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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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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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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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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The Killing Road. (1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마스터께서는 10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예.”

“그의 후계자가 되려고?”

“후계자까지는 아니고.....”


타르코프스키의 후계자는 니콜라예비치 소쿠로프 감독이다.

예술영화의 마지막 거장, 러시아 영화의 진정하고 유일한 계승자라는 수식어가 붙는 감독이다.

일반인들에게 그의 예술영화는 몹시 지루하고 심심하다.

그의 영화는 예술이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탐구에 가깝다.

반면에 류지호의 영화는 현란한 기술과 형식 실험을 통해 영화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대가들로부터 배운 걸 써먹어야죠. 그러려고 비싼 학비 내고 대학에 다니는 거잖아요.”


해리슨 노튼이 대화에 끼러들었다.


“디렉터.....?”

“응?”

“디렉터가 찍은 이 장면 어디에도 타르코프스키스러움이 묻어있지 않습니다만?”

“어둠과 밝음. 문을 닫은 상점과 편의점. 그리고 저기 밤하늘에 떠있는 별들까지. 비록 비도 오지 않고, 불과 물이 등장하진 않지만,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한 화면에 있지 않아? 그리고 호프타운과 벤 사이퍼가 있고. 물론 둘이 물과 불은 아니지만.”


끄덕.

나름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뇌에 진한 먹물이 든 해리슨 노튼은 류지호가 말한 바를 이해했다.

지적인 배우를 꾀어낼 때는 현학적인 허세를 부려주는 것도 방법이다.


“자기 자신을 구원함으로써만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영적 결핍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려 불구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질환은 치명적이다. 인류는 자신의 도덕적 파멸로부터 시작하여 자기를 절멸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 해왔다. 육체의 죽음은 다만 그 결과일 뿐이다.”

“순교일기입니까?”


류지호는 대답 대신 입가에 진한 미소를 그렸다.


“봉인된 시간이 아닌 순교일기입니까?”


역사전공으로 알고 있었는데, 독서 폭이 꽤 넓었던 모양이다.

‘순교일기’는 인간의 타락과 구원이라는 도스토예프스키적 주제를 가지고 일생을 씨름했던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일기모음이다.


“그의 삶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정말 열심히 읽었지. 나는 아직 학생이잖아.”

“타르코프스키의 추종자입니까?”

“위대하기 짝이 없는 한 영화감독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현실 속에서 견디면서 살아갔는지를 알고 싶었어. 아, 물론 그의 영화에 대한 철학이 궁금해서 ‘봉인된 시간‘도 읽어보았고.”

“나 역시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그렇게 저녁식사 주제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로 정해졌다.

감독은 배우보다 무조건 똑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가 자신의 방식대로 캐릭터를 해석하고 연기를 해버리니까.

감독들 중에 달변가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시나리오를 집필할 때부터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 직업이 영화감독이기도 하고.

암튼 스태프들이 LA로 철수했다.

류지호는 주요 헤드 스태프와 주연 배우들 그리고 연출제작팀원과 스톡턴에 남아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하루를 더 호텔에서 묵은 류지호는 다음 날 아침 비행기로 LA로 복귀했다.


❉ ❉ ❉


콜롬비아스 픽처스를 인수한 소닉은 한동안 워너-타임 스튜디오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셋방을 살면서 컬버시티로부터 지원을 이끌어내 MSM Studios에 1억 달러를 투자해 현대적인 촬영단지로 개조했다.

마침내 1992년 스튜디오 입구에 걸려 있던 MSM 마크가 사라졌다.

그 자리에 Sonic-Colombias Studios 마크가 부착되었다.

현대적인 시설로 탈바꿈했지만, MSM Studios 시절의 명성을 떨쳤던 클락 게이블, 주디 가렌드, 리타 헤이워스, 버트 랜카스터 같은 이름이 붙은 건물들은 그대로 보존되었다.

<오즈의 마법사>를 촬영했던 사운드 스테이지도 보존되었다.

180에이커(22만 평)에 달하는 드넓은 대지에 6개로 구분된 오피스와 촬영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MSM Studios 시절에는 총 28개의 사운드 스테이지를 자랑했었다.

2년여의 공사 끝에 18개로 대폭 줄어들었다.

한때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사운드 스테이지를 자랑했던 건물은 여전히 남아있다.

크기 별로 총 18 단계의 다양한 사운드 스테이지가 마련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2개는 TV 전용 사운드 스테이지로 운영되고 있다.

<The Killing Road>는 중급 규모의 사운드 스테이지를 두 달 임대했다.

조명기를 달수 있는 바텐이 없는 방음시설만 되어 있는 스테이지다.

대신 천장이 높고, 실내 공간이 넉넉한 장점이 있다.

메이저 스튜디오의 스테이지는 학생들에게 안 빌려준다.

독립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들 영화를 전문으로 촬영하는 촬영단지가 따로 있다.

그럼에도 소닉-콜롬비아스 측은 류지호에게 스테이지를 내줬다.

사용료까지 할인 해줬다.

트라이-스텔라와 콜롬비아스 간의 오래된 협력관계 때문이다.

Tri-Stella Pictures Distribution은 자체적으로 해외배급까지 소화를 하고 있다.

홀로서기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다만 일부 영화는 여전히 소닉-콜롬비아스가 해외배급을 맡고 있다.

블록버스터의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스파이더맨>에 대해 제이미 캐머론을 단념시켰다고요?”

“애 좀 먹었습니다.”


현재 류지호는 소닉-콜롬비아스 CEO 레빈의 집무실에 와 있다.

레빈 회장과 차담을 나눴다.

소닉이 콜롬비아스를 인수합병 때 영입되었던 구버 회장은 작년에 물러났다.

새롭게 소닉-콜롬비아스의 최고책임자가 된 레빈 회장은 소닉의 인수 이후로 꾸준히 내리막길을 겪고 있는 영화사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위기 타계를 위한 방책 중에 하나가 <스파이더맨> 판권 확보였다.


“여전히 판권을 팔지 않을 생각입니까?”


회장까지 나서서 류지호에게 잘 대해주는 이유가 바로 <스파이더맨> 판권 때문이다.

현재 <스파이더맨> 판권은 JHO에게, 더 정확하게는 류지호에게 있다.

캐롤코 픽처스가 법인명을 변경한 것이 JHO Pictures이기 때문이다.

JHO Pictures는 백퍼센트 류지호 개인 회사다.


“팔 수 없다는 것은 레빈 회장이 잘 알고 있잖습니까.”

“그 거머리 같은 캐넌 필름의 골란 때문에?”

“그와의 분쟁은 올해 안에 종결될 겁니다.”

“어떻게?”

“법정 밖에서 해결할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류지호는 자세한 설명을 삼갔다.

캐롤코 픽처스를 인수합병한 후 다른 판권들처럼 <스파이더맨>의 권리도 문제없이 정리가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캐넌 필름의 전임 사장과 제이미 캐머론까지 얽혀 복잡한 판권분쟁이 발생했다.

자칫 소닉-콜롬비아스와 MSM까지 판권분쟁에 가세할 뻔했다.

모두 캐넌 필름의 전임 사장과 캐롤코 픽처스의 엉터리 같은 일처리와 탐욕 때문이다.

암튼 류지호 혹은 JHO Company가 타임리 엔터테인먼트의 최대주주가 되면 캐넌 필름의 전임 사장과의 <스파이더맨> 판권 분쟁도 자연스럽게 해결 될 수 있다.

류지호가 타임리와 합의를 보고 캐넌 필름 전임 사장을 압박하면 되니까.

제이미 캐머론의 경우는 모리스 메타보이 선에서 정리가 될 것이고.


“내가 알기로 JHO 산하에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

“오늘 이 시점에는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인수합병할 업체라도.....?”

“ParaMax의 알버트가 활동이 정지된 채 방치되고 있던 애니메이션 부서를 살려볼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레빈 회장의 표정이 슬쩍 찌푸려졌다.

아무리 구워삶아도 좀처럼 류지호가 넘어올 생각을 안 하고 있다.

“극장판은 안 되더라도 TV시리즈를 우리에게 준다면 트라이-스텔라와 함께 1억 달러 예산 영화를 함께 할 수 있어요.”

“고마운 제안입니다. 하지만, 블록버스터에 대한 협력은 모리스 메타보이 회장과 대화를 나눠보시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나는 메타보이 회장의 업무영역을 침범하고 싶지 않군요.”


레빈 회장은 실사화는 생각도 못하고, TV 애니메이션 판권이라도 얻고 싶어 했다.

어떻게 확보한 판권인데 소닉과 나눠 갖는단 말인가.

캐롤코가 확보한 <스파이더맨> 판권은 무려 900여 개의 스파이더맨 관련 온갖 캐릭터에 대한 권리까지 포함하고 있다.

설령 류지호가 타임리 엔터테인먼트의 최대주주가 된다고 하더라도 판권을 다시 타임리에게 돌려줄 생각이 없다.

그 정도로 가치가 상당한 판권이다.

그 가치를 아는 이는 류지호밖에 없긴 했지만.


“모쪼록 JHO와 소닉-콜롬비아스가 좋은 협력관계를 이어나가길 기대합니다.”

“물론입니다.”

“촬영하다 불편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 하세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별말씀을.....”


류지호는 괜히 소닉-콜롬비아스 스튜디오에 세트를 지었나 싶었다.

회장부터 주요 임원진들이 심심하며 찾아와서 <스파이더맨> 판권에 대해 졸라대니 무척 성가셨다.


‘촬영 끝나면 잠시 잠수 좀 타야겠어.’


본래 역사에서는 1996년 소송 당사자인 캐넌 필름을 인수한 프랑스 영화사, 캐롤코 픽처스, 타임리 코믹스가 부도처리가 되어버려서 상황이 복잡하게 흘렀다.

부도 난 캐롤코의 지분 상당수를 20세기 PARKs가 확보하게 되고, PARKs는 캐머론을 설득해 재판을 포기시켰다.

부도 난 프랑스 영화사의 미국 회사 지분을 보유한 MSM까지 가세하고, 캐넌 필름에 투자하면서 <스파이더맨> TV시리즈를 제작했던 소닉 픽처스까지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면서, <스파이더맨> 판권의 향방이 매우 복잡해졌다.

기나긴 소송전은 1999년에 가서야 종결되었다.

결국 소닉 픽처스가 판권을 영구적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 되어버렸다.

안타깝지만, 소닉-콜롬비아스의 2000년대도 90년대처럼 암울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들의 밥줄이나 마찬가지인 <스파이더맨> 판권을 류지호가 차지했으니까.


✻ ✻ ✻


벽돌 벽에 Stage-9라 써진 사운드 스테이지.

세 개의 세트가 만들어져 있다.

호프타운 보안관 사무실, 티아라 이브의 캠핑카 내부, 달리는 차안을 찍기 위한 스크린 프로세스 장치다.


“무슨 생각해?”


멍하게 서 있는 류지호를 게리 켐프가 일깨웠다.


“그냥.... 딴에는 미니 메이저라고 불리는 트라이-스텔라가 언제까지 남의 스튜디오를 전전하며 영화를 찍어야 하나 싶어서요.”

“Cannell Entertainment 인수하면서 밴쿠버에 스튜디오 시설이 생긴 거 아니었어?”

“지분만 조금 확보했어요. 완전히 트라이-스텔라 소유가 아니에요.”

“하긴 TV시리즈가 주로 제작된다고 들었어.”

“그 부분은 메타보이 CEO가 복안이 있겠죠.”


사운드 스테이지로 들어와 류지호는 가장 먼저 스크린프로세스 장면부터 찍어나갔다.

그 자리를 비워줘야 다른 세트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텐이 설치된 사운드 스테이지가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선택이다.

이렇게 텅 빈 공간에 세트를 지을 때는 나중에 따로 바텐을 설치한다.

바텐은 스튜디오에서 설치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립팀이 설치한다.

<The Killing Road>는 예산 부족으로 인해 조명 바텐을 설치하지 않았다.

가벽의 탈부착도 가능하고, 세트 내부에 설정조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기에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메이저 스튜디오 가운데 LOG 스튜디오가 51에이커(약 6만 평)로 규모가 가장 작다.

대신 LOG는 세계 최고·최대의 테마파크를 가지고 있다.

암튼 촬영 스튜디오에는 야외(Backlot)와 실내 세트(Stage) 외에 오피스가 모여 있다.

소닉-콜롬비아스 제휴 영화사들이 입주해 있다.

또한 편집실, 녹음 스튜디오는 물론 자체 소품실과 의상실도 있다.

아트디렉터들은 제작 소품이나 영화의 맞춤 소품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소품을 스튜디오에서 보유하고 있는 소품실에서 대여하는 편이다.

스튜디오 소품실에는 포크 하나부터 대형 가구까지 모두 정찰가격으로 대여하고 있다.

독립영화라고 싸게 빌려주지 않는다.

정찰가격이다.

다만 독립영화를 작업한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소품 마다 종류별, 가격별로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으니까.


“스탠바이!”


세트 촬영은 죠앤으로 출연하는 로즈 맥로한 위주로 먼저 찍었다.


덜컹.


죠앤이 보안관 사무실로 들어온다.

어딘지 불안한 모습이다.

보안관보 샘(존 터튜)이 그녀를 맞이한다.


[내가 살인현장을 목격했어요.]


죠앤은 계속해서 보안관보에게 살인사건과 살인범에 대해 설명한다.

보안관들의 표정은 어딘지 심드렁하기만 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미국 중부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으로 인해 온 미국이 시끄러운 상황에서 죠앤처럼 살인사건을 목격했거나 살인범을 안다는 신고가 끊이지 않았다.

장난전화도 많았다.

심지어 보안관보는 죠앤의 몸수색까지 한다.

주머니에서 마약(마리화나)이 발견된다.

졸지에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날 왜 가둬! 풀어줘! 이 빌어먹을 돼지들아!]

[얌전히 그 안에 처박혀 있으라고 아가씨.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살인자가 날 죽일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얌전히 이곳에 있으란 말이야!]

[그 곳은 세상 어떤 곳보다 안전해. 그러니 안심하라고 이쁜이.]


유치장 안에서 죠앤은 한동안 난리를 친다.

화내고, 욕하고, 바락바락 대들고.

로즈 맥로한은 그 같은 연기를 정말 잘했다.

심지어 이탈리아어로 애드리브를 넣기도 했다.


“컷! NG!”


류지호는 단호하게 로즈의 애드리브를 막았다.


“이탈리아어로 말하는 건 곤란해. 애드리브를 넣더라도 영어여야 해.”

“쳇.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시나리오 단계에서 고민이 참 많았던 캐릭터가 죠앤이다.

살리기도 일찍 죽이기도 애매했다.

등장 자체는 매우 적다.

그럼에도 주인공에게 호프타운 방문의 동기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티아라 이브가 엇나간 질투심을 갖도록 하는 계기 중 하나다.

소설이라면 모를까.

영화에서 모든 인물을 하나하나 다 살리기 어렵다.

때문에 끝까지 고민했던 캐릭터다.

특히 어떤 타이밍에서 그녀를 퇴장시켜야 할지가 관건이다.

그녀의 죽음이 한 단락의 마무리가 되어서는 안 되니까.

긴장감의 연속성을 이어나가야 하기에.

사실 죠앤이란 캐릭터는 전형적이다.

범죄스릴러나 미스터리스릴러 장르에서 등장하는 뻔한 캐릭터다.

대부분 일찍 퇴장시킨다.

깊은 내면까지 표현할 필요 없는 캐릭터인데.

로즈 맥로한이라는 나름 매력적인 배우를 캐스팅하면서 조금 흔들렸다.

류지호는 그녀를 조금 더 써먹고 싶어졌다.

<둠 제너레이션>이란 영화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류지호는 로즈 맥로한이 이 당시에 가장 잘할 수 있는 연기를 마음껏 해보도록 일정부분 자유를 줬다.

특별한 목적의식이나 삶의 목표 없이 부유하는 청춘.

죠앤이 단순히 공포에 질려 꽥꽥 소리만 지르는 연약한 아가씨가 아니라, 고루하고 심심한 호프타운에서 나름 자아의 혼란을 겪고 있는 인물로 묘사하기로 했다.

그래서 콘티 단계에서 일부를 고쳤다.

보안관들에게 바락바락 대들고, 걸쭉한 욕설을 시도 때도 없이 내뱉는 골 때리는 캐릭터로.

그리고 벤에게 살해당하기 직전.


[난 태어나야 하지 말았어야 해. 아니 이 촌동네에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내가 너의 살인 장면을 목격한 것이 불행이 아니라. 태어난 것 자체가 불행이야. 빌어먹게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은 없어. 이쁜이.]

[X까! 살인자 새끼야. 닥치라구!]

[날 자꾸 자극하지 말라고. 이쁜이.... 지저분하게 삶을 끝낼 수도 있으니까.]

[소원 하나만 들어줘.]

[......?]

[보안관 개자식들도 다 죽여줘. 배지를 단 위선자들도 세상에서 사려지길 바래.]


벤은 죠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


[싫어. 난 이곳을 뜰 거야. FBI 놀이도 이제 시시해졌거든.]


슈팅스크립트에는 없었다.

콘티를 하면서 다이얼로그가 추가되었다.

별 고민 없이 뚝딱하고 나왔다.

사람들은 이미 완성된 시나리오의 일부를, 그것도 톤만 수정하는 일쯤이야 쉬운 일이겠거니 생각하겠지만, 원래 대사 한 줄 바꾸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니다.

그 대사 하나 때문에 인물이 변할 수가 있다.

그것으로 인해 다른 인물과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따라서 윤색작가를 고용할 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만 고치라고 명확하게 가이드라인을 준다.

어째든 죠앤의 살해 장면은 따로 찍지 않았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살해당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사실상 지금의 촬영이 로즈 맥로한의 마지막 출연이다.


“컷! OK!"


짝짝짝.


류지호가 마지막 분량을 모두 소화한 로즈 맥로한을 향해 박수를 쳐주었다.

스태프들도 고생한 그녀를 향해 아낌없는 박수를 쳐줬다.

로즈 맥로한이 고마움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에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었어요.”


류지호는 은근히 배우들을 들었다 놨다 했다.

지금처럼 별 것 아닌 것으로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감독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박수를 쳐준다는 것은 공개적으로 그녀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다는 걸 공표하는 것이다.

감독이 서비스차원에 한 것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류지호는 스태프들의 박수까지 유도했다.

감독의 의례적인 박수와 끝까지 함께한 스태프들이 함께 쳐주는 박수.

당연히 배우가 감동할 수밖에.


“캡틴이 24살이라며?”


젊은 스태프들은 어느 순간부터 류지호에게 ‘캡틴‘이라 불렀다.

인턴으로 영화에 참여한 UCLA 학생들이 부르는 것을 따라서 하게 된 것이다.


“저게 어딜 봐서 24살 애송이가 하는 행동이야.”

“킥킥. 젊은 감독이 결코 보여주기 어려운 모습이지. 대부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허세부리기 바쁘니까.”

“베테랑들 앞에서 무시당할까봐 그러는 거잖아. 괜히 카리스마 있는 척.”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감독은 나이가 적고 많음과 상관없이 존중을 받는데 말이야.”


누구나 감독을 꿈꿀 수 있다.

그런데 누구나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거들먹거리는 젊은 감독들이 널리고 널렸다.

또 스태프들이 그걸 당연시 여기기도 했고.


“할리우드에서 감독이 되었다는 것은 그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니까.”


하지만 류지호는 거들먹거리는 것이 없다.

일부러 감독입네 어필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다.

촬영 할 때는 대단한 집중력으로 스크립터가 놓친 것까지 잡아내고, 식사 시간이나 브레이크 타임에 견습이나 인턴과 스스럼없이 농담 따먹기를 했다.

JHO Company를 소유한 것과 영화감독은 전혀 별개 문제다.

스태프들은 스튜디오 오너라고 해서 부자라고서 해서 아낌없이 존경을 받치지도 고분고분하지도 않는다.

해고할 테면 해보라는 듯 도발하는 스태프까지 있을 정도다.

눈 하나 깜짝 안했다.

류지호는 자신의 스타일 그대로는 일관되게 유지했다.


“아카데미 수상자를 둘씩이나 인디영화에 섭외를 했다고 해서 기가 죽지는 않을까 유심히 지켜봤더랬지. 웬걸.... 캡틴이 리드를 하고 있잖아.”

“감독의 제1 덕목은 뭐니 뭐니 해도 연출 아니겠어?”

“안정적이잖아. 괜히 유수의 단편영화제 수상자가 아니야.”

“그 이상이지. 저 나이에는 아무리 재능이 출중하다고 해도 누군가의 세월을, 시간을 담아내는 것은 힘든 일이야. 근데 봐봐. 그걸 하고 있어 저 친구는.....”

“그렇지. 그런 것은 연륜의 영역인데.”

“천부적인 재능일까? 사람을 다루는 것이나 리더십 같은 거 말이야.”

“모르지. 확실 한 것은 단편영화 몇 편 찍어보고 꼴에 감독이라고 할리우드 들어와서 왕처럼 거들먹거리지 않는다는 거잖아. 그것이면 됐지.”

“솔직히 캡틴이 거들먹거릴 이유가 뭐가 있어. 이미 잘 난 걸 다 아는데. 24살에 이미 억만장자라잖아.”

“아참 그랬지? 자꾸 그걸 까먹게 된단 말이야.”


한편, 류지호에게는 묘한 구석도 많았다.

현장에서 직관과 계획된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경우.

류지호는 거의 대부분 준비된 대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천재적인 재능과 어울리지 않는다.

딱히 부를 말이 없어서 재능이라고 했지만, 약간은 다른 것 같았다.

저 나이 또래가 가지기 힘든 어떤 부분이라고 막연히 생각할 뿐.

스태프들은 대놓고 류지호를 찬양하진 않았다.

은근슬쩍 류지호와 좋은 관계를 쌓고 싶다고 돌려서 뜻을 전달했다.

사람이란 게 마냥 무언가를 아무 이유 없이 싫어할 수도 있고, 반대로 마냥 좋아할 수도 있다.

그것이 한 번 마주친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물건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류지호를 탐탁지 않아 하던 스태프들도 있었다.

워낙 잘난 위인이다.

주는 것 없이 미웠다.

그럼에도 류지호가 말을 걸면 친절하게 화답했다.

적어도 영화 작업에서만큼은 믿음이 갔으니까.

2주차부터는 류지호를 프로로 인정했다.

운 좋은 놈.

혹은 학생티를 벗지 못한 아마추어가 아니라.

유능한 영화인으로 존중했다.


“순조롭네요.”


류지호의 한가한 말에 리처드슨이 찝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래서, 안 좋아.”

“왜 안 좋아요?”

“이상하게 영화 찍을 때 뭔가 요상한 징조가 보여야 마음이 편해져.”


미국 사람도 미신을 믿나.

류지호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일종의 징크스 같은 건데. 뭐랄까.... 조명기 하나를 태워먹는다던가.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촬영이 하루 딜레이 된다던가.”

“할리우드도 그런 미신이 있어요?”


충무로에도 똑같은 미신이 있다.

특히 조명이나 세트장에서 화재가 나면 영화가 대박이 난다는.


“그냥 심리적 보험 정도라고 해줘.”


리차드슨의 우려와 달리 촬영은 너무나 순조로웠다.

스케줄도 딱딱 맞아 떨어졌다.

감독과 배우의 호흡도 좋았다.


“바텐이 달려있지 않아 조명기가 머리 위로 떨어질 일도 없고, 고가의 소품이 들어가지 않았으니 손상을 걱정할 것도 없고. 순조로울 수밖에요.”

“사건이 나길 바라는 것은 아니야.”

“알죠. 조명을 마음대로 쓰지 못해 답답하죠?”

“어떠한 여건에서도 최상의 영상을 뽑아내는 것이 DP지. 내가 자원해서 자네 영화를 찍겠다고 했다는 걸 잊으면 안 돼.”


메이저 스튜디오 영화를 찍을 때처럼 조명을 쓸 수 없다.

세트 미장센도 풍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감독이 원하는 만큼은 할 수 있다.

리차드슨과 리바가 경험이 풍부하고 다양한 영화작업을 하면서 노하우를 가지고 있기에 그렇다.

할리우드나 충무로나 똑같다.

영화 짬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후다닥.


리처드슨의 말이 씨가 되었을까.

일렉트리션 한명이 황급히 어디론가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재빨리 소화기를 챙겨 세트로 돌아가는 걸 볼 수 있었다.


“젠장!”

“무슨 문제가 생겼군!”


류지호와 리처드슨이 일렉트리션이 달려간 곳으로 뛰어갔다.

도착한 곳에서는 개퍼와 키그립이 HMI 조명기 한 대를 분해하고 있다.


“무슨 일이야?”

“아, 별 거 아닙니다.”

“별 거 아닌데 분해를 하고 있어?”

“HMI 램프 하나가 타버렸습니다. 장비 자체에는 문제없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전기선과 조명기들 다시 점검해 보도록 해.”

“예.”


류지호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사고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롭 리차드슨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렸다.

작은 소동을 보며 자신의 징크스가 완성된 것이라 여기는 모양이다.


‘<플래툰>에서 별의 별 고생을 다 해봐서 그런가? 이 양반 위험한 스타일이네.’


류지호의 심상치 않은 눈초리를 의식해서일까.


“일부러 그랬다고 의심하는 건가?”


리처드슨의 물음이 까칠했다.


“설마요? 징크스가 완성되었으니, 이제 우리 영화 잘되겠다 싶네요.”

“징크스라니? 그런 거 아니래도.”


이 말을 남겨두고 리차드슨이 얼른 카메라가 세팅된 곳으로 향했다.


‘징크스나 미신이나....’


류지호도 그만의 루틴이 있다.

매번 배우에게 디렉션을 줄 때마다 카메라 왼쪽으로 걸어가 그곳에서 다시 똑바로 배우에게 걸어가는 행동이다.

단편영화에서도 그랬고, 첫 장편영화에서 그의 루틴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다만 징크스와 루틴은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운동선수가 중요한 경기에서 특정 속옷만 입는다는 식의 징크스는 승리에 대한 갈망을 뭔가에 의지하는 경향이다.

그 같은 행동은 미신에 가깝다.

그런데 류지호의 행동은 마인드 컨트롤에 가까웠다.

그 행동을 통해 배우에게 줄 디렉션과 자신이 무얼 놓치고 있는지를 정리하니까.


‘엎치나 메치나.....’


작가의말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PS.  사비에르님, 을병정님 늦었지만 과분한 후원 감사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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