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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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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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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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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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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The Killing Road. (6)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LA로 복귀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곳을 둘러보고 또 꼼꼼하게 확인해야 했다.

바쁘게 로케이션 헌팅을 다니는 가운데 야트막한 언덕 위에 류지호와 리차드슨이 나란히 서서 황량한 구릉지를 바라봤다.

흙먼지가 날리는 수 만평 규모의 황무지.

낮은 산들이 드넓은 구릉지를 두르고 있다.

저 멀리 호수도 보인다.

리차드슨이 디렉터스 파인더(director's finder)를 꺼내 눈에 댔다.

디렉터스 파인더는 촬영장소 예비 답사 또는 촬영 전에 구도와 화각을 확인할 때 사용한다.

망원렌즈처럼 큰 원통에 여러 화각이 구비된 일체형이 있고, 렌즈를 교환할 수 있는 고급형이 있다.

롭 리차드슨은 촬영전문가답게 고급버전의 렌즈 교환형 파인더를 사용했다.

류지호는 고가의 파인더를 여러 개 가지고 있다.

단편영화를 촬영할 때 이후로 잘 안가지고 다닌다.

손바닥 절반 크기만 한 작은 디렉터스 파인더를 주로 가지고 다닌다.


‘아이러니.’


<The Killing Road>를 한 단어로 정의한 말이다.

범죄랄 것도 없는 소소한 사고들이 터지는 시골 마을.

하지만 소수의 음흉한 세력이 장악하고 있다.

게다가 보안관들은 공권력을 스스로 포기한 상태다.

오죽하면 지루하고 따분한 일상을 달래기 위해 도시를 지나쳐가는 차량의 타이어를 총으로 쏜다.

순전히 자신들의 무료함을 떨쳐내기 위해서.

심지어 타운을 지나쳐가는 여행객을 겁주기도 하고, 소위 ‘삥’까지 뜯는다.

그런데 타운이 속한 주에서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주민들은 타운의 평온함을 깨트린 살인사건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대도시에서 파견 온 FBI 요원에 대한 호기심뿐이다.

보안관보들은 그에게 잘 보여 자신을 스카우트해주지 않을까 하는 허황된 바람만 품는다.

타운 주민들의 가치관은 여전히 서부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인종차별적인 행동을 범죄라 인식하지도 못한다.

비밀 사업으로 남몰래 부를 쌓아가는 도시의 지배자도 문제다.

탐욕과 비리 그리고 범죄로 지탱한 삶은 언제고 무너지게 되어 있다.


‘한국의 어느 백화점 집안처럼.’


에인절스 캠프는 <The Killing Road>에서 가상의 시골마을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이 작은 마을은 외부세계의 부조리를 모두 담고 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The Killing Road>를 사회파 스릴러라고 단정 짓는다.


[어퍼 맨해튼에서 금융가인 로어 맨해튼까지 5마일. 택시 요금 20달러에 팁이 대략 3~4달러, 대략 25달러가 필요해. 어때?]

[비, 비싸네요.]

[비싸? 킥킥. 웃기는 게 뭔 줄 알아? 러시아워 요금이란 게 있어.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기본요금이 1달러가 추가돼. 심야 시간에도 그래. 여기에 별도로 팁을 내지. 어때? 끝내주지?]

[....네? 네!]

[택시를 탈 때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아?]

[......]

[택시 기사를 죽여야 할까? 아니면 그들에게 면허를 준 놈들을 죽여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면허 준 놈을 임명한 놈을 죽여야 할까?]

[네? 왜, 왜 죽여야 하는지....?]

[뭐 어때? 장난인데? 니들도 그런 장난하잖아.]

[우, 우린 사람을 죽인 적은 없습니다.]


벤 사이퍼가 보안관 보를 살해하기 전에 주고받는 대화다.

이 대화를 통해 그가 월가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고 고등교육을 받았며 뉴욕의 출퇴근 시간에 택시를 타고 다닐 정도로 수입이 좋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말투는 뉴욕 어딘가 카페에서 친구와 살인적인 물가를 이야기하듯 말한다.

다만 그의 손에는 검시도구가 들려있다는 사실.

그것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벤 사이퍼는 영화 속에서 IT기업들이 일으킨 경제 호황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부가 어디로 모여드는지를 계속해서 떠들어댄다.

자신이 어떤 브랜드의 옷을 입고, 얼마짜리 시계를 차며, 어디로 휴가를 떠나는지 자랑스럽게 떠벌인다.

미 상원이 발의한 새로운 복지정책도 비판한다.

때론 LA에서 벌어진 흑인폭동, 교육문제, 외교문제까지도 마구 떠들어댄다.

얼핏 들으면 미친놈이 주절거리는 헛소리일 뿐.

횡설수설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그런데 벤 사이퍼가 하는 대사의 핵심만 따로 모아두면 하나로 귀결 된다.


‘지금 미국은 뭔가 잘못 되었다. 지금의 행복은 얼마가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비극을 예언하면서 2000년대 닥칠 미국 현대사에서 최악의 시기를 암시한다.

물론 대한민국이 곧 겪게 될 고난까지도.

<Collapse>처럼 누군가에게 경고를 할 의도는 없다.

그저 자본주의 최전선이라는 금융계에서 타락하고 오염된 한 인간을 창조하다보니 그런 배경과 암시가 저절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 뿐.

영화가 개봉하게 될 때가 마침 아시아금융위기의 징조가 드러날 시점이기도 하고.


‘말장난이지.’


고등교육을 받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의 자기합리화와 냉소를 표현하기 위한 대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얼핏 의미심장하게 읽히는 다이얼로그가 만들어졌다.

사실 사회고발이나 미국 사회의 부조리를 풍자할 의도는 별로 없었다.

기획의도는 최악의 악당이 범죄가 당연시 되는 마을에 들어가 깽판을 치는 이야기에 가까웠다.

장르가 범죄스릴러인데다가 잔인한 상황도 자주 등장한다.

그 특성을 세련되게 가져가려다 보니 암시와 상징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피칠갑 장면도 심심찮게 나온다.

그러나 실제 살인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것은 단 두 장면뿐이다.

스릴러 장르의 묘미는 실제 살인을 보여주는 것 아니다.

살인으로 가는 과정의 연출을 치밀하게 연출해야 한다.

그래서 범죄스릴러는 감독의 콘티능력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르다.

롭 리차드슨이 진지한 얼굴로 류지호를 불렀다.


“디렉터.”


류지호는 가만히 서서 리처드슨의 말을 기다렸다.


“난 디렉터가 학교에서 찍은 단편영화를 모두 봤어.”

“.....”


어떻게 봤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다.

류지호는 맥도웰 교수에게서 프린트를 회수하지 않았다.

여전히 UCLA TV·영화학부에 남아 있다.


“롱테이크나 롱 쇼트를 좋아하더군. 그것이 디렉터 류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딱히 그렇진 않아요.”

“최대한 리얼리티를 영화에 담고 싶어서?”

“제가 하는 건 관객을 눈앞에 두고 하는 연극이 아니잖아요. 연기와 촬영은 흘러가는 것. 연출은 기록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리차드슨은 류지호의 영화 스타일을 알아차렸다.

아니나 다를까.


“배우는 개인의 삶을 담고, 영화감독은 동시대의 사회를 함께 담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영화문법의 기본인 클로즈업과 롱 쇼트 기법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탐구 과제에요.”

“내가 어떻게 찍어주길 원해?”

“자연스럽게 흘러가 주세요. 인물 간 관계를 이어주고, 갈등 역시 분절되지 않게 상호작용을 했으면 좋겠어요.”

“추상적이고 난해한 주문이군.”

“화면의 여백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인물을 잡을 때도?”

“네. 빈곤 속에서 혹은 어려움이 닥칠 때 사람들의 영혼과 의지가 더 단단한 것 같아요. 반면에 풍요로울 때 사람들은 많은 가치를 상실한 채 공허해 지는 것 같고요.”

“<The Killing Road>는 스릴러이네만?”

“상관없어요. 앵글도 구도도 다 극단적이었으면 좋겠어요. 대신.”

“....?”

“윌리엄 스톤이나 앤소니 스콧처럼 현란하고 화려하지 않게. 차라리 데이비드 린의 영화들이나.... <차이나타운> 같은.....”

“<The Killing Road>는 그들의 영화만큼 치밀하지 못하네만.”

“당연하죠. 어떻게 그런 뛰어난 영화에 제 걸 갖다 대겠어요. 그저 심리스릴러와 필름느와르의 콜라보레이션 정도로 이해해 주세요.”


<The Killing Road>를 읽고 나서 위대한 걸작 <차이나타운>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그런데 류지호의 말을 들은 롭 리차드슨은 <The Killing Road>가 진짜 하고 싶은 메시지를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었다.


“Forget it, Jake. It's Chinatown.... 인 거야?”

“아마도.....”


롭 리차드슨이 인용한 <차이나타운>의 대사는 미국영화 통틀어 명대사를 꼽을 때 반드시 들어간다.

이 세상은 차이나타운이 암시하는 것처럼 법과 질서 그리고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 허무로 가득 찬 세상이란 메시지가 압축적으로 담긴 명대사다.

류지호가 감히 영화 시나리오의 교과서라는 <차이나타운>에 버금가는 각본을 썼을 리가 없다.

다만 그 압도적인 허무함과 씁쓸한 뒷맛을 영화에 담고 싶었을 뿐.


“그래서 시네마스코프?”

“네.”

“재미있겠군.”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는 1953년 20세기 PARKs가 개발한 와이드스크린 상영 방식이다.

아나몰픽 렌즈와 특수한 35mm 필름을 이용해 좌우를 2배로 압축시켜 촬영하고, 상영할 때는 그것을 다시 펼쳐 2.39:1 화면비율의 웅장한 화면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기존 화면비보다 더욱 넓고 디테일한 화면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참고로 시네마스코프는 디지털 영상시대 표준 와이드스크린 비율이 된다.

즉 디지털 영화시대를 살다 돌아온 류지호에게 시네마스코프는 별난 시도가 아니라는 것.


“슈퍼 35?”

“아니요. 아나몰픽 렌즈를 써서 오리지널로 촬영하고 싶어요.”

“제작비는?”

“다른 부분을 아껴봐야죠.”


현재 할리우드 추세는 크롭 와이드 스크린 방식을 주로 선호한다.

즉 슈퍼 35mm 필름을 사용하고 일반적인 시네마 렌즈를 이용해 촬영한 후, 화면 일부를 잘라내 시네마스코프 와이드 스크린을 구현하고 있다.

기존의 아나몰픽 와이드 스크린은 비교적 많은 예산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재미있겠어. 인디영화 풍의 저예산 영화를 시네마스코프로 촬영을 다 해보겠군.”

“어쩌면 화면을 꽉 채우는 것보다 어떻게 여백을 줄 것인가... 그것이 비주얼의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해요.”

“화면을 비운다?”


시네마스코프와 비스타비전은 화면 구도와 미장센에서 완전히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류지호가 경험 많은 촬영감독과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하하.


롭 리차드슨이 껄껄 웃었다.

그는 허투루 영화를 선택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프로듀서 게리 켐프가 스크립트를 보내왔을 때, 단숨에 읽어 내려가긴 했다.

범죄스릴러 장르이면서 여러 장르의 혼종이 옅보이는 영화다.

충격적인 반전은 없다.

있긴 하지만, 영화 전체를 흔들만한 장치는 아니다.

주로 미국 사회에 대한 신랄한 조롱과 풍자가 영화 곳곳에 이빨을 감춘 채 도사린 영화다.

거친 듯 보이면서도 세련된 감각이 인상적이었다.

해서 작가에 대해 충분히 알아봤다.

UCLA까지 가서 단편영화도 봤다.

감독과 진솔하게 대화를 나눠보기도 했다.

시간낭비가 아닐 거란 확신이 들었다.

최종 현장 답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오늘.

롭 리차드슨은 영화에 합류하길 잘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 ✻ ✻


한 편의 영화를 만들 때 감독이 개입하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감독이 다 작업하는 것은 아니다.

총책임을 진다.

오로지 감독만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이 따로 있다.

바로 콘티를 짜는 일이다.

콘티라는 용어가 일본식 잔재이고 스토리보드와 종종 혼용해서 사용되는 것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콘티를 짜는 능력이야말로 감독의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능력이란 사실이다.

감독에게 필요한 자질은 리더십, 카리스마, 순발력, 일정 정도의 예술적 고집 등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자질은 콘티를 짜는 능력이다

콘티란 감독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한 편의 영화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그 설계도에 따라 이후의 모든 작업들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콘티를 토대로 모든 스태프들이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촬영이 진행된다.

콘티에는 모든 씬과 컷에 대한 연출의도, 미장센, 배우의 동선, 카메라 위치, 앵글, 무빙, 심지어 그것에 대한 연출의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좋은 감독이라면 연출 방법에 대해서 끊임없이 연구를 해야 한다.

모든 감독들이 그러하지만, 류지호 역시 어떻게 하면 좀 더 효과적이고 강렬하고 새롭고 신선하고 독창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단 한 컷을 찍더라도 감독이 고민해야 할 것이 참으로 많다.

씬과 컷의 연결이 자연스럽고 매끄러워야 한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때로는 파격, 기존 관념의 파괴도 필요한 법이다.

콘티는 감독만의 것이 아니다.

모두가 공유하는 설계 도면이다.

따라서 자신만의 비밀 암호로 표현하는 건 의미가 없다.

작품 전체에서 이 씬과 컷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할 것인가.

배우는 어디서 오게 하며 어디로 나가게 할 것인가.

카메라의 위치와 앵글은.

카메라는 멈춰있는가 아니면 무빙을 사용할 것인가.

그 외에도 핸드헬드, 달리, 스태디 캠 또는 크레인을 쓸 것인가.

배우의 심리적인 표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콘티에는 그 같은 작품 내적인 것들과 외적인 것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내 머리 안에 영화가 다 들어있지만, 이걸 실제와 매치시키는 건 또 다른 문제야.”


각본을 쓸 때 어떤 장면을 몇 미리 렌즈의 화각인지 조명은 어떻게 되는지 상상하며 글을 쓰진 않는다.

류지호처럼 연출 경험이 있는 감독들은 조금 다르다.

글을 쓸 때 이미지를 함께 상상하면서 둘을 일치시키기 위해 고민한다.

류지호는 기능적인 부분에서 콘티를 짜는 데는 선수다.

그 콘티의 연출력 혹은 예술성은 다른 문제였지만.

에인절스 캠프 현장답사를 다녀온 후로 류지호는 콘티와 스토리보드 작업에 매진했다.


“보스, 공항으로 이동할 시간입니다.”


류지호는 워싱턴에서 열리는 중요한 행사에 초대를 받았다.

문제는 한창 콘티작업에 속도가 붙고 있다는 점이다.


“아, 귀찮아.”

“그렇게 가기 싫습니까?”

“솔직히 귀찮아요.”

“보스를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윌리엄 파커와 용사분들께서.”

“알아요. 할아버지들을 뵌 지 오래되긴 했죠.”

“한국전쟁참전용사회와의 일은 가능한 직접 챙기는 것이 좋습니다.”

“맞아요. 영화 준비하기도 바쁘지만 할 건 해야죠.”

“한국에서 대통령도 온다고 하니, 준비 단단히 하십시오.”

“대통령이 오는 거라 저랑 상관없을 걸요? 내가 재벌도 아니고.”

“그렇더라도 VIP들이 많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네. 네.”


류지호가 건성으로 대답하고, 콘티작업을 멈췄다.

워싱턴DC 링컨 기념관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 제막식이 거행될 예정이다.

그간 류지호는 한국전참전용사회에 기부와 후원을 해오고 있다.

특히 이번 기념비 설립에 소요된 1,800만 달러 기금 가운데 300만 달러를 책임졌다.

당연히 VIP 초대명단에 류지호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이 제막식에는 미국 대통령과 순방 차 방문하는 한국의 대통령도 참석할 예정이다.


“한국에서 오는 가족은 언제 도착할 예정이죠?”

“오늘 밤에 도착합니다.”


군에 가 있는 남동생 류순호를 빼고 다른 가족들이 이번에 뉴욕을 방문한다.

류아라의 방학을 맞이해서 미국으로 넘어오기로 했다.


“후딱 일정 소화하고 돌아옵시다. 영화 찍어야 됩니다.”

“가시죠.”


오랜만에 비서진과 경호원 등 대규모 수행원들을 대동했다.

류지호의 가족도 함께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 ❉ ❉


동부로 날아온 류지호는 곧바로 파커 저택으로 이동해 윌리엄 파커에게 인사를 드렸다.

저녁에 찾아온 파커 가족과도 재회하고, 직접 JFK공항으로 마중나가 가족을 픽업해 오기도 했다.

두 가족 모두 건강하고 활기찼다.

특히 윌리엄의 컨디션이 나쁜 것 같지 않아 류지호는 안심했다.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에 파커 가문의 전용기를 타고 워싱턴DC로 날아갔다.

제막식에 참석하기에 앞서 알링턴 국립묘지가 내려다보이는 워싱턴 근교의 한 호텔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한국과 미국의 정상들이 참석하는 행사이다 보니, 내셔널 몰을 중심으로 사방 1~2Km 일대에 백악관 경호원들이 퍼져 있다.

류지호 일행은 호텔에서 점심을 먹으며 어제 못 다한 대화를 이어갔다.

류지호의 양 옆 자리를 차지한 두 여동생이 식사 내내 조잘거렸다.


"어렸을 때 수영장을 가지 않으시려는 할아버지가 싫었어. 왜 다리를 저시는지도 몰랐고."


레오나가 할아버지 윌리엄에게 매우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윌리엄은 손녀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한 번은 선생님께 물어본 적이 있어. 선생님도 친구들도 한국전쟁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거야. 교과서에는 당연히 안 실려 있고.”


사실 미국인들에게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다.

류지호가 웃으며 물었다.


“할아버지에게 물어봤으면 누구보다 자세하게 알려주셨을 텐데?”

“이제는 할아버지가 목숨 걸고 싸운 전쟁을 다 알아. 공부를 열심히 했거든.”


미국 공립학교 역사교과서에 제2차 세계대전은 별도 항목으로 20 페이지에 걸쳐 담겨 있다.

베트남전은 6~7쪽에 걸쳐 설명돼 있다.

반면 한국전쟁은 두세 문장으로 조금 언급하는 수준이다.


“내가 한국의 해군기지 행사에 간 적이 있었잖아?”

“인천상륙작전 기념식이었어.”

“그때 할아버지는 전쟁 영웅이었어. 그때는 너무 어려서 잘 몰랐는데, 이제는 알아. 할아버지가 용감하게 싸운 걸 잊지 않고 고마워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다는 걸. 엄청 감동했어.”

“한국인은 은혜를 절대 잊지 않아.”

“큰오빠?”

“응?”

“다른 나라에 사는 나 같은 아이들도 만나보고 싶어.”


류지호가 식사를 멈추고, 레오나를 돌아봤다.


“한국전 참전용사 손녀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 세계 여러 나라 군인들이 참전했으니까.”

“50개국 정도 될 거야.”


2015년 발표 기준 63개국이다.

참전국, 의료지원국과 물자지원 및 물자지원 의사 표명 국가를 모두 포함한 숫자다.


“전 세계 청소년들이 모이면 안 될까?”

“.....”


전 세계 한국전쟁 참전국 용사의 후손들이 모였으면 좋겠단다.

누가 부잣집 손녀 아니랄까봐 스케일이 남달랐다.


“피스코(Peace Corps)라고 있잖아.”


미국의 평화봉사단이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오지와 개발도상국 지원을 위해 출범했다.

주로 저개발국이나 개발도상국의 교육, 농업, 무역, 기술의 향상, 위생상태의 개선 등을 목적으로 미국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자원 봉사자를 훈련시켜 파견하는 단체다


“그 단체처럼 참전용사 후손들끼리 청년봉사단을 만들면 좋을 것 같아.”

“맞아, 맞아!”


류아라가 격하게 동의했다.

류지호가 그런 여동생을 돌아봤다.


“매년 여름에 레오나 같은 전 세계 친구들을 한국으로 초청하면 안 될까? 잼버리처럼.”


세계잼버리(World Jamboree)는 매 4년마다 개최되는 전 세계적인 야영대회다.

한국에서는 지난 1991년 제17회 대회를 강원도 고성에서 개최한 바 있다.


“기특한 생각했네?”


류지호가 양쪽에 앉은 여동생들의 머리를 동시에 쓰다듬었다.


“그게 끝?”

“칭찬 더 해줘?”

“아니. 오빠가 이렇게 저렇게 하자 해야지!”

“오빠가 뭘 해?”

“아이씨!”


심영숙이 엄한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류아라....!”

“왜...요?”

“지금 욕했잖아.”

“아이씨는 욕이 아닌데?”

“또!”

“알겠어. 아이 참....! 됐어?”


별안간 어른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호호호.


모녀의 실랑이를 알아듣지는 못했다.

다만 둘의 묘한 신경전에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톰과 제리’ 같다고나 할까.


“레오나하고 나하고 할게. 돈 대줘.”

“너희 둘이 뭘 해?”

“참전용사후손청소년평화봉사단. 너무 긴가? 그럼 ‘청평단‘으로 하지 뭐.”

“그래 대견하다. 오빠가 도와줄게.”

“진짜?”

“대학생 되면.”

“대학생?”

“성년이 되면 해. 오빠가 지원해 줄게.”

“싫어. 지금 할래.”

“그런 일은 민간에서 하는 게 아니야. 국가보훈처 같은 곳에서 하는 거야.”

“오빠는 어려운 사람들 많이 돕잖아. 전 세계 참전용사 후손들이 힘들게 살고 있을지 어떻게 알아.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엄청 어렵게 산다면서?”

“그건 다르거든. 암튼. 그런 친구들 찾아서 도울 수 있도록 공부 열심히 해. 알았지?”

“오빠는 고등학교 때 사업 시작했잖아. 우리는 왜 못해?”

“너희 둘은 아직 중학생이야.”

“금방 고등학생 돼.”

“아라는 대학교 안 갈 거야?”

“당연히 가야지.”

“그때 가서 해. 오빠가 물심양면으로 도울 테니까.”


양쪽에서 여동생들이 애교를 부렸다.


“오빠앙!”

“큰오빠.”


류지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뜻은 가상했다.

다만 소녀들이 할 일이 아니다.

한국 정부기관이나 유관 단체가 나서야 할 일이다.

그때 윌리엄이 입을 열었다.


“아이들의 입에서 피스코란 말이 나온 것 같은데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냐?”

“네.”


류지호는 두 소녀가 한 이야기를 파커 가족에게 들려줬다.


“내가 해보마.”

“할아버지가요?”


끄덕.


가볍게 수긍하는 윌리엄을 보며 두 소녀가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몸도 불편하신데.....”

“예전처럼 활동적으로 움직일 수야 있겠느냐? 내게는 손발이 되어줄 이들이 많단다.”


윌리엄이 두 소녀를 힐긋거렸다.


“그건 알지만.”

“모르긴 몰라도 전 세계 퍼져있는 한국전쟁참전용사들의 평균 나이가 70을 바라보고 있을 게야. 10년, 아니 5년 뒤면 우리 중 남아 있을 사람이 별로 없게 되겠지. 우리가 가더라도 남은 후손들끼리는 서로 교류하면서 의미 있는 일을 세상에 펼쳐 보이면 좋겠지.”

“....음.”


류지호는 이전 삶의 기억을 뒤져봤다.

낯선 나라라 할지라도 한국전쟁참전국의 경우 그것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들과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터키와는 형제국이니 뭐니 엄청 친한 척 했던 것 같았고.

한편으로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한국전참전용사와 그 가족을 엮으면 가장 강력한 친한파 한국 네트워크를 만들 수도 있다.


“내가 출범시키고 한 동안 돌보다가, 손녀들이 어른이 되면 넘겨줘도 되고.”


윌리엄의 말에 류지호가 한 발 물러섰다.


“일단 제가 한국 쪽에 그런 프로그램이 있는지 알아볼게요.”

“한국?”

“보훈기관이나 민간단체에서 이미 그런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만약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면 재정지원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가 알기로 전 세계적인 참전용사단체는 없다.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가장 큰 고민은 재원 일게야.”

“재원은 저와 할아버지 그리고 리오단 할아버지 같은 부자들이 돈을 보태면 된다고 봐요.”


현 LA시장 리오단은 포병중위로 한국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다.

지난 93년에 시장 선거가 있었는데, 카투사 복무 중이라 선거운동을 돕진 못했다.

대신 그의 친비즈니스, 교육 정책을 지지하는 발언을 언론을 통해 내보낸 바 있다.

한인들과 함께 교포사회에 대한 지원을 꾸준히 건의하고 있고, 1,500만 달러 규모의 교육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리오단 시장의 정책을 지지하는 한편 언제든지 재단 지원을 취소할 수 있다는 협박을 곁들이고 있다.

어쨌든 꽤 친하다는 말이다.


“민간단체가 전 세계 참전 용사 후손을 관리하기란 쉽지 않아요. 자칫 일회성에 그칠 수 있죠. 그래서 정부와 함께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우리는 재정적인 뒷받침을 하고, 한국 정부가 전 세계 참전용사들을 관리하는?”

“한국전쟁 참전국 대부분에 한국 대사관이 들어가 있을 테니까요.”

“솔직히 말 해볼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난 정치인이나 공무원이란 작자들을 믿지 않는단다.”

“저도 그래요.”

“그런데 왜 정부를 끌어들이려고 하지?”

“파커나 저나 전 세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진 않잖아요. 세계 곳곳에 퍼져 계신 참전용사 분들을 어떻게 찾아요. 설령 찾는다고 하더라도 많은 자금이 들든가 엄청 번거로울 걸요?”

“그렇긴 하겠구나. 하하.”


윌리엄이 웃음을 터트렸다.

공무원들이 당연히 할 일이지만 예산이 없다.

민간에서 예산지원을 지원해주면 공적조적을 활용해 많은 걸 할 수가 있다.

공적기관은 실적을 쌓을 수 있다.

지원한 민간기업은 사회공헌 이미지를 얻을 수가 있다.

제임스가 거들었다.


“지호가 사업가 다 됐어.”


캐서린도 말을 보탰다.


“한국 정부에는 생색낼 거리를 주고, 실질적인 사업은 윌리엄이 하고?”

“자금운용을 그들에게 맡기면 절대 안 돼요.”

“당연하지. 미국이라고 다를 줄 알아?”

“미국은 그래도 투명하게 집행되고, 모두 공개되지 않아요?”

“세상 어디에도 부패하지 않은 곳은 없어. 특히 돈이 모이는 곳에는.”


어른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처음 의견을 냈던 소녀들의 손을 완전히 떠났다.

류지호는 추후 재논의하는 것으로 한국전쟁참전용사 후손들의 봉사단체 사안을 마무리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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