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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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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최근연재일 :
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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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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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난 꿈꾸는 사람을 좋아해. (5)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오늘 사범들의 공개 심사에서 진짜 심사관은 단상에 앉아있는 원로 관장님들이 아니었다.

객석을 가득 메운 사범들의 수련생들이야말로 진짜 심사관이었다.

오늘 심사는 평소의 가르침과 그 실천이 같은지를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였다.


“미국 사람들이 순진하고 착해서 사범 말이라면 덮어놓고 다 듣는 줄 알면 오산인거야.”

“저마다 피 땀 흘려 가꾼 텃밭에서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이죠.”


윌 욱 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Jay, 우리 아버지는 지금도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도장 문을 열고 2시간 간씩 수련을 해. 그리곤 식사를 하면서 신문을 읽지.”


그의 부친은 여전히 태권도장을 운영 중이다.

윌 욱 리 역시 불과 일년 전까지만 해도 태권도 선수였고.


“중산층이 주로 사는 지역에서 태권도 센터를 운영하는 사범들은 교양도 함께 갖추고 있어야 하지.”

“맞아요. 지역사회의 엘리트를 상대하는데 사범의 무식이 드러나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으니까.”


전용운 사범을 포함해 많은 한국인 사범들은 지식을 쌓고, 새로운 걸 배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태권도 전파의 소명의식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태권도를 통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

그러니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하면 절대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태권도뿐만 아니라 다른 공부 또한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성장시켜주지.”

“그래서 젊은 학부모들이 나이 먹은 사범을 싫어하기도 하고요.”

“사범이 너무 고지식하다거나 무식한 운동선수처럼 보이면 학부모들은 아이를 태권도 센터에 보내지 않지.”


가라데나 쿵푸는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포장이 정말 잘 되어 있다.

반면에 태권도는 오로지 사범을 통해 이미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돈만 밝히거나 범죄에 연루된 태권도 사범으로 인해 태권도 이미지가 추락한 지역도 있다.

대략 15년이 흐르면 미국에서 제2의 태권도 열풍이 분다.

말을 더럽게 안 듣는 아이들이 태권도장에 다녀오면 고분고분해지는 마술을 학부형들이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태권도장에서 놀이를 겸해 운동을 하고 귀가하면 식사도 잘하고 잠도 일찍 잔다.

때가 되면 수련회라는 명목으로 캠핑을 다녀오기도 한다.

수련회 동안은 육아로 지친 학부모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짬이 난다.

한국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탄생한 태권도유치원 시스템이 미국의 학부형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게 되는 것이다.

류지호가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전용운 사범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태권도뿐만 아니라 다른 것에서도 어른만이 줄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이 먹은 사람이라고 해서 불편한 잔소리만 늘어놓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아둬.”

“예. 사범님.”


한국의 홍 관장이나 지역사회에서 소외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미국의 태권도 사범이나, 그들은 나이가 어른이 아닌 삶이 어른인 사람들이다.

사람의 진면목은 척박한 환경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승단심사가 모두 끝난 모양이다.”

“네!”


류지호와 윌 욱 리가 동시에 일어섰다.

두 사람은 특별 이벤트 형식으로 겨루기 시범을 보일 예정이다.

한 명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태권도 생활체육인이고 다른 한 명은 한때 태권도 주 대표선수였던 영화배우다.

오늘 참석한 수련생과 가족들에게는 꽤나 볼만한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승패가 중요하지 않은 승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상대에게 저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체급은 같지만 신장은 류지호가 윌 욱 리보다 5Cm가 크다.

윌 욱 리는 선수출신이다.

최근 배우수업을 받느라 운동을 조금 쉬었다.

류지호가 비록 품새 위주로 태권도를 했다고 해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제법 팽팽한 겨루기가 예상되었다.


“잘 부탁해."

"서로 다치지 않게 조심하자.“


이번 겨루기는 수련생들에게도 좋은 경험이다.

류지호는 오리지널 한국식으로 태권도를 수련했다.

반면에 윌 욱 리는 태권도 마스터인 아버지로부터 어릴 때부터 배워 대학에 체육특기생으로 입학까지 한 소위 ‘선출‘이다.

물론 태권도의 기본은 같다.

다만 수련방식이나 마음자세가 달랐다.


“시작!”


윌 욱 리의 발차기 공세는 밀려오는 파도 같았다.


‘역시 선출이란 건가?’


류지호가 태권도 스텝을 밟으며 호흡을 조절했다.

이내 마음이 차분해지면 대응에 나섰다.


팡!

휙!


두 사람이 도장 중앙을 종횡무진하며 격돌했다.

단순히 보여주기 겨루기 시합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진지하게 겨루기에 임했고.

그런 만큼 치열하게 격돌했다.


“으음.”


도복을 벗으며 류지호가 신음을 흘렸다.

윌 욱 리의 입에서도 신음이 새어나왔다.


“윽.”


둘 모두 온통 땀에 푹 절어 있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근사한 근육을 자랑했다.


큭큭.

하하.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후련했다.

승패는 상관없었다.

두 사람은 겨루기에 최선을 다했다.

승단심사에서 사범들이 그랬던 것처럼.


“Jay.”

“응?”

“나는 말이야. 남들 앞에서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게 좋아.”

“그러니까 배우를 하려고 하겠지.”

“그런가?”

“응. 그런 거야.”

“어떻게 하면 너처럼 성공할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류지호에게 물어보는 질문이다.


“어떻게 하면 나처럼 될 수 있을까.....”


류지호의 중얼거림과 상관없이 윌 욱 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과 이상이 있어. 하지만 현실 앞에서 두려움 때문에 감히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해서 그렇지."


류지호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차라리 태권도 하던 시절이 쉽고 편했던 것 같아.”


이럴 때면 류지호가 해주는 말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결혼식 비디오 사업을 벌였던 일화, 고등학교 자퇴 후 검정고시, 웨딩비디오 사업의 시행착오들, G&P에서의 프레젠테이션, UCLA 유학 도전 등 나름의 우여곡절 많은 경험담을 들려주고, 희망과 도전을 품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아시아 출신, 한국 출신으로서 대표성과 책임감을 느낄 때가 있지 않아?”

“별로.”

“넌 한국계들을 대표하고 있고 많은 이들의 롤모델이야.”


솔직히 신경 쓰이기는 한다.

그래서 그런 모양인지 어떤 선택이든 더욱 신중하게 내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툭툭.


윌 욱 리가 옆에 나란히 앉아있는 류지호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동갑내기 동포 친구에게 격려와 응원을 전했다.


“지호야, 기념촬영 하자.”

“넵!”


류지호는 승단심사에 참석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또 다시 류지호의 유명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수련생에게 일일이 사인을 해주느라 팔이 빠질 뻔했다.

겨루기 시합 한 번 한 것뿐인데, 고단한 하루였다.

기념촬영과 사인이 이렇게나 피곤한 일인 줄 처음 알았다.

연예인들의 고충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하루였다.

류지호는 웨스트우드 주택으로 돌아와 경호원들과 저녁을 챙겨먹었다.

명상도 하고 호흡도 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작업실로 들어갔다.

여전히 방 안 삼면에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메모된 색색의 포스트잇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류지호는 책장에 꽂혀있는 파일 하나를 꺼내 거실로 나왔다.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태권동자 마루치... 정의의 주먹에 파란해골 13호 납작코가 되었네~”


파일 표지에 적혀있는 타이틀.


-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1977년 개봉한 어린이 만화영화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를 기억나는 대로 정리해 놓은 트리트먼트다.

필름이 홍릉으로 이전한 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WaW 픽처스를 통해 원작자를 수소문하기도 했다.

만화영화가 오리지널이 아니었다.

문화방송에서 라디오로 방송된 어린이 연속극 ‘마루치 아라치’가 원작이었다.

여담으로 이전 삶에서 류성운 감독이 실사화를 시도했지만, 제작자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실사화가 무산되고 제작된 영화가 바로 <아라한 장풍대작전>이었다.

류지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승단심사를 보며 떠올랐던 무수한 아이디어를 메모했다.

스포츠 영화 풍에서부터 휴먼 드라마까지.

류지호는 의식적으로 태권도를 배제했다.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수많은 스포츠 실화영화와 성장영화들을 대입시켰다.


쿨쿨.


류지호가 어느새 소파에서 곯아떨어졌다.


❉ ❉ ❉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지만 눈을 떠보니 새벽이었다.

잠결에도 기계적으로 아침 운동을 시작했다.

단전호흡과 스트레칭.

카투사 복무 중에도 단 하루도 빼먹은 적 없는 일과다.

류지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우와. 오랜만에 피로가 장난 아니네.....!”


겨루기 한 번 뛴 것 말고는 무리한 운동도 없었다.

기념촬영이나 사인공세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중간고사부터 이어진 강행군으로 인해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온 모양이다.

사전에 충분히 몸을 풀었기 때문에 겨루기로 인한 심각한 근육통은 없었다.

류지호는 두 시간에 걸쳐 단전호흡과 스트레칭을 꼼꼼하게 했다.

야채주스를 갈아 마신 후에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식사는 UCLA 학생식당에서 했다.

식당에서 시나리오 전공의 김윤희와 마주쳤다.


“선. 선배?”


김윤희가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왜 살살 피해 다녀?”

“그런 적 없어...요.”


김윤희는 지난 학기에 혼쭐이 난 후로는 가능한 류지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다.


“진짜?”

“.....네.”


김윤희는 계속해서 류지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왜 내 눈을 못 봐?”


김윤희가 류지호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그런 적 없어요.”

“겨울학기 브레이크 타임에 한국 들어갈 거야?”

“아니요. 인턴십 신청했어요.”

“연락 온 곳은 있고?”


후우.


김윤희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없구나?”

“3주짜리 인턴을 뽑는 곳이 없더라고요.”

“그럴 거야. 한 학기 쉬면서 인턴십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내년 여름에는 한국 들어가야 해서 인턴십을 못하는데....”

“따라와.”

“밥 먹었어요.”

“인턴 자리 알아봐 줄게.”

“....예?”


김윤희가 영문을 몰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싫으면 말고.”

“진짜. 인턴을 할 수 있어요?”

“대신 3주가 아니라, 겨울 학기 내내 해야 돼.”

“한 쿼터를...요? 뭔데요?”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가봐야 알아. 매일 출퇴근하는 일을 주지는 않을 거니까 수업은 걱정하지 말고.”


류지호가 먼저 학생식당을 나섰다.


“자, 잠깐만요! 선배!”


그 길로 두 사람은 산타모니카의 ParaMax Films으로 향했다.


“나한테 화 난 거 아니었어요?”

“내가 왜?”

“내가 선배를 불쾌하게 했고... 또... 찍힌 거 아니었어요?”

“찍혔었지.”

“근데 왜?”

“네가 찍은 단편을 봤어. 좋았다.”


김윤희는 류지호에게 출연을 제의했던 시나리오도, 류지호가 제안했던 시나리오도 아닌, 완전 다른 시나리오로 단편영화를 찍었다.

원치 않았고, 의도하지도 않았던 임신을 하게 된 한국계 여자.

자신이 낳은 아이와 이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십대 미혼모를 통해, 모성애와 여성으로서의 삶을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풀어낸 영화였다.


“단편영화 때문에요?”

“재밌게 찍었다며?”

“네. 같이 영화를 찍으면서 크루 애들하고 친구가 되었어요. 뭐랄까 클럽활동이나 봉사활동하고는 다른 것 같더라고요. 마치 전쟁을 함께 치룬 전우라고 해야 할까....?”

“그럼 된 거야.”

“됐다고요?”

“재밌었다며?”

“....네.”

“그 만큼 네가 충실히 준비하고 작업을 했다는 의미겠지. 엉성한 자세와 허술한 준비를 하고 작업을 했다면 그런 말이 안 나왔을 걸? 후회, 미련, 아쉬움 또는 함께 일한 친구들이 내 마음 같지 않았다고 투덜댔겠지.”

“......”

“왜 트라이-스텔라가 아니라 ParaMax인지는 안 물어봐?”

“인턴 시켜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걸요.”

“스크린플레이 전공이지?”

“네.”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시나리오 작가가 될 생각이고?”

“그러고 싶어요.”

“트라이-스텔라가 제작하거나 배급하는 영화들은 전형적이야. 할리우드 공식에 입각한 스크립트들이지. 하지만 ParaMax는 독립영화부터 제3세계영화까지 스펙트럼이 넓어. 아시아 영화들도 수입해서 북미에 배급하고 있기도 하고.”

“.....?”

“영화제에 가지 않아도 ParaMax에 들어오는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대강의 세계 영화 흐름을 배울 수 있을 거야. 동 시대의 여러 나라의 작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접근하는지 배울 수 있다는 뜻이야. 무엇보다 장르가 다양해. 예술영화뿐만 아니라 B급 영화도 제작하거나 배급하니까.”

“열심히 할게요.”


류지호는 김윤희를 ParaMax Films에 소개했다.

방학기간이 아니기도 했고, 아직까지 ParaMax는 다른 스튜디오에 비해 크게 인지도가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턴 한 명 추천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UCLA 영화과 출신이라면 ParaMax에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ParaMax는 매년 30편 가량을 투자·제작·배급하고 있다.

그 가운데 투자나 공동제작 영화는 10여 편 정도다.

태생적으로 독립영화 배급사로 시작했기에 제작보다는 배급에 주력하고 있기도 하고.

올해 주목할 만한 영화는 <Exotica>, <Smoke>, <Four Rooms>, <Restoration> 등이 있다.

선댄스키드 네 명이 모여 만든 옴니버스 영화부터,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영화, 그리고 아카데미 노미네이트 작품까지 다양하게 포진했다.

특히 6월에 개봉한 존 웨인 왕 감독의 <Smoke>는 베를린 영화제 수상과 함께 제작비 대비 5배 이상 수익을 거뒀다.

700만 달러 예산으로 4,000만 달러의 박스오피스 수익을 거뒀다.

또한 호주영화 <뮤리엘의 웨딩>을 북미에 배급해 1,500만 달러 박스오피스 수익을 거뒀다.

그 외에도 1,000만 달러 미만 예산 영화들로 쏠쏠한 수익을 얻고 있다.

현재까지 ParaMax films에서 제작하는 영화는 크게 망한 영화도 없고, 대박을 친 영화도 몇 편 없다.

그럼에도 회사 자체는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Exotica>, <Smoke> 같은 영화들이 까먹은 돈을 모두 채우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보스!”

“밥!”


디멘션 필름의 밥 웨인스타인이 ParaMax 본사에 와 있었다.


“LA에는 언제는 왔어요?”

“어제 왔어.”


참고로 디멘션 필름은 뉴욕에 소재하고 있다.


“홍콩으로 출장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지난달에 다녀왔어.”

“갔던 일은 잘 되었고요?”

“리양중 영화 한 편과 방사룡 영화 두 편을 계약하고 왔지.”


디멘션 필름은 홍콩영화 <방세옥>,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의 북미 배급을 책임진 바 있다.

이번 홍콩출장 중에 <정무문>과 <홍번구>의 북미배급을 따왔다.


“한국영화는 마음에 드는 게 없어요?”

“<테러리스트>라는 영화를 북미에 풀어볼까 논의 중이야.”

“결국 그렇게 정리가 되었군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한국에서는 <닥터 봉>이 한국영화 중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한국의 로맨틱 코미디 장르는 미국에 통하지 않는다.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가운데 <남자는 괴로워>, <영원한 제국>, <헤어드레서>, <테러리스트> 단 네 편만 ParaMax와 디멘션에서 수입하기로 했다.

그것도 30개미만 스크린에서 제한상영 하고, 3주가 경과하면 곧장 비디오 시장에 풀릴 예정이다.


“<할로윈> 시리즈 권리는 어떻게 됐어요?”

“완전히 넘겨받았어.”

“현재 디멘션의 프랜차이즈 시리즈가 뭐가 있죠?”

“이번에 추가된 <할로윈>과 <헬레이저>, <크로우>, <하이랜더>가 있어. 그 외 TV 호러 영화 하나와 비디오용(direct-to-video)인 <옥수수 밭의 아이들>이 있지.”


모두가 비디오 시장에서 장수 시리즈들이다.

거기에 <황혼에서 새벽까지>와 <스크림>이 내년에 개봉된다.

두 개의 시리즈가 더 추가되는 것이다.

디멘션 필름의 라인업도 나름 충실하게 갖춰졌다.


“<더 크로우> 속편은 보스가 직접 프로듀싱 하게?”

“나는 기획만 하고, 프로듀싱은 밥이 해야죠.”

“.....음.”

“조금만 더 시간을 줘요. 아직 명확한 개발방향이 잡히지 않았어요.”

“근사한 프로젝트로 가져오기만 한다면야.....”

“당장은 하비와 함께 <스크림>에 집중해주세요.”

“알겠어.”


류지호는 디멘션 라인업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ParaMax를 빠져나왔다.

<더 크로우>는 브루스 리의 아들 브랜든의 유작이다.

촬영용 소품 총에 공포탄 대신 실탄이 장전되어 있어 총격에 의해 사망하고 말았다.

디멘션 필름은 그의 죽음과 관계없이 <더 크로우>를 시리즈물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흥행과 평단의 반응이 좋았기 때문이다.

이야기와 캐릭터는 평범했다.

그런데 암울한 도시의 분위기와 브랜든의 열연 그리고 티모시 버톤의 <배트맨>을 연상시키면서도 개성적인 비주얼 스타일을 선보였다.

문제는 브랜든 리의 아우라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마치 <나 홀로 집에>의 맥컬리처럼.

그를 대체할 배우가 마땅치 않았다.


‘포기할 수도 없고, 이대로 진행하자니 망할 테고.....’


<더 크로우>, <스피드>, <나 홀로 집에> 속편들 모두 류지호의 골칫거리다.

이들 영화 속편이 모두 망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쫄딱 망하리란 걸.

그렇다면 속편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꿔야 했다.

문제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분석한 것을 토대로 새롭게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했다.

그래야 전편만큼의 흥행은 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망하지는 않을 테니까.


‘대안을 마련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각각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책임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가 있어야 했다.

류지호는 세 편의 영화 성공 요인을 분석했다.

연말을 뉴욕에서 보내면서도 세 영화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The Killing Road>로 감독 데뷔 한 것도 잊은 채, 프로듀서로서의 역할에 몰두했다.


✻ ✻ ✻


<The Killing Road> 슈팅스크립트 단계에서 류지호는 영화음악가와 메인 테마곡을 논의했다.

촬영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음악작업도 같이 진행됐다.

영화음악가가 포스트프로덕션 스케줄에 쫓기듯 작업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할리우드에서는 슈팅스크립트 단계부터 영화음악가와 테마곡을 만드는 것이 별난 것이 아니다.

영화음악가가 먼저 테마곡을 만든 후 그것에 따라 콘티를 짜거나 편집을 하기까지 한다.

무명 작곡가의 곡을 거의 헐값을 주고 영화에 삽입할 수도 있다.

류지호는 이미 그 같은 경험을 해봤다.

<Life Goes On>에서 무명의 힙합 프로듀서의 곡을 싸게 구입해서 BGM으로 사용한 적이 있었다.

암튼 류지호는 영화음악가에게 레퍼런스로 두 곡을 제시했다.

한국가요 김우철의 ‘못다 핀 한송이’.

그리고 트로이얼 브룩스의 컨트리 송 ‘The Dance’.

‘못다 핀 한송이’는 가사가 들어가 있지 않은 연주곡만 들려줬다.

영화음악을 담당하는 숀 레스너(Sean Lesnar)는 처음 김우철의 음악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연했다.


“20대에 만든 곡인데, 혼자서 작사, 작곡, 편곡, 노래, 연주 거기에 프로듀싱까지.”

“천재군요.”


본인이 칭찬 받은 것도 아닌데, 류지호가 괜히 우쭐했다.

김우철은 시시한 대중가요 뮤지션이 아니다.

무려 올림픽 음악감독을 역임한 한국의 대표적인 대중음악가이자 영화음악가다.

국내 최초로 원맨 밴드 개념을 선보였고, 국악과 락을 결합시킨 실험적인 음악으로 해외에까지 이름이 알려진 뮤지션이다.

대중가수는 물론 세션으로도 대단했지만, 80년대부터 작품성 있는 영화 다수에서 영화음악가로 활동하고 있기도 했다.

미국의 메이저 레코드 레이블에서 러브콜을 보냈을 정도로 인정 받는 뮤지션이다.

트로이얼 브룩스 역시 두 말하면 입 아픈 컨트리 가수다.

89년 데뷔한 이래 앨범을 발표했다 하면 플래티넘을 찍는 컨트리계의 슈퍼스타다.


‘사운드작업 기간을 많이 준다고 퀄리티가 좋아질까?’


과거로 돌아오기 전 류지호가 충무로 영화사운드에 가졌던 의문이다.

기술적으로 할리우드에 근접했던 시기의 충무로를 경험하고 류지호가 과거로 돌아왔다.

좋아지긴 했다.

다만 한계도 명확했다.

더 진보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했다.

만약 할리우드처럼 계약해 준다면 어느 정도 좋은 사운드를 만들어 낼 것 같긴 하다.

겉으로만.

그 내용까지는 류지호로서도 장담하지 못했다.

모든 충무로 제작자는 후반작업 기간을 넉넉하게 잡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말로만 사운드의 중요성을 외칠 뿐.

대체로 사운드에 대한 투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현재 양수리 종합촬영소 믹싱실의 시설과 장비는 아시아에서 최고다.

일본과 홍콩 엔지니어들도 부러워하는 시설이다.

그것이 전부다.

그 우수한 장비를 다루는 엔지니어들의 수준은 한숨만 나온다.

폴리(Foley) 녹음에 대한 투자는 형편없고, 동시녹음을 선호하는 풍토와 더빙을 두려워하는 스타배우들로 인해 한국영화 사운드는 매번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다.

영화의 반은 사운드라는 말이 있다.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에 있어서 투자대비 효과로 특수효과나 미술보다 더 효율적으로 퀄리티를 끌어올릴 수 있는 분야가 음향과 음악이다.

명품은 생각보다 사소한 차이에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한국영화는 작은 부분의 투자를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차이들이 모여 스스로 한계를 만들어버리는 실수를 되풀이 한다.

류지호가 바꾸고 싶어 하는 부분이다.


‘한국에서 영화를 찍어도 할리우드로 와서 후반 작업을 해야 하려나....?’


할리우드에서 데뷔했다고 해서 미국에서만 작업할 생각이 없는 류지호다.

충무로에서도 영화를 찍을 때가 올 것이다.

아직까지는 충무로 인프라와 창의력에 대해 지독한 불신이 있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과하게 눈높이가 높아진 자신을 탓하는 것으로 류지호가 상념을 정리했다.


“음향 시스템은 Doldy? DTSS? 그도 아니면 혹시 SDDS?”

“Doldy Digital 5.1 채널로 녹음될 겁니다.”


이미 할리우드는 Doldy Stereo의 4채널을 넘어, <배트맨 리턴즈>에서 첫 선을 보인 Doldy Digital과 <쥬라기 공원>의 DTSS가 양분하고 있다.

다만 <라스트 액션 히어로>가 SDDS의 7.1 채널을 처음으로 선보였다는 사실.

그럼에도 Doldy와 DTSS의 디지털 5.1 채널이 대세다.


“테마곡 다시 한 번 들어봐요.”


쓸쓸하면서도 울분을 꾹꾹 눌러서 토해내는 듯한 곡.

컨트리풍의 낭만적이고 흥겨운 곡.

두 곡을 레퍼런스로 해서 테마곡이 만들어졌다.

오리지널 스코어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위기로 편곡된 짧은 곡들이 장면에 따라 삽입될 예정이다.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영화음악가의 숫자도 상당했다.

관련 조합에 연락해도 되고, 에이전시에 부탁해도 마음에 드는 음악감독과 연결시켜준다.

영화공장이라고 부를 만 했다.

제작비만 넉넉하다면 정말 많은 걸 할 수 있는 곳이 할리우드다.

한편으로는 꿈의 공장이다.

상상하고 꿈꾸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곳이 할리우드다.

모두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할리우드는 꿈꾸는 사람을 사랑하고, 그런 사람에게 기회가 찾아오는 곳이다.


‘꿈에도 등급이 있다는 것이 문제지... 큭.’


작가의말

풍성한 한가위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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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다들 수고가 많다....? (1) +5 22.08.29 5,105 158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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