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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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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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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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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3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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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다들 수고가 많다....? (2)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가 서울을 벗어나 양수리로 향했다.

차량 행렬은 양수리를 지나쳐 청평으로 가는 중간의 산속으로 들어섰다.

류지호 일행이 도착한 곳은 한창 마무리 공사가 진행 중인 서울종합촬영소다.

아시아 최대 규모를 선언한 이 스튜디오 단지는 지난 1991년 1월에 공사를 시작했다.

완공은 97년이 목표다.

현재 전체공정에서 60%정도 진척된 상태다.


“1단계 공사가 완공되는 96년 말까지 국고와 공사자금 585억 원이 투입될 예정입니다. 2단계로 영상자료원을 포함한 영화박물관건립과 시설현대화 5개년 계획 등 후속사업을 추진할 계획으로 알려졌습니다.”

“남산에서 완전히 이주를 마쳤답니까?”

“현재 야외 세트장과 편의시설을 제외하고 각종 제작기기, 스튜디오 관리, 녹음, 편집, 소품실 등의 공사가 끝이 나서 관련 부서가 이사를 마쳤다고 합니다.”

“흥릉으로는?”

“현상실, 자막실, 대사녹음실, 자료실, 시사실, 임원실, 총무, 기획조사, 진흥, 건설, 영화 아카데미가 이전했습니다.”


1997년에 완공될 예정인 남양주시의 영화 촬영 스튜디오는 40만 평 부지에 영화촬영용 야외 세트와 6개의 실내 촬영스튜디오, 녹음실, 각종 제작 장비 등을 갖춘 아시아 최대 규모의 영화제작 시설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영화진흥금고는 어떻게 하겠답니까?”

“내년까지 100억 원 규모로 확대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원 규모는?”

“제작사당 2억 원 범위에서 연리 3% 융자지원이 유력합니다.”


류지호가 기억하는 대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남양주 종합촬영소 영상관 앞에 세 대의 차량 행렬이 멈췄다.

황재정이 대유의 대형세단 아카디아에서 뛰쳐나와 차문을 열어줬다.

로얄 패키지 적용 모델로 자그마치 4,500만 원에 달하는 가격의 세단이다.

이 당시로서는 상식을 벗어나 버린 가격표가 붙은 세단이 아카디아다.

차 밖으로 빠져나온 류지호는 평소 쓰지 않던 안경을 쓰고 있다.

안경은 이미지를 탈바꿈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아이템이다.

비서와 경호원을 대동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류지호를 지켜보며 영화인들이 쑥덕거렸다.


“누구야? 배우인가?”

“WaW 픽처스의 실제 회장.”

“뭔 놈의 부하를 저리 줄줄이 달고 다니는 거야?”

“그러게. 조폭도 아니고.”

“재벌 흉내라도 내고 싶은가 보지.”


영상관 로비에서 박건호 대표와 제작총괄 주영호, G.O.M 본부장 오동석 등이 반갑게 류지호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늦지 않았죠?”

“딱 맞춰 오셨습니다.”

“사람들 시선을 끌지 말고 얼른 행사장으로 가죠.”


세미나실에 수많은 영화인들이 모여 있다.

한국영화발전 방향을 논의하고, 제작자들의 의견을 청취하기 위한 일환으로 영화진흥공사와 문체부가 마련한 자리다.

WaW 픽처스에서는 박건호 대표와 주요 수뇌부만 참석하려했다.

그런데 문화체육부 장관이 직접 류지호를 지목해 참석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요청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명령에 가까웠다.

류지호가 실내를 둘러보며 박건호 대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많이들 참석했네요?”

“대종상 시상식도 이렇게 모이기도 힘든데 말입니다. 종합촬영소 홍보를 제대로 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젊은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를 주요 주제로 이야기를 할 것이고, 기득권은 축소를 주장하겠죠. 저기 대기업에서 나온 사람들은 어떤 포지션을 취할지 궁금하네요.”

“제작자들은 영화진흥금고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겨우 100억 가지고요?”

“그래도 영세한 영화사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지원입니다.”

“유럽처럼 제작비의 70%까지 융자하는 것도 아니고, 겨우 30% 될까 말까 한 것으로요?”

“3억 미만 영화는 그 정도까지 지원하겠다고 하니 기대해볼만 하지 않겠습니까?”


나눠먹기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일단 우리도 자리에 앉죠.”


류지호 일행이 좌석 등받이에 붙어 있는 자신들의 이름을 찾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참석자 모두의 시선이 류지호 일행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류지호는 충무로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심지어 영화제나 시상식 초청도 무시해 왔다.

이번에도 문체부 장관이 직접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면 참석할 생각도 없었다.

암튼 류지호에게 낯익은 인물들이 다수 보였다.

그들과 눈인사를 나눴다.

대유영화사업본부장 옆에 앉아 있는 김자영과도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눈가의 주름이 멋들어지게 잡힌 김지훈 대유영화사업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쟤들이 수입하는 영화마다 대박을 쳤다고 했지?”


김지훈 왼쪽에 앉아있는 왜소한 체격의 안경잡이 남자가 얼른 대답했다.


“예.”


마흔 살가량으로 보이는 사내는 마른 체구에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 그리고 유독 좁아 보이는 하관이 특징인 얼굴을 하고 있다.

대유영화사업단 이사 송영석이다.

20여 년 간 충무로의 여러 영화사를 옮겨 다니며 배급 업무를 해온 영화인 출신이다.


“.....흠.”


김지훈이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등을 깊이 기댔다.

그는 어쩐지 중후한 멋이 풍겨 왔다.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큰 입은 성격이 시원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의 눈에는 탐욕 혹은 비열함이 번들거렸다.

능력보다는 정치를 잘해서 본부장이 되었다고 알려진 남자다.


“유림극장의 성 회장에게 들으니 굉장히 노련하고 교활한 친구랍니다. 말발이나 가식적인 행위에 아주 탁월해서 어지간한 사람은 가면 뒤에 숨겨진 교활한 본성을 알기가 힘들 정도라고 합니다.”


송영석은 오동석이 입사하기 전 유림극장에서도 근무 한 적이 있었다.

성 회장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어쨌든 김자영은 송영석의 근거 없는 험담에 어이가 없었다.

그의 말을 정정하려는데.

김지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요? 젊은 친구가 사짜 기질이 있는 모양이군요?”

“충무로에서는 고지식하면 뒤통수 맞기 딱 좋습니다.”

“WaW가 현재 가장 잘 나가지요?”

“가장 큰 경쟁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핏덩어리도 했는데 제가 못 할 이유는 없지요. 하하.”

“후후. 사장님은 충분히 해내실 겁니다.”


김자영은 남몰래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남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마음은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의 본부장은 뭔가 과잉되었다.


“본부장님.... 충무로에서 떠도는 소문을 모두 믿으시면 안 됩니다.”

“송 이사가 지금 헛소문을 내게 전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저도 모릅니다. 다만 연예계만큼 말이 많은 곳도 없습니다. 대부분은 근거 없는 낭설일 경우가 많고요. 교활함만으로 할리우드 파워랭킹에 이름을 올릴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 봤자.... 우리 그룹과 비교가 되겠어?”


김자영은 자신이 그룹 총수의 손녀라고 밝힐 수도 없는 처지다.

미국의 사업을 차지하고라도, 바닥부터 시작해 몇 년 사이에 한국 최대 영화사로 키워내고, 멀티플렉스 극장까지 세운 류지호와 그룹에서 낙하산으로 사업본부에 내려온 본부장을 놓고 비교하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김자영은 대유영화사업본부의 앞날이 무척 어두울 것만 같았다.


“맹수도 아니고, 여우새끼는 다루는 방법이 따로 있지.”

“맞습니다. 혹시 압니까? 본부장님이 길들일 수 있을지.....”


쿵짝이 잘 맞는 두 사람이다.

그들의 한심한 작태와 상관없이 세미나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스크린쿼터 축소를 성토하는 목소리.

영화진흥금고 운용을 놓고 벌어지는 이전투구.

난장판까지는 아니지만, 다소 꼴사나운 광경도 연출되었다.


“야 이 새끼야! 내가 네 선배야!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야!”

“말 좀 가려서 하십시오. 선배님! 지금 이 자리는 현장이 아닙니다. 공식적인 자리 아닙니까! 예의를 지켜주십시오.”

“영화 그만 하고 싶어? 이 새끼가 그냥!”


일부 원로 영화인들이 쌍욕을 섞어가며 큰소리를 쳤다.

그 모습이 하도 한심해 보여 류지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짜증이 치밀어서 그대로 세미나장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아! 류지호 의장님 하실 말씀이라도....?”


사회자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아닙니다. 화장실이 급해서. 그럼....”

“야! 너!”

“......?”

“어른들이 말씀하시는데 어린놈이 화장실에 가?”


세미나 내내 목청을 높였던 원로 영화인이 타깃을 류지호에게 돌렸다.

잘 아는 대선배다.

이전 삶에서도 안하무인적인 태도로 인해 꽤나 신망을 잃었던 원로다.

류지호는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가볍게 목례하고 그대로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아무리 반달들이 영화판에서 들어와서 행세 좀 했다고 해도.... 최소한의 품위는 있어야지.’


류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화장실로 향했다.

이대로 사라지는 것은 두고두고 뒷말이 나올 터.

간담회가 열리기 전까지 밖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끝날 때 쯤 들어와 문체부 장관과 영화진흥공사 관계자들과 인사하고 사라질 생각이다.


❉ ❉ ❉


화장실을 다녀온 류지호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세미나실 입구 양옆으로 서 있는 영화진흥공사 직원들 무리에 섞였다.

조용히 세미나라 쓰고 난장판이라고 읽는 장내를 지켜봤다.


“우리가 방화를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데! 그런 우릴 홀대해!”


류지호에게 쌍욕을 퍼붓던 원로는 숫제 웃통까지 벗어재꼈다.

그의 곁에서 함께 행패를 부리고 있는 비슷한 연배의 남자는 어깨와 등판에 문신까지 하고 있다.

비장한 모습이 당장 할복이라도 할 태세다.


“우리가 힘이 없어 양놈들한테도 영업권을 빼앗겼어. 그런데 너들은! 양놈들에게 간이고 쓸게도 다 빼주고 말이야! 니들이 한국영화인이라고 할 수 있어!”


원로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댔다.

난동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나서서 만류하는 사람이 없다.

젊은 영화인들은 오만상을 찌푸린 채 팔짱을 끼고 수수방관.

일부 영화 관련 협회 관계자들은 은근히 부추기는 태도까지 보였다.

대기업 참석자들과 금융권 참석자들은 강 건너 불구경이다.


“바우인지 와우인지 하는 새끼들은 지들이 미국물 좀 먹었다고 미국 놈들처럼 직배를 하겠다고 우릴 무시하고 말이지! 그 놈들에게 부화뇌동해서 젊은 놈들은 간신배처럼 바우 똥구멍이라도 핥을 기세야! 이런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상놈들이 어디 있어! 도대체 뭐하자는 수작들이야!”

“옳소!”

“그걸 또 왜 정부는 가만히 보고 있는 거란 말이야!”


몸에 문신을 한 남자는 지방배급업자임을 알 수 있다.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 역시 지방배급업자일 터.

영세영화사 대표 혹은 기술스태프 협회 간부로 보이는 자들도 끼어있다.


부스럭.


어느새 류지호의 곁으로 황재정이 다가왔다.


“올 상반기 오성과 대유, 무비서비스, 창업투자회사... 기타 등등이 한국영화에 투자를 시작하면서 독자적인 배급 라인업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한껏 목소리를 낮췄지만, 주변에 서 있는 직원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간 할리우드 직배사를 제외하고 WaW만이 전국적인 배급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벌의 영화계 진출과 서울극장 라인을 낀 강은석 감독의 무비서비스가 부상하면서 이제야 배급다운 배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배급사 파워는 전적으로 라인업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대기업이 배급을 하기 위해서는 영화를 확보해야 한다.

그로 인해 한국영화에 대한 직접투자가 늘어났다.

자연스럽게 충무로에 돈이 돌기 시작했다.


“기존의 배급라인 외에 극장들을 따로 영업을 하기 시작했겠지요?”

“영등포, 신촌, 강남, 천호, 잠실, 상계동 그리고 지방 대도시도 점점 라인 외 극장으로 확대 상영을 하는 추세입니다.”

“아마도 올 해와 내년이 본격적으로 배급이 배급으로써 토대를 잡아가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경강이라고 불리는 경기도와 강원도 그리고 부산을 제외한 경남지역, 대구를 제외한 경북지역, 대전을 제외한 충청지역, 광주를 제외한 전라지역(제주 포함)은 지방배급업자들을 통해 배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방까지 직배체제로 개편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저 난리를 치는 사람들이 바로 지방흥행업자들입니다.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인 모양입니다. 지방 극장업주들이 깡패들에게 협박도 받고 그러는 모양입니다.”


영화진흥공사 직원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비록 하급공무원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해도.

류지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주 피디님 말씀으로는 원로 기술스태프 중에 왕년에 지방흥행업자들에게 용돈 안 받아본 사람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원로 기술스태프 발등에도 불이 떨어졌지요. 철저히 ‘도제 시스템’에 따라 보수와 직위를 영위하던 사람들이 기획 피디와 신인감독들에게 차츰 외면을 받으면서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으니까요.”


세대교체 바람이 충무로에 본격적으로 불어 닥치고 있는 것이다.

그 선봉에 WaW 픽처스가 있다.


“....?”


갑자기 훅하고 여성용 향수냄새가 풍겨왔다.

백설그룹 미디어사업부 이희경이 다가왔다.

그녀가 소란을 피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두고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가 우리나 대유 같은 대기업 또 창투 관계자를 성토하는 자리가 될 줄 알고 각오하고 왔어요. 본의 아니게 감독님이 공적이 되어 버렸네요.”

“창피하네요.”

“감독님이 왜요?”

“영화판의 민낯을 외부인들에게 보여서요.”

“누가 외부인이죠? 설마 우리?”

“......”


류지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우와! 감독님은 다를 줄 알았는데.... 저기서 오만방자하게 난리 피우는 꼰대처럼 편을 가르시네.”

“편 가르지 않아요.”

“그럼 외부인이란 말은 뭐에요?”

“상무님과 백설그룹이 영화 사업을 하는 목적을 떠올려 보세요. 돈을 벌려는 목적 전에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한국영화 발전 방향도 충분히 고려하고 있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충분히 영화인들에게 비전을 제시했다고 생각해요.”

“.....”

“감독님, 저도 영화 좋아해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좋아해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 모인 사람들이 그들이 지불한 돈을 챙기고 있는 것이고.”

“기업가들이 영화인들을 낮춰 볼 거라고 단정하시는 건가요?”


류지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그건 감독님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녀가 보기에 류지호가 더하면 더했지 덜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미디어 사업부보다 훨씬 큰 규모의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일구고 있으니까.

그것도 영화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본토에서.


“미국에서 영화하면서 부러운 게 뭔 줄 압니까?”

“시장이 크다는 거? 부가시장이 어마어마하다는 거?”

“아니요.”

“그럼 뭔가요?”

“영화인 조합이 엄청, 무지 잘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렇긴 하죠. 하지만 기업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 아닙니다. 또 민간 기업이 할 일을 넘어 개인이 그리고 정부가 중재를 해야 할 문제라고 봐요.”

“정부가 관련 법규를 마련하면 따를 의향은 있고요?”

“.....”


이희경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처럼 조직을 결성해서 단체행동을 하게 되면 기업 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파질 가능성이 매우 농후해진다.

기업입장에서 하지 않아야 할 쓸데없는 생각이다.

아니다.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한국영화의 경쟁력은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있다고 보세요?”

“저렴한 인건비입니까?”

“잘 아시면서 낭만적인 생각을 하시네요.”


풋.


류지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낭만적인 겁니까?”

“할리우드는 지나치게 높은 인건비 부담으로 제작비가 매년 상승하고 있어요.”

“그게 과연 인건비 상승 때문이라고 보세요?”

“그렇다고 알고 있어요. DreamFactory 관계자들도 그렇게 말했고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좌석에 앉아 있던 영화인들이 류지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해서.

영화진흥공사 직원들도 슬금슬금 주위로 모여들었다.


“매년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물가 상승률과 연동해서 몇 년 단위로 조합 측과 제작자 측이 협상을 벌이고 있죠. 마치 제조업 분야에서 매년 노사가 치열하게 다투는 것처럼. 양측이 정말 치열하게 협상에 임합니다.”

“우리는 인건비라는 경쟁력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봐요. 향후 시장이 지금의 몇 배가 커진다면 모를까.”


류지호가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죠. 인건비를 감당할 수 있게 시장을 키워야 하죠.”


그런데.


“할리우드 영화 인건비를 대부분을 차지하는 게 누군지 모르지 않죠?”

“스타죠.

“현재 A리스트 배우의 출연료가 얼마인 줄 아십니까?”

“1,500만 달러?”

“2,600 달러를 받는 배우도 있어요. 6,000만 달러 예산의 영화에서. 스태프의 인건비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많은 금액을 스타 한 명이 가져갑니다.”


류지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들이 한화로 계산해봤다.

대략 200억 원이다.


“부당하다고 지적하고 싶진 않아요. 다만 이것만큼은 지적하고 싶네요. 맥커리 컬킨이라는 아역 스타가 있어요. 그 녀석의 아버지라는 작자가 새로운 영화에 1,800만 달러를 요구하더란 말이죠. 4,000만 달러 예산의 영화에서.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한 죠셉은... 감독은 여러 편에서 흥행 실적을 증명해 보였는데, 이제 400만 달러를 받을 예정이죠.”


물론 400만 달러도 A-List 수준의 연출료다.


“스타의 이름값이 그 만큼의 관객을 끌어 모으기 때문 아닌가요?”

“부정하지 않아요. 흥행산업의 특수성이죠. 할리우드 A리스트 배우들은 받는 만큼 일합니다. 관련해서 의무사항도 많고. 기술스태프들도 마찬가지에요. 받은 만큼 일합니다. 적게 받는 사람은 실력이 모자라거나 경력이 부족한 경우에요. 많이 받는 스태프는 그만한 능력자이거나 그걸 충분히 입증한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스튜디오 입장에서는 영화 만듦새의 결과물에서 리스크를 줄일 수가 있어요. 스태프들의 능력치가 충분히 예측가능하니까.”


영화를 산업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공무원들은 류지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는 이는 대기업 임원인 이희경과 경영을 전공한 황재정 정도다.


“영화 산업이 안정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무작정 인건비 상승을 막으려만 하죠. 그렇다 보니까 영상콘텐츠산업에서 활동하는 인력의 관리가 안 됩니다. 그러니 영화마다 완성도에서 널뛰기를 하게 되죠.”


대표적인 경우가 인도 영화계 그리고 남미 영화계다.

미래에는 중국영화도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

유럽영화계는 스태프 인력관리는 잘되고 있지만, 영화 품질이 들쑥날쑥하다.

“영화는 돈을 넣는 만큼 그림이 나옵니다. 또한 예산집행을 잘하는 사람은 유능한 프로듀서가 아니라 유능한 프로덕션 매니저, 디피, 제1조감독, 프로덕션 디자이너라고 확신합니다. 그들이 20억 예산의 영화를 낭비 없이 20억에 찍게 만들어 주는 겁니다. 게다가 그 유능한 사람들 덕분에 결국 50억 가치의 영화가 탄생하기도 하죠.”

“꿈같은 이야기에요. 감독님은 이미 그런 시스템이 잡혀 있는 할리우드를 경험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노사합의가 이루어질 거라고 믿고 있는 거죠.”

“할리우드도 완벽하지 않아요. 상무님은 현장 경험을 안 해봐서 모를 겁니다. 나는 최근 장편영화를 미국에서 찍었어요. 미친 듯이 효율적입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죠.”

“듣기로는 감독님 성향도 크게 한 몫 했다고 하던데.....”

“맞아요. 나는 무계획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을 정말 싫어합니다.”


이전 삶에서는 안 그랬다.


“<영정사진>을 찍을 때 였어요. 해가 지는 그 짧은 시간에 원하는 그림을 얻기 위해 스태프와 배우가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뭔가 홀린 사람들처럼 움직였어요. 그리고 우린 최선을 다해 멋드러진 석양 장면을 찍었죠. 미국이었다면 스태프들의 오버차지를 먼저 고민했을 겁니다. 오버차지를 주고 예정에 없던 커트를 찍어야 할지. 다른 예산을 아껴서 새롭게 스케줄을 짜야할지. 그런데 충무로에서는 오버차지는 두 번째 아니 세 번째 쯤의 문제였던 겁니다. 일단 찍을 것부터 해치워야 직성에 풀리는 사람들이니까. 초과노동에 대해 보상을 안 해줘도 그러려니 합니다. 그런 게 영화라면서.”

“.......”

“꼭 충무로 촬영현장에 자주 나가보세요. 그리고 DreamFactory가 제작하는 영화도 체험해 보시고 유럽이나 중남미 영화도 경험해보세요. 아마 충무로 스태프들이 위대해 보일 겁니다. 하하.”


할리우드는 받은 만큼 정확하게 일한다.

유럽영화계는 받은 만큼 일하면서 따지는 것이 더럽게 많다.

중남미나 동남아시아 영화계는 돈도 적게 받고 일도 적게 하면서 게으르기까지 하다.

충무로 스태프는 돈은 쥐꼬리만큼 받으면서, 노동 강도는 혹사이며, 그럼에도 순종적이고 성실하다.


“감독님이 영화 노조를 찬성하고 있다는 말은 전해 들었지만, 직접적으로 듣게 되니 조금 아니 많이 낯서네요.”

“후발주자들의 장점이 뭘까요?”

“......?”

‘앞서 성공한 이들을 벤치마킹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순간 세미나장과 입구 쪽이 분리가 된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류지호의 주변만 다른 공기가 흘렀다.


“후발주자의 나쁜 버릇 중에 하나가 악습까지 귀신 같이 배우려고 한다는 거죠. 할리우드처럼 돈을 많이 벌고 싶지만, 할리우드처럼 배우와 스태프에게 돈을 주는 것은 언제나 아깝죠. 그래서 영상산업이 발전해도 항상 엇박자로 한쪽만 일방적으로 선진화 되다보니 성숙기를 거쳐 혁신이 이루어져야 할 때 그 불균형을 해결하지 못해 주저앉고 맙니다.”


이희경이 괜히 찔려서 화제를 슬쩍 돌렸다.


“할리우드 영화가 무서운 것은 흥행산업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대자본의 우격다짐으로 본전치기는 해낸다는 것 같아요.”

“더 무서운 게 뭔 줄 아십니까?”


궁금하다.

할리우드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하기도 하고.

사람들은 마치 할리우드에서 수십 년 구른 베테랑 프로듀서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그도 아니면 영화과 교수의 강의라던가.


“흥행한 영화이든 망한 영화이든 그 품질이 유지된다는 겁니다. 영상의 퀼리티부터 작은 소품 하나까지도.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영화산업 인프라의 한 축을 담당하는 숙련된 스태프의 힘입니다. 그래서 영화사는 망할지 몰라도 산업은 망하지 않는 거죠.”


자본의 논리는 논외로 치고.


“할리우드 스태프들은 헤드스태프가 되지 않아도 설령 되지 못한다고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영화라는 직업에서 은퇴한 후 삶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입한 각 조합에서 연금이 나오니까요.”


솔직히 스태프 중에서 최하위층은 먹고 살기 힘들다.

영화산업이 활발한 도시의 물가를 감당할 수 없기에.

영화업계만 그런 것이 아니긴 하지만.


“현직에 있을 때 일을 설렁설렁 하냐 절대 그렇지 않아요. 세계 어디나 영화예술 종사자들의 자긍심은 매우 높기 때문이죠. 차라리 현장 스태프보다 배급사나 극장 종사자들의 직업 안정성이 떨어지는 편이죠. 회사나 극장이 망하면 그들의 직업도 끝이니까요.”


영화사는 망해도 영화 자체가 사라지는 일은 없다.

앞으로도 다른 방식으로 변화가 일어날 순 있어도, 영화라는 대중예술이 사라질 일은 없다.


“영화는 누가 만들까요?”

“......?”

“넉넉한 자본으로 무장한 제작자? 뛰어난 기획 피디? 슈퍼스타? 재능 있는 영화감독? 한국영화 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과 함께 숙련된 스태프가 필요합니다. 숙련도는 안정된 직업이 보장해주는 거고. 우리 영화 노동자들 아니 스태프들은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파트너입니다. 값 싼 인건비로 저렴한 제품을 만드는 것과 고급 인력으로 최고급 브랜드 상품을 만드는 것. 어느 것이 부가가치가 높을까요?”


이희경은 류지호의 생각 전부에 동의하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 말은 깊이 공감했다.

그녀 역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고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믿음으로 사업에 뛰어들었으니까.


“가장 먼저 영화 산업의 이해당사자들이 공론의 장으로 모두 나와야 합니다. 적어도 새천년 이후 시대의 충무로 산업구조 혹은 체제에 대해 담론은 나와 줘야 지금부터 준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처럼 중구난방으로 목소리만 높이면 어떤 결과도 도출하지 못하겠죠.”


류지호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악다구니 쓰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물론 저기 난리치는 선배님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영화판의 기생충 같은 존재들이긴 합니다. 하루 빨리 업계에서 치워버려야 할.”


이희경은 오한을 느꼈다.

류지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차가워졌기 때문이다.

착각이 아니다.

장내에 시선을 두고 있는 류지호의 눈에 온기가 싹 사라져 있었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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