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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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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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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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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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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Collapse. (5)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이거 어떻게 모은 거야?”

“내가 투자한 회사 중에 보안회사가 있어요.”

“나래안전?”

“거기서 우연히 모은 자료에요. 우연히 제보도 받고.”


송일성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이거 불법적으로 취득한 거면. 나 안 쓴다.”

“불법 없어요.”

“우.연.히 입수했다며?”

“G.O.M강남점 설계사무소 알아보다가 우연히 삼봉백화점 최초 설계한 건축사무소를 알게 됐대요. 그때 도면을 보게 됐었나 봐요. 서초동 사는 직원들이 백화점에 쇼핑 갔다가 매장 주인들하고 이야기하다가 불안하다는 말도 듣고, 직접 건물에 데미지가 간 것을 봤다는 증언도 듣고. 그런 인터뷰한 것들을 정리한 겁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이기에 하는 생각으로 미국에서 알게 된 건축구조 전문가를 초청해서 한 번 살펴봤어요. 심각하더라구요.”

“그러니까 왜?”

“여동생이 가끔 삼봉백화점으로 쇼핑 다녀요. 우리 직원들도 많이 가고. 불안하잖아요. 아파트 무너지고 다리 끊기고 난리도 아닌데....."

“MBS에 소스 준 것도 너였어?”

“재정이가 신포고 선배님들 찾아뵙고, 부탁드렸나 봐요. 한번 다뤄주십사.”

“6mm 테이프도 있던데.... 혹시?”

“나래안전의 직원이 촬영했다고 하네요.”

“너는 고등학교 때도 몰래카메라 좋아하더니 지금도 그 짓 하냐?”


류지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아무리 부탁하는 입장이라고 해도 송일성이 너무 나간다 싶다.

잠시 대화를 멈추고 참을 ‘忍’을 마음속으로 그렸다.


“그때는 우연히 찍힌 겁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짓‘이 아니라 공익을 위한 시민의 제보이고.”

“하여간 자식이.... 그 때나 지금이나 말은 참 청산유수야.”


류지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갈까 잠시 고민했다.

황재정이 얼른 끼어들었다.


“MIT 구조공학교수가 허물고 새로 짓던가, 원래 설계를 수정해서 대대적인 보강공사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입주 매장 사장님이 해당 관청에 투서도 하고 민원도 넣어봤지만 소용없었대요. 그래서 제가 신포고 선배님들 찾아다니며 부탁드렸죠. 기사화가 되기도 했지만....”

“거기 회장이 안기부 출신이라 배경이 빵빵해. 여권 정치인들하고 두루두루 인맥이 그물처럼 뻗어있고.“

“그러니까요. 나래안전 사장이 경찰서장 출신이신데, 현직 경찰 후배들에게 소스 줬더니 내사 들어가고 얼마 안 가서 곧장 사건 엎어지더라고요. 아무래도 무섭겠죠, 건드리기가....?”


황재정이 은근슬쩍 도발했다.


“이 서류가 사실이라면 빨리 터트려야 한다는 건데.....”


송일성이 말끝을 흐리며 류지호을 쳐다봤다.


“한국의 CNN을 꿈꾼다면서요?”

“내가 아니고 회사가.”

“이거 한번 제대로 파보시죠. 혹시 알아요? 한국기자대상부터 관훈언론상 기타 등등 올킬하게 될지.”

“상 받아봐야 떡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퓰리처 받아야 팔자 피지 우리나라 언론상 받아봐야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언론인 스스로 자처한 것이다.

대중들은 모르지만 언론관련 상이 정말 많다.

재벌들이 언론인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상까지 포함하면 10개가 넘는다.

이런 상들을 받아봐야 언론인들끼리만 안다.

대중들은 관심이 전혀 없다.


“혹시 영화 찍은 것도 삼봉 엿 먹이려고 그런 거냐?”

“<Collapse> 각본 쓰기 시작한 것은 93년 1월입니다. 그때 자료 조사하다가 얻어 걸린 거고.”

“그래?”


송일성은 믿지 않는 눈치다.

류지호는 뻔뻔한 태도를 유지했다.

마지막 세 번째 참을 ‘忍‘을 마음속으로 새겼다.

황재정이 또 다시 끼어들었다.


“지호는 영화쟁이일 뿐이에요. 사회운동가나 언론인이 아니고. 사회고발이나 문제제기는 선배님 같은 분들이 하셔야죠.”

“영화감독이 예술가 아니냐. 단편영화로 온갖 사회참여적인 문제작 잘 만 찍은 놈이 무슨....”

“선배님 같은 분들이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런 시선으로 사회를 감시하고 문제제기를 해야죠.”

“세상 똑바로 바라보기가 쉽냐?”

“기자가 애꾸가 되는 순간이 그 사회는 이미 썩었다고 봐야죠.”


류지호가 냉소적으로 내뱉고 등을 의자에 기댔다.

더 이상 매달리지 않겠다는 듯.

황재정이 나설 수밖에 없다.


“최근 다녀온 사람 말 들어보면 전면개보수를 해도 모자랄 판에 땜빵식 보수만 하고 있답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혹시 모르잖아요. 정 못 믿으시겠다면 그걸 토대로 따로 심층 취재를 해보세요.”

“알겠다. 일단 접수!”


송일성이 슬그머니 서류봉투를 챙겼다.


“그나저나, 너희 회사 꽤 크다며?”

“한국 사업은 고만고만해요.”

“같잖게 겸손은.... 케이블TV가 돈만 오질라게 처먹는 하마야. 여유 되면 우리 회사에 투자 좀 해 볼래?”

“웬만하면 언론사에 투자하는 것은 신중하려고요.”

“왜?”


황재정이 슬쩍 류지호를 의식했다.


“정치권력만큼 너저분한 게 언론권력이잖아요.”

“권력을 감시하는 게 언론이야.”

“글쎄요. 권력의 개라고 하려다가..... 뭐 그렇다구요.”

“언론인 앞에 두고 너무 직설적으로 까대는 거 아니냐?”

“선배님이니까 대놓고 바른 말 하죠. 딴 기자한테 이런 말 하면 매장 당하지 않을까요?”

“매장 같은 소리 한다.... 근데 지호 후배.... 타임이 워너 먹었고, CNN의 터너가 자기 회사 먹으려고 했다며?”

“인수합병 뉴스는 헛소문입니다. 언론에서 소설 쓴 겁니다.”

“그럼 네가 TBS 잡수시려고 한 거냐?”

“언론사에는 관심 없어요.”

“강력하게 부인하는 거 보니까 진짜 그런 일이 있긴 있었나 보네.”

“......”

“미국 언제 들어 가냐?”

“.....?”

“출국하기 전에 방송 출연 한 번 해줘. 분야별 특화뉴스 <스페셜>이라고 있거든. 거기 출연해서 할리우드 영화산업에 대해 썰 좀 풀어주라.”


송재정이 은근슬쩍 서류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황재정이 화를 냈다.


“영화감독에게 무슨 부탁이 그럽니까?”

“내 말 좀 들어봐. 그 프로 패널로 연예부 후배 기자 놈이 출연하는데, 그 놈 할리우드 근처도 못 가본 놈이야. 어디서 주워들은 건 많아서 말빨로 털기는 잘 터는데... 진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지호만 하겠냐?”


황재정이 류지호를 돌아봤다.


“생방송이면 출연 못합니다. 오전 10시 비행기를 타야해서.”

“녹화는 가능하지 않을까.....?”


류지호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황재정이 얼른 말을 받았다.


“단, 출국 날 오전에 촬영해야 하는 조건으로.”

“우리 회사 24시간 돌아간다. 돼! 되고말고!”

“녹화시간은 1시간 이상 못 해요. 편집해서 20분만 내보내는 걸로.”

“40분."

"한 꼭지 겨우 채우실래요?"

"알겠다. 30분 편성. 콜?"

"......."

"고맙다, 지호야. 우리가 케이블 채널로 옮기고 조금 아니 많이 힘들다.”


연예부에 양아치가 많지만, 사회부도 만만치 않다.

굳이 류지호가 일개 기자를 관리할 필요는 없지만.

어찌되었든 고등학교 때 교감 사건부터 미운 정보다는 고운 정이 많이 든 선배다.


“혹시 미국 특파원으로 올 일 있으면 워싱턴으로 가지 말고, 뉴욕이나 LA로 오세요.”

“미국특파원?”

“워싱턴은 연고가 없어서 어떻게 챙겨드릴 수 없어요. 뉴욕이나 캘리포니아에서는 도와드릴 수 있어요.”

“네 꼬붕 되라는 말이냐?”

“그 쪽에 미국 사업체들이 모여 있어서 뉴스 소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LA폭동이나 노스리지 지진 때 선배님이 미국 특파원이었으면 한국 어떤 언론사보다 제일 빠르고 정확하게 한국으로 속보를 송달했을 걸요?”

“허허. 자식....! 역시 의리 하나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막 성년이 된 애송이었다.

그런데 불과 한 두해 사이에 기세도 그렇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나 여유가 범상치 않다.


‘나이를 먹어가며 경험이 쌓이니까, 호랑이 등에 날개가 달린 격이군.’


신포고 교감을 향해 벌였던 일들을 보면 커서 뭐가 되도 될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나 일찍 거물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특파원이고 뭐고.... 공중파에 있는 신포고 선배들보다 내게 제일 먼저 소스 주면 땡큐다.”

“삼봉 건 어떻게 하나 보구요.”


류지호는 송일성이 미국 특파원으로 오길 바랐다.

그래야 한국의 외환위기와 관련된 경고를 계속해서 던져줄 수 있으니까.


“녹화 스케줄 잡히면 재정이에게 알려주세요. 다음 일정이 있어서 이만 일어서야겠네요.”

“그래라. 이 뉴스는 내가 회사 들어가서 국장 멱살잡이해서라도 낼 테니 걱정하지 말고.”


YnTV(Yonhap News TV)는 한국의 CNN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안고 출범했다.

이전 삶에서는 삼봉백화점 붕괴사고를 언론사 최초로 전했다.

당시 서울가정법원 출입 기자가 사고가 터지자마자 본사에 제보했다.

사고 8분 만에 속보를 내보냈다.

자체적인 사망자 집계 등 케이블TV 초창기 뉴스전문채널의 위력을 아낌없이 선보였다.

특히 처음 1주일간은 다른 뉴스도, 광고도, 다 멈추고, 오로지 삼봉백화점 붕괴 뉴스만 24시간 내내 방송했다.

공중파 뉴스에 비해 인지도나 시청률에서 형편없는 수준이었기에, 차라리 삼봉백화점 붕괴 사고 전용방송을 자처했었던 것.

심지어 YnTV 취재진들이 생존자를 구출하는 일까지 있을 정도다.

CNN이 이라크-쿠웨이트 전쟁을 생중계함으로 세계적인 뉴스채널로 도약할 수 있었다.

그처럼 삼봉백화점 붕괴 뉴스 방송은 YnTV 인지도를 올리는 효과를 불렀다.

본래도 삼봉백화점에 올인하는 방송사가 YnTV인데, 나래안전시스템에서 수년 간 조사하고 수집한 방대한 자료까지 확보했다.

약간의 확인취재를 거쳐 전방위적으로 삼봉백화점 문제에 달려들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황재정은 슬그머니 걱정이 들었다.


“혹시 안 무너지면 어떻게 하지?”

“하나님께 감사드려야지, 뭘 어떻게 해?”

“그, 그렇지?”

“오너 일가가 괘씸하긴 하지만, 무고한 죽음이 없다는 거잖아. 그럼 됐지 뭘.”

“어렵다.”

“안 어려워요. 원래 언론은 사회를 감시하고, 문제제기를 하는 거야. 우리 자료를 받은 언론은 단순한 의혹제기 수준이 아니라, 명확한 근거와 증거를 가지고 보도하는 거잖아.”

“그럼 다행이지만....”

“언론이 웃긴 게 뭔 줄 아냐?”

“뭐가 웃긴데?”

“한 언론사가 확증을 가지고 특종 터트리면, 다른 언론사들이 그걸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곧바로 다 받아서 쓴다는 거야. 무조건! 심지어 확증 없이 의혹만 가지고 특종 터트려도 그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구독자나 시청자를 경쟁사에 바로 빼앗기거든. 그리고 최초 보도가 파헤치지 못한 걸 경쟁사들이 파고들기 시작하지. 그러면 뉴스 전쟁이 시작되는 거야. 온 언론이 사건을 다루기 시작하면 여론도 덩달아 움직이지.”

“근데 MBS 9시 뉴스가 특종을 하는 거야 아니면 송일성 선배가 특종을 하는 거야?”


황재정이 이미 MBS에 똑같은 자료를 전달한 바 있다.


“먼저 내보는 방송사의 특종이 되겠지.”


❉ ❉ ❉


영화 <Collapse>는 여러 가지 화제성으로 인해 첫 주 관객동원은 나쁘지 않았다.

사실 G.O.M강남점 단독 상영은 손해다.

서울 메이저 단관극장의 좌석은 최하가 1,200석이다.

한 회차 관객 숫자가 490여석의 G.O.M강남점보다 월등히 앞선다.

그 같은 좌석수의 차이를 상영 일수로 보상하는 것이 멀티플렉스 G.O.M의 전략이다.

서울 단관극장에서 한 달을 상영한다면 G.O.M에서는 두 달을 극장에 걸어둘 수 있다.

<남자는 괴로워>의 상영관은 100석 규모다.

WaW 픽처스는 이 영화를 최소 3달, 길게는 6개월 간 극장에 걸어둘 생각이다.

100석 규모 상영관에 영화를 걸고 싶어 하는 배급사가 없기 때문이다.

<Collapse>를 본 관객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저걸 보고 왜 우냐?”

“생각보다 재미없네.”

“난 너무 슬퍼!”

“볼만하던데! 왜 그래?”


관객들은 저마다 보려는 영화의 기대치와 취향이 다르다.


“얼마나 죽이는 영화인지 한번 두고 보자!”

“CG가 그렇게 리얼하다고?”

“어디 나를 한 번 울려봐!”


관객 중에는 전투적인 자세를 취하는 관객도 꼭 한 두 사람 끼어있다.

류지호는 매스컴과 인터뷰가 있을 때마다 관객들의 기대치를 낮췄다.


“<Collapse>를 보러 오실 때 유명했던 재난영화일 것이라 기대하거나 전투적인 자세를 접어두시기를 바랍니다. ‘기대가 되는 걸 어떻게 합니까‘라고 제게 따시는 분들에게는 <Collapse>에는 슈퍼스타가 없을뿐더러 스펙터클한 액션은 애초에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 무언가가 영화에 있겠지 정도의 기대감만 갖고 극장을 찾아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Collapse>가 주는 감동과 의미를 조금이라도 느끼시려면 전투적인 자세는 꼭 버리셔야 합니다.”


끼이익.


“도착했습니다! 의장님.....!”


자동차 시트에 깊숙이 몸을 기대 졸고 있던 류지호가 눈을 떴다.

시차 적응도 덜 된 상태에서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다.

류지호의 컨디션은 말이 아니었다.


푸우.


류지호가 마른세수를 하며 잠을 쫒아냈다.

고개를 좌우상하로 비틀며 정신을 수습했다.


우두둑.


류지호가 차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대기 하고 있던 의전 담당 최영미가 류지호의 옷차림을 점검했다.

하늘색 남방, 리바이스 청바지, 운동화 차림이다.

캐주얼하게 차려입고 있어서 딱히 옷매무새를 봐줄 것도 없다.


“가시죠.”


황재정이 류지호를 카페로 안내했다.


덜컹.


약간 각진 얼굴, 무쌍꺼풀, 예민한 성격처럼 보이는 30대 초반 여성이 도어벨 소리에 반응했다.

영화잡지 스크린의 송윤지 기자다.

송윤지가 막 카페로 들어서는 훤칠한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전에 자신을 비서실장이라 소개했던 청년과 여비서, 보디가드로 보이는 날렵한 인상의 남자까지.

그들 모두가 훤칠한 신장의 청년을 보호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것으로 봐서 오늘 인터뷰를 하기로 한 류지호 의장이 캐주얼 복장의 청년인 모양이다.


'딱 대학생이네....'


처음 류지호를 본 송윤지의 소감이다.

한눈에 책상물림처럼 생긴 비서실장이 곧바로 자신의 테이블로 걸어왔다.

송윤지가 기선제압이라도 하려는지 도발적으로 물렀다.


“복장이 참 편해 보이시네요?”

“......?”

“저는 화려한 정장을 입고 나올 줄 알았어요.”

“인터뷰에 누가 그런 옷을 입고 나오겠습니까.”

“씨네마21하고만 단독 인터뷰 허락하고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래서 이렇게 왔잖습니까?”


송윤지는 마치 가까운 사이처럼 스스럼없이 대화를 이끌었다.

류지호는 그녀의 태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미국으로 오시지 그러셨어요? 인터뷰가 아니라 많은 대화를 나눴을지도 모르는데.”

“편집장이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지 않아서요.”

“미국의 JHO 의장비서실에 말하면 항공권은 보내드렸을 텐데.”

“뇌물 안 받습니다.”

“지인초청입니다.”


송윤지가 턱하니 손을 내밀었다.


“스크린의 송윤지 기자예요.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류지호가 그녀의 손을 맞잡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류지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류지호가 자리에 앉자, 최영미와 경호팀이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 사이 황재정이 음료를 주문하고 왔다.

송윤지의 입에서 본격적인 인터뷰 질문이 흘러나왔다.


“감독이 아니라 작가로 할리우드에서 데뷔를 하신 거네요?”

“운이 좋았습니다.”

“메이저 스튜디오를 소유하고 있는 분이 운이라니요?”

“미니 메이저입니다.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은 JHO Pictures에 한정되어 있고.”

“뭔가 복잡하네요.”

“스티븐 아들러 감독이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E.T Entertament에서 제작을 하고, 투자와 배급을 파트너인 유니벌스 스튜디오에서 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천하의 스티븐 아들러라고 해도 유니벌스의 사장이 그린라이트를 켜지 않으면 영화를 찍을 수 없죠. 내가 미니 메이저 스튜디오의 대주주이자 이사회의장이라고 할지라도 '그러십쇼' '영화 찍으셔야죠' 하는 곳이 아니에요. 할리우드는.”

“트라이-스텔라에서 일 년에 5편에 한해서만 권리를 행사한다고요?”

“전문경영인들에게 간섭을 최소화하면서 나름대로 의사결정 구조에 참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수한 기획, 시나리오들이 많이 들어옵니다. 회사의 전문가들이 괜찮은 프로젝트를 추려놓은 것 중에서 다섯 편을 골라 그린 라이트를 켜는 거죠. 회사내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영화에 대해 숟가락을 얹는 것 뿐입니다.”


류지호가 꽤나 겸손을 떨었다.


“작가님? 의장님?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하죠? 누구는 감독이라고 하고, 누구는 회장이라고 하고. 가까이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주로 의장이라고 부르는 것 같지만.”

“편하게 부르세요. 참고로 저는 감독이란 호칭이 제일 마음에 드네요. 의장은 솔직히 듣기 부담스럽고.”

“그럼 감독님으로 하죠.”


톡톡 쏘는 말투다.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있다.

친한 사람이 아니면 차갑고 인간미 없다고 오해할 수 있는 스타일이다.


“할리우드 데뷔 작품을 재난영화로 선택한 이유가 있어요?”

“우암아파트상가가 무너진 걸 뉴스에서 보고, 끔찍한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고 있는 모든 것들이 과연 그러한가? 매년 태풍이 오면 십만 명의 이재민이 생기는데, 만약 지진이라도 나면 우린 과연 안전할까? 그런 의문이 들더라고요.”

"듣고 보니 그러네요. 우리는 한 번도 그런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긴 해요."

“솔직히 가족들이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이사 나오라고 하고 싶었다니까요.”

“그런데 실제 영화에서는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였죠.”

“지진, 화산 폭발을 다룬 영화는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이미 기획되고 있었거든요. 뒷북을 칠 이유는 없었어요.”


<트위스트>와 <데이라잇>이다.

류지호가 <Collapse>를 궁리할 때는 두 프로젝트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트라이-스텔라 오너 쯤 되면 당연히 알고 있겠거니.

다들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고 많이 놀랐어요. 영화 속에 나오는 쇼핑몰이 서초동에 있는 어떤 백화점과 너무 똑같이 생겨서. 영화가 특정 백화점을 정확하게.... 풍자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비리를 고발했다고 할까요.”

“저도 놀랐어요. 우연도 그런 우연이 다 있다니.”

“우연치고는 너무 똑같던데요?”


송윤지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호화 쇼핑몰 디자인치고 평범하다고 말하는 미국 사람도 있습니다.”

“쇼핑몰 내부도 거의 비슷한 것 같던데.... 진짜 아니에요?”

“나는 작년까지 인천에서만 살았고, 저는 주로 미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기자님이 말하는 백화점을 자주 접하지 못했어요. 차라리 나에게 친숙한 곳은 인천 부평의 백화점들이죠. 뭐 그렇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Collapse> 이야기를 해볼까요?”

“편하게 물어보세요.”

“영화가 상당히 의미심장한 것 같아요. 지금까지 할리우드 영화가 보여줬던 스펙터클의 강박이랄까 그런 전형성이 덜해요.”


류지호가 웃으면서 되물었다.


“작가가 한국인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진 않을까요?”


송윤지는 웃지 않았다.

마치 인터뷰하는 인공지능 컴퓨터 같다.


“얼핏 추모문구나 에필로그의 흰색 국화꽃을 보면 사고로 억울하게 희생된 자들을 위한 진혼곡인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영화 전편을 반추해보면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그리고 그 대가로 자신들의 무능력을 처절하게 경험해야만 했던 이들을 위한 위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떤 평론가분이 그런 리뷰를 해주셨더군요.”


당연히 미국의 영화평론가의 리뷰다.

한국의 평론가와 연예부 기자들은 시비를 거는 것인지 비평인지 모를 글들만 양산했다.


“영화는 반성을 이야기하지도, 문제의식을 드러내지도 않아요.”

“역경과 고난을 함께 이겨낼 것이라고 말하죠.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 조금이라도 뭔가를 돕고자 해요. 직접 구조현장에서 돌을 치우고 하는 도움뿐만 아니라, 아주 사소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있을 법한 도움들이죠. 똑같이 부상을 당했음에도 더욱 위중한 사람에게 양보한다든가, 휴대폰을 양보한다든가 그밖에 아주 사소한. <Collapse>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상처와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모두가 함께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평범한 사람들의 그런 노력들이 있기에 불가능은 사라지고 기적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결국 보편적인 가치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뀐 원동력은 사랑, 인간애라는. 어떤 분은 그 같은 사랑의 가치를 진부하다고 하지만.”

“재난영화의 교과서 같은 <타워링>에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인물들이 등장해요.”

“보여줄 필요가 없었어요. 이미 우리 모두 알고 있잖아요. 영화가 그들을 혼내고 벌하는 것은 잠시 통쾌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일궈낸 기적은 그것보다 훨씬 큰 여운을 남길 거라고 생각했어요.”

“재난에 처한 사람을 스토리로 푸는 방식에도 지금까지의 재난영화와 사뭇 달랐어요.”

“뚜렷한 리더라고 해야 할지 강력한 통솔력을 발휘하는 영웅이 없죠? 내년에 개봉하는 실베스테르 형님 영화에서 그런 쾌감을 맘껏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네?”

“유니벌스에서 <데이라잇>이라는 영화를 준비하고 있잖아요.”

“영화가 계속해서 관객의 예상을 비껴가더군요. 부자와 가난한 자, 상급자와 하급자 그런 계급 갈등도 다루지 않고, 인재임에도 책임이 누구에 있는가를 놓고 영화 속에서 싸우지도 않아요. 의도하신 건가요?”

“영웅이 만들어낸 기적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 돕고 이겨내며 만들어낸 기적이 좋아요. 영화 속에서 사람들이 아주 사소한 행동을 하지만 실제 그 사소한 행동은 도움을 받은 당사자에겐 결코 작은 도움이 아니에요.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의사와 간호사는 최선을 다해 사람을 치료하고, 부자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가난한 사람에게 양보하고, 가난한 사람은 자신이 먹을 걸 구조대원에게 양보하고... 서로 배려하고 아픔을 공유하는 것. 고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 심부름으로 신문사에 수재의연금을 접수할 때 봤던 광경이었죠. 지금도 매년 여름에 수재의연금을 그리고 겨울에 구세군 냄비에 많은 사람들이 돈을 기부하고 있잖아요. 그 작은 도움이 모여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하잖아요.”

“왜 하필 쇼핑몰 회장이 한국인이죠? 샌프란시스코는 일본인과 중국인이 한인들보다 많다고 하던데....”

“오리지널 시나리오에는 LA 한인타운이었어요. 그걸 감독이 바꾼 거죠.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는데 미국인들은 <Collapse>를 보고 한국인이 가해자, 미국인이 피해자라고 생각 안 해요. 누구나 다 탐욕스러운 것이니까. 그리고 영화 속에서 쇼핑몰 안에는 다양한 국가에서 온 여러 인종이 섞여 있어요. 회장만 한국인이지 임원들은 백인이거나 흑인이고, 히스패닉도 섞여 있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면 동그라미도 네모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동그라미는 그냥 동그라미입니다.”


류지호가 <Collapse>와 관련해 성심성의껏 인터뷰를 했건만.

송윤지는 전혀 엉뚱한 글을 자신의 특집기사에 넣었다.


[서해훼리호 사건 뒤에도 똑같은 원인으로 충주유람선 참극이 빚어졌다. 수많은 '부실근절' 다짐 속에서 성수대교가 무너져 버렸다. 아현동 가스폭발사고 때 온 나라의 위험 요소를 총 점검할 듯한 기세로 대책을 발표한 것이 불과 몇 개월 전이다. 정부 당국에서 그동안 즐비하게 내놓았던 대책이란 것들은 단지 여론 무마용의 국민 기만책에 불과한 것임이 드러났다. 비록 <Collapse>가 한국인이 시나리오를 썼지만, 할리우드산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이 영화가 단순히 오락영화가 아닌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영화가 전하는 휴머니즘 속에 감춰져 있는 세태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감독이 전하는 진한 인간애보다 건물이 붕괴된다는 영화 속 대사건에 더욱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결코 남 일 같이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 스크린 95년 6월 호 중에서.


작가의말

평안하고 행복한 주말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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