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1장 탈출 1화 시블리스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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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탈출
세레즈력 388년 5월
코네세타에 표류하여 억류당했던 아체프렌 왕자,
감시를 피해 탈출, 본국인 세레즈로 돌아오다.
-제국력 연대기 섭정공 세느비엔느 열전 발췌
1. 시블리스 도착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 사람의 얼굴조차 분간해 내기 어려울 만큼의 자욱한 안개가 사위를 휘감고 있다. 척박한 시블리스의 대지를 뒤덮고 있는 이 안개는, 동이 터오기 직전에 깔리는 코네세타 남부 영지의 미적지근한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에스피아는 열여덟 해를 살아오면서 이처럼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시야를 차단하고 있는 짙은 안개는 처음 접했다. 바로 눈앞의 사물조차 뿌옇게 만드는 장막은, 답답한 느낌을 넘어서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은 분위기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바람결 하나 없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피부에 와닿는 공기는 기이하리만큼 축축하다. 습기가 배어들어 있는 음울한 공기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회색 성벽에서 시선을 떼어내며 에스피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비가 내리치는 편이 속이 시원할 듯하다. 이번으로 두 번째 방문이 되는 셈이건만,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낯선 감각은 처음 찾아 왔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시블리스 원주민 세력의 근거지라 할 만한 거성 랭카스타의 입구를 통과한 후 이십여 분을 걸었을까. 외성 입구에서부터 에스피아의 일행을 맞이하여 지금껏 안내해오던 사내가 외성과 내성을 잇는 부교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대공 전하께선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나머지 분들은 여기까지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우리는 대공 전하의 수행원들이오. 그런데 우리 보고 내성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인가?"
상대의 발언이 기가 찬다는 듯, 친위대 대장직을 맡고있는 헬싱거드 공이 한 걸음 걸어 나오며 거의 시비조로 물었다. 주위의 공기마저 긴장시킬 만큼 강한 공격성을 표출하는 그 앞에서도, 흡사 가면이라도 뒤집어쓴 듯 무표정한 사내의 얼굴은 그대로였다.
"들으신 대로요."
헬싱거드의 한 마디와 함께 깍듯하던 공대에 실려 있던 정중함 역시도 사라졌다. 사내, 아니 클라우드 블란쳇은 나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운을 뗀 후 헬싱거드를 비롯한 에스피아의 수행원을 쭉 훑어보았다. 약관을 이제 갓 지난 젊은이라고는 하나 블란쳇은 실력 위주의 시블리스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뛰어난 무장이었다. 신분조차 밝히지 않은 코네세타의 왕위계승자의 수행원 따위에게 무례한 반말을 들을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아주 짧은 시간차를 두고 다시 흘러나온 블란쳇의 목소리는 종전보다도 더욱 차갑게 굳어있었다.
"귀국 대공 전하의 안위는 회담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우리의 명예를 다하여 지킬 것이오. 회담 결과의 성사 여부와는 무관하게 말이지. 그러니 경들은 여기서 기다리시오."
시블리스 스스로 끊임없이 주장해온 바대로, 블란쳇은 자신들이 코네세타와는 분리·독립된 존재임을 명확히 하는 발언을 스스럼없이 내뱉었다. 사내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귀국'이란 단어 속에 드리워진 노골적인 경원의 감정이 음습한 대기를 타고 울려 퍼지자, 에스피아와 자신들을 갈라놓으려는 시도에 불쾌해져 있던 친위대 기사들의 눈매가 한층 더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부러 모른 척을 하는 것인가? 이 땅 위에서 코네세타인이 아니기를 자처하는 자들은 여기 밖에 없다는 것 정도는 그대 스스로도 잘 알 터인데? "
적이나 다름없는 너희를 어찌 믿겠느냐는 헬싱거드의 발언에 일순 사내의 얼굴에 비틀린 듯한 고소가 스쳐 갔다.
"말씀하신 대로 여긴 시블리스요. 이곳은 우리 땅이고, 우리는 우리 나름의 방식을 갖고 있지. 그것이 싫다면 떠나면 될 것 아닌가?"
블란쳇은 입꼬리 한쪽만을 기묘한 각도로 끌어올려 웃음이라고 보기엔 불쾌함의 강도가 짙은 표정을 지었다. 도발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만한 말을 툭 내뱉은 그는, 자신의 발언에 대해 상대가 무어라 대꾸할 말을 찾아내기도 전에 소름이 돋을 만큼 냉담한 목소리로 뒷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무언가 착각을 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대들 쪽인 듯싶군. 공이 말하는 그 믿을 수 없는 족속들을 먼저 찾아온 건,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대화를 청해온 건, 귀국의 대공 전하시오. 우리가 아니라."
딱딱하다 싶을 만큼 분명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되쏘고 나서, 블란쳇은 공격의 화살을 에스피아 쪽으로 돌렸다.
"우리는 다만 전하께서 독립된 존재로서의 우리를 인정하고 정중히 대화를 요청하셨기에 그에 대한 예의로 받아들인 것뿐.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는 상황이란 말이오.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코네세타의 공주시여? "
어딘가 묘하게 뒤틀려 있는 듯한 웃음기조차 지운 사내의 얼굴은 무기물과도 같은 차가움을 느끼게 했다. 무얼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조차 없을 만큼 무표정한 얼굴 가운데서 유일하게 감정의 흔적을 품고 있는 것은 쏘는 듯 날카로운 시선뿐이다.
강한 눈빛이었다, 고작 안내역 따위가 가질 수 없는. 에시피아는 미소지었다. 면면은 젊으나 저자는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문무겸비를 강조하는 코네세타에서도 가장 군사력이 강한 시블리스 안에서도 최상위의 포식자, 상대의 본질을 꿰뚫어 본 에스피아는 오싹하게 빛나는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걸음 걸어 나왔다.
"아니. 틀리지 않은 말이오, 블란쳇 경. 내가 먼저 그대들에게 대화를 청했다는 것은, 이 땅이 시블리스라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사실이니 말이오."
에스피아의 순순한 대답에 블란쳇의 입매가 약간 올라간다고 느껴진 것도 잠시, 그는 예의 딱딱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이대로 수행원들을 두고 내성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요구를 거부하고 돌아가실 요량이신지요? 만약 후자를 선택한다 하여도 배후 공격이나 추격은 없을 거라 약속드리지요. 이건 코네세타에 대한 호의가 아니라, 그간 전하께서 보여주신 성의에 대한 답례이니 만큼 신뢰하셔도 좋습니다. "
일견 무례하다 받아들일 수도 있는 발언에도 불구하고, 에스피아는 단아한 얼굴 가득 태연한 미소를 떠올렸다. 코네세타의 왕위계승자로서 그녀는 이러한 순간에 뒤로 물러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것 참 고마운 충고군요.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 호의는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군 그래. 현재로서는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게 내 대답이니 말이오. 단지 산책을 위해서라기엔, 크롬 빌에서 시블리스까지는 너무 멀거든. "
"전하! "
순간적으로 헬싱거드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듯한 부름이 흩어졌지만, 에스피아는 눈길 하나 돌리지 않았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그 부름 뒤에 이어져 나올 항변을 미리 차단해 버렸을 뿐.
"그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압니다, 헬싱거드 공. 이들이 신뢰할 수 있는 상대인가에 대해선 나 역시 장담할 수 없으니 말이오. 그러나 나는 이들이 적어도 말이 통하는 상대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에스피아는 꼿꼿하게 선 채로 짤막하게 명령했다.
"그러니 내 따로 지시를 내리기 전까지는 외성에서 기다리세요. 이는 이스빌렌 대공으로서 예하 수행원들에게 내리는 명령입니다."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 듯한 에스피아의 시선에, 헬싱거드 공은 마지못해 한 걸음 물러났다. 그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숙여 명령을 받들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던 순간, 에스피아는 그 어깨 너머로 슈레디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흔들림 없이 자신에게 고정된 그 파란 눈동자에 설명하기 힘든 묘한 빛이 드리워지던 순간, 에스피아는 자신이 해야할 다음 말을 불현듯 깨달았다.
"이렇듯 나는 그대들의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소. 그러니 그쪽에서도 내 편의를 봐주었으면 좋겠군. "
"들어드릴 수 있는 한도 안에서라면 얼마든지 그리 하겠습니다. 말씀하시지요. "
에스피아는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시녀 하나와 내 친족이자 벗 한 명. 물론 그대들이 내 물리적· 정신적 시중까지 들어줄 요량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충고해 두건대 나는 좀 예민한 편이거든. 나의 편의를 위해 그대들도 조금쯤 양보할 생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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