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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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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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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The Killing Road.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비디오 영상 속에서 수십 명의 아역배우들이 자신의 재능을 뽐내고 있다.

류지호는 6~9세 사이 아역들의 오디션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성인연기자 캐스팅이 얼추 마무리 단계다.

아역 오디션에만 두 달이 넘게 걸렸다.

조감독 터커 레이튼과 캐스팅 디렉터 수잔 베일리는 아역 캐스팅에 더욱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류지호가 좀처럼 아역을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잠시만!”


터커 레이튼이 리모컨을 눌러 화면을 정지시켰다.


“리모컨 줘봐요.”


터커가 건넨 리모컨을 조작해서 한 여자아이의 오디션 장면을 반복해서 재생했다.


“낯이 상당히 익은데...?”


수잔 베일리가 재빨리 프로필을 뒤적여 류지호가 궁금해 하는 아역을 찾아냈다.


“올해 11살입니다. 이름은 래티 조핸슨......”

“......!”


류지호가 수잔에게 손을 내밀어 프로필을 전해받았다.


“맞네... 그 래티 조핸슨....”

“특이하게 이란성 쌍둥이라네요. 여덟 살 때 이든 호크와 연극을 했다고 합니다.”

“작년에 노먼 라이너 감독의 <노스>에 출연했네요?”

“엄마가 래티의 손을 붙잡고 오디션을 보러 온 것이 기억납니다.”

“잘하든가요?”

“영리했어요.”


류지호가 프로필에 첨부된 사진들을 훑었다.

비디오 영상을 볼 때는 몰랐는데, 사진을 보니 그제야 성인이 되었을 때 모습이 보였다.


“직접 만나보시겠습니까?”

“네. 그래주세요. 래티는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네요.”

“알겠습니다.”


류지호가 래티 조핸슨(Letty Johansson)의 프로필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녀석을 보고 나니 다른 아역 배우들은 왠지 시시하게 느껴졌다.


“프로듀서 웨인스타인이 여배우 한 명을 추천하고 싶어 합니다.”

“어떤 웨인스타인이요? 밥? 아니면 하비?”

“하비입니다.”

“여배우는 마리아와 이미 계약을 했는데....”

“조앤 역할에 관심이 있답니다.”


조앤은 <The Killing Road>에서 주인공 벤의 살인 장면을 목격한 여성 캐릭터다.

시골마을 보안관 사무실로 신변 보호를 요청하게 되는데, 벤이 그녀를 처리하기 위해 FBI로 위장해서 시골마을을 방문하도록 하는 중요한 캐릭터다.


“한 명이겠죠?”

“네.”

“알겠어요. 10분 투자하는 게 뭐가 어렵겠어요. 한 번 보자고 하세요.”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스크림>처럼 웨인스타인이 가져오는 알짜배기 영화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을 뿐.

류지호는 사적으로 그와 엮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양아치와는 상종을 안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런데 하비 웨인스타인은 만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할리우드 유대계 커뮤니티는 물론이고 미국 정치계에도 인맥이 상당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는 말이 있지.’


가까이할 수도 멀리할 수도 없는 사이.

그렇게 지내는 것이 좋다.

삼류감독 류지호는 불가근불가원이랄 수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선택할 수 없었다.

이젠 아니다.

누구와 가까이 지낼 것인지.

또 누구와 멀리할 것인지.

류지호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선택할 수가 있는 명성과 지위를 갖췄다.


며칠 후.

뉴욕에 살고 있는 래티 조핸슨이 엄마와 함께 웨스트우드의 JHO Pictures로 날아왔다.

길게 늘어뜨린 금발의 머리카락, 커다란 눈동자와 오뚝한 코, 기다란 눈썹, 도톰한 입술.

성인이 되면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래티 조핸슨이다.

아역 시절의 그녀는 그야말로 인형을 연상케 하는 미소녀다.

래티가 씩씩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디렉터!”

“서부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지?”

“엄마가 신경써줘서 힘들지는 않았어요.”

“그래. 거기 앉아. 미세스....”

“밀레나 슬론이에요. 멜이고 부르셔도 되요.”

“멜도 앉으세요.”

“오디션은....?”

“바쁘세요? 다른 일정이라도?”

“아니요. 보통 오디션만 보고 떠나는지라.”

“천천히 하죠. 래티, 마실 것 좀 줄까?”


래티 조핸슨이 엄마를 쳐다봤다.


“부인은 뭐로 드릴까요?”

“.....”


멜라니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오디션을 보면서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다.

심지어 영화사에서 항공편을 보내 캘리포니아까지 초대를 받은 적도 없다.

류지호가 인터폰에 대고 말했다.


“제니퍼. 주스 세 잔 부탁해요. 한 잔은 어린이가 마실 겁니다.”

- 네. 보스!”


류지호와 모녀가 제니퍼가 가져온 주스를 마시며 사적인 부분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현재 래티 조핸슨은 뉴욕 맨해튼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살고 있으며, 미국에서 유명한 아역 지망생과 무용수를 양성하는 사립학교 PCS(Professional Children's School)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 영화 속에서 소녀는 다이얼로그가 거의 없어요. 표정과 몸짓이 대부분이죠. 그래서 특별히 대본으로 오디션을 볼 것이 없어요.”


주스를 빨아먹던 래티 조핸슨이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자유연기를 보여드릴까요?”

“왜? 래티는 나와 대화하는 게 싫어?”

“그런 건 아닌데.... 음.... 처음이에요.”

“뭐가?”

“지금까지는 그냥 연기만 하고 엄마와 집으로 돌아갔는걸요.”


그것이 일반적이다.

게다가 주인공이라면 모를까, 단역 아역을 맨해튼에서 LA까지 부르지도 않는다.


“래티는 언제부터 연기를 했지?”

“에드리안이 에이전시에 캐스팅 된 걸 보고 부러웠어요. 그래서 엄마를 졸라 오디션을 보러 다녔어요. 아마 8살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에드리안은 래티의 오빠에요. 디렉터.”

“혹시 이란성 쌍둥이라는?”

“그 아이는 헌터에요. 첫 째 에드라인이 에이전시에게 캐스팅을 된 일이 있어요. 그걸 보고 래티가 배우를 하고 싶다고 떼를 써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래티는 연기하는 거 재밌어?”

“네. 근데 날 안 써줘서 요즘엔 재미가 없어요.”


류지호는 계속해서 말을 시켰다.

그러면서 행동과 말투, 목소리 등을 관찰했다.


인형을 안고, 스케치북에 낙서를 시켜보기도 했다.


“터커, 미안한데 인형을 가져다주겠어?”


류지호는 래티 조핸슨에게 커다란 테디베어 인형을 품에 안고 있어보라고 시켰다.


“인형을 안은 상태에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려봐.”

“...그림이요?”

“그림이든 낙서든 뭐든지. 래티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래티 조핸슨은 노먼 라이너 감독의 <노스>에 캐스팅되기 전까지 수도 없이 많은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어린이가 감당하기에는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게다가 올해 11살이다.

영화 속의 소녀보다 나이가 너무 많다.

그럼에도 류지호는 오디션을 보며 마음이 기울었다.


“마지막으로 연기 한 번 볼까?”


류지호는 래티 조핸슨의 자유연기까지 확인하고 모녀를 돌려보냈다.

예정되어 있던 최종 아역 오디션은 취소됐다.

그날 아역 캐스팅을 마무리했으니까.

하비 웨인스타인이 추천한 여배우만 확인하면 캐스팅 작업이 마무리된다.


❉ ❉ ❉


산타모니카 클로버필드 대로와 올림픽 대로가 만나는 지역.

ParaMax Films 본사 주차장으로 DOYODA의 코롤라 왜건이 들어왔다.

족히 4~5년은 된 것 같은 차량 안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지저분했다.

차에서 내린 여성은 오늘 <The Killing Road>의 오디션이 예정되어 있는 로즈 맥로한이다.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의 이민자다.

10살까지 영어를 단 한마디로 못하다가 LA로 온 후로 영어와 연기를 시작했다.

올 초에 선댄스 영화에서 <둠 제너레이션>이 공개되었는데, 온갖 혹평은 다 들었다.

하비 웨인스타인이라는 독립영화 제작자와 어울리며 할리우드 유력자가 준비하는 영화의 오디션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됐다.

비록 독립영화 스타일의 저예산 영화라곤 하지만, 이미 참여가 확정된 크루나 존 터튜, 빈센트 부셰미, 마리아 베리 같은 배우들의 면면을 보면 쉽게 볼 수 없는 영화다.

조앤이란 배역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배우들 역시 하나 같이 만만치 않았다.

경력으로 치면 로즈 본인이 가장 하위권이다.

쟁쟁한 상대들을 제치고 따내야 하는 배역이란 것.

즉 만만치 않은 오디션이란 뜻이다.


후우웁.


로즈 맥로한이 주차장 한복판에서 심호흡을 했다.


‘떨리네.’


지금까지 오디션에서 떨거나 긴장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살짝 긴장된다.


똑똑.


“들어오세요.”


캐스팅 디렉터 수잔 베일로의 안내로 로즈가 오디션 룸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긴 책상에 앉아있는 세 명의 남자들을 확인했다.

중앙에 앉아있는 동양인이 뉴욕에서 본 적 있는 류지호다.

손대는 영화마다 대박을 터트린다는 미다스의 손.

망해가던 영화사를 십대에 인수해서 미니 메이저로 성장시킨 희대의 수완가.

오만하기가 마피아 보스 저리가라 할 정도인 하비 웨인스타인이 한 수 접어주는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


“안녕하세요. 로즈 맥로한이에요.”


목소리도 나쁘지 않다.

발성이나 발음 등 기본기를 잘 갖추고 있다.


‘비주얼도 괜찮고.’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고 있으면 백치미가 풍겼다.

눈을 그윽하게 뜨면 퇴폐미도 보이고.


“곧바로 시작하죠.”


터커 레이튼이 사무적인 어조로 다짜고짜 오디션을 시작했다.


“아, 아~ 음....!”


로즈 맥로한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손과 발을 풀며 긴장을 풀었다.

천천히 감정을 잡기 시작했다.


“나, 나, 난 아무 것도 말하지 않, 않았어요..... 그들은 내 말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고요.”


공포에 젖어 횡설수설하다가 느닷없이 뾰족한 비명을 터트렸다.


“악!”


울음 섞인 숨소리를 죽이려 애썼다.


“흑... 꺽... 흡.”


그럴수록 심장을 옥죄는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주르륵 흘렀던 눈물은 홍수라도 난 듯 펑펑 쏟아졌다.

대사 톤을 과장해서 올리지 않았음에도 듣는 사람 귀에 그냥 꽂히는 목소리.


“살고 싶어요. 제발..... 제, 제발......”


공포, 떨림, 체념, 간절함 복잡한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부분이다.

그녀는 감정을 한번에 폭발시키지 않았다.

은근히 연기로 밀당을 했다.

울부짖는.... 뻔 한 애원이 아니다.


슥.

훌쩍.


로즈 맥로한이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


감정을 모두 해소하지 못한 채 긴장한 표정으로 류지호의 반응을 기다렸다.


“....음.”


류지호는 계속해서 묵묵부답이다.

덩달아 게리 켐프와 터커 레이튼 역시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류지호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


로즈는 애가 탔다.

돼지 같은 하비 웨인스타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서 얻은 기회다.


“다른 것도 보여줄 수 있어요.”

“.......”


류지호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다.

오디션을 보다 말고 무슨 짓인지.

로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청하게 서서 류지호의 입만 열리길 기다렸다.


“잘 봤어요.


긴장했던 로즈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좋았나요?”

“괜찮았어요.”

“그게 다예요?”

“수고했어요. 결과는.... 나중에 연락이 갈 겁니다.”


로즈는 마음이 급했다.

류지호가 오디션 장을 빠져나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저기요! 디렉터! 나는 동양 남자와 사랑을 나눠 본 적이 없어요. 나 어때요?”


류지호가 황당한 표정으로 로즈를 쳐다봤다.


킥킥.


게리와 터커가 동시에 키득거렸다.


“로즈, 우린 감독과 배우로 만난 겁니다. 클럽이나 파티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그렇구나....가 아니라! 그렇다면 더더욱 나와 자려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난 신사에요. 그런 짓 안 합니다.”

“프로듀서는 원래 다 그러던데.....?”


류지호가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대체 어떤 쓰레기들과 작업했기에! 로즈, 난 출연을 미끼로 여배우와 잠자리를 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로즈는 물러서지 않았다.


“나도 내가 끌리지 않는 남자에게 치근거리지는 않아요.”

“그렇게 웨인스타인씨와 잠자리를 한 후 기회를 얻었어? 그 재능을 제대로 살려서 앞으로 죽 이어갈 자신은 있고?”


류지호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너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배우지망생은 널리고 널렸어. 그 중에는 프로듀서나 감독과 살을 섞은 후 기회를 얻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걸로 단숨에 스타가 될까? 아마 만 명의 한 명일걸? 빨리 가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도 있어. 부디 네 무기가 연기력이나 본연의 매력이 아닌 육체가 되질 않길 바라.”


그냥 꺼지라고 한 미다 하면 된다.

그럼에도 류지호는 충고를 했다.


“하비와 친하게 지내지 마.”

“친구 아니었어요?”

“친구 아냐.”


류지호가 찬바람이 불 정도로 쌀쌀맞게 사무실을 나섰다.


“디렉터 류!”


로즈가 황급히 류지호를 막아섰다.


“사실 지금까지 연기한 거예요! 조금은 디렉터 류와 사귈 마음은 있지만, 아니 이건 못 들은 걸로 하세요! 디렉터 류가 아무 반응이 없어서 계속 연기를 한 거라고요!”


류지호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비켜... 가드를 부르기 전에.”


입술을 깨물며 로즈를 비켜섰다.

게리와 터커가 피식피식 웃으며 류지호를 따라 나섰다.

그들에게는 이 같은 일이 처음은 아닌 모양이다.


으아악!


로즈가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중요한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오늘을 위해 며칠 동안 얼마나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정말, 연기였다고요! 무슨 감독이 배우가 연기하는 것도 못 알아봐!”


로즈는 한참을 오디션 룸에 머물렀다.


“오랜만에 현실감 넘치는 연기를 보여줬는데... 뭐야 이게!”


괴로워하다가 피식피식 웃다가.

머리만 풀어헤치면 마치 실성한 여자처럼 보였다.

한동안 로즈는 종잡을 수 없는 감정 상태를 오갔다.

로즈가 홀로 남아 괴로워하거나 말거나.

게리가 류지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개성이 강해서 마니아층을 제법 모을 수 있을 것 같더군요.”

“그렇겠죠. 평범한 친구는 아닌 것 같아요.”


로즈는 인터뷰 내내 말도 정말 똑 소리 나게 잘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는데 그것이 결코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조앤이라....”


❉ ❉ ❉


류지호가 하는 일은 일종의 특수한 직종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감독이나 배우가 폼 나 보인다.

한 번 뜨고 나면 다음부터는 순조로울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과거로 돌아온 류지호가 다시 한 번 이 특수한 직종에 종사하면서 느낀 것은 꼭 그렇지만 않다는 것이다.

예술계, 대중매체 종사자 모두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맞다.

어릴 때 이야기다.

어느 정도 연차가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선천적인 재능은 점점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다.

계속해서 자기 개발을 하고, 새로운 트렌드를 훈련해야 한다.

선천적인 재능만 가지고 오랜 시간 유지가 어렵다는 것이다.

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까지 수많은 청춘 무비스타가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타고난 재능과 외모 조건만 믿고 안일하다가 어느 순간, 특히 나이 먹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용도 폐기된 경우가 부지기수다.

할리우드에 남아 있는 배우들은 끝까지 자기 개발을 하고, 창조를 고민하고, 자기의 부족함을 고민하고, 새로운 것들을 훈련한 사람들이다.

게다가 할리우드 바닥에서 비즈니스로는 한계가 있다.

예술분야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것은 진리다.

특히 영화에 있어서는.


“넌 재능이 충분해. 아니 넘쳐.”


류지호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다.

그렇다면 본인은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여기고 있을까.


“아니. 난 평범한 편이지.”


이전 삶까지 포함해 4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영화를 하고 있다.

과거로 돌아와서 만든 영화들은 사실 새로울 것이 없다.

<Life Goes On>의 원 씬 원 커트(싱글 쇼트 영화)와 <Help Me, Please>에서 좀비에게 인격을 가미한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처음 시도한 것들은 아니다.

놀라운 실험이었고, 찬사를 받아 마땅한 시도였긴 하지만.

게다가 단편영화였기에 더더욱.


“가깝게는 태런티노, 멀게는 누벨바그 감독들, 그들의 영화와 비교하면 평범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


영화역사에 영원히 기록되고, 영화학도를 위한 교재로 사용되는 영화는 그 이유가 다 있다.

그들만의 영화관과 예술가 정신으로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 냈기 때문이다.

영화 문법에서부터 이야기를 창조하고 묘사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영화와 비교하면 류지호의 작품들은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

단 하나.

재능이라면 재능일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했다.

바로 30년의 현장 경험이다.

어떤 시기나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다를 것이 없다.

제 아무리 제작비가 상승하고,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도.

흔히 영화를 감독의 예술이라고 한다.

영화의 전 부분에 감독이 관여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도 된다.

특히 감독에게 중요한 것이 배우와의 소통이다.

경험이 많은 배우의 경우 자신이 연기해야 할 캐릭터에 대해 감독의 의도를 때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랜 시간 연기를 하다보면 자기 연기의 색깔이 강하게 생기게 된다.

오히려 영화에서 그런 자기의 색깔을 감독에게 설득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 과정에서 마찰이 생길 수가 있다.

특히 신인 감독이 추상적인 캐릭터와 실제 연기의 인지가 부족할수록 배우 쪽에 끌려가기 쉽다.

류지호 역시 이전 삶에서 연차가 오래된 배우에게 휘둘린 적이 있었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캐릭터의 성격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배우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로 돌아와 단편영화를 작업하면서 류지호는 배우에게 시나리오의 내용을 알려주는 디렉션을 준 적이 없다.

캐릭터 고유의 성격, 심리상태, 장면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배우와 사전에 충분히 교감했기 때문이다.

소통은 지시나 일방적인 설명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같은 관심사를 놓고 대화하고 의논하고 토론하는 것이다.

해리슨 노튼은 학구열과 탐구심이 대단한 배우다.

틈만 나면 류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 벤은 인간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악마에 가깝습니까?

“그는 분명한 인간이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일 뿐. 평범한 사람이 악마에게 영혼을 저당 잡혀 악행을 저지르는 건 아닙니다.”

- 하지만 그의 성부터가 사이퍼이지 않습니까? Ben Cifer.


확실히 해리슨 노튼은 똑똑했다.


“물론 루시퍼에서 따온 건 맞아요."


Lucifer는 '샛별‘ ’계명성‘의 의미로 ’빛나는‘을 뜻하는 라틴어 luciferi에서 왔다.

일부 대중문화에서 마치 악마나 타락한 천사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처럼 사용하는데, 사실 잘못된 상식이다.

Cifer 혹은 Cypher는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Lucifer를 암시하거나 복선의 말장난으로 사용된다.

가령 Mr. Luis Cifer, Lieu Cifer, John Cypher처럼.

영어권에서는 Cifer보다 암호라는 의미의 Cypher나 Cipher가 훨씬 많이 쓰인다.

영화 <매트릭스>의 배신자가 바로 Cypher다.

사실 Cifer보다는 0. 암호, 열쇠 같은 뭔가 있어 보이는 cypher나 cipher가 대중문화에서 주로 사용된다.


“그것에 휘둘리진 말아요. 이 영화는 <엔젤 하트>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연쇄살인마를 모델로 하고 있으니까.”

- FBI 요원을 연기한다는 부분에서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벤은 아이비리그에서 법률을 공부했을 정도로 명석한 남자죠.”

- 그는 똑똑해요. 매우.

“게다가 자신이 전혀 경험해 본 적 없는 직업을 어떻게 행세해야하는지 알아요. 진지하게 임무에 충실한 FBI 요원 행세를 한다면 언젠가 파탄이 드러날 것이란 것도 잘 아는 거죠. 그래서 그는 떠버리에 유쾌한 남자로 연기를 하는 거예요. 적당히 속물근성이 있는.”

- 벤의 그런 연기에 시골의 순박한 보안관들이 속아 넘어갈 수 있다고 보십니까?

“떠버리에 능청스럽고 다소 허점이 많은 남자라는 걸 강하게 인식시키면 이후 그에 대한 의심을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지요.”

- 그래서 보안관과 첫 만남에서 투덜거리는 거군요? 상관들이 자신이 신참이란 이유로 이런 시골로 보냈다고 말이죠.

“맞아요. 영화 속에서 벤의 연기는 실제 어설퍼요. 하지만 사전에 사람들에게 신참, 떠버리, 경솔함, 엉성함 따위의 암시를 계속 주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은 쟤는 그럴 만한 위인이 못돼. 설마 쟤가 연쇄살인마일 리가 없어. 하는 생각을 품게 되는 거죠.”

- 관객을 납득시키는 것이 꽤 어렵겠어요.

“해리라면 잘해낼 거라고 믿어요.”

- 이중인격자는 아니지만, 영화 속에서 두 개의 캐릭터를 연기한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다만 FBI 행세하는 벤에게 너무 몰입하는 건 피했으면 하네요.”

-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연쇄살인마라는 정체성이 흔들리면 안 되니까요.


작품을 잘 이해하고 있는 배우와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면 좋겠지만, 해리슨 노튼은 저 멀리 뉴욕에 있다.

촬영이 임박했을 때 LA로 넘어올 예정이다.

그럼에도 수시로 전화 통화를 했다.

거리는 문제될 것이 없다.

열의와 성의만 있다면.


작가의말

폭우로 인해 많은 분들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독자님의 집안이 무탈하시길 기원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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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난 꿈꾸는 사람을 좋아해. (3) +4 22.09.07 4,921 159 21쪽
269 난 꿈꾸는 사람을 좋아해. (2) +5 22.09.06 4,950 147 22쪽
268 난 꿈꾸는 사람을 좋아해. (1) +12 22.09.05 5,040 154 21쪽
267 전문가의 손을 타야 좋아져. +13 22.09.03 5,121 163 26쪽
266 도전은 좋은 겁니다. (2) +6 22.09.02 5,056 160 26쪽
265 도전은 좋은 겁니다. (1) +12 22.09.01 5,129 155 23쪽
264 그건 당신들 착각이고....! +9 22.08.31 5,054 171 26쪽
263 다들 수고가 많다....? (2) +10 22.08.30 5,081 167 26쪽
262 다들 수고가 많다....? (1) +5 22.08.29 5,104 158 23쪽
261 누가 자네를 말릴 수 있겠어. +8 22.08.27 5,177 168 26쪽
260 The Killing Road. (14) +12 22.08.26 5,002 170 29쪽
259 The Killing Road. (13) +5 22.08.25 4,789 160 25쪽
258 The Killing Road. (12) +7 22.08.24 4,817 161 26쪽
257 The Killing Road. (11) +4 22.08.23 4,886 154 26쪽
256 The Killing Road. (10) +9 22.08.22 4,891 148 23쪽
255 The Killing Road. (9) +6 22.08.20 5,006 152 26쪽
254 The Killing Road. (8) +5 22.08.19 5,053 144 25쪽
253 The Killing Road. (7) +12 22.08.18 5,014 156 23쪽
252 The Killing Road. (6) +7 22.08.17 5,118 162 25쪽
251 The Killing Road. (5) +4 22.08.16 5,177 151 22쪽
250 The Killing Road. (4) +5 22.08.15 5,161 163 21쪽
249 The Killing Road. (3) +4 22.08.13 5,302 167 22쪽
» The Killing Road. (2) +12 22.08.12 5,333 161 22쪽
247 The Killing Road. (1) +16 22.08.11 5,815 173 26쪽
246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영웅놀이....! +17 22.08.10 5,583 200 27쪽
245 Collapse. (7) +8 22.08.09 5,294 168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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