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미치광이의 노래 6화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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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깨달음
노틸라드의 흐린 하늘에 땅거미가 안개처럼 퍼지고 있었다. 슈레디안은 멍하니 회색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계절이 더디게 찾아오는 북부 영지라 그러한가. 코네세타의 도성 크롬빌에 있었을 때 느꼈던 봄빛은, 한낮에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대기는 어디까지나 싸늘하고 건조했으며, 상처 난 살갗을 때리고 지나가는 바람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해가 졌으니 기온은 더 떨어질 것이고, 바람은 더 매서워질 터였다. 사지가 구속된 채 로크라테 영지에서 다시 노틸라드로 이동하는 배에 올랐을 때부터 지금까지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한 몸에 벌써 한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시블리스를 탈출한 이래 굶는 게 다반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공복감조차 잃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갈증은 느꼈다. 온종일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못한 목구멍이 타는 듯 아렸다. 피를 많이 흘려서 탈수 현상이 일어나는지 머리가 어지럽고 빈속은 메스꺼웠으며 시야가 아득하니 흐렸다. 슈레디안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정말로 내가 이곳을 탈출하여 미드프레드를 만날 수 있기는 한 건가. 아니, 이런 몸을 하고서 이곳에서 살아남을 순 있을까.’
다치고 지친 육체 때문일까. 약해진 마음에 어느새 포기와 체념의 감정이 깃들기 시작한다. 인간이란 어쩌면 이다지도 나약한 존재인 것인지. 그의 입가에 실소가 번진다. 미드프레드가 지구 사령관으로 있는 땅에 닿기만 하면 그를 바로 만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저의 순진한 어리석음이 지금으로서는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코네세타에서 에스피아를 수행하는 동안 그녀 몰래 빼돌려 본 몇몇 문건으로 미루어보건대 이곳 카이아의 채석장에 주둔하는 부대가 미드프레드가 지휘하는 노틸라드 지구의 상비군과 별개의 지휘체계를 가졌으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십중팔구 지구 사령관인 미드프레드가 아닌 광산 노역을 명한 세느비엔느의 측근에게로 전달될 터였다. 이 꼴을 하고서 자신이 아체프렌이라 말해봐야 믿지도 않을 것 같았으나, 섣부른 행보로 신분이 탄로 나면, 그 일을 보고받을 여왕파 인사들에 의해 저는 이런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제거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세레즈는 코네세타와의 전쟁에서 이겼고, 그 와중에 미드프레드가 전쟁영웅으로 부상했다고는 하나 전쟁의 총사령관이었던 이는 다름 아닌 저의 이복 아우 안타미젤이었다. 나라 안에서 자신의 사망은 기정사실이 되었고, 안타미젤은 선왕의 적통 왕자라는 점뿐만 아니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추후 보위 계승을 위한 정치적인 명분 또한 달성했다.
에스피아의 첩보 활동에 의하면, 도성인 다이레비드에서는 여왕파 인사들에 의해 안타미젤의 왕위 계승을 위한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 하였다. 남부 영지는 모후께서 승하하셨던 비극적 사건 이후 친여왕파 인사들로 영주들이 대거 교체되었고, 저의 생사가 묘연해지면서 수도의 대신들과 중부의 귀족들도 상당수 여왕과 안타미젤 쪽으로 돌아섰다. 북부의 영주들은 본디 도성의 권력 싸움에 초연한 편이었으나, 유목민과의 전투를 통해 성장하고 여왕의 비호를 받는 기존 군부 세력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만큼 자신에게 과히 우호적이라 할 수 없었다. 불과 2년 만에 자국의 정황이 자신에게는 너무도 불리하게 변해 버렸다. 이곳에서 자력으로 탈출하든, 아니면 다른 무슨 수를 쓰든 해서 미드프레드를 무사히 만날 수 있게 된다 하여도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복잡하게 묶인 매듭을 어디에서부터 풀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나, 가장 최우선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목숨이 붙어 있어야, 미드프레드도 만나고, 제 자리인 왕위도 되찾을 수 있지 아니한가.
생각에 잠겨 있던 슈레디안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확연히 어두워진 공터에 자그마한 인영 하나가 보였다. 새벽녘의 그 아이였다. 배에서 저에게 빵을 건네주었던, 그리고 누구 하나 나서려 하지 않았던 어제 저를 때리는 병사의 발치에 매달려 매질을 멈추어 달라 목숨 걸고 호소하던, 그리고 밤새도록 자신의 상처를 돌보아주고 끊임없이 입가에 물을 흘려주었던 붉은 머리의 소년.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오지 말라 일렀는데, 어린 것이 고집이 대단했다. 겁이 없는 것인지, 아둔한 것인지, 착해빠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찍 오고 싶었는데, 점호가 길어져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요. 미안해요. 목이 마르죠. 마실 수 있겠어요?”
낑낑거리며 물통을 들고 단 위로 올라온 소년이 자그마한 컵에 물을 담아 슈레디안의 입가에 흘려주었다. 까칠하게 메마른 입안으로 물이 조금씩 흘러들었다. 마시는 것 절반, 흘리는 것 절반이었으나 소년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가 갈증이 가실 때까지 몇 번이고 물통의 물을 떠주었다.
“밤이 되니 더 춥죠. 먹은 게 없어서 더 그럴 거 같아서 모포를 가져왔어요.”
등에 이고 온 묵직한 보퉁이를 풀자, 자그마한 무릎 덮개 크기의 담요가 나왔다. 어제 세레즈 측이 배급한 넝마와 같던 더러운 모포와 달리 크기는 작았지만 깨끗한 물건이었다. 그것으로 슈레디안의 벗은 상체를 둘러주며 소년이 어둠 속에서 멋쩍게 웃었다. 이런 건 또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어린 것이 수완이 보통이 아니었다.
“피가 멎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상처가 아물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같은 피가 흐르는 세레즈의 백성들은 저를 매질하고 만인 앞에 짐승처럼 매달아 그를 능욕하였으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적국의 꼬마가 저를 지키고자 필사적이었다. 슈레디안은 이 역설적인 상황에 웃음이 났다.
엇비슷한 상황 탓인가. 소년의 얼굴 위로 아이네즈가 겹쳐지는 것 같았다. 계모의 밀명을 받은 자국의 수행원들에 의해 상처를 입고 바다에 빠져 위기에 처한 그를 구한 것도 코네세타 출신의 여인 아이네즈와 그 아비인 플로베르였다. 그는 벌써 두 번이나 적국의 이들에게 생명을 빚졌다. 생명의 무게는 무거웠고, 그 때문인지 코네세타라는 울림이 슈레디안에게는 예전 같지 않았다.
“···이름이 뭐지?”
제 곁에 주저앉아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묻지도 아니한 말을 이어가던 소년이 뜻밖의 물음에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가 순한 눈매를 반으로 접으며 웃었다.
“르메아예요.”
잠시 후, 소년이 약간 주저하다가 덧붙였다.
“형···은요?”
형이라. 생경한 울림에 슈레디안은 잠시 멍해졌다. 친동생인 안타미젤도 저를 어려워하여 철이 들고부터는 늘 태자 전하라 불러온 까닭에 그는 형이란 단어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이름을 알게 된 이국의 꼬마에게 그러한 호칭으로 불리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으나, 아이네즈를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는 아이라 그런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슈레디안.”
“예쁜 이름이네요. 잘 어울려요.”
르메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어제도, 오늘도 네게 큰 은혜를 입었다. 언제고 반드시 보은하마. ···와준 건 고맙다만, 이만 돌아가.”
어른도 견디기 힘든 광산 노역이었다. 기존의 일들로 미루어 세레즈 측이 이들에게 먹을 것을 제대로 챙겨주거나 채석장 내 안전에 주의를 기울일 리가 없었다. 이렇게 어린 르메아가 며칠 밤을 지새운 채 힘들고 위험한 일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노곤한 몸으로 노역을 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세레즈 측이 제대로 치료해 줄 리가 없었다. 그건 굳이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아까 들어가서 잠시 눈을 붙여서 괜찮아요.”
“고집부리지 마.”
완고한 한 마디에 르메아는 빙긋 웃었다.
“진짜로 형이 생긴 것 같네요. 말 안 듣는다고 혼나는 거 처음이에요. 나, 엄마 아빠도 없이 동생만 네 명이거든요. ”
그렇게 중얼거린 르메아는 몸을 일으켰다.
“계속 묶여 있어서 손발이 저리죠? 주물러줄게요.”
“됐어. 가.”
“알았다고 하면 얼른 주물러주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르메아가 작게 되뇌는 말에 슈레디안은 할 말을 잃었다. 착한 것도 맞고, 당돌한 것도 맞았다. 어린 녀석이 말도 안 통하는 낯선 곳에 홀로 떨어져 스스로를 건사하는 것만도 벅찰 텐데 일면식도 없는 이를 위해 서슴없이 위험을 무릅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점인데 자신이 보는 눈이 없었다고 슈레디안은 생각했다. 르메아는 쇠사슬에 묶인 슈레디안의 손을 펴서 작은 손으로 주물렀다.
“여긴, 동생들 때문에 온 건가.”
“그것 말고는···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헤어진 동생들을 떠올리니 가슴이 아픈 모양이었다. 르메아의 음성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애써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형은요? 도저히 이런 데 끌려올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데 어째서···.”
“이런 데 끌려올 자가 따로 정해있는 건가.”
쓰게 웃으며 하는 나직한 대답에 르메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저처럼 가난하고 못 배운 이들이 대다수예요. 근데 형은 세레즈 말도 할 줄 알고, 말투랄까, 분위기랄까, 꼭 성안에 사는 사람들처럼 근사한 데다가, 가만히 있어도 엄청 똑똑해 보여서···.”
“착각이야. 똑똑하면 승선 첫날부터 수족갑에 채워진 채 끌려오고 도착하자마자 매질 당한 데다 이렇게 짐승처럼 묶여 있을 리가 있나.”
“그건 눈치를 보지 않아서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까 더 멍청하다는 거지.”
슈레디안의 말에 르메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어진 소년의 말은 슈레디안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말은,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일부러 그랬다는 거네요. 대체 왜 그랬어요?”
···어느 정도 사고를 쳐야 주둔군 사령관에게 연락이 가게 될지 가늠하고 싶었으니까. 부러 거슬리는 짓을 하여 채석장 감독관에게 끌려가면 그에 대한 판단을 얼추 내릴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이번 일로 고초를 겪으며 슈레디안이 깨닫게 된 건 자신 혼자의 힘으로는 미드프레드에게 연락이 가도록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었다. 지휘체계가 다른 마당에 주둔군 사령관이 첫날처럼 채석장을 자주 찾을 리도 만무했고, 설령 그가 시찰을 온다 해도 노역 인부의 하나에 불가한 그가 운 좋게 미드프레드와 마주치기를 바라는 건 기적에 가까운 확률이리라. 어지간한 일이라면 채석장 감독관은 지구관사가 아니라 성도로 보고를 할 터였다. 그러니 그럴 여유도 없으리만큼 채석장 주둔군 내부를 휘저어 놓지 않는 한 지구 관사로 연락이 갈 가능성은 없었다.
배움이 짧은 천민 꼬마를 상대로 제 셈속을 말해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저의 무심한 한 마디에서 그의 계산을 어림짐작했다는 점만으로도 르메아는 말도 안 되게 영특한 소년이었다. 비천한 출신이 안타까울 만치.
“···일하기 싫어서.”
“말하기 싫으면 더 묻지 않을게요.”
르메아는 깔끔하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슈레디안의 다리를 주물러 피가 잘 통하도록 도왔다.
“대신 나중에 저랑 다른 사람들에게 세레즈 말을 좀 가르쳐주세요.”
“그 정도쯤이야.”
순순히 허락한 슈레디안은 잠시 후 르메아를 쓱 보고는 반문했다.
“당장 필요한 말이 있나? 말하면 일러주겠다.”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를 알고 싶어요.”
르메아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슈레디안의 미간이 마뜩하지 않게 찌푸려졌다. 하나 같이 비굴하기 짝이 없었다.
“···그딴 말 몰라.”
“그럼 ‘제발 자비를 베푸세요’는?”
“야.”
“설마 ‘감사합니다’는 알죠?”
순진한 눈망울로 묻는 말에 슈레디안은 결국 마지막 말에는 대꾸를 해주었다. 세레즈 말이 신기한 듯 슈레디안의 말을 몇 번이고 따라 해보인 르메아는 몸을 일으키며 슈레디안을 돌아봤다.
“형은, 역시 우리랑 달라요. 저런 말을 몰라도 될 환경에서 자랐다는 건 그만큼 축복받은 거예요. ···그렇지만 저런 말이 절박하게 필요한 우리 같은 사람들도 세상엔 정말 많아요.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남의 자비를 구하며 비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씁쓸하게 울리는 어린 목소리에는 가혹하게 이어졌을 삶의 굴레가 묵직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자신 또한 에스피아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러한 적이 있었기에, 슈레디안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르메아의 말처럼 필요할 때 적절히 수그리며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게 현명한 행동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앉아. 물어본 건 다 가르쳐 줄게.”
슈레디안이 가르쳐 준 대로 세레즈어로 감사하다고 대답하며 르메아는 자리에 냉큼 앉았다. 쏟아져 내리는 별빛 속에서 슈레디안과 르메아의 첫 수업 시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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