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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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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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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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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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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누가 자네를 말릴 수 있겠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영화작업이란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법이 거의 없다.

다행히 개강 일 주일 전에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류지호는 영화촬영으로 지친 심신을 추스를 겨를도 없었다.

포스트프로덕션 때문이 아니다.

당장 3학년 첫 쿼터를 준비해야 했다.

수강신청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해두었다.

따라서 개강에 맞춰 학교로 돌아오는 데 문제가 없었다.


“다들 오랜만이네요.”

“수고 많았어요. 보스."


뉴욕에서 매튜 그레이엄과 제나 그레이스가 날아놨다.

의장 비서실 직원들도 모처럼 한 자리에 모였다.

<The Killing Road> 크랭크업 파티 때문이다.

몇몇 배우와 스태프가 사정이 생겨 참석하지 못한 것을 빼고는 대부분의 관계자가 참석해서 크랭크업 파티를 즐겼다.

호텔에서 준비해준 음식은 스태프들의 인종만큼이나 각양각색이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도 눈에 띄었다.

류지호는 익숙한 음식 위주로 접시에 담았다.

래티 조핸슨 테이블에 앉아 차분하게 식사를 즐기는데.


“나는 쓸모가 없었어요.”


류지호가 고개를 돌렸다.


“래티, 다시 한 번 말해 줄래?”


류지호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헌데 래티 조핸슨이 음식 접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다.

풀이 죽은 모습을 보니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쓸모가 없다니?”


래티 조핸슨은 대답 없이 커다란 눈을 천천히 끔뻑거리기만 했다.

그러더니 예고도 없이 눈물 한 방울을 뚝 떨어뜨렸다.


“.....!”


류지호는 순간 당황했다.

항상 밝고 명랑한 래티 조핸슨에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줄 알았다.

류지호는 그녀의 엄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류지호와 눈이 마주친 밀레니가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영문을 모르는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래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내게 설명을 해주겠니?”


래티 조핸슨이 손등으로 눈을 슥 문질렀다.

그녀의 손등에 물기가 묻지는 않았다.

딱 한 방울을 흘렸으니까.

하지만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먹거릴 것처럼 씰룩씰룩 거렸다.


“하하. 미세스 슬라온... 혹시 내가 울린 것은 아니겠죠?”

“디렉터 때문은 아니에요.”


래티의 엄마가 류지호를 안심시키고, 손수건을 꺼내 래티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엄마와 잠시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쐴까?”

“괜찮아, 엄마.”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엄마에게 말해주겠니?”

“난 이번 영화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아. 그냥 멍청하게 서있거나 앉아있기만 했어. 나도 해리나 마리아처럼 연기를 하고 싶었는데.....힝....”


래티의 푸념에 류지호가 웃음을 삼켰다.


‘경재 같은 녀석을 할리우드에서 보게 될 줄이야....’


아역배우 이경재는 연기 욕심이 상당히 많은 녀석이었다.

그 어린 녀석이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명확하게 인지할 정도로 영특했다.

<영정사진>을 촬영할 당시 나이답지 않은 이경재의 능청스러운 연기에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역배우들은 연기를 멋지게 선보여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 한다.

작은 칭찬에도 헤헤 거리며 활기차게 현장 분위기를 이끈다.

칭찬 없이 넘어가면 이내 풀이 죽어 침울해 한다.

류지호는 웃음기를 지우며 진지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래티?”

“.....네.”

“래티가 내 영화에서 몇 장면에 나오는 줄 알아?”


도리도리.


“씬으로는 28씬. 커트로는 30~45 사이가 될 거야.”

“.....?”


래티가 발딱 고개를 쳐들어 류지호와 눈을 맞췄다.

그녀의 눈에 호기심이 어른거렸다.


“이번 영화의 총 커트 수는 대략 700 커트 정도 될 거야. 물론 조금 줄 수도 늘 수도 있겠지만 네게 주었던 스토리보드가 그랬어.”


이 당시 한국영화 한 편의 평균 커트 수는 대략 500.

많으면 700커트 정도다.

할리우드는 이보다 적어도 1.5배가 많았다.

스릴러나 액션 영화 장르는 3배 이상 차이가 났다.


“그럼 28번이 나오는 건가요?”

“아니. 그것보단 훨씬 많이 나오게 될 걸.”

“28번 보다 많이.....?”

“그 가운데는 얼굴만 나올 때도 있고, 인형을 안고 있는 모습이 나올 때도 있고,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 게 나올 때도 있어. 어느 하나 똑 같은 래티의 모습은 없지.”

“똑같은 게 없어요?”

“응.”


래티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래티는 그걸 해낸 거야. 영화를 함께 만드는 사람들 중에 쓸모가 없거나 필요가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거야. 모두가 소중한 동료지.”

“알아요. 디렉터는 모두를 차별 없이 대했어요. 친절한 분이세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진짠데.....”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 너는 나와 털북숭이 촬영감독 두 사람을 완벽하게 만족시킨 연기를 해주었어.”


류지호 자신이 말해놓고도 너무 오글거려 속이 거북했다.


“영화를 개봉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래티를 보고 깜짝 놀랄 거야. 그리고 함께 영화를 찍고 싶어 할 거야. 재능이 있으니까.”

“정말 그럴까요?”

“응.”


래티 조핸슨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졌다.

그 속에서 미소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디렉터 말처럼, 내가 진짜 연기에 재능이 있는 거였으면 좋겠어요.”


래티 조핸슨이 비로소 기운을 차렸다.

류지호가 그녀의 엄마와 눈을 마주치며 눈을 찡긋거렸다.

래티 조핸슨이 자신 앞에 놓인 물 컵을 들어 단숨에 비우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 빨리 오디션 보고 싶어. 정말 열심히 할 게.”

“그래, 지금처럼만 해.”


류지호가 특별히 간섭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빛날 아이가 래티 조핸슨이다.

아역 때부터 그 싹수를 알아본 헤이우드 앨런과 작업을 하게 될 테니까.

류지호는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래티를 <나 홀로 집에>에 출연시키면 어떻게 될까? 좀 더 성숙해지기 전에....’


<나 홀로 집에>는 후속편이 흥행에 성공한 이후로 표류 중이다.

류지호가 3편의 개발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인공인 맥커리가 몇 년 사이에 망가졌다.

외모가 망가진 것이 아니다.

갑작스런 유명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그의 부모는 후속편 출연료로 말도 안 되는 거액을 요구해 관계자들을 어이없게 만들기도 했다.

현재 맥커리의 상황은 최악을 치닫고 있다.

막장 부모가 이혼함으로써 재산과 양육권을 둘러싼 법정싸움이 진행 중이다.

사실상 영화계에서 퇴출 수순을 밟고 있다.


‘어차피 래티의 십대 시절은 가족영화 위주로 출연할 가능이 높으니까 코미디 장르 하나 추가된다고 해서 필모그래피가 망가지진 않겠지?’


생각을 정리한 류지호가 모리스 메타보이 회장에게 다가갔다.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나 홀로 집에> 3편 만들죠.”


뜬금없는 말에 메타보이 회장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정말 2편에서 멈추고 싶었어요.”

“그런데?”

“영화선택 권리를 써가면서 반대를 하는 것은 나만 손해잖아요.”

“오호! 뭔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발견한 모양이지?”

“그건 아니에요.”

“그럼 왜?”

“제가 반대한다고 해도 휴즈 엔터테인먼트와 3편까지 계약되어 있잖아요. 어차피 영화를 제작할 거 아니겠어요?”

“그렇긴 한데. 맥커리로는 무리야. 걔 상태가 어떤지는 알잖아.”

“알죠. 죠셉도 이제 이런 예산 정도의 영화를 연출할 레벨이 아니고.”


사실 모리스 메타보이는 <나 홀로 집에>가 제작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단물이 다 빠졌다고 보고 있기에.


“저기 래티 어때요?”

“자네 영화에서 유령으로 나온 여자 아이?”

“유령 아니라니까요.”


모리스 메타보이 같은 이들이 래티 조핸슨의 배역을 유령이라고 불러서 그랬을까.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다.

래티가 의기소침해진 것도 일면 이해가 갔다.


“그렇다고 치고. 귀엽지. 사랑스러운 아이야.”

“맥커리는 안되고. 새로운 아역을 데리고 와도 과연 녀석을 대체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시리즈를 접자니 아쉽고, 개발하자니 답이 없고.


“이참에 리부트를 해버리죠.”

“.....리부트?”


아직 영화에서 리부트라는 개념이 통용되기 전이다.

모리스 메타보이가 컴맹에 가깝기도 했고.

윈도우와 인터넷 등으로 퍼스널 컴퓨터가 많이 대중화 되었다고 해도, 기성세대에게 컴퓨터는 골치 아픈 신문명이다.

어쨌든 류지호는 컴퓨터 용어인 부팅과 리부팅의 개념부터 차근차근 설명했다.


“리메이크와는 다른 개념이란 말이지?”

“기존 작품의 설정 등을 모두 갈아엎고 아예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거죠. 리메이크는 원래 내용을 수정하고, 큰 틀에서 가급적 벗어나지 않도록 변화를 주는 정도에서 만들어지잖아요. 리부트는 고유 설정은 유지하되 아예 전반적인 틀을 싹 다 갈아엎고 새로 시작하는 거죠.”

“그러니까 성별을 여자 아이로 바꾸고, 지역도 바꾸고, 좀도둑 콘셉트도 바꾸자는 말이지?”

“1편이 만들어진지가 벌써 5년이 흘렀어요. 그 만큼 시대도 변했죠. 만약 래티를 캐스팅 한다면 내년 겨울에는 촬영이 들어가야 해요.”

“왜?”

“래티의 나이가 10살이라서요. 내년에 11살이 되죠.”

“그게 그거 아닌가?”

“저 녀석, 해가 바뀔 때마다 외모가 엄청 바뀔 걸요.”

“아이들이야 금방 자라기 마련이지.”

“그 정도가 아닐 텐데... 암튼 13살 정도 되면 더 이상 소녀라고 부를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때는 숙녀가 되어있을지 몰라요.”


그것도 굉장히 성숙한.


“래티라는 여자아이로 시리즈를 마무리하자는 건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야 모르죠. 2편 정도의 박스오피스 성과를 거둔다면 고민하게 될지.”

“아무래도 1편 정도의 흥행은 무리겠지.”


<나 홀로 집에> 1편의 흥행은 어느 정도 운도 따라준 면이 있었다.


“만약 프로젝트가 성사된다면 엔딩에 맥커리를 출연시킬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맥커리를?”

“특별출연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녀석을 출연시켜서 시리즈를 마무리 하던가, 리부트답게 새로운 콘셉트의 영화가 될 것이란 걸 관객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던가.”

“새로운 콘셉트?”

“예.”

“어떤?”

“예를 들어, 4편에는 흑인 소년, 혹은 소수인종 아무나가 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마음 같아서는 한국계 아역을 출연시키고 싶다.

아직은 무리다.

NASA에 근무하는 아버지를 둔 천재 한국인 꼬마.

맥커리가 선보인 아날로그 트랩이 아니라 조금 더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의 함정들.

류지호의 머릿속으로 몇 개의 아이디어가 스쳐지나갔다.

이내 생각을 멈췄다.


“5편에서는 아이들이 팀을 짜서 악당에 대항할 수도 있겠죠. 꿈같은 이야기지만 7편 즈음에 가서는 전대 주인공들이 모두 출연 할 수도 있어요. 그때 가면 모두 청년이 되어있겠네요. 그들이 우리 시리즈의 새로운 꼬마 주인공과 게임을 벌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날로그 방식이 아닌 21세기 최첨단 방식으로.”

“.....흠.”


맥커리를 캐스팅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주인공의 성별과 인종을 바꿔보자는 아이디어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팀을 짠다거나 맥커리를 특별 출연시키자는 아이디어는 없었다.

어쨌든.


“자네가 연출 하게?”

“아니요.”

“그럼?”

“트라이-스텔라의 생각은요?”

“글쎄?”

“뜸들이지 말고 말해보세요. 대단한 비밀도 아니면서.”

“레이몬드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던데?”

“뭘 했죠?”

“1,2편을 편집했지. <미세스 다웃파이어>도 했고. 최근에 <나인 먼쓰> 편집을 끝냈다고 들은 것 같아.”

“감독도 바꿔요.”

“누구로?”

“찾아봐야죠.”

“레이몬드도 나쁘지 않아.”


레이몬드 고스넬은 베테랑 편집자다.

90년대 이전에는 크게 주목할 만한 영화에 참여하진 못했다.

<나 홀로 집에> 시리즈 편집과 <미세스 다웃파이어>, <34번가의 기적> 같은 영화를 편집했다.

할리우드에서는 편집자가 감독으로 데뷔하는 경우가 그리 낯설지 않다.

문제는 지엽적인 문제에 지나치게 몰입해서 영화 만듦새는 괜찮을지도 몰라도 전반적인 영화 맛을 잘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기왕에 영화에 개입한다면 기술 스태프 출신보다 연출 전문 감독에게 맡기기고 싶은 것이 류지호의 솔직한 심정이다.


“나쁘지 않지만 아주 좋은 선택지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누구에게 맡길 생각인데?”

“생각해 본다니까요.”


모리스 메타보이는 불현 듯 자신이 류지호에게 말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프로젝트를 진행시킬지 말지를 먼저 결정해야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이미 프로젝트 진행을 기정사실화 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거 아나? 조금 쓸 만하다 싶은 감독은 시리즈의 마지막편 연출을 맡으려하지 않을 거야.”

“그렇겠죠.”


충동적으로 시리즈 재개를 결정한 것이 결코 아니다.

<나 홀로 집에Ⅲ>가 왜 망했는지 고민해봤다.

당연히 영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맥커리가 없는 것이 가장 크다.

전 세계를 뒤져보면 맥커리보다 훨씬 귀엽고 연기도 잘하는 아역이 널렸다.

그렇지만 맥커리가 두 편에서 보여준 모습을 뛰어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맥커리와 새로운 주인공을 계속해서 비교를 할 것이기에.

그래서 성별을 바꿀 생각을 해본 것이다.

이 당시 래티 조핸슨은 꽤나 귀엽고 예쁘장했다.

연기도 썩 잘했다.


“스크립트는 있어요?”

“2편을 제작할 때, 준비된 것이 있을 걸.”

“그것 먼저 보여주세요. 읽어보고 싶어요.”

“그럼 영화권리 하나를 쓰는 걸로?”

“<나 홀로 집에>를 트라이-스텔라로 가져온 사람이 누구죠?”

“큭. 그랬지.”

“이 프로젝트는 게리 켐프와 휴즈 엔터 공동으로 개발하는 걸로 해요.”

“게리? 자네 영화의 그 게리?

“작은 영화 한 편 했으니, 2,000만 달러짜리 영화 한 편 맡겨야죠.”

“게리가 마음에 든 모양이군.”

“꼼꼼해요. 감독을 편하게 해주는 프로듀서더라고요.”

“내 입장에서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데?”

“감독에게 끌려 다닌다는 뜻이 아니라, 영화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한다는 뜻이에요. 5,000만 달러 예산보다 <The Killing Road>처럼 애매한 사이즈 영화 예산이 더 다루기 힘들다는 건 Moe가 더 잘 아시잖아요.”

“그렇긴 하지.”

“일단 제 생각은 그렇다는 것이고. 빠른 시간 안에 트라이-스텔라 임원들하고 미팅 한 번 해봐요. 그들의 의견도 들어봐야죠.”

“쯧. 지독하군.”

“계속 그러실래요? 서른 편중에 영화권리 겨우 다섯 장이라고요.”

“그 말이 아니야.”

“그럼 뭔데요?”

“크랭크업 파티에서까지 다음 작업을 생각하니 하는 말이야.”

“원래 할리우드 프로젝트는 파티에서 이루어지잖아요.”

“그렇다면 더 많은 손님을 초대했어야지.”

“ParaMax 가난해요.”

“자네가 돈을 쓰면 되지.”

“저도 그러고 싶었죠. 게리가 그러지 말래요.”

“게리 캠프가?”

“저와 Moe, 알버트, 피터, 얀, 웨인스타인 형제, 매튜 그레이엄... 또 저기 맥도웰 교수님도 계시네요. 이 이상 더 화려한 파티가 어디 있냐면서. 더 부르지 말자고 하더라고요.”


모리스 메타보이가 납득했다.

트라이-스텔라의 오너와 회장, ParaMax와 트라이-스텔라 텔레비전 최고경영자, 독립영화계의 나름 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웨인스타인 형제, 명문영화과 교수들, 명문가 출신의 투자회사 사장 등.

Hues & Rhythm과 IVE Entertainment 대표와 제휴 영화사 CEO들까지 참석했다.

솔직히 시상식이 아니면 좀처럼 한 자리에 모일 수 없는 바쁜 이들이다.

그럼에도 일개 영화 크랭크업 파티에 참석했다는 것은 <The Killing Road>의 크랭크업 축하 자리인 것과 함께 인맥관리와 정보교류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일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컬버 시티에서 하기로 하고, 이제부터 파티를 즐겨.”

“이제부터 말리지 마세요. 제대로 놀 테니까.”

“하하하. 누가 자네를 말릴 수 있겠어?”


공식 파티가 끝난 후에는 영화에 출연한 UCLA 영화과 졸업반들과 클럽으로 몰려갔다.

덕분에 대기하고 있던 경호팀이 모두 출동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호원들이 또래들과 놀고 있는 류지호를 지켜보며 쑥덕거렸다.


“오늘의 보스는 완전 다른 사람인데?”

“사이코패스 영화를 찍어서 그런가?”

“하하하. 오늘 같은 날도 있어야지. 보스는 워커홀릭이야.”

“영화를 만드는 게 휴식이라고 여기는 보스이니 말 다했지 뭐.”

“난 보스처럼 살라고 하면 못 살 것 같아.”

“그 정도 머리는 있고?”


은근히 추파를 던지는 여자들이 꽤 있었다.

류지호는 웃음으로 얼렁뚱땅 넘겼다.


‘간만에 또래들하고 놀아보네.’


류지호는 오랜만에 모든 걸 내려놓고 파티를 즐겼다.


❉ ❉ ❉


전 날 류지호는 모처럼 밤 새 놀았다.

그럼에도 정신줄까지 놔버리지는 않았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기상하긴 했다.

그렇다고 숙취 때문에 크게 고생스럽지는 않았다.

스트레칭을 꼼꼼히 하고, 가벼운 조깅까지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늦잠을 잔 탓에 금방 점심시간을 맞이했다.


“소닉-콜롬비아스 스튜디오로.....”

“저희가 모르는 일정이 있습니까?”

“세트 철거하는 미술팀 격려도 할 겸. 혹시나 놓친 것은 없는지 보려고요.”


한국에서도 세트맨들은 영화인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저 목수일 뿐이다.

할리우드에서는 이들도 엄연한 영화 스태프다.

관련 기술스태프 조합이 따로 있다.

영화촬영이 끝나고 세트를 철거할 때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누가 뭐랄 사람은 없다.

하지만 류지호는 다른 할리우드 감독들과 달랐다.

함께 일한 스태프를 챙기는 세심함.

그런 것들이 계속되면 사람들은 류지호를 좀 더 친절하고 세심한 감독이라 평가할 것이다.

비록 가식적이라 할지라도.


"함께 식사하러 갑시다!"


류지호는 미술 스태프들을 소닉-콜롬비아스 스튜디오 내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들과 점심을 함께 먹었다.

헤어지기 전에는 각종 음료수와 간식거리까지 한 보따리 안겨줬다.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티노와 말릭은 이미 그의 존재를 인식한 모양이다.

류지호 역시 그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다.


“예. 안녕하세요.”

“혹시 트라이-스텔라의 류지호 회장님 아니십니까?”


류지호에게 다가온 남자는 동양인이다.

유창한 영어로 보아 이민자인 것으로 보였다.


“경영에 참여하고 있지 않아서 회장이라고 불리진 않습니다.”

“아, 제가 실수를 했군요."

“소닉 관계자 되십니까?”

“인사드립니다. 히라이 카츠키라고 합니다.”


처음 말을 걸 때는 미국식 자유분방함이 느껴졌는데, 악수를 건넬 때는 영락없는 일본인이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영광입니다. 맨 손으로 할리우드에서 메이저 스튜디오를 키우고 있으시니.... 정말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자랑스럽습니다.”


빈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히라이 카츠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아니면 메소드 연기를 펼치는 배우보다 더 탁월한 연기를 펼쳐 보이는 것이거나.


“아참 내 정신 좀 보게.... 제 소개가 조금 미진했습니다. 이번에 소닉 컴퓨터 엔터테인먼트의 미국지부(SCEA)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업무 차 소닉 픽처스를 방문했는데, 이런 곳에서 미스터 류를 만나는 행운을 갖게 되다니....”


류지호는 친절한 미소를 띤 채 가만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 컴퓨터 엔터테인먼트라는 표현이 조금 낯설겠군요. 소닉의 게임 사업부분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소닉 뮤직에서 국제 업무 부서장을 맡았다가 이번에 컴퓨터 엔터테인먼트로 옮기게 됐습니다.”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의 북미 유통을 담당하시겠군요?”

“그렇습니다.”

“힘든 시기에 플레이스테이션 사업부로 옮기셨네요.”


플레이스테이션은 출시 이후로 올해까지 게임계에서 별 볼일 없는 존재였다.

심지어 2월~3월 말까지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그 어떤 게임도 발매되지 않았을 정도다.

각종 악평과 조롱의 대상이었다.

이때만 해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소닉 플레이 스테이션이 GASE(Game Service)의 새턴과 소위 ‘차세대 게임기 전쟁’을 벌이게 된다는 것을.


“초면에 실례인 줄 알지만. 저와 잠시 티타임을 가져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시죠.”


류지호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동종 업계에서 일하고 있진 않지만, 인맥이란 언제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 알 수 없는 법.

두 사람은 컬버 시티 다운타운으로 이동해서 커피를 마시며 안면을 텄다.


“미스터 류가 Snowstorm까지 소유하고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게임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모하임씨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있지요.”


히라이 카츠키는 개발사 발굴과 차세대 게임기 발매 준비를 이끌고 있다.

‘워크래프트’라는 베스트셀러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Snowstorm Entertainment에 관심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그는 미국 시장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게임 타이틀 확보와 개발사 영입에도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직은 부장급일 뿐이지만.

일본 출신들은 특유의 영어 발음이 있다.

하지만 히라이 카츠키는 원어민에 가까운 영어를 구사했다.

미국통이란 사실에도 자부심이 엿보였다.

어릴 때부터 캐나다와 미국에서 주로 생활한 탓인 것 같았다.


“귀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유익한 대화였습니다.”

“종종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언제든지. 졸업할 때까지는 웨스트우드를 벗어날 일이 거의 없을 것 같군요.”


사람의 앞날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오늘 우연히 만난 히라이 카츠키가 나중에 소닉에서 중요한 위치에 오를지 누가 알까.

여담으로 그는 류지호의 기대를 월등히 뛰어넘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심지어 죽어가던 소닉을 되살려내게 된다.

암튼 다른 일본 기업들처럼 소닉 역시 매우 보수적인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소닉-콜롬비아스의 최고경영자는 주로 미국인이 맡았다.

하지만 최고경영자를 보좌하는 이들은 대체로 소닉 본사에서 보내는 일본인일 경우가 많된다.

소닉이 일본 기업이라고 해서 그들을 일부러 경원시 할 필요는 없다.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만행은 용서할 수 없다.

비즈니스에까지 그런 감정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복수가 별 건가. 걔들보다 더 민주적으로 더 품위 있게 더 잘 살아서 세계 속에서 더 인정받는 날이 오면, 그 날이 복수하는 날이겠지.’


한편으로 류지호는 오기가 생겼다.

일본 기업은 미국에 근사한 촬영 스튜디오를 보유하고 있다.

한국인인 자신이 뭐가 부족해서 스튜디오를 보유하지 못할까.

얼마 전까지는 대규모 촬영 스튜디오를 소유할 자금도 운영할 능력도 없어 포기했다.

점차 현실성이 높아지고 있다.

촬영 스튜디오는 일종의 메이저 스튜디오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할리우드 선셋대로에 위치한 촬영 스튜디오가 10년째 인수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했지?”


류지호의 중얼거림에 티노가 즉각 반응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에요. 혼잣말이었어요.”

“트라이-스텔라로 가시겠습니까?”

“웨스트우드로 돌아가죠. 책을 좀 읽어두어야 할 것 같네요.”

“또 책을 보신단 말입니까?”

“과목별로 B+, 아무리 못해도 B는 받아야죠. 턱걸이로 간신히 패스하면 좀 그렇잖아요.”


절레절레.


두 경호원은 몇 달 간 영화를 찍고 곧바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자신들의 보스는 누구도 못 말리는 워커홀릭이다.


‘고언형제처럼 가상인물을 만들어서 편집을 직접 할 걸 그랬나?’


류지호는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막상 촬영을 끝내놓고 보니 손이 근질근질 했다.

<The Killing Road>의 편집은 영국출신의 편집자 스펜서 베어드(Spencer Baird)가 맡았다.

70년대 <슈퍼맨>의 편집부터 가장 최근 <데몰리션맨>과 <매버릭>을 편집한 베테랑이다.

액션영화에서 탁월한 감각을 발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 초까지 워너-타임 스튜디오 소속 편집감독이었다.

액션영화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그를 범죄스릴러 장르의 편집을 의뢰한 것은 조금 특별한 이유 때문이다.

이전 삶에서 그가 <스카이 폴>을 편집했다는 사실.

류지호가 <007 시리즈> 가운데 가장 좋아했던 영화다.


[어디 있다 온 거야?]

[....지옥.]

[자네도 이제 한 물 갔어.]

[누구나 취미가 필요해.]

[자네 취미는 뭔데?]

[....부활.]


영화 <007 스카이 폴> 중에서 라울 실바와 제임스 본드가 나누는 대화다.

사람의 가치관과 이념, 관념이 쉽게 바뀔 리 없다.

그런 면에서 류지호는 바뀌지 않았다.

다만 이전 삶에서 가졌던 것들을 버리고 있을 뿐이다.

류지호의 삶은 완벽하게 리부트되었다.

그의 영화 역시 이전 삶에서 찍었던 영화의 리메이크가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영화로 채워지고 있다.


작가의말

편안하고 행복한 주말 되십시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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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자네를 말릴 수 있겠어. +8 22.08.27 5,178 168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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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The Killing Road. (13) +5 22.08.25 4,789 160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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