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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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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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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The Killing Road. (1)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산타모니카 소재 ParaMax Films 본사.

JHO Pictures의 피터 웰스 사장이 ParaMax와 <The Killing Road>의 투자·배급 계약을 체결했다.

회사 간의 계약이라서 류지호가 딱히 개입할 상황은 아니다.


“혹시 의회가 상정할 예정인 복지개혁법안(PRWOA)에 찬성하는 입장인가?”


류지호는 알버트 마샬 사장의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영화 속에서 살인마가 재미있는 말을 하더군.”

“무슨 말이었죠?”

“AFDC(아동부양가족지원금)는 극빈가구에 조건 없이 현금을 지급하는 제도지. 난 그 따위 복지정책을 이해할 수 없어. 그건 근로 동기부여가 취약하고 빈곤 극복에 실질적인 효과가 없거든. 우리 세금으로 일할 의욕도 없는 자들에게 공짜로 퍼주는 건 잘못된 거야.... 라고 말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어.”


류지호는 연쇄살인마 벤의 가치관을 만들기 위해, 미래의 어떤 미국 대통령의 논리를 떠올렸다.

그 대통령이 후보시절 상대당 후보를 비판하기 위해 ‘생산적 복지정책’을 주장했던 것을 기억해내고, 그와 관련해 공부를 조금 했다.

물론 수박 겉핥기식 공부였다.

현재 미국 의회에서 기존의 연방 복지급여 지원금과 아동부양가족지원금을 폐지하고, 대상자가 근로 교육프로그램 이수 등 일자리를 얻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 주당 일정 시간의 노동을 할 경우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복지정책을 바꾸는 법률을 준비하고 있다.

지원 주체 역시 연방정부에서 주정부로 이양하는 법안이다.

명백히 복지정책의 후퇴다.

그럼에도 많은 지식인들이 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어 결국 대통령이 이를 승인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현재 미국 중산층 고학력 젊은 백인 남성의 생각을 대입해 봤어요.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벤의 학력과 그가 가졌던 직업 등을 비춰봤을 때 그런 말을 하고도 남을 것 같아서.”


실제 시나리오 상에서는 서로 상반된 이야기를 한다.

벤이 시골사람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이와 정반대적인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살인을 저지를 때 비로소 본심을 드러낸다.


“사회파 스릴러 아닙니다. 알버트.”


류지호가 <The Killing Road> 장르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알버트 마샬 사장은 대수롭지 않아 했다.


“뭐, 좋아. 데뷔 작품을 ParaMax로 가져온 건 잘한 거네.”

“잘 부탁해요.”


정식으로 투자·배급 계약이 체결된 후로, 배우와 주요 스태프 구성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주연배우인 해리슨 노튼과 마리아 베리가 가장 먼저 계약서에 서명했다.

촬영기간은 총 4주.

촬영 회차로는 20회다.

두 배우는 다음 영화 스케줄이 잡혀있다.

따라서 9월 초순에는 모든 촬영을 끝내주기로 계약서에 명시했다.

출연료는 독립영화 업계 수준에 맞춰 체결했다.

천군만마도 합류했다.

신경쇠약의 보안관보 역할에 <바톤 핑크>의 존 터튜가 계약했다.

올해 세 편의 영화를 찍었거나 찍을 예정이다.

그럼에도 류지호의 러브콜을 고민도 없이 수락했다.


“나는?”


쿠엔 태런티노가 배역을 달라고 요청했다.

부탁을 빙자한 협박에 가까웠다.

류지호는 꿈쩍도 안했다.


“<겟 쇼티>부터 <황혼에서 새벽까지> 프로젝트가 연달아 있는 것으로 아는데?”

“스팍스 리도 나를 출연시키려고 하는 거 몰라?”

“잘됐네. 그 영화에서 열연을 펼치도록 해.”

“진짜 이럴래!”


쿠엔 태런티노는 <펄프 픽션> 성공 이후로 제 세상을 만난 것 같았다.

<황혼에서 새벽까지>처럼 기획·제작하는 영화 사이사이 연기까지 할 예정이다.

매우 신나는 하루하루를 경험하고 있다.


“생긴 거나 뭐로 보나 캐릭터가 있긴 한데....”


쿠엔 태런티노가 하도 들러붙어서 류지호는 잠시 흔들렸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을 만큼 답답한 돌머리 캐릭터인 보안관 보(Deputy Town Marshal)를 시켜볼까 생각해보았다.


절레절레.


진지하게 임해줄 것 같지 않았다.

왠지 다이얼로그까지 제 멋대로 고쳐서 연기할 것만 같았다.

캐스팅 디렉터 수잔 베일리는 쿠엔 태런티노의 사진을 보며 한국말로 중얼거리는 류지호를 힐긋 거렸다.

내심 이번 영화에 합류한 것이 잘 한 일인지 돌아봤다.


‘특이한 유형의 감독이라니까.’


캐스팅 디렉터 계약을 체결하기 무섭게 JHO Pictures에서 <The Killing Road>의 시놉시스와 캐릭터 가이드를 보내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감독이 직접 작성한 문서를 또 보내왔다.

주조연은 물론이고 단역까지 포함해 30명이 넘는 캐릭터가 담겨 있었다.

그 캐릭터 하나하나에 대한 매우 자세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보통 조연까지 따로 위시리스트를 보내준다.

비중이 크지 않은 배역까지 자세하게 정리된 캐릭터 리스트를 보내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감독들은 캐스팅 디렉터가 추천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오디션을 보고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류지호처럼 각 배역별로 인종, 외모, 출신 국가, 목소리까지 따져가며 치밀하게 준비하는 감독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지독하게 꼼꼼한 감독으로 인해 수잔 베일리는 자신만의 방식을 버렸다.

새롭게 배역 분석 작업을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은 어떻게 할 예정입니까?”


류지호가 즉각 대답했다.


“순탁 오는 개인적으로 제의를 해볼 생각입니다.”


에이전시를 통하지 않고 배우 본인을 직접 만나겠다는 의미다.


“알겠습니다.”

“혹시 내가 ParaMax 오너라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우세요.”


캐스팅에서 넉넉한 예산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혹시나 그런 기대를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확정된 스태프와 배우들은 독립영화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할리우드 영화는 스튜디오 영화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대다수의 스태프들이 류지호와의 인맥을 쌓기 위해 적은 보수에도 기꺼이 참여하기로 했다.


“원래 그런 겁니다. 주어진 예산 안에서 현실적이면서도 조금은 욕심을 내는 정도의 캐스팅 리스트를 짜야 하는 거죠.”


캐스팅 디렉터는 제작진의 취향이나 요구조건을 잘 파악해야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영화는 캐스팅 디렉터에게 쉬운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이 원하는 바가 구체적이고 명확했기 때문이다.

류지호가 단단히 일렀다.


“다른 무엇보다 배우의 인성이나 팀워크 부분을 신경 써 주세요.”


<Life Goes On>의 촬영 초반이었다.

몇몇 껄렁대는 배우들이 류지호에게 도전했던 적이 있었다.

결국 녀석들과 류지호는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지만.

어디나 이기적이고 성격 좋지 못한 이들은 있게 마련이다.

안 해도 되는 기싸움으로 심력을 소모했었다.

캐스팅 디렉터는 영화·TV 시리즈의 배역을 추천할 때는 지금 당장의 인지도나 인기도 중요하지만 향후 전망까지 내다봐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영화는 촬영 시점과 개봉 시점이 평균 1년, 길게는 2년 가까이 차이 나는 경우까지 있기에 배우의 성장 잠재력까지 고려해만 한다.

그래야 안목 있는 캐스팅 디렉터가 되고, 유능한 에이전트가 될 수 있다.


“물론입니다. 거기에 더해, 연기력과 배우의 가능성도 함께 살펴야하는 것이 제가 하는 일입니다.”

“캐스팅에는 정답이 없죠.”

“디렉터도 잘 아시겠지만, 여러 사람의 호불호를 따지는 일인 만큼 한 사람의 독단적인 의견만으로 이뤄지지 않기도 하고요.”

“어디 캐스팅뿐이겠어요? 스크립트를 볼 때도 다들 주관적일 수밖에 없잖아요.”

“결국 캐스팅이 잘 됐다 못 됐다는 관객의 냉정한 판단에 달려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스튜디오는 매년 리서치 조사를 하고 이미지 분석을 외부업체에 의뢰하는데 꽤 많은 비용을 쓰고 있죠.”


할리우드는 무명배우라도 연기력이 우수한 편이다.

특급 배우를 제외하고, 캐스팅이 되기 위해서는 거의 대부분 오디션을 봐야 한다.

따라서 연기력이 별로라면 캐스팅 될 수가 없는 구조다.

물론 특별한 경우도 있다.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가진 원석을 발견했거나, 다른 분야에서 이미 슈퍼스타인 케이스다.

대표적으로 가수로 유명세를 떨친 배우를 캐스팅하는 경우를 들 수가 있다.

그럴 경우에는 영화 제작비에서 따로 예산을 편성한다.

연기 트레이닝 예산이다.

배우를 위한 맞춤형 트레이닝을 시켜준다.

배역을 소화할 만큼만 캐스팅 된 영화에 최적화된 배우로 만들어버린다.

외국인인 경우에는 배역준비부터 언어를 교정해주는 전문가를 따로 붙여준다.


“그런 면에서 케이아누는 특이한 케이스죠.”


류지호가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 아니다.

연기력이나 외모보다는 다른 부분으로 롱런하게 되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스피드>로 액션배우로 본격적으로 뜨기 시작한 케이아누 립스는 스타가 되었음에도 한결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인성이 좋잖아요. 할리우드 스태프 중에서 그를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착하죠. 케이아누는......”

“잘생기기도 했고요.”


캐스팅은 그런 거다.

연기력도 중요하고, 외모도 중요하고, 목소리도 중요하고, 태도도 중요하고.

무엇보다 스타성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인성이 좋은 배우는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일하는 스태프가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결국 관객도 사랑하게 만든다.

영화 일이란 것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인성이 좋은 배우와 일하게 되면 뭐라도 하나 더 신경 써 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배우 입장에서 싫을 수도 있답니다.”

“.....?”

“만약 디렉터의 영화에서 배우가 문제가 생기게 된다면 누구에게 제일 먼저 연락을 할까요. 가장 친하면서 착한 배우에게 도움을 청할 겁니다.”

“아직 연기하는 친구는 없지만, 케이아누 립스 같은 배우가 친구라면, 내 부탁을 외면하진 못하겠네요.”

“내 경험으로 말하자면. 원했던 배우에게 물 먹거나 갑작스럽게 하차해서 공백이 생겼을 때 친한 이들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영화가 흥행에서 재미를 보지 못한 경우를 많이 봤어요.”


어떤 분야나 다 마찬가지다.

영화 일을 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거다.

예상대로 되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


‘오히려 그 점이 매력적일지도.....’


류지호는 할리우드든 충무로든 캐스팅이 결코 폐쇄적이거나 권위적이고 누군가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갑질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재능 있고 실력 있는 배우들, 요행을 바라지 않고 묵묵히 노력하는 배우들이 인정받고 성장할 수 있도록 공정하게 길을 열어주는 것.

그 또한 캐스팅의 숙제라고 생각했다.

이전 삶에서 그렇게 하지 못했기에.


"얼추 캐스팅은 마무리 단계고, 세트 예산이 골치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삼봉백화점 건으로 골치를 썩었다.

그에 비하면 이런 고민은 고민도 아니다.

고민하는 것 자체가 훨씬 즐겁고 행복하기도 했고.

류지호는 즐거운 마음으로 영화 준비에 임했다.


✻ ✻ ✻


베벌리힐스도 자주 찾다보니 그저 옆 동네 같다.

실제 웨스트우드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이긴 했지만.

류지호는 트라이-스텔라 임원들과 자주 가는 레스토랑에서 노년의 한국인과 저녁을 먹었다.

할리우드 최초의 한국인 배우는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의 장남 필립 안이다.

필립 안 선생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새긴 유일한 한국계 배우이기도 하다.

그리고 재미교포가 아닌 한국인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최초의 배우가 류지호 맞은편에서 와인을 음미하고 있는 오순탁 대선배다.


“나도 사실은 부루인에 한 발 걸치고 있다네”

“프로필에는 뉴욕의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 연극학교 출신이라고 나오던데요?”

“1959년 가을학기에 입학해서 1년 반 정도 UCLA 학부를 다녔어.”

“하길종 선배님이 최초의 UCLA 영화과 동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참 아까운 친구였지. 귀국하지 않고 미국에서 남았으면 당시에 불고 있던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절정기를 ‘영화악동‘들하고 함께 했을 텐데.... 자네도 코폴라, 루카스하고 하 감독이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알지?”

“예.”

“하 감독은 인디영화로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도 있었어. 그놈의 중앙정보부 놈들 때문에 할 수 없이 귀국할 수밖에 없었지만.”


류지호로서는 처음 듣는 비사다.


“하 감독이 LA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었거든. 당시에 반정부운동을 하는 유학생들에게 ‘병역기피’ 같은 이유를 들어서 강제소환령을 내리고 그랬어. 하 감독의 큰형이 경제기획원에서 꽤 높은 직위에 있었나봐. 중앙정보부에 큰형이 끌려가서 사표를 낼지 동생을 귀국하게 만들지 결정하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들었어.”


비단 하길종 감독뿐일까.

좀 더 일찍 해외에서 큰일을 할 수도 있었던 많은 인재들이 온갖 명목으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고 강제로 군대로 보내졌었다.


“암튼 헨리라는 지도교수가 어느 날 나를 불러서 그러는 거야. 네 수준이면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연기전문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맞다면서 네이버후드 플레이하우스 연극학교를 추천해줬지. 물론 나중에 다시 UCLA 대학원에 다니며 연기와 극작을 복수전공으로 하는 MFA(석사 후 실기 연구)과정을 들었지만. 물론 학위는 못 땄어. 그때 브로드웨이 뮤지컬 <라쇼몽>이 캘리포니아에서 순회공연을 했는데 크게 히트를 했거든. 그때 이쪽 동네 매스컴에서 ‘아시안 배우 중에서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고 크게 떠들기도 했고, 할리우드 관계자들도 내 공연을 많이 보러 와서 오디션 제의가 쏟아졌지.”

“그때는 영주권도 없으시고 학생비자였을 텐데.....?”

“<앨리윈터의 마지막 전쟁>이었나 CBS TV시리즈에 출연한 일이 있어. 월맹군 장교 역할을 할 배우를 찾고 있었는데 1년 넘게 배우를 찾지 못하고 있더랬지. 마침 내가 떡 하고 나타난 거야. 내가 학생비자 때문에 이틀 이상 일을 못한다고 그랬지. 그때 아마 주당 20시간이었나 그랬던 것 같아. 암튼 그렇다고 하니까 CBS가 나서서 풀타임으로 일할 수 있도록 손을 써주더라고.”

“미국 시민권도 그때 받으셨어요?”

“아니야. UCLA에서 MFA 과정을 마치고 귀국할 생각이었는데 UCLA에서 미국과 동양에서 출판된 연기교과서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으면 장학금과 생활비를 주겠다고 제안했어. 시민권도 받게 해주겠대. 나쁠 것이 없다고 해서 수락했지. 근데 CBS 드라마에 출연하고 영화도 출연하다 보니까 너무 바빠서 결국 학위는 마치지 못했지.”


나 때는 말이야.

오순탁에 대한 존경이 없으면 그렇게 들릴 수도 있는 길고 지루한 말이었다.

지금보다 수십 수백 배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시절의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대선배다.

무려 200편에 가까운 할리우드 영화 및 TV시리즈에 출연했고.

한국 유학생이자 영화학도로서 존경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류 감독.... 내가 미안하게 됐어.”

“......?”

“자네 영화는 출연하지 않겠네.”


못하겠다가 아니다.

분명히 거절의사표시다.


“시나리오가 흥미가 없으셨어요?”

“그것은 아니야.”


류지호는 가만히 그가 할 말을 기다렸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후, 잠시 뜸을 들인 오순탁이 입을 열었다.


“난 미국에 와서 당장 밥을 굻을지언정 한국인이나 내 조국을 비하하는 역할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네. 누가 알아주든지 말든지.”


오순탁은 지금보다 훨씬 인종의 벽이 높았던 시절의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활동했다.

동양인으로 활동하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 역할이나 하지 않았다.


“일본인, 중국인은 상관없었지. 심지어 월맹군 장교까지도. 하지만 말이야, 한국인을 비하하는 역할의 제의가 오면 나는 그들에게 항상 말해주곤 했어. 한국인은 그리 쩨쩨하지도 멍청하지도 않다고.”

“<Collapse>에는 출연하셨잖아요? 영화에서 거의 유일한 악역이었어요. 그때는 왜 출연하셨는데요?

“나 말고도 많은 한국인들이 나왔잖아. 나는 비록 악당이었지만, 미스 오나 그 밖의 많은 한국계 배우들이 좋은 모습으로 그려졌지. 헌신적이고 자상한 캐릭터로 말이야.”

“만약 <Collapse>의 배경이 한국이었으면 출연 제의를 거절하셨겠네요?”

“그랬을 걸세.”

“선배님 신념이 그러시다면, 제가 뜻을 접어야겠네요. 이번만 찍고 저와 선배님 둘 다 영화 관둘 것도 아니고요.”

“내가 감히 감독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은 아니지만 말이야. 혹시....”

“편하게 말씀하세요.”

“내게 제의했던 캐릭터를 일본인으로 바꿀 수는 없나?”

“....음.”

“강이라는 노인은 그 타운의 유일한 동양인이지. 그것도 비루하고 보잘 것 없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더군. 백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개처럼 복종하는 인물로 말이야.”

“원래 그 마을 설정이 그래요. 강 노인이 멍청하고 비루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만큼 그 타운 토박이들의 사회가 견고하면서 편협해서 끼어들지 못하는 거죠. 그건 흑인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할리우드에서 주로 일본인 역할을 많이 했어. 대본에 한국 욕이 아주 찰지더군. 나머지는 모두 영어로 되어 있고. 일본어 욕은 시시하지만, 다른 식으로 표현해볼 순 있지 않을까?”

“....음.”


꼭 한국인이어야 할 이유는 특별히 없다.

그저 한국인 캐릭터를 한 명 등장시키고 싶은 것뿐.

여주인공인 티아라가 벤에게 자신의 남편을 구해달라고 사정하는 장면이 극 초반에 나온다.

그리고 벤과 티아라는 남편이 반 강제적으로 노동력 착취를 당하는 곳을 찾아가게 된다.

그곳에서 티아라의 남편과 함께 노예처럼 일하는 동료가 강 노인이다.

영화에서 몇 번 나오지도 않는다.

일종의 맥거핀 효과를 위한 장치라고 할까.

맥거핀은 이야기에 동기를 부여하고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퇴장하는 장치를 일컫는다.

이 효과를 처음 사용하고 발안한 감독이 알프레드 히치콕이다.

<사이코> 초반에 여주인공이 훔친 돈다발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여주다가, 여주인공이 살해당한 후 돈다발은 전혀 중요한 장치로서 의미가 없어진다.

그것처럼 티아라의 남편과 강 노인은 타운과 관련해서 뭔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냄새만 풍기다 그대로 영화에서 퇴장한다.


“혹시 중국인 역할은 가능하세요?”

“가능하지. 할리우드 사람들은 우리와 중국인, 일본인을 잘 구분 못해. 나를 중국계로 알고 있는 프로듀서나 캐스팅 디렉터가 얼마나 많은데.”

“그럼 중국인으로 바꾸면 출연하실래요?”


채신머리없이 후배 감독 앞에서 ‘좋아’라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다.

오순탁이 대답 대신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류지호로서는 강 노인 캐릭터를 중국인이든 동남아시아계로 바꾸든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일본인의 일반적인 습성으로 봤을 때 그 시골까지 들어갔을 것 같진 않다.

외모 상으로 오순탁 배우가 동남아시아계로 어울리지도 않는다.

차라리 중국인으로 바꿀 수밖에.

오순탁 배우가 출연을 승낙하고 곧바로 대사를 중국어로 바꿨다.

UCLA의 대만계 미국인 교수에게 자문도 받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미국 영주권을 취득한지 얼마 안 된 차이나타운 거주 중국인에게 감수까지 받았다.


✻ ✻ ✻


“리젠시에서 <히트>를 여름에 촬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아요.”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굉장히 인상적인 중년의 흑인 남자.

민머리에 코 밑으로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었는데, 오디션에서 순박함과 비열함이 동시에 풍겼다.

류지호에게는 TV시리즈로 친숙한 배우다.

아직 제작되지 않은 <더 유닛>과 <24>다.

각각 알파팀 지휘관과 흑인 대통령 역할로 유명해진다.

영화 <메이저리그>에서 부두교 쿠바 선수로 열연을 펼쳐 인지도를 높인 바 있다.

40대 초반 나이의 덱스터 헤이스버트(Dexter Haysbert) 배우다.


“출연이 가능하겠어요? 헤이스버트씨.”

“덱스라고 불러요.”

“덱스, 내 영화도 여름에 촬영할 예정입니다.”

“<히트>에서 내가 일을 해야 하는 것은 단 이틀뿐이고, 메인 로케이션이 LA지역이기 때문에 두 영화 사이의 거리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아요.”


끄덕.


리젠시 엔터프라이즈는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의 제휴 영화사다.

현재 마이크 만 감독의 TV영화 <LA Takedown> 리메이크 영화에 캐스팅 된 상태다.

바로 <히트>다.

류지호와 비슷한 시기에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다.

6,000만 달러 예산이 소요되는 영화답게 총 14주의 촬영계획이 잡혀 있다.


“알겠어요.”

“가발을 써야 할까요?”

“외모 부분에서 <The Killing Road>를 위해 따로 준비할 것은 없어요. 다만 그 덥수룩한 수염을 깎아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문제없어요.”

“그 문제는 덱스가 계약서에 서명하고 나면 다시 이야기 하는 것으로 하자구요.”

“잘 부탁합니다.”

“나야 말로....”


캐스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웬만한 배우는 류지호의 기억을 토대로 검증이 된다.

또 한 명의 검증된 배우가 캐스팅 됐다.

<내추럴 본 킬러>에서 보안관 역할을 맡아 열연을 펼친 테일러 빈스(Taylor Vince)다.

시원하게 벗겨진 머리와 불룩한 뱃살이 트레이드마크다.

할리우드 영화나 TV시리즈에서 멍청한 경찰 직업군의 클리셰 같은 외모라고 할 수 있다.

테일러 빈스는 시골마을 보안관으로 영화 내내 굼뜨고, 헐떡거리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주로 보여줘야 한다.

동시에 비열함도 간간이 드러내야 한다.

조단역급 배우 포지션이다.

다년간의 TV·영화 경력을 봤을 때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디렉터 류는 뭐랄까.... 굉장히 디테일하네요?”


수잔 베일리가 다소 질렸다는 듯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류지호는 인물 한 명 한 명에 대해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다.

마치 <The Killing Road>가 유작이라도 되는 것 같다.

지독하게 고민하고 탐구했다.

류지호로서는 당연한 것이다.

그가 경험한 충무로에는 친숙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배우들만 존재한다.

외국어를 구사하는 배우가 필요한 경우는 극히 제한적이다.

반면에 할리우드는 모든 인종이 다 활동을 하는 것 같다.

혼혈도 많다.

류지호가 보기에 백인이지만, 백인이 볼 때는 혼혈인 사람도 많다.

똑같은 흑인이라도 스킨 톤이 다르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지만 출신 국가, 인종, 지역, 교육수준에 따라 차이가 있다.

류지호는 그런 디테일까지 다 신경을 썼다.


‘연기 좋네. 외모도 그럴 듯 하고.’


절대 뭉뚱그려서 직관적으로 배우를 확정하지 않았다.

수잔 베일리는 주요 배역 외에 단역을 캐스팅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쉽다고 생각했던 것을 후회할 정도로.

오히려 주연을 캐스팅하는 것보다도 더 애를 먹었다.

게다가 류지호의 배우 인맥이 썩 나쁘지 않다.

존 터튜에 이어 빈센트 부셰미까지 데리고 왔다.


“내 영화에 출연해줘요. 빈스.“

“Jay의 영화라면 언제든지.”


스크립트를 보내지 않고 전화 한통화로 캐스팅이 끝났다.

빈센트 부셰미는 영화에 목말라 있는 사람이다.

류지호가 소유한 영화사들 작품을 여러 편 했다.

게다가 류지호가 어떤 마음자세와 태도로 영화 사업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배우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너무 튀지 않아요?”


수잔 베일리가 우려를 표했다.

류지호 역시 처음에는 빈센트 부셰미를 배제했었다.


“관객들이 해리보다 빈스를 더욱 강하게 연쇄살인마로 여길 가능성이 높긴 하죠.”

“그런데 왜?”

“착한 이미지와 악당 이미지를 뒤죽박죽 섞어볼까 해서요.”


수잔 베일리는 류지호의 말을 금방 이해할 수 없었다.

<The Killing Road>는 작품 배경이 한정적이다.

예산도 적다.

미장센에 힘을 주기가 힘들다.

때문에 배우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단 한 장면에 출연하는 단역일지라도 류지호로서는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모든 배우들이 다 중요하다.

할리우드는 배우조합이 매우 잘 관리되고 있어서 엑스트라 부분도 다양한 연령대가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전문직이라서 연기가 되는 엑스트라도 꽤 많다.

류지호는 엑스트라까지도 기존 출연진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매우 꼼꼼하게 지침을 내렸다.

그런데 사람이 항상 힘을 주면 부러질 수밖에 없다.

완급 조절도 필요한 법이다.

보다 못한 프로듀서 게리 켐프가 류지호를 말렸다.


“디렉터.... 힘 좀 뺍시다.”

“지금이 힘 뺀 상태에요.”

“아무리 첫 장편이라지만, 이 프로젝트에 목숨 걸었어?”

“목숨과 영화는 여벌이 없잖아요. 영화는 한 번 찍으면 되돌릴 수 없어요. 걸작이든 졸작이든. 영원히 남습니다.”


영원히 기록에 남을 것이냐, 잊히느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 실패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알아요. 실패에서도 배울 점이 있죠.”

“디렉터는 이번 영화로 감 좀 잡고, 메타보이씨와 1억 달러 영화를 찍을 수도 있어. 부담 가질 이유가 전혀 없단 말이야.”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바로 그거야! 잘 알면서.....”

“그러다가 신나게 망쳤어요. 실전을 실전답게 할래요. 앞으로 쭈우욱!”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류지호의 눈 빛 만큼은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게리.... 나는 실패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아요. 다만 지긋지긋할 뿐입니다.”


얼마나 살아봤고, 얼마나 실패했다고 지겹단 말인가.

입을 다문 게리 켐프가 콘티에 시선을 고정하는 류지호를 바라봤다.

한편으로 자신이 경험한 성공한 감독들을 떠올려봤다.

지금 류지호의 모습이 바로 성공한 자이면서 가진 자의 습성이다.

이들은 실패를 한다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실패를 성공의 원력으로 삼을 뿐.

그렇기에 일을 하는 모습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바로 지금의 류지호처럼.

광기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작가의말

주인공이 영화감독으로 데뷔를 하게 됩니다. 영화 내용이 습작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만 디테일을 꽤 보강했습니다.

편안하고 행복한 하루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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