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탈출 2화 의외의 조언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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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뜻밖의 조언 上
"바깥 공기가 차갑습니다. 이리 오시지요."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는 개활지를 바라보고 있던 에스피아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슈레디안이었다. 시블리스 측이 커다란 거부감 없이 자신의 요구를 수락하여 그녀는 직속 시녀와 그를 제 곁에 둘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 춥다고 불평하는 것인가?"
벽난로 근처로 의자를 옮기던 슈레디안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에스피아를 바라보았다. 일부러 심술궂은 언행을 골라 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섬기는 주군쪽에서 저리 나오면 아랫사람 입장에서는 답하기 난감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슈레디안은 이런 순간에 미드프레드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를 떠올렸다.
에스피아에게 억류되어 억지로 친위대에 입대하게 된 이래 슈레디안은 줄곧 미드프레드를 연기했다. 란델의 교육으로 더이상 천민처럼 굴 수 없게 되었으니 다른 기준을 마련하는 건 당연하였다. 그리고 코네세타 상류 사회의 정점이라고 할 이스빌렌 친위대 기사직으로 마주치는 모두에게 예의 바르고 정중하지만 저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드러내지 아니하였던 미드프레드는, 퍽 잘 어울리는 껍질처럼 보였다. 실제로 십여 년을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그의 반응을 예상하기도, 그것을 따라 하기도 과히 어렵지 아니하였다.
“저는 다만 전하께서 건강을 해치실까 염려되어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잠깐의 시간 차이를 두고 흘러나온 대답은 정중하나 다소 책망하는 듯한 뉘앙스를 하고 있었다. 미드프레드를 떠올리고 답을 해서 그러한 것일까. 분명히 타박하는 말투인데도 자상하고 부드러운 울림이 덧붙인 말끝에 묻어났다. 마치 그가 자신을 근심하여 건넸던 무수한 언사들처럼. 저의 목소리 위로 그리운 벗의 음성이 자연스레 겹쳐지는 기분이었다.
“비록 한겨울이 지나 이곳의 해가 길어졌다고는 해도, 도성의 봄빛에는 비할 수 없을 테니까요.”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조금 어색하긴 하여도 편들어주고 걱정해주는 말을 듣는 것은 나름대로 기분 좋은 일이라고 에스피아는 생각했다. 그 안위를 근심하는 이가 눈앞의 이 청년이라면 더더구나.
슈레디안이 저를 코네세타의 왕위 계승자이며 주군으로 절대적으로 신봉하며 따르는 다른 친위대 기사들이나 궁정 신료들과는 묘하게 다른 태도로 대한다는 것을,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에스피아는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형제자매 없이 홀로 자라온 그녀에게는 예의 바르지만 은근한 친밀감이 깃든 그의 언행은 새롭고도 신기하게 다가왔다. 슈레디안의 가문이 멸문당하지 않아서 그가 크론케이터 가문의 공자로 저와 가까운 자리에서 어릴 적부터 사촌지간으로 자라났다면 이러한 느낌으로 저를 대할 것 같았다. 열여덟 평생 없었던 오라비가 갑자기 생긴 것 같다고 여기며 에스피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온종일 방 안에 있으려니 조금 숨이 막혔던 것뿐이다. 연기 냄새도 고약하고. "
나지막하게 웅얼거리며 에스피아는 손을 뻗어 창문을 닫았다.
"장작이 습기에 차 있으니까요. 하지만 실내 공기가 차가워 불을 때지 않으면 오한이 일지 모릅니다."
변명인 듯 아닌 듯 애매한 에스피아의 발언에 슈레디안이 낮게 웃었다.
"이리 앉으세요."
서늘한 기운에 차게 식은 손을 맞잡은 채 불가로 다가서는 에스피아에게 그는 가죽 모피가 깔려있는 의자를 권했다. 에스피아가 의자에 기대앉는 것을 확인한 후 그는 침대가로 걸어가 온기를 담은 모포를 가져와 그녀의 어깨에 살짝 둘러 주었다.
몸짓은 담백하지만 모포의 온기까지 고려할 정도로 세심하게 마음을 기울인 시중이었다. 딱히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은데도 언제나 돌아보면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들이 전부 마련되어 있다. 필시 란델이 이러한 것까지는 가르치지 아니하였을 터인데도.
명령 없이도 마음 한 수를 앞서보고 움직이는 것 같은 슈레디안의 태도에 에스피아는 어느덧 그를 경계하던 마음을 풀고 있었다.
"갑갑하실 수도 있겠지만 체온이 돌아올 때까지만 덮고 계십시오. 전하의 차림은 이곳의 날씨를 감당하기에는 다소 가벼운 듯하니까요."
에스피아는 한 손으로 모포 끝을 잡아 올리며 가만히 슈레디안을 바라보았다. 레논 궁에 있을 때도 느끼긴 했지만, 요즘의 그는 정말로 수더분했다.
목숨을 구걸하며 매달렸을 때도, 그리고 그 이후로도 자신의 지시에 고분고분하긴 하였지만, 예전에는 저를 어려워하는 기색이 가득하여 이런 식의 능동적인 배려는 없었다. 본인의 생명줄을 지닌 절대자에 대한 수동적인 복종, 딱 그 정도의 태도였던 것이 언제부터 이렇게 살가워졌는지는 에스피아도 알지 못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단 하나, 왕실 예법을 가르쳐 귀족의 언행을 익히게 해도, 슈레디안은 완연히 아체프렌과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그의 정체에 대해 의심을 지우지 못했던 시절, 에스피아는 슈레디안이 아체프렌과 달라 보이는 건 그의 투박하고 경박한 말투와 행실 때문이라고 여겼다. 언행이 달라 다르게 보이는 거라면 정중하고 고아한 언행을 익히게 하면 무심결에라도 아체프렌의 모습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생각하였으나, 막상 궁중 예법을 익힌 후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슈레디안은 에스피아의 예상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슈레디안의 무표정에는 아체프렌 특유의 서늘한 예기가 없었다. 무심히 서 있기만 해도 절로 느껴지던 우아함 대신 칼로 베어낸 듯한 단정함이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고, 유일하게 감정의 흔적을 담은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냉혹한 결단력 대신 온순하나 끝을 알 수 없는 열정이 깃들었다. 얼굴은 같다 하여도 인상이 달라 확연하게 구분이 되었다. 오히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더 낯설어 보여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무어라도 좀 드시겠습니까? 그들이 저녁 식사 전에 귀리 케이크와 진저티를 가져다주었습니다만."
"시큼한 맛을 그리 좋아하지 않기도 하지만, 지금은 별로 생각이 없군. 그보다 그대도 여기 앉지그래?"
에스피아는 넓은 방 안을 이리저리 오가며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는 슈레디안을 향해서 중얼거리듯 한 마디했다. 그의 수려한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스쳐 가는 듯하더니, 그는 이내 의자를 불가로 끌어왔다. 도성에 있을 때는 깍듯한 태도로 마다하더니, 낯선 곳에 와서는 마음이 풀어졌음인가. 그러나 순순히 저의 지시에 따르는 그가 더 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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