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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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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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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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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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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The Killing Road. (1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는 아침식사를 스톡턴의 베이스캠프 호텔에서 하지 않았다.

스태프들과 함께 촬영현장에 준비된 케이터링을 이용했다.

보통, 베이글과 크림치즈, 도넛, 계란 오믈렛, 과일들, 커피, 우유, 각종 음료수들이 매일 아침 준비되어 있다.

예산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할리우드 영화는 조리사가 음식을 만들어 준다.

트라이-스텔라가 인하우스로 제작하는 영화는 최저 예산이 2,000만 달러다.

대부분 촬영현장에 조리사가 파견 나가 요리를 한다.

아침 식사는 점심과 달리 30분 정도면 끝이 났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트디렉터 한나의 팀이 오프닝 씬을 촬영할 지하공간의 미술을 점검했다.

개퍼는 일렉트리션(조명부)들을 움직여 조명기와 전선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키그립은 그립들을 움직여서 조명 앞에 스탠드들을 설치했다.

광질을 조절하는 것은 개퍼의 몫이다.

그립은 장비만 옮겨놓는다.

촬영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일만 한다.

절대 남의 업무를 침범하지 않는다.

기본 적인 조명작업이 끝났다.

류지호는 해리슨 노튼과 블로킹(Blocking) 리허설을 진행했다.

배우가 서있거나 움직일 때마다 촬영 팀이 바닥위치에 테이프를 붙여 마킹했다.

고예산 영화에서는 블로킹부터 최초 리허설만 전문적으로 하는 대역(Stand-In)을 고용한다.

<The Killing Road>는 저예산영화이다.

대역을 고용할 예산이 있을 리가 없다.

따라서 배우가 직접 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이런 리허설을 통해 배우의 움직임과 동선을 보여주자, 촬영감독 리차드슨이 그에 따라 카메라의 위치를 조정했다.


“지금 움직임에서 더 뭔가를 추가할 거야?”

“아니요.”


류지호가 블로킹을 확정하자 리차드슨이 렌즈를 확정했다.

이후 조명을 좀 더 디테일하게 조절했다.

류지호와 리차드슨은 촬영현장에 나와 쇼트 리스트를 보며 촬영순서를 정하거나 의논할 필요가 없다.

촬영현장 한 편에 오늘 촬영한 분량의 스토리보드가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지 크기로 확대한 스토리보드는 현장에서 일하는 누구라도 확인할 수 있다.

스토리보드 앞에서 마주친 스태프들이 쑥덕거렸다.


“애니메이션도 아닌데, 풀 스토리보드를 그린거야?”

“그런 모양이야.”

“대단히 부지런한 감독이네.”

“우리야 스토리보드 대로 준비하면 되니 한결 수월하지 뭘.”

“스토리보드 대로 찍기는 하고?”

“이미 DP하고 사전에 조율을 끝마쳤다고 하더라.”


할리우드에선 간단한 대화씬은 스토리보드를 그리지 않는다.

류지호처럼 고지식하게 모든 쇼트를 다 그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베테랑 스태프들은 그런 류지호를 몹시 신기해했다.


“정말 이 대로만 찍는다면 고층빌딩을 짓는 것과 똑같겠어.”

“설계도만 완벽하다면.”


촬영현장에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 복잡한 쇼트를 찍을 때 배우들은 감독과 개별적으로 연기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그렇기에 대역(Stand-In)이 필요하다.

감독과 배우가 없다고 해서 준비를 안 할 수 없으니까.

시간이 돈이기도 하고.

대역을 고용할 수 없는 저예산 영화는 주로 촬영팀에서 배우와 체격이 비슷한 이를 테이프로 마킹 된 위치에 세워두고 조명을 조절하고 카메라의 포커스와 노출을 조정했다.

류지호가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 제작 영화의 현장을 다녀보면, 단 한군데도 예외 없이 첫 촬영은 한 씬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기 가장 좋은 위치에서 와이드앵글로 마스터 쇼트를 찍었다.


“첫 번째 커트를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끝내는가.”


촬영현장에 도착해서 감독, 프로듀서, 촬영감독이 가장 먼저 하는 생각이다.

첫 번 째 커트를 찍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경우 하루 동안 찍어야 할 분량을 모두 소화하지 못할 수 있다.

또한 스태프의 능률이 떨어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때문에 첫 커트는 가급적 복잡하게 가는 걸 피한다.

빨리 해치울 수 있는 것부터 촬영을 시작하게 된다.

류지호나 리차드슨처럼 경험이 풍부해야 가능한 작업방식이다.

대부분 마스터 쇼트부터 촬영을 시작한다.


“시작해 볼까요?”


스태프들이 류지호에게 언제든지 촬영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준비 끝났습니다.”

“촬영하시죠.”


로우 앵글로 화면 가득 해리슨 노튼의 얼굴이 잡혀있다.

해리슨이 화면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며 연기를 시작했다.


[왜 항상 영화에서 인질범은 인질을 쉽게 죽이지 않을까? 리얼리티. 사실적이지 않아. 인질을 바로 죽여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어떤 자비심이나 연민 따윈 없이!]


리차드슨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트라이포드에 고정하는 레버를 풀어 좌우로 카메라를 팬(Pan)했다.

포커스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포커스가 살짝 나가는 것도 좋다.

카메라가 좌우로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클로즈업(C.U) 된 구도가 계속해서 바뀐다.

얼굴이 중앙에 놓이기도 하고, 우측 구석에, 혹은 좌측에 얼굴이 위치하기도 했다.

누군가의 불안한 시점(point of view)로 보이는 기법이다.


[하나씩 차례로 죽이는 거야. 빵! 또 빵! 내가 감독이라면 협상을 하기 전에 인질을 죽이는 걸 보여주겠어. 잔인하게 빵! 또 빵! 그들에게 편안한 안식은 사치야.]


해리슨 노튼은 첫 등장부터 캐릭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날카로운 눈빛과 살벌한 말투, 카리스마 넘치는 아우라가 더해져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조금도 지루할 틈 없는 변화무쌍한 표정 연기와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하며 화면을 꽉 채웠다.

벤 사이퍼는 살 떨리게 하는 공포의 대상이다.

한편으로 떠버리처럼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능청스러운 반전도 보여준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 극에 대한 몰입감을 올려준다.

어떤 일을 벌일지 알 수 없기에.

류지호는 테드 번디와 루카스라는 연쇄살인법을 혼합해서 벤 사이퍼를 창조했다.

연쇄살인범은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는 은둔형이 많다.

그에 반해 테드 번디는 법대를 졸업한 수재였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는데 탁월할 만큼 사회적인 교류가 활발했던 인물이었다.

1974~1978년까지 수많은 여성을 강간 살해했는데, 1975년 검거된 후에도 두 번이나 탈옥에 성공했다.

법정에선 스스로 변호에 나서는 등 자신감도 대단했다.

30여 명의 여성을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실제로는 그 이상으로 추정될 뿐, 모두 밝혀내지 못했다.

루카스란 이름의 연쇄살인범은 조금 웃기는 인물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해진 살인자로 첫 손에 꼽힌다.

주장에 따르면 17개 주에 걸쳐 360명 이상을 살해했다고 한다.

실제로 밝혀진 것은 5명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 자백은 재밌자고 또 경찰이 얼마나 멍청하게 속는지 보여주기 위해 거짓 진술을 한 것임이 밝혀졌다.

지금은 360명을 살해했다는 자백이 거짓임이 밝혀졌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루카스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연쇄살인범이었다.

류지호는 벤 사이퍼라는 인물에 루카스의 극단적 허언증과 테드 번디의 영특함을 섞어 놨다.


“컷!”


류지호는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이상 다섯 번째 테이크를 넘기지 않는 편이다.

단편영화부터 그래왔다.

경험상 2~3번째 테이크에서 가장 좋은 연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화면 가득 에드워드의 얼굴을 잡은 상태에서 카메라는 계속해서 팬(PAN)과 틸트(TILT)를 넘나들었다.

인물은 고정되어 있는데, 카메라가 쉬지 않고 움직임으로 해서 2분짜리 오프닝 씬의 롱 테이크가 마치 다양한 구도로 잡은 쇼트들이 편집된 것처럼 느껴지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 때 가장 공을 들이는 장면이 있다면 단연 오프닝 시퀀스다.

스튜디오 임원들 역시 첫 시작부터 관객들을 사로잡길 원한다.

류지호는 화려한 미장센이나 의미심장한 암시를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를 쓰지 않았다.

그저 해리슨 노튼의 클로즈업 된 흔들리는 얼굴로 영화를 시작했다.

그것도 2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끊지 않고 롱 테이크로.

대신 카메라가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화면의 구도는 계속해서 바뀐다.

지금까지 누구도 시네마스코프의 와이드 스크린을 이런 식으로 영화 첫 장면부터 사용한 적이 없다.

시네마스코프가 탄생한 배경과 장점을 포기한 황당한 시도다.


[관객은 해피엔딩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악당은 지게 되어 있다라.... 큭큭. 영화는 영화일 뿐이야. 실제 현실의 삶은 영화보다 훨씬 대단해. 자, 친구! 이제 가봐야겠어.]


해리슨 노튼의 대사가 끝나면 화면이 풀 쇼트(F.S)로 바뀐다.

그런 후에 드러나는 텅 비어 있는 공간.

2.35:1 비율의 길쭉한 화면 왼쪽에 테이프로 결박당한 누군가 바닥에서 뒹굴고 있다.

손에 파이프 렌치를 든 채 쭈그리고 앉아있는 해리슨 노튼도 보인다.

첫 화면에서 보였던 이리저리 화면 구도가 바뀐 에드워드의 얼굴은 테이프로 결박당한 여자의 시점 쇼트였음을 알 수 있다.

넓고 휑한 공간에 달랑 두 사람 뿐이다.

화면 톤은 푸른색으로 가득하다.


[......]


카메라는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해리슨 노튼과 바닥에서 꿈틀대는 여자를 관조하듯 가만히 잡고만 있다.

화면 안을 최대한 비우고, 화면비를 극대화한 공간감을 살림으로써 공허, 불안, 왜곡의 감정을 담았다.


퍽!


그런 공허한 화면에서 느닷없이 벤 사이퍼가 파이프렌치로 여자를 내려친다.


퍽! 퍽! 퍽! 퍽!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폭력.

이어지는 장면은 동이 틀 새벽 무렵의 희미한 조명....

텅 빈 공터....

그리고 한적한 도로의 풍경을 차례로 보여준다.

시네마스코프의 장점을 극대화 시켜주는 구도로.

폭력 장면 뒤에 붙는 이 같은 풍경 화면들은 벤 사이퍼의 공허한 상태를 더욱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

또한 폭력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소리로 표현함으로써 상상력을 자극한다.

시간이 경과하는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

어쨌든 특별한 감정표현이나 묘사 없이 촬영과 화면비만으로 이런 감정을 조성 한 뒤....

건물을 빠져나오는 죠앤의 갑작스러운 모습으로.

또 다시 버려진 골동품 오르간으로.

차례로 연결된다.

오르간은 다소 생뚱맞아 보인다.

이 인서트는 호프타운에서 인연을 맺게 될 여인, 즉 티아라 이브의 메타포다.


후다닥.


극단적인 롱 쇼트(L.S)로 잡힌 화면 저 멀리서 카메라를 향해 죠앤이 허둥대며 달려온다.

추적자 벤은 이내 포기해버리고.

그렇게 <The Killing Road>의 오프닝 시퀀스는 가로로 길쭉한 화면 공간을 최대한 비운 화면 구도.

롱 쇼트와 클로즈업의 극단적 대비.

그리고 영화 전반을 지배할 푸른색과 붉은색이 강조된다.

생뚱맞은 인서트가 불쑥 나오는 것처럼, 가만히 결박된 여인을 바라보다가 어떤 사전 신호도 없이 벤이 파이프렌치로 내려친다던가, 어떤 설명도 없이 등장하는 죠앤도 느닷없다.

류지호는 차분하고 고요한 정서에서 갑작스레 연결되는 일련의 커트들로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흐름을 암시할 생각이다.

2.35:1 시네마스코프 비율은 스케일이 큰 영화에나 어울린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상식이다.

류지호는 그런 기대를 시원하게 깨버리는 다소 도발적인 오프닝을 만들었다.

비스타비전 화면비(1.85:1)에서는 절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미장센이다.

채우는 것이 아닌 비우는 미장센.

오프닝 시퀀스에서 작가주의 야심까지 느낄 수 있다.

이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벤 사이퍼는 밴의 화물칸에 자신의 허리 높이의 플라스틱 대형 통을 싣는다.

이미 밴의 화물칸에는 서너 개의 통이 실려 있다.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암시다.

범죄스릴러에 해박한 영화팬들은 한 번 더 꼬아서 생각할 수 있다.


‘혹시 맥거핀은 아닐까?’


맥거핀(MacGuffin)일지 아닐지는 영화가 끝나봐야 안다.

<The Killing Road>은 단순한 플롯의 영화다.

그런데 암시, 복선, 상징, 은유가 곳곳에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음. 좋군.]


벤이 다국적 커피숍 브랜드 Siren 앞에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음미한다.

마치 고된 노동 뒤에 맛보는 커피 한 잔의 여유라도 되는 것처럼.

PPL은 아니다.

때문에 브랜드 로고는 바다의 요정 사이렌을 떠올리게 하면서 브랜드명은 Silence(침묵)로 바꿨다.

Silence는 '조용히 하게 만들다', '침묵시키다'와 같이 동사로도 쓰인다.


“이 쇼트들을 편집 없이 그대로 이어붙이면 몇 분이 될 것 같아요?”


스크립터가 오프닝 시퀀스 페이퍼를 찾아 OK 커트의 시간만 따로 메모한 후 모두 더했다.


“5분 36초에요.”

“...흠. 3분으로 끊으려면 두 개의 롱 테이크 쇼트를 줄여야 하려나....”


롭 리차드슨이 모니터 스테이션으로 와서 물었다.


“어때?”

“만족해요.”

“꽤 요상한 시네마스코프 영화가 나올 것 같아.”


롭 리차드슨이 껄껄 웃었다.


“롭이 보기에 해리와 젊은 배우들 어때요?”

“잘 해.”


할리우드에서 오래 뒹굴다 보면 이런 경우를 종종 접한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지만 결과가 매우 좋은.

기분 좋은 오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해리슨 노튼을 비롯해 신인들 모두 썩 괜찮다.


“이 영화를 통해 이름을 알릴 신인들이 있을 것 같아.”


그 신인에는 류지호라는 신인 감독도 포함될 것이라고 롭 리차드슨은 확신했다.


“그들을 위해서 내가 좀 더 분발해야겠지.”


어린 친구들이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지금의 텐션을 유지할 수 있을지.

롭 리차드슨은 걱정보다 진한 흥미가 동했다.


❉ ❉ ❉


이번 영화를 준비하며 류지호는 살짝 긴장했었다.

할리우드 베테랑들과 작업하는 것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

나이, 어려보이는 외모, 동양인까지.

혹시나 얕잡아 보지는 않을지.

인종차별까지 가진 않겠지만, 손발을 맞추는데 비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을까 약간 걱정했었다.

강한 카리스마를 보이기 위해 머리를 밀어버릴까 수염을 길러볼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결과적으로 쓸데없는 기우였다.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자, 스태프들은 류지호의 매너에 매료되었다.

감독이 스태프 막내의 이름까지 모조리 알고 있다.

먼저 인사를 걸어올 정도로 친절했다.

저예산 영화라고 해도 배우까지 포함해 50여 명에 이르는 인원이다.

간혹 이름을 혼동하기는 했다.

그럼에도 그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외웠다는 것에 스태프들은 감동했다.

작업적으로 봤을 때도 류지호의 촬영 방식은 정말 독보적이다.

일반적인 할리우드 촬영현장에서 와이드 쇼트로 전체 장면을 찍고, 그 다음 인물을 기준으로 처음부터 다시, 나를 기준으로 처음부터 다시, 상대를 기준으로 또 다시,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그러고 나서 편집자가 리듬과 속도로 컷을 짜 맞춘다.


"디렉터 류는 스토리보드가 이미 머릿속에 다 있고 영화가 편집이 돼 있는 것 같아.“

“그러게. 찍어야 할 것만 정확하게 계산해서 찍는 것 같아. 예를 들어 첫 대사로 너를 찍었다면 두 번째 대사는 나를 찍고 세 번째 대사는 저쪽에서 찍는 식이지.”

“전체적으로 다 안 찍어도 되냐니까, 괜찮다고 그럴 필요 없다고 하더라.”

“편집까지 벌써 다 정해놓고 있는 거야?”

“가이드라인이 있는 거지. 그래서 낭비되는 시간 없이 술술 진행되는 것이고.”


함께 일하는 이들의 평가가 호평 일색이다.

영화 경험이 많은 스태프들은 기가 막혔다.

그들이 보기에 류지호는 급이 다른 천재처럼 보였다.


"집을 지으면서 못 한 포대 달라는 게 아니라 '못이 53개 필요해'라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류지호는 한국인 최초의 아카데미 수상 감독이 받았던 평가를 무려 25년이나 앞 서 받았다.

물론 류지호가 직접 들은 것은 아니다.

스태프들끼리 주고받는 말이었을 뿐.


“적절한 예야. 디렉터 류는 이미 작품에서 본인의 확고한 비전이 있는 거야.”


류지호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충무로에서는 예산 때문에 필름을 아껴야 했다.

낭비적인 촬영을 극도로 싫어했다.

할리우드 방식처럼 촬영 한다면 무능한 감독 취급 받았다.

게다가 류지호는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철저한 준비를 하는 타입이다.

이전 삶의 반성 때문이다.

촬영 때 감독이 중심을 잃게 된다면 영화의 전체적인 진행이 무너진다.

제아무리 콘티를 잘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촬영에 들어가면 촬영환경이 콘티와 일치 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이전 삶에서 감독을 할 때 지겹게 경험했다.

실제 촬영현장에서 잡히는 카메라 앵글과 감독이 생각했던 연출 앵글이 다른 느낌을 가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머리로 생각하는 연출과 실제 촬영하는 영상의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다.

사람 눈으로 보는 것과 카메라 렌즈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무로에서 활동하는 감독은 경험이 매우 중요했다.

스토리보드를 착실히 준비해도 마찬가지다.

만화 같은 그림의 2~3개 커트로 그려진 짧은 내용을 실제 찍어보면 안다.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것보다 영상에서 생각보다 길게 표현된다.

정지 이미지와 움직이는 영상이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이다.

만화 컷은 단지 감정의 대략적인 흐름만 잡아준다.

그것을 보는 독자에게 나머지 감정선을 알아서 상상하게 만든다.

실시간으로 재현되는 영상에서는 그 감정선을 어느 정도 직접적으로 표현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영상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에서 관객의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슥삭.


스토리보드 그림 또 하나가 붉은색 X 표시가 그어졌다.

류지호는 스토리보드 대로 촬영을 해나가고 있다.

마치 알프레드 히치콕이나 고언형제처럼.

그들처럼 천재적인 영화감독이서가 아니다.

예산에 맞추려면 도리가 없다.

한편으로 류지호가 편집을 강제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

자신의 연출 호흡, 연출 의도, 작품 특성이 편집에서 훼손되지 않길 바랐다.

딱 떨어지게 촬영해 온 필름을 편집자가 보게 되면 단숨에 영화 스타일을 눈치 챌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작품 스타일을 살려주는 쪽으로 편집방향을 잡아 줄 것이다.

편집소스가 모자라네 마네.

나보고 뭘 편집하라는 거야.

따위의 되도 않는 투정 없이.

어쨌든 5회차 촬영이 끝날 즈음에 류지호에 대한 스태프와 배우의 신뢰감은 단단해졌다.


“영화를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 손대는 영화마다 흥행을 성공시켰지.”

“감독을 얕봤던 에릭의 입에서 차원이 다르다는 말이 나왔으면 말 다한 거야.”

"배우들도 완전히 복종했잖아. 감독의 비전을 전적으로 믿는다는 증거지.“

“자기가 뭘 하는지 정확히 아는 감독이라는 믿음이 가.”

“저 봐. 실제로도 그렇잖아."


매 순간 의사결정을 내려야하는 것이 감독이다.

류지호는 애매한 법이 없다.

좋으면 확고하게 OK.

미진하면 단호하게 NG.

현학적인 배우와 스태프에게는 그들의 방식으로 소통했다.

직설적인 사람들과는 똑같이 쉬운 언어로 대화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는 친절한 신사지만, 일단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면 벤 사이퍼 못지않은 필름 킬러야.”

“필름 킬러?”

“말 그대로 감독이 확고함으로 필름을 제거해 나가잖아.”

“엉터리 같은 소리지만, 말은 되네.”


스태프들이 영화에 대한 기대를 높였다.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터커 레이튼을 보며 류지호가 물었다.


“터커, 기분이 좋아 보이네?”

“곧 주급이 들어오잖아.”

“돈 필요해?”

“특별히 돈 들어갈 데는 없지만, 내 계좌에 돈이 들어오는 건 즐거운 일이지.”


다음 주에 조금 힘든 밤 촬영이 예정되어 있다.

그 전까지 스태프를 무리시키지 않을 생각이다.

게리 켐프는 주 5일 촬영을 철저하게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금요일인 오늘 스태프의 계좌로 주급이 입금되었다.

계획된 일정을 대체로 잘 소화했다.

때문에 주급을 지급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기분이 가벼웠다.

충무로에서는 영화제작 기간 중 가장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연출부가 명확한 노동기간의 명시도 없이 혹사당한다.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도 못하면서.

할리우드에서는 프리 프로덕션에서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전 과정 동안 고용되는 사람은 단 둘 뿐이다.

바로 감독과 프로듀서다.

배우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돈을 받는 것도 둘이다.

터커 레이튼은 제 1조감독으로 프로덕션 기간의 예산과 스케줄을 총괄하는 프로덕션 매니저와 함께 제작부 쪽 일의 상당부분을 책임졌다.

충무로처럼 감독을 보좌하는 역할이 아니다.

고용기간 역시 한국처럼 고무줄 계약을 할 수 없다.

프리 프로덕션 기간 중에서 크랭크인을 앞두고 일정 기간, 프로덕션 기간 전반, 포스트 프로덕션 기간 중 단 일주일.

일반적인 할리우드 제1 조감독의 계약기간이다.

프리프로덕션을 준비하는 것은 전적으로 프로듀서와 감독이다.

포스트프로덕션 역시 슈퍼바이저가 따로 고용돼 업무가 이관된다.

영화 한편에 6주의 사전준비, 6주의 촬영기간, 6주의 후반작업이 소요된다면 조감독은 10주 동안만 일하면 된다.

분업화가 철저한 할리우드에서 연출 퍼스트는 연출자의 동지이면서 때로는 견제자다.


“디렉터, 오전에 10개의 커트를 모두 소화하기 위해서는 촬영속도를 올려야 합니다.”

“.....”

“모두가 스탠바이 중입니다. 5분 후 배우를 입장시키겠습니다.”


친구들, 가까운 지인들과 학교, 소규모로 영화를 촬영하지 않는다면, 일반적인 할리우드 촬영 현장에서 연출 퍼스트와 감독과의 대화는 저런 식이다.

감독의 일방적인 명령에 복종해서 지시를 수행하지만, 때로는 연출 진행을 총괄하면서 능동적으로 스케줄을 관리한다.

할리우드 영화 현장에서 연출 퍼스트가 시계를 가리키며 감독을 채근하는 모습은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다.

조금 더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연출 퍼스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꾸 촬영이 지연되고 촬영 분량 소화가 지지부진하다면, 제작자가 감독과 촬영감독을 교체할지언정 연출 퍼스트를 해고하진 않는다.


“한 주 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요.”


류지호가 연출팀의 노고를 치하했다.


“디렉터, 월요일에 봐.”


배우와 스태프들이 각자 타고 온 차량을 이용해 LA로 돌아갔다.

항상 촬영장을 가장 늦게 빠져나가는 팀은 제작부와 촬영팀이다.

할리우드는 기본적으로 DP 시스템이다.

촬영감독이 영화영상의 기본인 구도와 조명을 총괄한다.

따라서 촬영과 조명의 경계가 없다.

DP가 거느리는 핵심적인 스태프들은 개퍼, 그립, 카메라 오퍼레이터들인데, 규모가 작은 영화에서는 DP가 직접 카메라를 잡는 경우도 있다.

카메라 오퍼레이터의 고용을 보호하기 위해 조합에서는 일정 규모 이상 예산 영화에서 DP가 직접 메인 카메라를 잡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다.

다만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운용할 경우에는 예외다.

촬영현장에서 전기 공급을 책임지는 전기부문 수석담당자를 개퍼(Gaffer, 조명감독)라고 부른다.

캐퍼는 Best Boy Electric, electrician으로 이루어진 팀을 이끌고 촬영 당일마다 램프, 전기 케이블 그 외 모든 전기 장비를 설치하여 원활한 영화진행이 되도록 준비를 한다.

가장 중요한 역할은 로케이션 촬영 시 전력을 즉각 가동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촬영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자력발전기 등을 곳곳에 설치하여 전력의 순조로운 공급을 책임져야 한다.

촬영현장에서 카메라 삼각대를 설치하고 레일트랙을 깔거나, 지미집(Jimmy Jib) 등의 장비를 조작하는 스태프를 그립(grip)이라고 하고 그들의 책임자를 키그립(Key-Grip)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촬영 및 조명장비 설치에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에 촬영부의 역할과 조명부의 역할을 동시에 행하게 된다.

그립의 대표적인 일 중 하나가 조명을 끊어준다든지 조명기 앞에 빛을 확산 시킬 수 있는 필터나 색을 바꿔주는 젤라틴을 설치하는 일이다.

개퍼가 함께 일하는 팀원은 최소 세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이 일할 수도 있다.

일렉트리션이 다섯이면 그립도 다섯, 이런 식으로 숫자를 맞춰서 일하는 편이다.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 투자·공동제작·배급 영화 <미션임파서블>의 경우, 프라하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다.

프라하 거리를 닷새 동안 사용할 수 있도록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얻었는데, 촬영은 단 하룻밤 동안 5개 유닛의 촬영팀을 동원해 해 뜨기 전에 촬영을 무사히 마친 일화가 있다.

앞선 이틀간 수십 명의 개퍼와 그들의 지휘를 받는 현지 일렉트리션들이 미국에서 공수해온 엄청난 물량의 장비들을 설치했으며, 촬영을 마친 후 곧바로 투입되어 이틀에 걸쳐 장비들을 철수했다.

여담으로 수년 후에 촬영될 <스파이더맨>, <다크나이트> 등의 뉴욕거리 로케이션 촬영 때는 일렉트리션과 그립만 200명이 넘게 참여한다.


“터커, 주말 동안 할 일 없으면 집으로 와.”

“일 시키려고?”

“불고기와 잡채 해 줄게.”

“좋았어.”


류지호가 미국인 친구들에게 음식을 대접해서 실패를 하지 않은 두 가지가 불고기와 잡채다.

물론 류지호의 입맛과 간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마리아 배리는 비빔밥을 좋아했다.

다만 고추장이 아니라 간장에 비벼먹는 것이 달랐다.


빵빵!


롭 리차드슨이 촬영감독이 자신이 몰고 있는 픽업트럭에서 크락션을 울렸다.

그의 차량에는 아트디렉터와 개퍼가 타고 있다.


“갑니다! 가요!”


작가의말

편안하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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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 난 꿈꾸는 사람을 좋아해. (3) +4 22.09.07 4,922 159 21쪽
269 난 꿈꾸는 사람을 좋아해. (2) +5 22.09.06 4,951 147 22쪽
268 난 꿈꾸는 사람을 좋아해. (1) +12 22.09.05 5,040 154 21쪽
267 전문가의 손을 타야 좋아져. +13 22.09.03 5,121 163 26쪽
266 도전은 좋은 겁니다. (2) +6 22.09.02 5,056 160 26쪽
265 도전은 좋은 겁니다. (1) +12 22.09.01 5,129 155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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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다들 수고가 많다....? (2) +10 22.08.30 5,082 167 26쪽
262 다들 수고가 많다....? (1) +5 22.08.29 5,105 158 23쪽
261 누가 자네를 말릴 수 있겠어. +8 22.08.27 5,177 168 26쪽
260 The Killing Road. (14) +12 22.08.26 5,002 170 29쪽
259 The Killing Road. (13) +5 22.08.25 4,789 160 25쪽
258 The Killing Road. (12) +7 22.08.24 4,817 161 26쪽
» The Killing Road. (11) +4 22.08.23 4,887 154 26쪽
256 The Killing Road. (10) +9 22.08.22 4,892 148 23쪽
255 The Killing Road. (9) +6 22.08.20 5,006 152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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