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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사비칰의 이야기

남만야수왕

웹소설 > 자유연재 > 무협

와사비칰
작품등록일 :
2022.05.11 22:17
최근연재일 :
2022.08.31 08:38
연재수 :
62 회
조회수 :
8,278
추천수 :
139
글자수 :
263,461

작성
22.06.19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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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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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9쪽

하니 마을의 준예(哈尼儁乂) (1)

DUMMY

무진의 수련법에 이어 이지노괴의 수련법까지 더해지자 결국 반나절도 못 가서 탈진한 반웅. 술시(戌時)를 맞이하여 저무는 태양 아래 혀를 내민 채 바닥에서 헐떡이는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강아지 같다.


"아해야, 겨우 그 정도 수련했다고 쉬는 게냐? 무공 고수가 될 생각이 없는 모양이로구나."


올돌궈와 하후진에게 각각 부채질과 안마를 시킨 채 반웅을 꾸짖는 이지노괴 가천일. 여유롭다 못해 하품까지 하는 모습에 반웅이 내심 욕지거리를 퍼부은 건 당연한 일이다.


"노사께서 일러주신 대로 따르기에 형제의 자질이 부족하여 송구할 따름입니다."


"저희에게 가르침을 하사하여 주신다면 그 이상으로 해내겠습니다!"


반면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어떻게든 그에게서 무공을 배우려는 올돌궈와 하후진. 벌써 한 시진이나 이어진 뜨거운 열의에도 불구하고 가천일은 그저 웃어넘길 뿐이다.


"너희 둘에게는 무공을 연마하는 것을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 대체 어디서 수작을 부리는 게냐! 퍼뜩 다른 아이들처럼 농장 일이나 돕거라!"


결국 장시간 동안 자리를 비운 것이 들켜 거야휘가 직접 끌고 가니 노고가 모두 수포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어차피 오늘 네놈이 더 수련하는 건 무리일 듯하니, 이 노부와 잠시 산보라도 다녀오겠느냐?"


"...더 걷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 혼자 다녀오십시오."


산보(散步)라니. 기진맥진하여 간신히 숨이나 쉬고 있는 반웅과 대체 어딜 또 가자는 걸까. 반웅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가천일은 쉬게 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네 놈의 열 손가락이 필요해서 하는 말이거늘. 시간도 없으니 그냥 네놈은 등에 매달리고 있거라!"


결국 노인의 등에 단단히 업힌 반웅. 검지 한 쌍 밖에 안 남은 노인이 대체 무슨 연유로 그의 손을 빌리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끌끌끌. 꽉 붙잡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거라!"


처음 반웅이 고원 농장에 도착했을 때처럼 능공허도를 펼치는 가천일. 삼왕십괴 중 말석을 차지하는 노인다운 모습이다.


'대체 어디로 데리고 가시는 걸까?'


안개 낀 크고 작은 산등성이를 지나 어지럽게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허공을 달리는 이지노괴의 등에서 반웅은 운귀 고원에 오를 때는 어둠에 가려져 보지 못하였던 풍경을 눈에 담고 있다.


'산을 깎아 논을 만들다니, 산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구나.'


어느덧 숲이 아니라 다랑논이 보이기 시작하자 반웅은 노야의 행선지를 얼추 유추할 수 있었다. 제전(梯田)이 있으니 분명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다. 가천일은 텅 빈 산골 마을 초입에 도착하자 마침내 반웅을 내려주었다.


"내가 손가락이 없어 매번 빈손으로 고원을 드나드는데, 오늘은 마침 네놈이 있으니 형님께 체면치레 좀 해야겠다! 따라오거라!"


한 두 명이라도 거리에 나와 있을 법도 한데, 적막만 가득할 뿐이라니. 가천일과 함께 마을 중앙으로 나아가자 낡은 버섯 모양의 가옥들과 대비되는 화려한 주점 한 곳이 반웅의 눈에 들어온다. 왁자지껄 소리가 들려오는 걸로 보아 모두 저 곳에 모인 듯하다.


"다들 작주좌(綽酒座)의 노랫소리를 듣기 위해 모여 있구나! 운 좋은 줄 알거라!"


작주좌라니. 주점에서 노래를 파는 가녀(歌女)가 아니던가. 반웅은 대체 얼마나 뛰어나기에 마을 사람 모두가 모여들었는지 호기심이 동했다.


"어서 옵시오!"


반웅과 가천일을 반기는 주보(酒保). 허나 주점 안은 남녀노소 빼곡히 들어선 것으로 보아 더 앉을 자리는 없어 보인다.


"아무래도 만석인지라 아란의 노래를 들으러 오신 거라면 서 계셔야 될 것 같습니다."


"개의치 마시게. 귀한 기회를 어찌 차버리겠는가. 산둥성(山东省) 봉래각(蓬莱阁) 출신의 가녀가 고향 땅에 돌아왔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먼."


마침 모습을 드러낸 여인의 모습에 반웅은 넋을 잃고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홍색 사의(紗衣)를 걸치고 주점 안에서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며 정겹게 담소를 나누는 가인(佳人)의 눈부신 미모에 눈길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오늘 처음 주점을 방문한 가천일과 반웅을 알아챈 그녀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먼 산골짜기까지 소녀의 노래를 듣기 위해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곡조 올려도 되겠습니까?"


옷차림새로 보아 외지인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챈 모양이다. 가천일이 전낭에서 은자 한 냥을 허공섭물로 전하자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변한 그녀가 옆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던 반웅의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无日无夜兮不思我乡土,禀气合生兮莫过我最苦]

밤낮 없이 고향 땅을 그리워했지만,

나보다 기구한 인생을 산 사람이 있을까.


[天灾国乱分人无主,唯我薄命兮没戎虏]

천재지변에는 주인이 따로 없다고 하던데,

나는 오랑캐에게 붙잡혀 박명하게 되었구나.


[殊俗心异兮身难处,嗜欲不同兮谁可与语]

마음과 습관이 달라 어울리기 어렵고,

바라는 바가 달라 말도 통하지 않는구나.


[寻思涉历兮多艰阻,四拍成兮益凄楚]

아무리 생각해도 앞길은 막막하기만 한데,

네 박자가 구슬퍼 애달픔만 더하는구나.


"채염의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의 네 번째 박(拍)이로구나. 열여섯 나이에 극음지체(極陰肢體)로 인해 귀향한 너의 심정을 담은 듯하나 노부가 해줄 수 있는 건 없구나."


한 눈에 그녀의 병세를 파악한 가천일이 말을 마치자마자 소매에서 비수를 꺼내 들고 반웅의 목에 들이미는 아란.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에 주점 안의 그 누구도 제때 반응하지 못하였다.


"소녀의 목숨은 이미 경각에 달하였으니 더는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 부디 긍휼히 여기어 가르침을 베풀어 주십시오."


극음지체라니. 타고난 음기가 강하여 양기를 지닌 천고의 영약이 없다면 그 목숨이 열여덟 나이에 이르기 전 다하고 만다는 체질이 아닌가. 머나먼 북해빙궁(北海氷宮)에서 태어났다면 모를까, 백화궁마저 멸망한 남만에서 이를 쉽게 치료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공이란 것은 범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만능이 아니거늘. 불행한 아해의 목숨으로 겁박하여도 네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가천일의 말에도 무기를 내려놓지 않는 아란. 반웅은 매번 이토록 무방비하게 목숨을 위협 받는 자신의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목에 비수를 겨누는 건 그에게 심법을 전수해 주었던 노인을 납치한 복면인 한 명으로 족하다.


반웅은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한 자신의 목숨을 지켜내기 위해서 자신의 가슴팍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여인의 왼손에 정신을 집중해 음양조화신공을 펼쳤다. 가천일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저건 대체 무슨 사술(邪術)이냐!'


가천일은 반웅의 몸속으로 여인의 음기가 맹렬히 빨려 들어가는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치 60년 전 무림을 뒤흔든 흡성대법이 펼쳐지는 것 같지 않은가!


거대한 기운이 움직이고 있음에도 다행히 주점 안에서 이를 눈치 챈 사람은 오직 이지노괴 가천일 한 명 뿐이었다. 반웅은 기세를 올려 진파(津波)처럼 밀려드는 음기를 혼신의 힘을 다하여 빨아들였다. 엎질러진 물이니 손속에 사정을 둘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극음의 기운이 또 날뛰는가 보구나. 나의 기구한 삶이 이렇게 마침표를 찍게 되다니. 어머니, 먼 길을 떠나는 이 불효자식을 부디 용서하십시오.'


반웅을 붙잡은 채로 일다경이 지나자 아란은 자신의 몸에서 별안간 기운이 빠져나가면서 눈앞이 흐릿해지는 걸 느꼈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아무리 저항해 보아도 떨려오는 손과 발은 그녀의 명을 거부한 채 바닥으로 떨어진다. 결국 기력이 다하여 바닥에 쓰러진 아란은 자신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반웅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젠장. 대체 음기가 얼마나 많은 거야!'


반웅은 미처 다 흡수하지 못한 음기가 자신의 몸속에서 날뛰는 통에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지만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 아무리 단전 밖에 둑을 쌓고 기운이 침범하는 걸 막으려 해도 밀려드는 물량 공세는 이겨낼 수가 없는 모양이다.


'음기 흡수하다가 죽다니!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단전을 감싸던 둑이 무너지고 차가운 한기가 복부로 밀어닥치자 반웅은 이전에 은월랑의 기운을 흡수했던 때처럼 두 기운이 반발하여 뜨거운 열기가 턱 밑까지 차오를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정반대의 결과가 발생했다. 얼음장처럼 시린 기운이 그의 단전을 타고 오히려 하반신으로 뻗어나간 것이다.


'이건 또 뭔데!'


반웅은 이번에는 급격하게 쪼그라드는 그의 분신을 느끼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멀쩡히 서 있던 두 남녀가 바닥에 대(大)자로 뻗은 채 포개져 있는 모습에 가천일은 물론 주점 안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마을 주민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작가의말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술시(戌時) - 저녁 7시부터 9시 사이


다랑논, 제전(梯田) - 산을 평지처럼 깎아서 만든 논밭


산둥성(山东省) 봉래각(蓬莱阁) - 중국의 4대 명루 중 한 곳


주보(酒保) - 술집 일꾼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 - 조조가 그 재능을 안타깝게 여겨 흉노에게 잡혀간 채염을 귀향시킨 이야기를 담은 고대 악부금곡가사(乐府琴曲歌辞)


북해빙궁(北海氷宮) - 바이칼 호수 근방이라는 설이 유력하였으나, 근래 위구르 제국의 포르 바진 유적 근방으로 본다는 설을 채택하였습니다


진파(津波) - 쓰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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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불협화음 (1) 22.07.31 39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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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망각행승 (2) 22.07.17 45 1 10쪽
43 망각행승 (1) 22.07.14 57 1 10쪽
42 북란성을 떠난 이들 22.07.12 55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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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두 번째 시련 - 혼원야수공의 정수 (3) 22.06.19 100 1 9쪽
21 두 번째 시련 - 혼원야수공의 정수 (2) 22.06.19 94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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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운귀고원(云贵高原)으로 보내진 아이 (4) 22.06.11 132 1 10쪽
18 운귀고원(云贵高原)으로 보내진 아이 (3) 22.06.09 148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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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운귀고원(云贵高原)으로 보내진 아이 (1) 22.06.07 160 1 10쪽
15 무진이라는 사내 (5) +3 22.06.05 159 2 11쪽
14 무진이라는 사내 (4) +2 22.06.03 156 3 11쪽
13 무진이라는 사내 (3) 22.06.01 164 3 10쪽
12 무진이라는 사내 (2) 22.06.01 175 2 10쪽
11 무진이라는 사내 (1) 22.05.31 201 3 9쪽
10 첫 번째 시험 - 도채밀림 (刀寨密林) (3) +1 22.05.28 206 2 10쪽
9 첫 번째 시험 - 도채밀림 (刀寨密林) (2) +1 22.05.27 234 2 9쪽
8 첫 번째 시험 - 도채밀림 (刀寨密林) 22.05.25 261 3 9쪽
7 비동의 회의 - 억취소악 (憶吹簫樂) +1 22.05.23 301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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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영웅협객(英雄俠客) +4 22.05.18 325 7 10쪽
4 수련과 생사기로(生死岐路) 22.05.16 402 11 9쪽
3 야수신궁의 역사 22.05.13 466 13 9쪽
2 여정의 시작 +2 22.05.11 688 1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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