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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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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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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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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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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The Killing Road. (1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가 대기하고 있던 말릭의 차에 탑승했다.

일행은 다음 주 첫 촬영이 예정되어 있는 장소로 향했다.

모든 촬영 현장이 그렇듯이 첫 번째 카메라 포지션을 잡는 것에서 많은 시간이 소요 된다.

류지호는 매 촬영이 끝나면 롭 리차드슨에게 양해를 구해, 다음 날 첫 촬영을 합의하고 헤어졌다.

촬영감독과 다음 촬영 스케줄의 첫 씬, 첫 쇼트의 카메라 포지션과 앵글을 결정했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촬영현장에 도착하면 사전에 합의된 카메라 포지션을 잡을 수 있다.

첫 촬영을 안정적이고 빠르게 촬영할 수 있다.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다.

이런 모든 것이 이전 삶에서 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류지호의 자세와 태도가 바뀌니 실무에서 능률이 더 올랐다.

실무가 안정되니, 그것에 쏟아야 할 에너지를 연출에 할애할 수가 있게 됐다.


“디렉터.”

“네?”

“주말에는 쉬어. 괜히 사무실에 출근해서 일하지 말고.”

“......”

“감독은 분명 특별한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반 스태프도 하지 않는 행동을 해도 되는 것은 아니야.”

“예.”


롭 리차드슨은 충분한 휴식을 권고한 것이 아니다.

할리우드 업계의 각 조합은 회원들의 노동관련 법규나 협회 규약을 준수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휴식일로 정해진 날은 감독이든 인턴이든 일을 해선 안 된다.

뒷말이 나올 수도 있으니 조합의 룰을 따르라고 충고한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따라야겠지.’


❉ ❉ ❉


주말을 웨스트우드의 집에서 보낸 류지호의 목소리에 기운이 넘쳤다.


“액션!”


보안관보 역할의 존 터튜와 벤 사이퍼 역할의 해리슨 노튼이 거리를 가로질러 걸어간다.

두 사람이 T-BONE이란 간판이 걸린 식당으로 들어간다.

손님이라곤 한 명도 없는 한적한 식당이다.

해리슨 노튼이 먼저 자리에 앉은 존 터튜에게 묻는다.


[계획이 뭐예요?]


다이얼로그에 잡소리가 섞이지 않도록 해리슨 노튼이 의자를 살짝 빼 자리에 앉는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두 사람이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 풀 쇼트(F.S)에서 달리 인(Dolly In) 했다.


[여기 음식 먹어봤어요?]


존 터튜는 해리슨 노튼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메뉴판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때 이 식당의 유일한 서버가 테이블로 다가온다.

환갑을 훌쩍 넘긴 노파다.

노파가 서빙을 볼 정도로 이 마을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낙후되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안녕하세요. 오늘 기분 어때요?]

[더워서 친절하게 대할 기분이 아니야.]


존 터튜의 물음에 불친절한 태도로 답변한 노파가 이번엔 해리슨 노튼에게 화살을 돌린다.


[먹기 싫어?]

[.....네?]

[먹기 싫으냐고?]


해리든 노튼은 황당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반면에 존 터튜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다.


[저기... 나는......]

[여기서 30년 넘게 이 일을 하고 있지만, 티본 스테이크와 감자 말고 주문했던 손님이 없어.]


존 터튜가 노파에게 해리슨 노튼의 신분을 소개했다.


[벤은 대도시에서 온 FBI 요원이에요.]

[대도시에서 온 FBI 등신만 빼고.]

[.......]

[주문 안 해? 먹기 싫어?]


마치 귀찮으니까 대충 주문해서 처먹으라는 투다.


[주세요. 그걸로.]

[티본 스테이크 미디움.]

[내 스테이크는....]

[물어본 거 아니야.]


주는 대로 먹어라.


[네.]


단호한 노파의 태도에 입을 다무는 두 사람이다.


[아이스티 두 잔.]

[아이스티 좋죠.]

[난....]


노파와 해리슨 노튼의 눈이 마주친다.

마치 노파가 째려보는 것 같다.


[나도 그걸로 하죠.]


영화 내내 이런 식이다.

FBI요원 행세를 하는 벤은 이 시골마을에서 우월적인 신분이어야 한다.

그런데 보안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과 몇몇 유지, 권력자에게만 통하는 신분이다.

동네 주민들은 그런가 보다 하는 정도.

그런 분위기에서 류지호는 벤이 연쇄살인마로서 기분이 나쁘면 언제든 혹은 누구든 죽일 수 있다는 걸 계속해서 영화에서 암시한다.

해리슨 노튼의 외모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백면서생.

육체적인 능력도 보잘 것 없어 보인다.

다소 가벼운 언행과 투덜거림을 입에 달고 있다.

한마디로 사람들에게 만만해 보인다.

당연히 극중 인물들의 착각이다.

관객들은 안다.

해리슨 노튼이 연기하는 벤 사이퍼가 그저 가볍고, 어설픈 신참 FBI 요원이 아니라 연쇄살인마라는 것을.

연쇄살인범이 평범한 시골사람에게 푸대접을 넘어 무시를 당하는 걸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류지호는 은근슬쩍 살인을 암시하는 뉘앙스를 깔아두었다.

암시들 통해 관객들은 언제든 무슨 사달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해리슨 노튼은 일부러 극중 인물들이 보지 못하도록, 오로지 관객만 알 수 있도록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아니야!”

“......”

“그런 연기는 너무 촌스러워. 차라리 그냥 히죽 순박하게 웃어봐.”


딴에는 복잡한 감정을 의미심장하게 표현한 표정연기다.

그저 순박하게 웃으라니.


“네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보 같은 웃음이겠지만, 관객들은 저 사이코패스가 화를 애써 참고 있구나. 곧 뭔가 일을 저지르겠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알겠어요.”


똑똑한 배우와 일하면 이런 면에서 좋다.

매 디렉션마다 시시콜콜하게 설명을 해줄 필요가 없다.

약간의 설명을 해주면 그 이상을 고민해서 실현해 보여준다.

해리슨 노튼은 류지호의 요구에 한술 더 떴다.

불친절한 노파를 향해 더욱 친절하고 살가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지나칠 정도로.

관객들은 이 식당 장면이 끝나고 나서 언젠가 벤이 노파를 죽이거나, 노파가 시체로 발견될 것이라 지레짐작하게 된다.

벤 사이퍼는 노파를 죽이지 않는다.

엉뚱하게 함께 식사를 했던 보안관보 존 터튜를 죽인다.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고문까지 해가면서.

연출과 연기로 이야기를 한 번 더 비트는 것이다.


“컷! 셋 업 바꿔서 리버스 쇼트 찍읍시다.”


리버스 쇼트(reverse shot)는 연속편집 상에서 시선 일치 혹은 시선 봉합을 이루는 쇼트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A와 B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A의 어깨 너머로 B를 촬영한 후에 어깨만 보였던 A를 보여주기 위해서 같은 방식으로 B의 어깨 너머로 A를 보여주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A와 B의 위치, 자리, 행동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한다.


"시간 잘 가네.“


엊그제 크랭크인 한 것 같은데, 2주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동안 벤 사이퍼를 중심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벤은 FBI 요원으로 위장해 호프타운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떠버리에 허점투성이 신참 FBI를 연기한다.

해리슨 노튼은 떡잎부터 달랐다.

괜히 <프라이멀 피어>에서 그 같은 연기를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카메라 앞에서 굉장한 몰입과 집중력을 보였다.

벤 사이퍼란 인물의 이중적인 모습을 탁월한 연기로 재현해 사실적인 긴장감을 선보였다.

상대한 존 터튜까지 절로 긴장하게 만들 정도로.

힘을 쫙 빼고 연기하던 존 터튜다.

처음에는 느긋하고 여유만만했다.

새카만 후배의 연기에 기합이 들은 모양인지, 어느 순간부터 둘 사이의 공기가 제법 팽팽했다.

두 배우는 인물 그 자체가 되어 연기하는 미국식 메소드연기(method acting)를 신봉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배역에 대한 순간 몰입력이 뛰어난 편이다.

류지호는 ‘컷’ 사인을 내고 난 후에도 두 배우를 배려했다.

감정을 수습할 수 있도록.

스태프들도 덩달아 조용히 움직였다.

감독이 특별히 개입하지 않아도 배우들이 조화(케미)를 발휘하는 순간들.


‘이럴 때 연출할 맛이 난다니까....!’


해리슨 노튼은 나이에 비해서 어려보이는 선한 인상이다.

그럼에도 초기에 맡은 배역들은 흉악성을 내포하거나 다중 인격을 가진 캐릭터가 많았다.

그 정도로 <프라이멀 피어>가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는 뜻이다.

어쨌든 나이와 연륜이 쌓여가면서 연기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장르를 넘나들며 맡은 배역마다 동화되기 때문에, 그가 연기한 배역마다 같은 사람인지 인식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듣게 된다.

작품과 배역에 대한 이해와 분석이 매우 뛰어난 것은 배우에게 큰 장점이다.


‘똑똑한 만큼 영화 홍보 때마다 양질의 인터뷰를 하기로 유명한 배우이기도 했고.’


낮에 먹는 끼니를 점심이라고 한다.

촬영현장에서는 가벼운 식사를 무조건 점심(Lunch)라고 부른다.

오후에 집합해 밤 촬영을 하면서 한밤중에 식사를 하더라도 그냥 런치다.

식단까지 가볍지는 않다.

점심은 간단한 아침식사에 비해 제대로 된 음식 즉 육류, 샐러드, 그 밖에 다양한 뷔페 식단이 제공되었다.

저예산영화는 돈과 시간에 쫒길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급해질 수가 있다.

그런데 류지호는 한결 여유가 있었다.

류지호는 프로덕션 매니저와 터커의 진행에 순응했다.

베테랑 조감독과 제작부장의 현장진행 대로 가서 손해 볼 것이 전혀 없기에.

류지호는 헤드 스태프들과 3주차부터는 몇 작품을 함께 한 것처럼 척척 손발이 맞았다.


✻ ✻ ✻


“디렉터와 DP는 나와 이야기 좀 해요!”


4주차로 접어들면서 터커 레이튼이 심각한 표정으로 롭 리차드슨까지 불러들였다.


“앞으로 30분 안에 예정된 촬영분량을 소화하지 못하면 나는 없애도 되는 쇼트를 골라내자고 요청을 할 수밖에 없어.”

“알겠어. 촬영속도를 내 볼 게.”


터커 레이튼이 처음으로 정색했다.

꼭 필요하지 않은 쇼트를 제거 혹은 쇼트들을 묶는 방법을 강구할 수도 있다고 협박(?)을 했다.

진지한 분위기에 류지호가 초를 쳤다.


하하.


류지호가 웃음을 터트렸던 것.


“디렉터, 내 업무영역을 무시하는 거야?”

“아니야. 걱정 마. 터커가 우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처음이다.

류지호의 촬영현장에서 실무적인 부분으로 간섭을 받은 것이.

조감독 따위가 조언이 아닌 협조를 요청하는 것도 새삼스러웠고.

이전 삶에서는 피디가 사사건건 간섭을 하고 방해를 해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번에는 스트레스가 없었다.

할리우드 시스템에 적응한 것도 있지만, 옳은 판단이고 적당한 조언이란 생각 때문이다.

게다가 조감독의 정색은 다소 느슨했던 현장에 다시금 긴장을 불러왔다.

미국은 스태프 조합 규약에 따라 정해진 노동시간이 정해져 있다.

어차피 낮에 진행하는 로케이션 촬영은 해가 지면 촬영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감독은 하나의 커트라도 더 찍고 싶어 하게 마련이다.

신인감독이 무리한 욕심을 걸러내고 자제할 줄 알면서 능률적으로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란 쉽지 않다.

류지호는 이상하게 느긋하다.

때문에 오후 5시 즈음이면 슬슬 촬영을 마무리하기 시작한다.

조감독 경험이 풍부한 류지호로서는 당연한 거다.


“어때? 우려할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했지?”


류지호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터커 레이튼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혹시 일부러 느슨하게 굴었던 거야?”

“그럴 리가.”


터커 레이튼이 봤을 때 류지호는 감독이라기보다는 프로듀서에 가까웠다.


“배우와 모든 스태프들이 기계가 아닌 인간이니까.”


상식이다.

12시간 촬영, 12시간 휴식.

제 시간에 식사를 하는 것은 제작 파트와 연출 파트의 스케줄 관리의 핵심이다.

그 같은 일정을 지키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일 수도 있다.

그 일정에서 20번의 카메라 셋업, 할리우드 양식의 시나리오 4페이지 정도를 소화해 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할리우드에서는 오랜 시간 일을 해오고, 다양한 영화 경험을 갖춘 노련한 스태프를 존중한다.

한창 활발하게 활동하는 퍼스트 어시스턴트 디렉터 즉 한국식으로 제1조감독들의 나이가 30대 후반에서 40대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프로덕션에 들어오기 전에는 무슨 자신감인가 했어요.“


터커 레이튼의 말에 게리 켐프가 ‘킥킥‘ 웃었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보통의 독립영화는 일주일에 6일씩 촬영해서 한 달 안에 촬영을 마무리한다.

류지호는 주 5일 촬영에 6주 스케줄을 잡았다.

그것도 300만 달러 예산으로.

현재까지는 예정대로 되어가고 있다.

터커 레이튼은 나름 베테랑이라고 자부했다.

신인감독을 도와서 고생을 감수하고서 열정적으로 촬영에 임하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런데 나이만 어리지 롭 리차드슨 뺨치는 노련함을 갖춘 류지호로 인해서 딱히 고생스러울 것이 없이 인디영화를 찍고 있다.

작품을 잘 만나는 것도 조감독에게 복이다.

그 보다 감독을 잘 만나는 것이 더 큰 복이다.


✻ ✻ ✻


만약 미국에서 촬영지가 주를 넘어가거나, 같은 주 안에서도 남부에서 북부로 나뉘어 있다면 이동은 무조건 비행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땅 덩어리가 워낙 넓기 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이동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류지호의 경우는 월요일에 비행기를 타고 스톡턴으로 갔다가 금요일 밤 철수 시에는 경호원들이 운전하는 차량을 타고 웨스트우드로 복귀했다.

JHO Pictures가 보장해줘야 하는 서비스지만, 어차피 본인 소유 회사라서 자비부담을 했다.

할리우드는 일단 프로덕션 단계에 들어가면 크랭크 인 날짜와 크랭크 업 날짜가 변동되는 일이 없다.

예정대로 안 된다는 것은 제작비 초과와 영화의 후반작업 스케줄의 차질로 바로 이어진다.

개봉까지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따라서 촬영 중에 감독이나 헤드 스태프 누군가를 교체하는 한이 있더라고 예정된 스케줄은 무조건 지키려고 노력한다.

어디나 예외가 있다.

스티븐 아들러, 리드 스콧 같은 감독들은 스튜디오의 압박은 받을지언정 해고되는 일은 없다.

류지호가 ParaMax에서 투자를 받아 영화를 찍는 이유다.

자신 소유의 영화사에서 감히 마음에 안 든다고 해고를 할 리가 없으니까.


“지난 주 리포트를 ParaMax에 보냈어요?”


류지호의 물음에 스크립터가 선선히 대답했다.


“문제될 건 없어요. 걱정 말아요.”


류지호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스크립터의 기록은 스케줄 진행이 어떻게 되었는지의 자료가 된다.

투자·배급사인 ParaMax는 매주 스크립터로부터 <The Killing Road>의 리포터를 전달받아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있다.

리포트에는 매 커트의 촬영 시각과 종료 시각만 따로 추린 문서가 첨부된다.

류지호가 오너라고 해서 예외를 둘 순 없다.

그것이 업계의 룰이니까.

만약 촬영 진행 타임라인이 지지부진하거나 일정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스튜디오의 사장이나 최고위직이 직접 해당 영화의 감독과 촬영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경고를 보낸다.

또한 그 같은 보고서가 세 번 이상 올라오게 되면, 스튜디오에서는 대기감독 명단의 스케줄 확인 작업에 들어간다.

조명이나 카메라를 움직이는 시간이 지체된다면 촬영감독이 책임을 져야 하고, 배우와 관련된 시간이 지체되었다면 감독이 책임을 져야 하는 거다.

감독 혹은 촬영감독에게 영화를 맡길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스튜디오는 즉각 행동에 들어간다.

해당 감독을 해고하고 대기자를 현장에 투입하는 것이다.

트라이-스텔라 픽처스를 인수하기 전까지 류지호는 그 같은 일이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사건인 줄로만 알았다.

아니었다.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이 메인 스태프의 교체였다.

이 시기는 일 년에 평균 380편 정도의 영화가 미국에서 제작되고 있다.

최대 제작편수도 500편이 되지 못한다.

할리우드 최고 전성기에도 순수 극장 상영용 영화는 500편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할리우드가 영화공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홈비디오 영화, 텔레비전 영화, 케이블 채널 영화 등 다양한 영화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류지호가 소유하고 있는 영화사들에서도 일 년에 평균 두 편 정도에서 감독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

인하우스 혹은 공동제작 영화 23편에서 감독 두 명이 해고되는 것이다.

류지호가 몰랐던 이유는 그 같은 영화들은 한국에서 상영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감독들의 인지도도 없기 때문이다.

간혹 해고된 감독이 크레디트에 남아 있는 경우도 존재한다.

최초 계약할 때 해고 시 임금 보전문제와 크레디트 조항을 감독에게 유리하게 적용했을 경우가 그렇다.

할리우드에서는 그 같은 문제로 법정분쟁이 자주 발생한다.

트라이-스텔라, ParaMax 역시 이런 분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죽하면 회사에서 가장 바쁜 부서가 법률팀일까.

법정 분쟁이 많거나 자체적으로 힘이 부칠 경우에는 캐서린의 법률회사와 계약해서 진행하고 있다.

주로 메이저 스튜디오와 분쟁이 벌어졌을 때 도움을 받는 편이다.

이 같은 내용들은 류지호와 전혀 상관없다.

어쨌든 류지호를 해고할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그가 무책임하고 무능하게 프로덕션을 진행할 리가 없기 때문에.


“빌어먹을! 당신들은 도대체 언제까지 길을 차지하고 있을 셈이야!”


어째 별다른 문제없이 잘 돌아간다 싶었다.

기어코 문제가 발생했다.

에인절스 캠프 주민과 <The Killing Road> 제작팀이 옥신각신했다.

타운 메인 도로에 그립들이 온갖 장비들을 늘어놨는데, 그로 인해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고 항의를 한 것이다.


“촬영차들 때문에 주차할 데가 없어서 주민들이 애를 먹고 있는데! 빨래까지 널어 말려!”


얼핏 보면, 그립팀이 조명 스탠드 네 개를 줄로 연결해 천들을 말리고 있는 것 같다.

주민들의 오해다.

젖은 천을 말리는 것이 아니다.

빛을 걸러주는 디퓨저란 장비를 펼쳐놓은 것이다.

게다가 디퓨저는 물에 젖으면 못 쓴다.

UV처리가 훼손되니까.

암튼 <The Killing Road> 촬영팀이 정식으로 당국의 허락을 받았다.

도로 사용료도 완납했다.

때문에 영화 제작팀은 법적으로 보호를 받는다.

주민 입장에서 영화촬영은 불편하고 성가신 것이지만.


“암튼! 해도 해도 너무 하잖아!”


이런 문제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영화팀이 도시의 블록 전체를 빌리거나 스튜디오 내에 오픈 세트를 지어 촬영하는 것이다.


“큭. 영화촬영 현장은 어디나 비슷하구나.”


주민들의 민원이 심할 경우 촬영허가가 취소될 수도 있다.

한국이라면 제작부들이 주민들을 찾아가 사정을 해 양해를 구할 수도 있는 문제다.

미국에서는 어림도 없다.

자칫 소송이라도 하게 되면 골치 아프다.


“너무 슬슬 풀려서 찝찝했던 차에 이런 소동이라도 있어줘야지.”


이런 작은 소동이 몇 번 더 있었다.

어쨌든 촬영은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에인절스 캠프 촬영을 모두 마친 류지호가 아쉬움을 토로했다.


“하루가 32시간이 얼마나 좋을까요?”


스크립터가 즉각 반발했다.


“그렇게 일하면 죽어요.”

“절반만 일해야죠. 규약에 따라서.”

“그래도 16시간이에요.”

“세 번의 런치 타임을 빼면 13시간이죠.”

“아무도 디렉터와 일하려고 하지 않을 걸요?”


제작자에게 항상 아쉬운 것이 제작비이다.

감독에게는 시간이다.

더 풍부하게, 더 공을 들여서 찍을 수 있었을 텐데.

지나고 나면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 ❉ ❉


에인절스 캠프에서 마지막 날.

오후 7시가 넘어가면 거의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

메인 가(街)에 띄엄띄엄 서있는 오래된 가로등.

타운의 유일한 펍과 편의점만 조금 늦게까지 불이 밝혀져 있을 뿐.

전체적으로 어둡다.

타운의 너머로는 짙은 어둠이 깔려있다.

그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또 다른 어둠 혹은 악의.

롭 리차드슨 촬영감독은 호프타운과 연쇄살인마의 악의 크기를 대비시키는 구도를 잡았다.

화면 오른쪽에 해리슨 노튼의 전신 뒷모습을 걸고, 그 너머로 호프타운을 담았다.

뭔가 특별하거나 고유한 표현양식은 아니다.

도시라는 거대한 부조리와 한 인간을 대비시키려는 목적에서 자주 쓰인다.

예를 들어 <다크나이트> 시리즈에서 브루스 웨인이라는 한 인간이 최첨단 장비들로 무장한 배트맨 슈트를 갖춰 입은 채, 건물 옥상에서 고담 시티를 내려다보는 장면처럼.

조커라는 절대악과 상대해야할 히어로의 고독을 상징하거나, 거대한 메트로폴리스의 부정과 마주한 한 인간의 나약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류지호의 의도는 상당히 달랐다.

주인공의 고독, 인간의 나약함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시네마스코프 넓은 화면을 이용해 벤 사이퍼와 호프타운의 크기를 대비시켰다.

흡사 누가누가 더 악한가를 재보는 것처럼.

개인으로서 벤 사이퍼는 절대적인 악인이다.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호프타운 주민들의 악의는 그의 악에 비할 바가 아니다.

개인주의, 무관심, 타락한 욕망.

개인에게 한정되면 작은 악일지 모른다.

개인을 파멸시키는 것에 그칠 수도 있다.

그런데 집단으로 이루어지면 그 악은.... 공동체를 또 그들이 속한 사회를 파괴한다.


“.....?”


도로에 우두커니 서있는 해리슨 노튼이나 그를 촬영하고 있는 리차드슨의 촬영팀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인서트 느낌의 촬영이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시간이 흘렀으니 사인을 내야했다.

그런데 류지호는 ‘컷‘을 외치지 않고 있다.

리차드슨 촬영감독이 모니터스테이션을 돌아봤다.

황당했다.

류지호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카메라가 잡고 있는 화면 너머 실제 에인절스 타운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컷 사인을 잊은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의 로케이션 촬영을 추억이라도 하는 것일까.

전부 아니다.

현재 류지호는 넋이 나가 있지 않았다.

관객 입장에서 이 장면이 어느 정도 길이어야 지겨워서 미칠 지경일지 고민하고 있다.

관객의 인내심이 바닥날 커트의 길이를 속으로 세고 있다.

한편으로 이 롱 테이크에 어떤 사운드 디자인을 할지를 떠올려보았다.

마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스타일의 롱 테이크를 찍어보려는 것처럼.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지독하게 지루해 졸음을 이기지 못하거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적적으로 끝까지 영화를 보거나.

영화를 예술로 믿거나 영화를 공부하거나 혹은 만드는 사람들은 명백히 후자다.

보통은 십 분이 넘어가는 롱테이크를 보게 되면 하품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영화 <희생>에서 극작가가 자신의 집을 모두 불 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그 중요한 장면은 굉장히 지루하다.

심지어 관객입장에서 신경질이 나기도 한다.

주인공이 자꾸 라이터 불을 꺼트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니까.

촛불에 불을 붙인 후 꺼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살피는 장면이 6분 이상 전개된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지루해서 미칠 지경이다.

감독이 추구하는 불과 물의 상징을 이해하고 보면 그럭저럭 참으면서 볼 수 있다.

물론 그럭저럭 참는 사람은 극소수다.

타르코프스키에게 불이라는 것은 태초의 순수성과도 같다.

그의 영화에서 반드시 물과 함께 나온다.

감독은 불의 세계가 물의 세계와 만날 때, 비로소 그것이 세상의 순리라고 믿는 것 같다.

물을 만나면, 불은 꺼지니까.

그런데 영화 속에서 불에 물을 부어 끄는 장면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한 프레임 안에서 물과 불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것도 무지막지한 롱 테이크 촬영기법으로.

이전 삶에서 류지호는 타르코프스키 영화를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졸았거나 중간에 포기해버렸다.

이번에는 봐야만 했다.

무조건.

UCLA 영화사 입문 과정에서 과제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류지호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을 마음을 비우고 봤다.

지루함을 일부러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자 재미있는 감흥이 일어났다.

물과 불은 상극이다.

그 둘을 한 화면 속에서 공존시키면서 세상의 대립을 화해시키는 어떤 이미지로 승화시켰음을 발견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는 시종일관 비가 쏟아진다.

그는 비를 ‘어머니 대지와 아버지 하늘을 이어주는 선’이라고 표현했다.

그에게 비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끈과도 같은 것이다.

어떤 감독의 영화들에서 비가 자주 내린다면, 타르코프스키 영화 신봉자이거나 오마주일 가능성이 높다.

암튼 류지호는 전에 깨닫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아는 만큼 본 것이 아니라, 본 만큼 알게 되었다.

류지호는 자신만의 영화적 언어와 문법을 탐구하고 정립해 나가고 있다.

그것이 롱 테이크 스타일이 될 수도 있고, 지금 찍는 것처럼 롱 쇼트일 수도 있다.

시각적인 전시를 뛰어 넘어서 타르코프스키의 롱 테이크처럼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예술의 영역에 진입할 수가 있다.


“......!”


30초가 지나갈 즈음.

해리슨 노튼이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었다.

그러더니 짝다리까지 짚었다.

턱도 약간 치켜든 것 같다.

감독이 하도 사인을 주지 않으니, 나름대로 애드리브를 넣어본 것이다.

짝다리는 좋게 말하면 멋져 보이고, 나쁘게 말하면 건방져 보인다.

해리슨 노튼은 허세기가 다분한 벤 사이퍼의 캐릭터대로 멋져 보이거나 강해 보이려는 심리적인 표현으로 이런 포즈를 취해봤다.

그래봐야 적막감에 휩싸인 타운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존재처럼 보였지만.

그렇게 1분이 훌쩍 넘어 2분으로 향할 때.


“커엇!”


마침내 류지호가 속이 후련할 정도의 목소리로 사인을 냈다.


짝짝짝!


디렉터 체어에서 일어선 류지호가 수고한 스태프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수고했어요! 집으로 돌아갑시다!”


그립들이 장비 정리에 들어갔다.

롭 리처드슨과 해리슨 노튼이 함께 류지호에게 다가왔다.

콘티북과 시나리오북을 가방에 챙기는 류지호를 향해 리차드슨이 입을 열었다.


“롱 테이크의 마스터가 되고 싶은 거야?”


작가의말

활기차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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