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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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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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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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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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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난 꿈꾸는 사람을 좋아해. (4)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Eye-MAX는 스펙터클의 재현을 기본으로 하는 영화일 경우 그 효과는 배가될 것입니다. 여기에 3D 입체영상 기술이 결합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상해 보세요. 관객은 좌석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재현하는 그 장소 어딘가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끄덕.


“Hues & Rhythm의 향후 사업방향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바로 3D 영화의 VFX 문제입니다. 게다가 3D 애니메이션과 결합하면 더욱 실제처럼 보여주고자 하는 우리의 목적을 일정부분 채워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직과 수평으로 급강하 혹은 급상승하는 움직임이나 현재 일부 대학에서 연구 중인 퍼포먼스 캡쳐 혹은 모션 캡쳐 기술과 융합하면 굉장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Hues & Rhythm Studios의 사장 조너던 휴즈가 입을 열었다.


“실사보다는 애니메이션에 더욱 강점이 있을 듯싶구만....”

“맞습니다. 당장은 예산으로 보나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실사보다는 애니메이션에서 강점을 보여주게 될 겁니다. 그러니 MPX... 편의상 Eye-MAX MultiPleX라고 부르도록 하지요. Eye-MAX MPX가 소정의 성과를 거두기 전부터 DreamFactory와 LOG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접촉해서 그들이 3D 애니메이션을 Eye-MAX 포맷으로 상영하는 것에 대해 설득을 해야 합니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의 협상은 엔지니어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다.

게다가 수익성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당장은 실현가능성도 없고.


“이 회의실에 모여 있는 여러분들은 모두 한 분야에서 수년간 연구와 개발을 진행한 경험이 있죠. Nikkor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호리우치는 디지털 카메라를 연구하고 있죠. 캔튼씨는 Eye-MAX 카메라 개발에 참여하고 있고. 트라이-스텔라의 기술이사인 버나드 휴즈는 입체영화를 작업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IVE의 기술총괄 찰스 힐러는 워너-타임 진영에서 DVD 표준화에 관여하고 있다.

인터넷 데이터베이스 사이트를 운영 중인 폴 니드햄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다만 류지호는 폴 니드햄이 Eye-MAX 영화 데이터베이스화와 차후 출시될 DVD 타이틀에도 관심을 갖길 기대했다.


“예전에는 두 대의 카메라로 3D 영화를 촬영하고, 이를 두 대의 영사기로 상영했죠. 현재는 디지털 합성기술로 인해, 촬영은 여전히 두 대의 카메라로 하지만 영사기는 한 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버나드 휴즈가 문제점을 지적했다.


“가격이 매우 비싸서 실제 극장에 보급되는 것은 무립니다.”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Eye-MAX 영사시스템 개발이 이루어져야 하는 겁니다. 아울러 3D 영사까지 가능할 수 있도록 기술을 융합시켜야 합니다.”


GMG Lab의 수석연구원 밥 세이먼드가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디지털 시네마 카메라 개발과 Eye-MAX 카메라 둘 모두에서 3D 촬영이 가능한 모델도 연구개발이 이루어져야 하겠군요?”

“궁극적으로는 그렇습니다. 디지털 기술이 필름을 대체하게 되면 시기가 문제이지 Eye-MAX 카메라의 무게도 현재의 절반까지 줄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월터 캔튼이 말을 받았다.


“예전에는 Eye-MAX 카메라도 크고 무거웠지만, 점차 바디의 무게를 줄이는 방향으로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필름 무게만큼은 해결하기 어렵지요. 디지털 카메라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3D 카메라 역시 연구개발과 실제 적용 시간이 얼마가 걸릴지 알 수 없습니다.”

“3D 부분에서는 먼저 리깅 시스템에 대한 연구개발이 선행되어야 하겠죠.”


3D영화를 촬영할 때 카메라 두 대를 수평으로 나란히 놓거나 수직으로 배치해 촬영을 한다.

2대의 카메라를 설치하는 장비를 리깅(Rigging)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리깅 시스템에는 2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사물을 포착하도록 하는 전자 감응장치가 필수다.

카메라 2대를 나란히 놓고 촬영하는 기법은 인간의 눈의 원리와 비슷하다.

만약 한쪽 눈을 감고 사물을 인식하면 거리감 등에서 양쪽 눈을 뜨고 봤을 때와 차이를 느끼게 된다.

두 눈으로 사물을 봐야 뚜렷한 입체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으로 각각의 사물의 이미지를 받아들인 뒤 그 2개의 이미지를 하나로 합쳐 사물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처럼 3D 영화는 2대의 카메라를 통해 2개의 이미지를 촬영한 뒤 극장에서 2대의 영사기로 2개의 이미지를 동시에 투영하거나, 영사기 한 대로 필름을 고속 회전시켜 왼쪽과 오른쪽 카메라의 이미지가 구별돼 스크린에 투영되도록 한다.

관객의 전용안경에는 왼쪽 눈에 왼쪽에서 촬영된 이미지가 오른쪽 눈에는 오른쪽 카메라를 통해 촬영된 이미지가 보이도록 함으로써 관객이 2개의 이미지를 하나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밥. GMG에서 3D 영화를 한 대의 영사기로 투사하는 시스템을 연구 중이지요?”

“네.”

“캔튼씨?”

“예.”

“Eye-MAX가 귀사가 가지고 있는 영사기술 일부를 GMG Lab에 제공해주기를 요청합니다.”


Eye-MAX의 모든 기술이 다 특허인 것은 아니다.

10년 안에 영화산업에 디지털 체계가 정착하면 큰 쓸모가 없는 특허들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까지 원하시는지?”

“밥과 의논해 보세요. 모회사에서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GMG Lab은 JHO 산하 기업들을 서포트 하기 위해 설립했습니다. 기술과 노하우에 대해 야박하게 굴지 않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LMI에서 디지털 데이터로 제작되는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를 준비 중입니다.”


현재 조지프 루카스는 온통 디지털 시네마(D-Cinema)에 빠져 있다.

D-Cinema는 쉽게 말해서 영화관에서 영사기를 없애고, 디지털방송 형식에 의한 영상을 스크린 위에 투사하는 일종의 중계 방식 상영시스템이다.

TV방송을 각 가정에 송출하는 것처럼, 영화 데이터를 위성을 이용해 실시간대로 극장으로 전송한다는 발상에서 시작된 시스템이다.


“버나드와 IVE의 찰스는 GMG에서 연구 중인 암호화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길 바랍니다. 우리는 불법복제라는 도둑질에 대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극장용 프린트는 부피와 무게 때문에 도둑질을 당할 염려가 없습니다. 그리고 35mm, 70mm, Eye-MAX 필름은 훔쳐가 봐야 일반인들은 그걸 볼 방법이 없습니다. DVD가 새로운 저장매체가 되고 디지털 시네마가 상용화하게 되면 디지털 데이터가 유출될 가능성이 생깁니다. 위성을 통한 데이터 송출이든, 하드디스크에 영화 데이터를 담아 극장에 배달하든, 필름과는 다른 유출 위험성이 발생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보안입니다. 즉 데이터가 암호화되어 저장될 필요가 있죠.”

“예. 보스.”


21세기 디지털 시네마의 배급과 상영은 필름시대와 다르다.

마스터링을 통해 암호화된 DCP(Digital Cinema Package)가 각지의 극장으로 배달 혹은 전송된다.

DCP를 받은 극장에서는 암호화된 파일을 디지털시네마 서버로 옮긴다.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을 하기 위해서는 암호를 풀 수 있는 키(key)가 필요한데, 이 키는 특정서버에서만 풀리도록 독립적으로 암호화되어 있다.

보통 영화와 이 암호를 풀 수 있는 키가 함께 배달되지 않는다.

각각 따로 암호화되어 배달된다.

한번 암호를 풀었더라도 특정서버에서만 풀리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영화를 다른 서버로 옮겨 상영하려면 그 서버에 맞는 키를 따로 발급받아야 한다.

따라서 영화 데이터가 들어있는 하드디스크를 누군가 손에 넣더라도 암호화를 풀지 못하면 영화를 보거나 상영할 수 없다.

상영은 디지털시네마 영사기로 하는데, 서버와 영사기 사이의 통신도 암호화되어 있다.

이러한 암호화된 신호를 받을 수 있는 영사기는 몇 개 회사 제품으로 한정되어 있다.

그로인해 디지털 시네마의 카르텔이 형성된다.

DLP(Digital Light Processing) 기술을 발명한 미국의 반도체 기업 Dallas Instruments는 자사의 칩을 미국의 Cristie, 벨기에의 Barco, 일본의 JEC에만 공급한다.

Dallas Instruments를 중심으로 영사기 회사, 디지털 시네마 서버 제조사 등이 하나의 카르텔로 묶이기 된다.

이들 기업이 사실상 영사기 시장을 나눠먹는다는 이야기다.

류지호가 Eye-MAX를 인수한 이유다.

Dallas Instruments가 형성하게 되는 카르텔 한 자리는 Eye-MAX의 차지였으니까.

어차피 Eye-MAX의 영사시스템에도 DLP가 들어갈 테고.

G.O.M 멀티플렉스를 운영하면서 또 소유한 모든 영화사가 영화를 제작할 때마다, 막대한 로열티를 지불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도 있다.

일단 Eye-MAX의 특허만 가지고 있어도, 로열티로 남 좋은 일 시켜줄 일은 없으니까.

중요한 사실은 Eye-MAX Corp.이 MPX와 DMR만 개발하기만 하면, 류지호가 마음껏 Eye-MAX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적어도 5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기간 류지호는 이전 삶에서 살짝 맛만 본 3D 영화 그리고 꿈에서나 상상해 보았던 Eye-MAX 영화를 익힐 시간을 가지면 된다.


“......”


류지호가 자신에게 쏟아진 시선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그리고 무겁지 않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경쟁자들보다 한 발 뒤쳐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시작하면 됩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문제는 실용화의 시점입니다. R&D 자금은 걱정 마세요. JHO가 책임집니다.”


짝짝짝.


버나드 휴즈가 박수를 치며 바람을 잡았다.

회의실에 모인 이들이 덩달아 박수를 쳤다.

조지프 루카스는 영화사상 최초의 컴퓨터그래픽, THX 사운드시스템 개발 등 필름테크놀로지의 메시아로 불린다

그런 그가 디지털 시네마의 최선두에 있다.

제이미 캐머론 감독은 3D 디지털 영화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무려 2억 달러짜리 <타이타닉>을 준비하면서, <스파이더맨>을 하겠다며 웨스트우드 헤드쿼터를 들락날락거리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3D 영화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다.

물론 그에게는 80페이지짜리 <아바타> 트리트먼트가 이미 준비되어 있기도 하고.


‘세계 최초의 Eye-MAX 3D 영화 타이틀은 물 건너갔지만, 죽기 전까지 원 없이 Eye-MAX 영화 찍어보자.’


세계 최초의 Eye-MAX 3D 영화는 1985년 츠쿠바 엑스포에서 상영된 <We are Born of Stars>였다.

이 영화는 11분짜리 단편영화였다.

아직까지 Eye-MAX 3D로 장편영화가 제작되지 않았다.

세계 최초의 Eye-MAX 3D 상업장편영화 타이틀은 아직 유효하단 뜻이다.


✻ ✻ ✻


비서들은 자신들의 보스를 볼 때마다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류지호 같이 지독한 일 중독증 환자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수면시간이라는 것이 있는지 의문이었다.

주중에는 하루 3시간 취침, 30여분의 낮잠.

그것이 수면시간의 전부였다.

대학을 다니는 주제에 수업시간을 제외하고 모든 스케줄이 1시간단위로 치밀하게 짜여있다.

바쁠 때는 10분 단위까지 쪼개서 움직일 때도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면시간은 3시간여의 불과했지만, 자기 전과 일어난 후 두 시간을 명상 및 호흡시간으로 빼놓고 있다.

즉, 수면 시간은 3시간 이지만, 수면 못지않게 피로를 풀어줄 수 있는 시간까지 합쳐 하루 6시간은 휴식을 취하고 있다.

류지호는 대학공부도 업무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때때로 하기 싫을 때도 있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업무.

최상위 성적을 바라지 않았다.

오로지 졸업에만 초점을 맞추고 학교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류지호다.

그런 가운데 나날이 자회사와 계열사가 늘어나고 있는 JHO Company그룹을 챙기고 있다.

한국에서 넘어오는 보고서까지 꼼꼼히 검토하고 있다.

<The Killing Road>의 포스트프로덕션을 챙기고, 영화전공 첫 학기 학점 사수를 위해를 애쓰고, 날로 사세가 확장되고 있는 한국과 미국의 기업들도 점검하는 등.

한국과 미국의 기업을 이끌어 나가고자 하는 책임감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쿼터학기제는 학사 일정이 상당히 빡빡하다.

우선 한 학기에 중간시험 2번 기말시험 1번을 소화한다.

첫 주에는 과목 소개로 넘어간다고 쳐도 3~4번째 주부터 첫 중간고사 6~8주째에 두 번째 중간고사 마지막 주에 기말고사를 치른다.

또한 중간에 프로젝트 퀴즈 과제도 별도로 진행한다.

류지호가 하루 3시간 밖에 취침을 하지 못하는 이유다.

어쨌든 쿼터제 학기는 시간이 정말 빨리 가는 것 같았다.

어느새 두 번째 중간고사까지 치렀다.

시험을 그럭저럭 치른 류지호가 오랜만에 웨스트우드 헤드쿼터에 출근했다.

너무 바빠서 읽지 못했던 시나리오들을 읽었다.

그 가운데는 친구 더스틴 린의 장편영화 시나리오도 있었다.


“평범하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본 류지호의 감상이었다.

전형적인 인디영화였다.

흔하디흔한 퀴어 영화를 벗어나지 못했다.

섹슈얼리티, 젠더, 인종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동성애적인 육체와 욕망, 환상과 로맨스가 정리되지 않고 넘쳐나는.... 몇몇 곳에서는 정치적인 선동까지도 드러낸.

뉴욕파 독립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스크립트였다.


“조금 더 공격성이 정제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어느 지점에서 두 명의 공동 감독이 타협하고 순응한 것 같았다.

류지호는 동성애자가 아니다.

그들의 성 정체성을 깊이 공감하지 못했다.

다만 영화적으로 이런 종류의 영화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준 혹은 방향성은 인지하고 있다.

일탈과 경계 허물기.

또는 기존 관념의 전복과 논쟁의 방향을 역전시키는 무엇.

표현 방식에 있어서 좀 더 풍부한 상상력과 자극적인 영감이 넘실거리는 로맨스.

가령 <필라델피아>, <해피 투게더> 같은 영화처럼.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류지호는 그들의 현재 상황을 놓고 보면 납득이 가기도 했다.

열악한 제작 환경과 형편없는 제작비.

두 감독이 기획 단계부터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럴수록 더욱 과감하고 도전적으로 이야기를 풀었으면 좋았을 텐데.”


류지호가 시나리오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톡톡.


손가락으로 시나리오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더스틴이나 존을 봐서는 그깟 카메오 출연....”


그런데 영화가 끌리지 않았다.

류지호는 책상 서랍 속에 더스틴 린의 시나리오를 넣었다.


“당장 제작에 들어가는 건 아니라고 했으니까.”


류지호는 고민을 접었다.

친구의 영화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인터폰을 눌러 비서에게 외출할 것임을 알렸다.


“제니퍼, 학교 도서관에 가서 책 좀 읽다가 집으로 갑니다.”

- 네. 보스.


류지호는 10분 후 웨스트우드 집무실을 나섰다.

결국 류지호가 책상 서랍에 넣어둔 더스틴 린의 시나리오는 영화화 되지 못한다.

대신 그들은 다른 영화를 내년에 제작하게 된다.

썩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얻게 된다.

절치부심한 더스틴 린은 몇 년이 지나서 아시아계 친구들과 영화를 찍는다.

그 영화를 통해 선댄스에서 주목을 받으며 할리우드에 입성하게 된다.


❉ ❉ ❉


LA의 태권도장을 방문할 때마다 류지호는 묘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한국인도 아닌 미국인이 남의 나라 국기에 경례를 한다.

사범 앞에서는 최고의 예를 갖춘다.

이채로운 풍경이다.

류지호가 보기에 전용운 사범의 삶은 종교지도자 같았다.

항상 겸손해야한다.

심지어 수련생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몸가짐을 바로 해야 한다.

전용운 사범은 언제나 상대보다 고개를 더 많이 숙인다.

매사 언행도 조심한다.

어른이든 아이든 부자든 가난하든 또 지위와 관계없이 상대에 대한 존중이 행동으로 묻어 나왔다.

전용운 사범의 본래 성품이 그랬던 건 아니었단다.

미국에서 태권도로 벌어먹고 살려다보니 저절로 그럴 수밖에 없다고 고백했다.


“매사 행동거지와 몸가짐을 조심해야 했지. 언제 어디서 수련생들이 나의 행실을 보고 있을지 몰라서.”


다른 무술, 예컨대 가라데와 경쟁하는 상황에서 그들보다 더 겸손한 태도를 취하다보니 언젠가부터 그것이 몸에 뱄다고 했다.

가든그로브(Garden Grove).

LA 다운타운에서 남동쪽으로 31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다.

미키마우스랜드와 나츠베리팜이 근처에 있어 호텔 등 숙박업소가 발달해 있다.

또한 한인상권과 가까워서 한국계들이 많이 사는 도시다.

1980년 초중반 태평양을 건넌 한인들은 남가주의 세 지역 중 한 곳에 주로 터전을 잡았다.

LA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밸리, 동으로 하시엔다, 남쪽은 바로 가든그로브였다.

그때부터 가든그로브는 오렌지카운티 한인커뮤니티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가든그로브에만 수백 개의 한인업소가 있어서 캘리포니아에서 두 번째로 큰 한인타운을 형성하고 있기도 하다.

점차 소득이 늘어나는 한인들이 인근의 오렌지, 샌타애나, 어바인 등으로 이주를 하고 있지만, 매년 한인축제가 열릴 만큼 오렌지카운티 한국계들의 거점도시 역할을 하고 있다.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보니 일찍부터 태권도장도 많이 들어섰다.

오렌지카운티에서도 꽤나 규모가 큰 태권도 센터.

태권도복을 입은 류지호가 전용운 사범과 윌 욱 리와 함께 도장 한편에서 몸을 풀었다.

동시에 백여 명이 수련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도장이다.

그런데 에어컨이 없다.

사방에 나있는 창문을 열어놓는 것으로 에어컨을 대신하고 있다.

전기요금이 상당히 부담되었을 터.

그런데.


“관장실에도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지 않을 걸?”

“관장님이 더위를 잘 안타세요?”


전 사범으로부터 예상 밖의 대답이 나왔다.


“수련생들이 수련하는 도장엔 없고 관장님 오피스에만 에어컨이 있다고 해봐. 제자들이 스승을 믿겠어? 우리는 저들 스승이야. 받들어 모셔야 할 상전이 아니라.”


스승으로써 모범을 보인다는 뜻이다.

돈이 없어서 에이컨 설치를 안 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에어컨을 설치해서 쾌적한 환경에서 운동하면 좋잖아요.”

“이곳은 에어로빅 센터나 Gym이 아니잖아. 무예를 수련하는 장소야.”

“고리타분한 꼰... 옛날 마인드 아닐까요?”

“창문을 모두 개방하면 땀을 식혀줄 바람이 들어온다.”


백인들의 체향이 그렇게 향기롭진 않다.

땀 냄새까지 풀풀 풍기면 좋지 않을 텐데.

암튼 해외에 나와 있는 한국인임을 떠나서 태권도인의 자긍심, 그런 것과 상관없이 돈 벌이에만 혈안이 된 태권도 사범도 많다.

그에 반해 전용운 사범은 태권도인으로 또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모범적인 시민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도 한국에서 사범들 많이 넘어와요?”

“응.”

“개념 없는 후배들 많죠?”


갓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 와서 태권도장을 차린 이들이 늘고 있다.

그들 가운데 개념 없는 이들도 종종 있어서 기존에 자리 잡고 있는 선배 태권도인들과 갈등이 생겨서 교류가 끊어지는 일도 발생하고 있다.


“사범님은 몇 단이십니까?”

“5단.”

“어, 저도 5단인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20대 사범들이 미국의 실정도 모르고 단수가 낮다고 대선배들을 무시까지 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80년대 미국으로 넘어온 이민자 가운데 여전히 4단에 머물러 있는 사범도 많았다.

미국에서는 심사추천권이 있는 고단자가 저단자의 심사를 봐주어야 하는데, 그런 고단자를 만날 기회가 없어 오랜 시간이 걸려 간신히 심사를 치루는 경우가 많았다.

전용운 사범 역시 5단까지 승단하는데 걸린 시간만 총 15년이다.

미국에서는 10년을 수련하고도 2, 3단이 고작인 경우도 많다.

그들의 수련이 모자라거나 게을러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한국보다 더욱 엄격하게 승단심사를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십대 후반의 새파란 청년이 5단이라고 하니, 미국 수련생들이 자신들의 마스터보다 더 고수인가 하는 눈초리를 보내는 일이 잦다.

나이는 어려도 종주국에서 왔으니까.


“마스터는 언제 7단, 8단, 9단 따십니까?”


수련생들이 사범들에게 자주 묻는 질문이다.


“평생을 수련해야 하니까. 앞으로 25년이 걸리지 않을까?”


이런 대답에 수련생들의 입이 딱 벌어진다.

자기들 딴엔 3년 만에 딴 검은 띠가 자랑스러웠는데, 그리고 언젠가는 사범님처럼 5단, 6단이 되고 싶었는데.

사범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인생을 다 바쳐 헌신적인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팍 떨어진다.

한때 미국 태권도인들이 승단심사 강도를 조금 낮추자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태권도뿐만 아니라, 다른 무술들도 블랙벨트를 따기가 정말 어렵다.

때문에 검은띠의 명예와 긍지는 상당한 편이다.

또한 미국에서 태권도 승단심사는 일종의 축제다.

가족 모두가 참석해 이벤트를 즐긴다.

오늘은 오렌지카운티 지역 고단자 두 명의 승단심사가 있는 날이다.

류지호와 윌 욱 리는 참관인으로 초청을 받았다.

또한 두 사람은 특별 이벤트에 나설 예정이다.

이번 심사를 주최한 태권도장 측에서 지방방송사와 언론사 기자를 부르려고 했다.

류지호는 기자가 오면 참석하지 않겠다고 했다.

추후에 보도자료를 통해 지역신문에서 기사가 나가는 것은 허락했다.


‘야박하다고 해도 할 수 없지.’


사생활이 공개될수록 파파라치만 꼬이기 때문이다.

암튼 미국에서 사범들의 고단자 심사는 공개심사로 이루어진다.

승단심사를 받아야 할 사범은 자기가 지도하는 수련생들과 지역주민들을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평소 존경하던 원로 관장님들을 심사위원으로 초빙해 공개심사를 치르는 것이 관행이다.

심사장에 시선을 두고 있던 윌 욱 리가 말했다.


“시작할 모양이다.”


그의 말마따나 승단심사를 치룰 두 명의 사범이 제자들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으며 도장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태극기에 대한 경례.

심사를 위해 모셔온 원로 관장님들께 경례.

자신의 승단심사를 구경하러 온 제자들과 관중들에게 경례.

류지호는 어딘지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건 뭐....’


자신이 심사를 보는 것도 아닌데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국기원 2단 심사와는 다른, 뭐랄까 굉장히 영화적이다.

단순한 이벤트가 아닌 것 같다.

축제라고 하기에도 뭔가 다르다.

승단심사에 스토리가 있고 드라마가 있다고 할까.


“이얍!”


사범들은 가진 실력을 전부 내보였다.

진지하게 품새를 시연하고, 겨루기를 선보이고, 수 십, 수백 장의 송판과 기왓장을 격파하고, 야구배트를 발차기로 부러뜨리고....

국기원 승단심사의 요식행위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사범들이 정신을 집중할 때는 모두가 숨소리조차 죽였다.

멋진 발차기나 격파장면이 연출되면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숨 가쁜 승단심사로 거친 호흡을 고르고, 퉁퉁 부은 손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피까지 흘리며, 있는 힘을 다하는 사범들의 모습.

어린 수련생들이 안타까움에 눈물 젖은 응원을 보내기도 했다.

사범들의 처절해 보이기까지 보이는 승단심사를 지켜보며 류지호는 감동을 받았다.

고단자로 올라갈 준비가 되었다는 걸 원로 관장님께 증명하는 한편, 제자들과 지역사회에 그저 폼만 잡은 무술가가 아닌 진짜 실력자임을 알리는 것이다.

열렬한 박수를 받으며 공개심사가 끝이 났다.

땀에 흠뻑 젖은 사범들이 원로 관장님들께 큰절을 했다.

낡은 검은 띠 대신 새로 받은 검은 띠를 허리에 질끈 매니, 도장 안은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다.

어른이고 아이고 자신들의 사범님이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태권도 사범이 영웅이 되는 순간이다.

전용운 사범이 류지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지호야, 이것이 미국에서 우리 사범들이 제자들에게 존경을 얻는 방법이란다.”


무도인인지 정치꾼인지 모를 이들만 득실거리는 서울 강남 모처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작가의말

참고 : Nikkor) - Nikon. Dallas Instruments - Texas Instruments

편안하고 행복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PS. 을병정님, illssun 늦었지만 후원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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