 있는 세느비엔느를 섭정으로 격하시키는 슈레디안의 언동에 백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잠자코 슈레디안의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별개의 지휘체계를 지닌 지구 사령관 미드프레드 그론레이를 만나 우리의 조건을 제시하고 가급적 협력을 전제로 이 사태를 정리하고자 한다. 그는 공평무사한 인사라 들었다. 이곳에 온 나의 목표는 이리 끌려온 코네세타 백성들을 지키는 데 있었으니 협상이 무사히 타결된 이후 이번 사태에 대한 총책임을 지고 내 신병을 세레즈에 인도하겠다. 내가 가진 정보는 코네세타 왕실의 첩보 활동으로 얻은 바, 군사령관에게도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나와 코네세타인들은 이 사건을 더 확대할 마음이 없고 세레즈 쪽이든 코네세타 쪽이든 추가적인 인명피해를 원하지도 않는다. 어때, 이런 조건이라면 협조하겠는가.”
“···나쁘지 않은 조건이군. 사태 정리가 끝나면 네가 아는 걸 다 실토할 때까지 내 친히 고문해주마. 네 입으로 세레즈에 스스로 신병을 인도하겠다 했으니 단단히 각오해두는 게 좋을 거다.”
“귀관이 그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선선히 대답한 슈레디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쓱 올려 보았다. 하늘 가득 별빛이 쏟아질 듯 빼곡하게 빛나고 있었다.
“새벽 다시 오겠다. 필러리 형을 유난히 즐기는 귀관이니 어디 한 번 하늘을 이불 삼아 밤을 지새우며 역지사지를 몸으로 배우는, 유익한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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