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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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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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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2.08.1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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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The Killing Road. (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영화에서 캐릭터는 개성이 있어야 한다.

특히 주인공은 영화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끌어가는 인물로써 보는 사람에게 확실한 정체성과 존재감을 보여줘야 한다.


"아, 저 사람은 성격이 저렇구나.."


라고 확실하게 인지를 시켜줘야 한다.

그래야 그 인물이 영화 속에서 성장 혹은 변화했을 때 관객이 그 인물을 응원하거나 몰입하는 등 감정적 동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류지호는 <The Killing Road>에서 각 캐릭터마다 디테일한 프로파일링을 작성했다.

캐릭터 특성을 못 잡을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는 주변 사람 중에서 영화 속 캐릭터와 비슷한 사람을 표본으로 연구했다.

말투부터 행동패턴, 습관까지.

UCLA 교직원들과 학생들 그리고 여러 사업체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을 관찰했다.

류지호는 캐릭터 연구를 정말 깊게 했다.

이를 토대로 계약서에 서명한 배우들과 만났다.

영화 속 캐릭터가 만들어진 인물이 아니라 원래 있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구체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까지 류지호는 단편영화 작업을 무척 많이 했다.

캐릭터의 정확한 성격묘사에 있어서만큼은 다양한 단편영화 작업을 하며 일취월장했다.

단편의 경우, 짧은 시간 안에 강한 메시지와 치밀한 연출 구조를 보여줘야 한다.

배우 한두 명이 영화를 끌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캐릭터의 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캐릭터의 성격이 불분명 하다면 영화 전체적인 흐름이 산만해 질 수 있다.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이야기 그렇다.

미모의 여성이 성격이 소탈할 때.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세심한 배려를 할 때.

키 작은 남자가 배포가 클 때.

똑똑한 여성이 남 돕기에 열심일 때.

우리는 이런 경우에서 반가움과 부조화의 매력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것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일상에서 자기 생각에 얼마나 함몰되어 있는가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지요.”


시나리오 기초 작법 강의 중에 교수가 한 말이다.

암튼 감독이 열심히 하는 만큼 배우들도 성실하게 배역에 대해 준비했다.

여주인공에 캐스팅 된 마리아 베리도 시간 날 때마다 류지호를 찾았다.

메이저리거인 남편이 원정경기를 떠날 때면, 웨스트우드 집무실로 찾아오거나 류지호를 집으로 초대를 했다.

영화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마리아 베리는 스트레스가 꽤 심했다.

강하고 개성 있는 캐릭터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잃지 않기 위해 고심했다.


“난 사실.... 배우로서 연기력을 보여주는 것보다 모델이라는 선입견과 싸우는 게 더욱 힘들어.”

“기죽지 말아요. 마리아의 앞에는 많은 기회가 대기하고 있으니까.”

“날 배우로 봐주지 않아. 제법 예쁘장한 흑인 모델.... 예쁜 옷을 입혀 놓은 마네킹으로 써먹으려고 하는데도?”

“그래서 일부러 강하고 힘든 역할만 찾고 있잖아요. 그 부분에서 내겐 행운이라고 할 수 있어요.”

“행운?”

“UCLA 학생이 어떻게 마리아 같은 대단한 여배우와 일을 해보겠어요. 당연히 행운이죠.”


마리아 베리가 깔깔 웃었다.


“호호호.”


아부가 섞인 말이다.

하지만 진심이 느껴졌다.

마리아 베리는 류지호의 또래의 감독들과도 일을 해봤다.

특히 뮤직비디오와 광고업계에 젊은 감독들이 많다.

한마디로 젊은 감독일수록 재수가 없다.

싸가지가 없다.

반면에 그들과는 비교 자체가 실례인 류지호는 말도 참 예쁘게 하는 신사다.


“모델로 잘 나갔잖아요. 어쩌다가 연기를 시작하게 됐어요?”

“연기를 시작한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어. 좋은 영화를 보고 외국의 좋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연기가 예술이라는 생각을 했지. 그래서 시작한 연기이지만,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매료되고 미칠 수밖에 없더라고.”

“배우라는 직업이 미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직종이긴 하죠.”

“그럴 것 같아.”

“내 영화에서 제대로 미쳐주세요.”

“실망시키지 않을게.”


해리슨 노튼도 그렇지만, 마리아 베리 역시 의욕이 넘쳤다.

기분이 좋은 한편, 경계하는 마음도 들었다.

사람이란 것이 그렇다.

함부로 사람을 들이지 않는 거라는 말이 있듯이.

상처를 주거나 배신을 당하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정을 주는 것이 문제다.

정을 줘버리면 한도 끝도 없다.

책임이란 걸 져야 한다.

그게 무서운 거다.

감독과 배우의 관계도 그렇다.

비즈니스 관계로만 규정지을 수 없다.


탁.


류지호가 오디션 파일을 덮었다.

아직까지 살인 사건의 목격자 조앤 역할을 결정하지 못했다.

오디션을 본 여배우들은 각각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기본기들도 훌륭했고.

혹시나 놓치고 있는 배우가 있나 싶어 오디션 파일을 자주 들춰봤다.

눈만 아플 뿐.


“첫 단추는 잘 꿰어진 것 같지?”


터커 레이튼의 말투가 변했다.

함께 한 시간이 늘어갈수록 두 사람 사이의 말투나 태도가 좀 더 편해졌다.


“아마도. 모두가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가 되는 배우들이야.”


끄덕.


터커 레이튼 역시 동의했다.


“마리아 베리는 배우로서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성실하고 에너지가 넘치지. 그런데다 겸손하고. 그녀는 지금보다 나이가 들수록 더 좋은 연기가 나올 거야. 해리슨은 현명해. 영민하고. 그래서 항상 영화를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연극도 자주 할 것 같아. 고집만 조금 버리면 좋겠는데, 그런 성격은 스튜디오 입장에서 꺼려지는 부분이지. 감독들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고집과 자기주장이긴 하지만. 레티는 앞으로 용모의 변화가 별로 없을 것 같아. 그녀는 제 2의 마릴린 먼로라고 불리게 될지도 모르겠어. 그녀만의 오리지널한 개성을 찾기 쉽지 않겠지만, 일을 하면서 한 번도 찌푸리는 기색이 없이 매일 전력투구 할 거야. 진짜 배우라는 직업을 사랑하니까. 존이나 빈스는 여전히 좋아. 성숙 단계에 들어선 것 같아. 처음 알 게 된 배우들도 모두 기대가 되고.”

“캡틴이 마음에 든다니 나로서는 보람을 느껴.”

“나중에 영화 끝나면 수잔에게 감사의 선물 보내야겠어.”

“참으라고 캡틴. 아직 그들과 필드에서 일을 해보지 않았어.”

“잘 할 거야. 감독이 믿고 지지해줘야지.”

“세상에서 재능이 있는데 성공하지 못한 사람보다 더 흔한 건 없어.”

“특히 연예계가 그런 편이지.”

“세상에 밝고 어두운 부분이 없는 직업이 없다지만,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특히 더 그런 것 같아.”


연예계는 빛을 받는 부분이 유난히 화려해서 그런지, 그림자도 더 짙은 것처럼 느껴졌다.


“조앤 배역은 언제 결정하려고?”

“결정하긴 했는데요. 뭐 랄까....”

“알 것 같아. 마지막에 봤던 친구지?”

“응.”

“재밌겠어.”


사차원적인 면이 얼핏 보였다.

좋은 의미의 사차원이 아니다.


“그 친구는 고급스러움, 친절함, 순수함 그런 긍정적인 단어와는 영 매치가 되지 않지만, 확실히 개성은 있어.”


싸구려 느낌이 풍기는 백치미와 관능미.

타고난 것이든,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분위기든.

배우로서는 그런 것도 하나의 장점이다.

류지호는 <둠 제너레이션>의 예고편을 보고 그녀를 기억해 냈다.

<스크림> 출연 이후로 ‘B급 영화의 여왕‘이 되는 배우다.

독보적인 악녀 캐릭터.

할리우드의 여배우 성폭력을 최초로 고발한 강단 있는 여배우.

류지호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로즈 맥로한에 대한 기억이다.


“로즈에게 스크립트 보내 주세요.”

“아직 계약도 하지 않았어.”

“그녀가 영화 출연을 거절할 수도 있잖아.”

“설마.”


터커 레이튼이 그럴 리 없다고 단언했다.

류지호는 로즈 맥로한에게 가능한 빨리 영화 대본을 보여주고 싶었다.

대략적인 상황설명과 캐릭터 소개만으로 꽤나 골 때리는 연기를 보여줬던 그녀다.

<둠 제너레이션>에서 선보였던 막나가는 십대 여자애 캐릭터에 이어서 자신의 영화에서는 과연 어떤 연기가 튀어나올지 조금 궁금했다.

약간의 테스트도 해보고 싶었다.

배우는 머리가 나쁘면 대성하기 힘들다.

시나리오를 어떻게 읽고 해석했는지도 듣고 싶다.

오디션에서 보여준 엉뚱하고 멍청한 모습이 실제인지 그녀 말대로 연기인지도 확인하고.


❉ ❉ ❉


다음 날 아침.

로즈 맥로한이 웨스트우드 JHO Pictures로 찾아왔다.

외모가 가관이다.

떡진 검은 머리카락, 졸린 듯 부스스한 눈동자, 립스틱을 바르지 않은 도톰한 입술.

방금 자다 나온 여자 같았다.


“세수는 했어?”

“그, 그럼요. 화장만 안 했을 뿐이라고요!”

“난 또 누군가 했네.”


로즈가 류지호를 등지고 작은 소리로 온갖 욕설을 내뱉었다.


“다 들려.”


얼른 표정을 고친 로즈가 돌아서서 배시시 웃었다.


“이 역할 하고 싶어요. 아니, 꼭 시켜주세요.”


류지호는 대답 대신 사무실 서랍을 뒤졌다.


“매번 표독스럽거나 악녀 캐릭터만 오디션 봤는데, 이건 달라요!”

“조앤도 만만치 않은 돌아이야.”

“그래도 이 영화에 나오는 다른 놈들에 비하면 평범한 수준이잖아요.”

“그렇긴 해.”


류지호가 서랍에서 LA 다저스 모자를 찾아냈다.


“이번 영화 함께 하자.”

“<The Killing Road>에 나도 출연하는 건가요?”

“응.”


류지호가 로즈에게 다가왔다.


“....?”


로즈에게 바짝 다가온 류지호가 모자를 그녀의 머리에 씌웠다.


“명색이 배우가 그러고 다녀? 베벌리힐스가 지척인데?”

“아, 그게.... 스크립트를 받아보고 너무 기뻐서....”


더듬거리는 그녀의 눈은 욕심으로 빛나고 있다.

눈동자만은 투명하고 맑았다.

순수한 갈망이다.

로즈 맥로한은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는 아니다.

다만 배우로서의 열정만큼은 진짜배기였다.


훗.


류지호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잘 부탁해. 로즈.”


순간 로즈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았다


‘여태까지 날 이렇게 욕심내는 사람이 있었나?’


육감적인 몸매나 잠자리 상대가 아니라, 영화배우로서....


"오, 마이~ !!"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로즈의 맨 얼굴에 격한 감정이 드러났다.


“고마워요. 디렉터 지호 류.”


류지호로서는 그녀의 반응이 의아했다.

겨우 단역 급의 배역일 뿐이다.

출연료가 적다.

독립영화 스타일의 저예산 영화다.

저렇듯 감격할 만한 캐스팅은 아니다.


“디렉터, 나 어때요? 괜찮으면 호텔에서 오디션을 다시 볼 수도 있어요.”


로즈가 눈까지 찡긋거렸다.


“네가 어떤 사람들과 일을 해왔는지 모르지만, 나와 일할 때는 그러지 마.”

“.....?”

“네 스스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도록 해. 넌 배우지, 에스코트 걸이 아니야.”

“이번엔 연기가 아니라 진짠데....”


로즈가 졸린 눈 대신 그윽한 시선을 류지호에게 던졌다.


“유감스럽게도 내 타입이 아냐.”

“쳇. 나도 샌님은 싫어요.”


어떤 것이 진심이고 어떤 것이 연기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나름 할리우드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 같았다.


“아침은....?”

“....급하게 나오느라고.”

“가자. 나도 아침 안 먹었어.”

“잠깐! 잠깐만....!”


로즈가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얼굴을 확인했다.

꼴이 말이 아니다.

급한 대로 스킨은 발랐지만, 잡티를 가려주는 기초화장조차 하지 않은 상태다.

감독은 기다려주지 않고 스태프들과 사무실을 나서고 있다.

하는 수 없이 모자를 푹 눌러썼다.

류지호는 일행을 사무실 근처 브런치 레스토랑으로 데리고 갔다.

에그 베네딕트에 커피를 곁들여 늦은 아침을 해결한 류지호는 로즈 맥로한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프로듀서나 감독과 잠자리를 하는 건 영 부질없는 짓은 아니에요. 나 같은 무명배우에게는.....”

“그렇게 기회를 얻어 롱런하는 배우는 거의 없어. 차라리 그 시간에 오디션을 보러 다니거나, 무보수로 연극 공연 하는 게 백번 나아.”

“디렉터가 부자라서 그래요. 난 일을 해야 밥을 먹을 수 있다고요.”

“성공으로 가는 길과 실패로 가는 길은 거의 똑같아. 단지 준비된 자가 그 길을 가는 것과 행운에 기대 가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지.”

“나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믿어 줄게.”

“진짠데.....”

“하비 같은 자들과는 가급적 깊게 어울리지 마.”

“왜 요? 질이 안 좋아요?”

“호텔 객실을 예약하고 그곳에서 오디션을 보는 건 정상적이지 않지. 산 페르난도 밸리 지역이 아니라면 말이야.”


산 페르난도 밸리는 실리콘 밸리, 포르노 밸리로 불릴 정도로 미국 내 포르노 프로덕션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다.

한마디로 포르노 산업의 메카 같은 곳이다.


“프로듀서와 감독이 호텔로 부르는데 안 갈 수도 없잖아요.”

“가지마.”

“열에 아홉은.... 아니에요.”


스튜디오 오너 앞에서 그들의 갑질을 흉볼 순 없다.

육체관계로 캐스팅의 당락이 결정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차라리 할리우드 파티를 찾아다는 편이 그나마... 아니다. 이것도 정상적이진 않겠구나.”

“디렉터가 가는 파티에 나 같은 여자는 초대도 못 받아요. 그들만의 리그잖아요.”

“할리우드 파티가 얼마나 많이 열리는데.”

“나도 데려가 줄 수 있어요?”

“별 거 없어. 내가 가는 파티는 주로 나이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서.”

“그래도 데려가 줘요.”

“싫어.”


로즈가 이탈리어로 중얼거렸다.


“이 자식을! 확 쥐어박을 수도 없고!“


피식.


류지호는 어렵지 않게 로즈의 말을 유추할 수 있었다.


“에이전트는?”

“얼마 전에 함께 일하던 자식과 계약을 해지했어요. 그 자식이 웨인스타인씨를 소개해 준 거고요.”

“이번에 나와 함께 일한 수잔 베일리가 ETA 소속이야. 알지? Endeavor Talent Agency? 소개 시켜 줄까?”


로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류지호를 빤히 쳐다봤다.


“회사를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아서 관리하는 고객이 많지 않은가 봐.”

“대형 업체에서 저와 계약을 해 줄까요?”

“오후에 그녀와 미팅할 예정인데, 네 전화 번호 알려줄게.”

“고마워요.”

“조앤을 완벽하게 연기해주는 걸로 갚아.”

“믿어줘요. 난 어떤 배역이든 항상 준비 되어 있으니까.”


식사를 마치고 로즈가 떠났다.

사무실로 돌아온 류지호는 출연 계약서에 서명한 오순탁과 티타임을 가졌다.


“혹시 한국계 배우들과 평소 교류하세요?”

“한국계 배우라고 해봐야 몇 명 되지도 않아.”

“듣기로는 꽤 된다고 하던데?”

“젊은 애들은 잘 모르겠고, 늙은이들이 가끔 만나 소주를 마시고 있지.”

“한국인만 전문적으로 중개하는 에이전시는 없어요?”

“글쎄. 난 주로 뉴욕에서 일을 하는 편이라서 사실 LA 쪽은 잘 몰라.”

“그러셨군요.”

“한국계 배우는 왜?”

“교포 2.3세 배우들은 한국말을 거의 못하더라고요. 혹시 선배님이 그들에게 한국어 연기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내가 알려줘도 그 아이들은 한국 배우들처럼 연기를 못 할 걸?”

“그렇겠죠?”

“어릴 때부터 한국말을 배우지 않았다면 그냥 외국인이 한국말을 잘하는 것 밖에는 안 돼.”


<Collapse>에서 실감했다.

한국말을 한국인처럼 또박또박 할 줄 아는 배우가 많지 않았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한국인이 등장할 일은 거의 없다.

가뭄에 콩 나듯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다이얼로그가 영어다.

따라서 배우를 꿈꾸는 교포 2,3세 들은 한국어를 배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정에서도 어릴 때부터 미국인으로 키웠다.

언어뿐 아니라 사고방식 또한 미국인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은 기대하기 힘들다.


“한국에서는 영어가 능수능란한 배우가 거의 없고, 할리우드에는 한국어가 자연스러운 배우가 없고.... 어렵네요.”

“우리말이 중요하겠나? 한국인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그건 그렇습니다.”

“다음 영화에서 한국인이 주인공이야?”

“제가 기획하는 영화에서 만큼은 한국인 캐릭터를 한두 명씩 꾸준히 넣어보려고요.”


메이저 스튜디오 영화에서 흑인이 주인공을 맡는 것도 힘든 것이 현실이다.

히스패닉보다 선호도가 떨어지는 것이 아시아계 배우다.


“단역부터 넣어보려고요. 성별의 틈을 잘 이용해 봐야죠.”

“......?”

“남자 배우보다는 여자 배우에게 오히려 기회가 많이 주어질 것 같아요.”

“어째서 그런가?”

“인종편견적인 측면에서 아시아계 남자가 백인 여성을 리드하는 것은 부담스럽지만, 백인 남성이 아시아계 여성을 이끄는 것은 약간이라도 허용되는 면이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서 제가 기획하거나 연출하는 영화에서 꼭 아시아계 캐릭터가 필요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냥 여자 캐릭터가 필요할 때 한국계 여배우에게 기회를 줘볼까 하는 거죠. 그런 식으로 심리적 저항선을 조금씩 낮춰봐야죠.”

“참, 자네는 생각이 남달라.”

“소닉은 무작정 사무라이 같은 남성성을 영화에 넣으려고 하더라고요. 제가 볼 땐 접근이 잘 못됐어요. 미국 백인들에게 자신들의 이미지가 어떤지 모르고 있는 것인지 외면하는 것인지....”


사무라이 판타지가 서구권에서 잘 먹힌다.

단지 취향을 조금 많이 탈 뿐.


“하하. 그렇긴 하지.”

“한국에서 교수 제의가 왔다면서요?”

“아직 현역에서 일을 할 수 있는데, 학교로 가는 건 아닌 것 같아. 거절했네.”

“한국에서는 출연제의가 없어요?”

“요새는 통 미국으로 촬영 오는 한국영화가 없는 모양이야. 전에는 간간이 에이전시를 통해 한국영화 출연 제의가 오긴 했는데 말이야.”

“한국 가서 활동할 생각은 없으시고요?”

“자네 영화가 끝나면 할리우드 영화 하나와 계약 할 것 같아. 내년 봄에 촬영할 것 같더군.”

“잘 되셨으면 좋겠어요.”

“자넨 참 특이해.”

“가끔 듣는 말이에요. 하하.”


류지호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요즘 한국 영화계의 제작자나 감독이 삼십대라고 하더구먼. 한국의 영화인들은 왜 내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어. 그 친구들은 나를 동료 의식을 가지고 봐주지 않는 것 같아. 완전히 남이라고 느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좀 그래. 자네는 항상 선배로 대해 주더구만.”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분이니까 선배죠.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거리감도 느껴지고, 같은 걸 공감하고 함께 하는 느낌이 안 들잖아요.”

“나이 먹었다고 선배 요구를 하고 그러면 다른 데 영향을 미치니까.... 그러면 안 되지만, 같은 일을 하면서 인연을 갖는 선후배로 보지 않는 것 같아 섭섭하더구먼. 선생님이라고 호칭은 하면서 별로 존경심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누가 연세가 있는 분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지 몰라도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60대 이상 연기자에게 선생님이란 호칭을 쓰기 시작한 것은 방송계부터다.

일설에는 방송계의 유명한 작가가 작가님이란 호칭 대신 선생님이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하면서 몇몇 원로 배우가 자신들에게 똑같이 선생님 호칭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영화계에서는 스태프와 배우들의 유대감이 끈끈해서 그런 호칭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2000년대로 넘어가면서 달라진다.

영화계에서도 원로배우들에게 선생님이란 호칭을 사용하게 된다.

다만 류지호 또래의 젊은 스태프들은 호칭을 구분해서 썼다.

존경받아 마땅한 원로배우에게는 선배님이라고 불러드렸다.

갑질을 일삼으면서 가식적인 원로배우에게는 선생님이란 호칭을 썼다.

조감독들이 쓰는 호칭을 보면 연차가 있는 배우들의 인격을 대략 유추할 수 있었다랄까.


“감독이 나이를 고려해 배려해주면 고마운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동등한 관계에서 작업에 참여해야 하는 게 맞아.”

“일을 할 때만큼은 동료니까요.”

“따지고 보면 서열은 감독이 더 높기도 하고.”


오순탁은 60년대부터 할리우드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미국식에 익숙하다.

할리우드 현장에서는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먼저 시작했을 뿐, 지위와 대접은 나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할리우드에서는 돈을 많이 받는 사람이 그만한 대접을 받는다.

오래 했다고 해서 특별한 존중을 받지도 않는다.

류지호에 대해 한국에서는 나이에 주목하는 편이다.

어린 나이에 이랬다저랬다.

그래서 대단하다.

미국에서는 류지호가 쌓아온 커리어에 더 주목한다.

영화제 수상경력, 학생 아카데미 금메달, 영화사를 몇 년 사이에 준메이저로 키운 능력.

한국에서는 류지호의 나이를 듣는 순간 은근슬쩍 만만하게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에서는 류지호의 영향력을 이해하며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문화 차이인지 인종적 기질에서 오는 차이인지는 류지호도 모른다.

어쨌든 그런 편이다.


“오래 연기 하셔야죠.”

“아직은 내가 현장에서 잘 따라가. 내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불러줘.”

“선배님은 에이전시 통해서 연락 안 해서 좋아요.”

“당연하지. 우리는 비즈니스로 맺어진 인연이 아니지 않나.”

“그렇죠.”


한 때 007 영화에도 출연한 경력이 있는 할리우드의 베테랑 배우다.

미국의 TV·영화·연극 200여 편에 출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60대가 되면서 B급 영화에 주로 출연하곤 있지만,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배우다.


‘자존심과 고집만 좀 꺾으시지.’


한국인 1호 할리우드 진출 배우라는 어떤 책임감 때문인지 몰라도 배역을 많이 가린다.

그것 때문에 좋은 배역을 번번이 놓치고 있다.

현 시점의 할리우드 주류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한국인이 류지호다.

그의 등장으로 할리우드 지형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어쩌면 한국계 배우들에게도 좀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작가의말

편안한 주말 되십시오. 광복절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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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난 꿈꾸는 사람을 좋아해. (2) +5 22.09.06 4,951 147 22쪽
268 난 꿈꾸는 사람을 좋아해. (1) +12 22.09.05 5,041 154 21쪽
267 전문가의 손을 타야 좋아져. +13 22.09.03 5,122 163 26쪽
266 도전은 좋은 겁니다. (2) +6 22.09.02 5,057 160 26쪽
265 도전은 좋은 겁니다. (1) +12 22.09.01 5,129 155 23쪽
264 그건 당신들 착각이고....! +9 22.08.31 5,055 171 26쪽
263 다들 수고가 많다....? (2) +10 22.08.30 5,082 167 26쪽
262 다들 수고가 많다....? (1) +5 22.08.29 5,105 158 23쪽
261 누가 자네를 말릴 수 있겠어. +8 22.08.27 5,178 168 26쪽
260 The Killing Road. (14) +12 22.08.26 5,003 170 29쪽
259 The Killing Road. (13) +5 22.08.25 4,791 160 25쪽
258 The Killing Road. (12) +7 22.08.24 4,819 161 26쪽
257 The Killing Road. (11) +4 22.08.23 4,888 154 26쪽
256 The Killing Road. (10) +9 22.08.22 4,893 148 23쪽
255 The Killing Road. (9) +6 22.08.20 5,008 152 26쪽
254 The Killing Road. (8) +5 22.08.19 5,054 144 25쪽
253 The Killing Road. (7) +12 22.08.18 5,016 156 23쪽
252 The Killing Road. (6) +7 22.08.17 5,119 162 25쪽
251 The Killing Road. (5) +4 22.08.16 5,178 151 22쪽
250 The Killing Road. (4) +5 22.08.15 5,162 163 21쪽
» The Killing Road. (3) +4 22.08.13 5,303 167 22쪽
248 The Killing Road. (2) +12 22.08.12 5,334 161 22쪽
247 The Killing Road. (1) +16 22.08.11 5,816 173 26쪽
246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영웅놀이....! +17 22.08.10 5,584 200 27쪽
245 Collapse. (7) +8 22.08.09 5,295 168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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