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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사비칰의 이야기

남만야수왕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와사비칰
작품등록일 :
2022.05.11 22:17
최근연재일 :
2022.08.31 08:38
연재수 :
6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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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04
추천수 :
139
글자수 :
263,461

작성
22.07.1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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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망각행승 (2)

DUMMY

휘황찬란한 금빛 휘장들이 사방에 걸려있는 넓은 석실 안.


그 끝에 위치한 제단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푸른 불길 아래 놓인 거대한 옥좌에 앉아있는 천축인 여인이 맞은편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고 있는 승려와 편안히 담소를 나누고 있다.


"아미타불. 천기를 읽어보니 근래 부리를 다친 붕새 한 마리가 봉소에 날아들어 호기심이 동하였으나, 직접 당도하여 보니 붕새는 이미 떠나고 없으니 아쉬울 뿐이구려. 다만 날아오른 새가 떠나기 전 산란하여 20년 뒤에는 새로운 붕새가 이곳에서 태어날 것이니 어찌 밀교의 경사가 아니겠소. 시주께서는 부디 후대를 위해서 안정을 취하고 향후 5년간 벌어질 세상의 풍파를 멀리서 관망만 하시기를 바라오."


커다랗게 부풀어오른 맞은편 자리 여인의 배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진언하는 승려. 근심 가득한 그의 표정은 산모의 건강은 물론 그 아이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무사히 다음 세대의 영웅을 낳기 위해서는 필히 안정을 취해야만 하리라. 이에 웃으며 화답하는 옥좌에 앉은 여인은 수 개월 전 밀교의 교주로 등극한 금령이다.


"그렇군요. 망(忘) 대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그 무게와 울림은 격이 다릅니다. 날아든 붕새를 잡아두지는 못하였으나 그 후사를 얻게 되었으니 잘 길러낸다면 세상의 복이 되겠지요. 조언을 받들어 다가올 세상의 풍파에서 밀교는 한 발자국 떨어져 있겠습니다."


망 대사라 불린 남자는 염불을 외운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석실문을 나선다. 세간에 망각행승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망우 대사가 바로 이 사내라니. 그를 이미 만나본 사람도 그 무색무취한 행색과 행동거지에 쉽사리 정체를 알아채지 못하리라. 그것이 그가 이른 망각조아(忘刻朝我)라는 독문무공의 경지에 대한 반증이자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자의 모습이다.


턱을 괴고 그의 뒷모습을 덤덤하게 바라보는 금령의 마음은 사실 심란하기만 하다.


망각행승의 말을 통해 앞으로 세간에서 벌어질 사달을 충분히 유추해낼 수 있었기에. 정사대전이 끝난지 불과 2년여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새로운 분란이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뱃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아이는 물론, 그 중심에 위치한 밀교인들과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크나큰 불행이 닥치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마음은 더욱 고달플 수밖에 없으리라.


작아져만 가는 망각행승의 뒷모습처럼 앞서 이곳을 떠나간 자신의 아버지가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일전에 그를 처단하지 못하여 세상을 혼란하게 만들고 말았다는 죄책감마저 느껴진다.


전대 밀교 교주였던 이가 이제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여 이곳에서 실패하였던 의식을 개량하고 번복하면서 더욱 많은 백성들을 홀리고 있다. 쉽게 무공 고수가 될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어 그들의 휘하로 들어간 이들이 벌써 만 명이 넘는다.


한결 같으리라 믿었던 대리(大理), 대월(大越), 남송(南宋)의 관계마저 위태로워 지고 있는 지금. 태내의 아이와 남은 교인들을 위해서 혼란스러운 시국을 오로지 보고만 있어야 하는 그녀의 심정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는 이는 몇 없으리라.


석실 문 바깥에서 급히 날아든 두 명의 복면인이 그녀의 사색을 끊어낸다. 옥좌 앞에서 곧장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교주님, 북룡 폭포에 당도한 독특한 일행이 있습니다. 폭포 안으로 들어서려는 것으로 보아 전사들을 통해 이들을..."


"그들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해선 안 된다. 비동 입구로 완전히 들어서고 나서 수를 써도 늦지 않으니 감시하던 이들도 물리거라. 망 대사의 말씀처럼 우리는 그림자 속에 스며들어야 한다. 그래야 20년 뒤에 날개를 펼칠 수 있다. 그들이 먼저 우리를 찾아내기 전에는 절대 먼저 접촉하지 말아라."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발언에 순간 바닥에 조아린 채로 굳어버린 두 복면인. 허나 그들이 밀교의 전사인 이상 밀존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존명!"


일사분란하게 자리를 뜨는 두 복면인.


먼저 밀교로 통하는 비밀 통로라도 발견하지 않는 이상 이들이 나설 일은 없을 것이다.


==========================


"가 할아버지, 적야 노야가 말씀하신 친정댁은 이 근처에 있는 게 맞나요?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데...첩첩산중에 친정댁이 있다고 하신 것도 이상하니 아무래도 다시 여쭤보는 게 어떨까요?"


"아서라. 적야의 친정댁은 우리가 원한다고 언제든지 방문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근처에 당도하면 먼저 연락을 취할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마지막으로 본 이후로 세월이 너무도 흘러 더 이상 본좌를 알아보는 이가 없는 모양이로구나. 이미 우리는 잘 짜여진 진법 안에 들어왔으니 이를 어찌할꼬."


북룡폭포 근처에서 바닥에 놓인 돌들을 쌓아 올리면서 시간을 떼우고 있는 반웅과 떨어지는 폭포수 아래에서 좌선에 임하고 있는 이지노괴 가천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과 거진 다를 바 없는 이들의 행보에 아란은 제법 성이 났는지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른다.


"아아아아아아아!"


물론 그녀의 외침에도 인기척은 커녕 짐승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미약하게 반사되어 울려퍼지는 메아리만이 부름에 응답할 뿐. 허나 그녀의 간절함은 잔향에 귀를 기울이던 가천일에게 작은 실마리가 되어준 모양이다.


'반사되는 소리가 이상하구나!'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가파르게 솟아오른 산. 그곳에서 반사되어 들려와야만 하는 자연의 소리가 어딘가 이상하다. 이러한 미묘한 차이가 가천일 같은 고수에게는 진법의 허상을 파헤치는 계기가 되어주는 것이다.


'분명 높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메아리가 제대로 들려오지 않는구나! 실제로는 훨씬 작은 높이라는 얘기다. 그리하다면 중간에 드나들수 있는 작은 통로나 굴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다가오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먼저 나서야 겠구나!'


오랜 강호 경험으로 온갖 비고는 물론 암문마저 돌파한 이지노괴 가천일. 그가 두 눈을 부릅뜨고 양손에 하나씩 남은 검지 손가락으로 폭포수 위로 탄지공을 쏘아올린다.


중후하면서도 고강한 가천일의 내공이 그대로 실려 있는 기운이 자연의 이치에 따라 흘러 내려오는 폭포수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물살을 가른다. 그에 따라 아래로 흩어지던 물이 더욱 넓게 혼비백산하여 산개하니 가려져 있던 공간이 자취를 드러낸다.


"옳거니! 예상대로 굴이 있구나! 아란, 반웅! 가까이 오거라!"


돌을 쌓고 있던 반웅과 소리만 지르던 아란이 황급히 그에게 뛰어가자 가천일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그들을 안아들고 허공답보를 펼친다.


무려 오장이 훌쩍 넘는 높이를 넘어 어렵사리 도착한 암굴 안. 이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간다면 무사히 적야의 친정댁에 닿을 수 있으리라.


그들을 맞이하는 수많은 복면인들의 매서운 눈초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


사지가 꽁꽁 묶인 채 어딘가로 이송되는 반웅 일행들. 재갈과 안대까지 채운 것으로 보아 철저히 행선지를 숨길 심산이다.


'젠장. 왜 가천일 할아버지는 맞서지 말라고 하신거야! 이대로는 개죽음 당할 뿐이잖아!'


이지노괴 가천일 정도의 무공 실력이라면 굴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상한 자들을 모조리 몰살하고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었으리라. 반웅은 얌전히 잡혀야 뒤탈이 없다고 연신 당부하던 노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얼마나 걸어야 이 고행이 끝나는 거야! 친정댁은 무슨. 비밀 결사단의 은신처 같은 곳에 잠입한 것 같은데!'


속으로 가천일에 대한 욕지거리를 퍼붓던 반웅은 귓가에 울려퍼지는 한 여인의 싸늘한 목소리에 마침내 목적지에 당도하였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허리를 곧추 세웠다.


"본교에는 대체 어떤 연유로 찾아왔는가? 여행객들로 보이지는 않으나 그 사정에 따라 객으로 묵을 수도, 그대로 묻힐 수도 있으니 신중히 답하도록!"


그 이질적인 말투가 기대하던 것과 사못 달랐는지 가천일이 자신을 옥죄던 밧줄을 단번에 찢어내고 안대를 벗어던지면서 다급히 입을 연다.


"이보시오, 젊은 처자. 혹시 이곳이 밀교의 마지막 지부가 맞는가? 그리하다면 금령이라는 자를 혹시 아시오? 젊었을 적에 그와 술잔을 나누고 의형제를 맺었건만, 이런 대우는 노부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소!"


가천일이 꺼낸 '금령'이라는 이름에 얼어붙어있던 방 안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을 반웅은 느낄 수 있었다.


"본좌가 한때 지녔던 이름이 금령이다. 전대 교주였던 자를 찾는 것이라면 이미 한참 전에 본교를 떠났으니 아이들을 데리고 어서 하산하라! 과거의 그와의 연을 생각하여 목숨만은..."


"금령아! 네 아비의 오랜 친구인 나를 못 알아보는 게냐! 어릴적 놀아주던 백면서생 가천일이란 말이다!"


본좌라 자신을 칭하는 여인의 말을 끊고 오히려 설명을 이어가는 가천일. 반웅은 스스로를 백면서생이라 칭하는 가천일이 조금 못 마땅했지만 상대방에게는 제법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설마 가...아저씨? 가천일 아저씨가 맞으신가요? 세상에! 세월이 벌써 이렇게 흘렀군요!"


가 아저씨라는 낯 뜨거운 호칭으로 이지노괴 가천일을 부르기 시작하였으니 말이다.


작가의말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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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대리국을 향한 여정 (2) 22.08.26 36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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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봉소, 대월, 그리고 주술 (2) 22.08.18 30 0 9쪽
56 봉소, 대월, 그리고 주술 (1) 22.08.17 34 0 9쪽
55 전쟁의 서막 (3) 22.08.15 36 0 9쪽
54 전쟁의 서막 (2) 22.08.09 34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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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불협화음 (2) 22.08.02 33 1 9쪽
50 불협화음 (1) 22.07.31 39 1 10쪽
49 북룡폭포에서 벌어진 접전 (3) 22.07.28 51 1 9쪽
48 북룡폭포에서 벌어진 접전 (2) 22.07.26 40 1 9쪽
47 북룡폭포에서 벌어진 접전 (1) 22.07.24 44 1 9쪽
46 적야 노인의 친정댁 (2) 22.07.21 44 1 10쪽
45 적야 노인의 친정댁 (1) 22.07.19 44 1 9쪽
» 망각행승 (2) 22.07.17 46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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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북란성을 떠난 이들 22.07.12 55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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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무진이라는 사내 (3) 22.06.01 165 3 10쪽
12 무진이라는 사내 (2) 22.06.01 176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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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첫 번째 시험 - 도채밀림 (刀寨密林) (3) +1 22.05.28 207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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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첫 번째 시험 - 도채밀림 (刀寨密林) 22.05.25 261 3 9쪽
7 비동의 회의 - 억취소악 (憶吹簫樂) +1 22.05.23 301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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