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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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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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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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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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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The Killing Road. (10)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The Killing Road>의 프로덕션은 총 6주로 예정되어 있다.

첫 주에는 인서트와 소스촬영, 배우가 굳이 출연하지 않아도 되는 다양한 쇼트를 찍을 예정이다.

이후 3주차까지 에인절스 캠프와 인근에서 로케이션을 마쳐야 한다.

남은 기간은 컬버시티의 소닉-콜롬비아스 스튜디오에서 세트 촬영을 진행하는 일정이다.

제작비의 대부분은 인건비다.

스튜디오 대여 비용과 미술·소품 예산도 만만치 않았다.

메인 배우가 직접 출연하는 순간, 소요경비가 대폭 상승한다.

분장, 헤어, 의상, 대역이 붙어야 하고, 대기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인 트레일러가 동원되어야 한다.

식사의 품질이 올라가는 만큼 식비까지 상승한다.

그처럼 영화제작은 모든 것이 돈과 연결되어 있다.

오죽하면 영화를 제작하다보면 길에 버리는 돈이 절반이란 말까지 있을까.

제 아무리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투자를 받아도 항상 모자란 것이 제작비다.

300만 달러.

이 시기 충무로에서는 코미디 장르영화 세 편을 제작할 규모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넉넉한 예산이 아니다.

쿠엔 태런티노는 <저수지의 개들>에서 128만 달러 예산으로 보름 간 촬영했다.

<유주얼 서스펙트>는 550만 달러의 예산으로 5주 전에 촬영을 마쳤다.

프로덕션 기간에서 시간이 곧 돈이다.

저예산 영화는 장소가 매우 한정적이다.

그래야만 예산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케이션을 더 압축할 순 없어?”


류지호는 <The Killing Road>의 로케이션을 최대 5개 장소로 압축했다.


“많이 양보했잖아요. 더는 줄일 수도 없고, 줄여서도 안 됩니다. 더는 그 문제를 꺼내지 말아요.”

“에인절스 켐프 지역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는 것만 어떻게 해 줘.”

“싫어요. 저예산이라는 것과 반드시 찍어야 하는 문제는 별개에요. 내가 비용을 줄이는 것에 충분히 타협을 한 만큼 게리도 나를 위해 수완을 발휘해주세요.”


아무리 저예산 영화라고 하더라도 쓸 때는 써야 한다.

명백히 낭비만 아니라면.

충무로에서 하는 작업이었다면 <The Killing Road>의 예산을 류지호의 손바닥 안에 놓고 완벽하게 통제할 자신이 있었다.

미국은 그것이 어렵다.

물가도 잘 모르고, 로컬룰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어차피 예산은 감독이 고민할 부분이 아니다.

주어진 예산에서 프로덕션을 운영하는 것은 전적으로 프로듀서와 제작팀의 몫이다.


“노력은 해 보겠네.”

“내 지갑에서 달러가 나올 수 있다는 기대는 접어요. 사생활적인 부분 외에는 사비를 전혀 쓰지 않을 거니까.”


절대 야박하게 구는 것이 아니다.

내 돈이 들어가는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것도 아니고.

프로들이 하는 작업이다.

내 돈 네 돈이 마구 섞이면 좋지 않다.


“게리도 프리프로덕션 기간 내내 나를 충분히 경험했잖아요. 내가 어리바리 신인감독 같아요?”

“예정에 없던 욕심만 자제해 줘.”

“단 이틀만 내가 촬영하는 걸 직접 보게 되면 내가 어떻게 작업하는지 알 수 있어요. 지켜봐요.”


예정된 일정 내에서 최선을 뽑아낼 자신은 있다.

그를 위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프리프로덕션을 매우 꼼꼼하게 준비했던 것이고.

최상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감독 혼자만의 힘으론 불가능하다.

함께 작업하는 스태프들을 믿어야 한다.

또한 그들의 능력을 최고치까지 끌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집단창작의 영화작업이다.


✻ ✻ ✻


두근두근.


류지호는 침대에 누웠다 일어났다 하기를 반복했다.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장편영화를 찍게 된다.

학생신분으로 단편영화를 찍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친다.

두려움과 긴장은 아니다.

스트레스도 아니다.

약간의 설렘과 흥분.


‘어쩌다가 충무로도 아니고, 미국에서 입봉을 하게 되었지?’


성급하게 장편입봉을 결정했나 싶기도 하고.

신중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도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지금도 과거로 돌아온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하는 류지호다.

문득 과거로 돌아온 날부터 오늘까지 오만 생각들이 떠올랐다.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일들이 많았다.

매번 행운이 따라주었던 것도 같고.

그렇다고 해서 류지호가 운에만 기대진 않았다.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들이다.

침대에 누워있으려니 잠은 안 오고 잡념만 떠다닌다.


벌떡.


류지호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호텔 객실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스으으으으읍.

후아아아아아.


류지호는 단전호흡에 몰두했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숨쉬기만큼 좋은 것이 없으니까.


❉ ✻ ❉


창백하다!


<The Killing Road>의 톤 앤 매너(Tone and Manner)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그렇다.

색감은 녹색이 섞인 푸른빛이 메인 톤이 될 것이다.

화면 전체의 채도도 떨어뜨려 건조함을 강조할 생각이다.

강렬한 명암대비를 주지 않음에도 영화 톤 자체만으로 온기 하나 없는 비정함이 느껴지도록.

색도 빛바랜 듯, 질감도 투박한 듯.


광활하다!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정말 넓고 길다.


“마음에 들어?”


롭 리차드슨이 류지호에게 파나비전의 뷰파인더를 양보했다.

류지호는 독일제 ARiCH535가 더 친숙했다.

그럼에도 미국제 파나플렉스(Panaflex)를 쓰기로 했다.

시네마스코프를 구현해줄 아나몰픽 렌즈를 주력 제품으로 삼고 있으니까.

류지호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제작하는 동안은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하고.


“좋네요. 마음에 들어요.”


첫 날은 인서트와 소스촬영 위주로 촬영했다.

때문에 따로 현장 모니터를 연결하지 않았다.

극단적인 롱 쇼트(Long shot).

좌우로 넓은 시네마스코프 화면 하단에 지평선이 손톱 크기만큼 걸려있다.

나머지 95% 화면은 하늘 그리고 구름이다.

화면 하단 지평선에는 전봇대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드문드문 서있다.

그리고 콩알만큼 작아 보이는 자동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달려간다.

정말 운이 좋았다.

CG를 따로 입힐 필요가 없다.

하늘에 그림같이 구름이 몽글몽글 피어있다.


“포스트 프로덕션에서 흰색 뭉게구름을 먹구름으로 바꿀 거야?”

“그 부분은 고민할 필요가 있겠네요. 원판이 너무 좋아서.”


하늘을 채우고 있는 구름의 두께가 가까운 곳과 먼 곳 그리고 오른쪽과 왼쪽이 모두 달랐다.

그 불규칙성이 먹구름 못지않은 불길함을 선사하는 것 같았다.

리차드슨이 호언장담했다.


“대형 스크린에서 보면 볼만할 거야.”


류지호도 격하게 동의했다.

스펙터클한 영상과 함께 묘한 정서를 불러일으킬 것 같았다.

벤 사이퍼라는 불길한 악마가 지상 세계에 강림한 것 같이.

후반작업에서 색보정을 하고, 밝기를 조금만 어둡게 눌러주면 더욱 좋아질 터.


‘좀 오버했나....?’


류지호가 과장할 만큼 자연 그대로의 풍광이 굉장했다.

그것을 화면에 담아낸 롭 리차드슨의 촬영도 만족스럽고.


“서두릅시다!”


첫날은 벤 사이퍼가 시골마을 ‘호프(Hope)'를 향해 자동차로 이동하는 장면들 위주로 찍었다.

벤의 대역은 카 체이싱 전문가 데니스 풀만(Dennis Poolman)이 맡았다.

할리우드 톱클래스 카 스턴트맨이다.

닭 잡는데 소 잡는 칼 쓰는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장면은 Stand-In(대역 배우)이 하면 된다.

그런데 굳이 본인이 하겠다고 자원했다.

류지호로서는 말릴 이유가 없다.

대역배우보다 차량의 속도, 카메라와의 타이밍을 더 잘 맞출 테니까.

해리슨 노튼이 직접 출연해서 운전하는 차량 내부 장면은 사운드스테이지에서 스크린프로세스 기법으로 촬영될 예정이다.

스크린프로세스(screen process)는 영화초창기부터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아날로그 합성기법이다.

어떤 장면의 배경을 미리 찍어서 영사막에서 투사하고 그것을 배경으로 해서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을 촬영하는 방식이다.

주로 달리는 자동차 실내를 찍을 때 많이 쓰인다.


“셰리프 밴으로 바꿔서 찍읍시다.”


소품팀이 준비한 셰리프(Sheriff) 마크가 찍힌 보안관 밴(Van)이 등장했다.

이틀 동안 에인절스 캠프 주변을 돌아다녔다.

다양한 풍경과 달리는 자동차를 종류별로 몰아서 촬영했다.

셋째 날에는 에인절스 캠프 메인 도로를 중심으로 촬영했다.

오랜만에 할리우드 영화팀이 방문한 것이라서 많은 주민들이 관심을 보였다.

풍광만 찍지는 않았다.

틈틈이 인서트 소스촬영도 진행했다.


성조기.


미국영화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반드시 영화에 성조기를 등장시켜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미국영화에 성조기를 등장시킨다.

할리우드는 성조기의 이미지를 이용해 미국의 지배에 의해 세계 평화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팍스 아메라카(Pax Americana)를 전 세계 관객들의 머릿속에 부지불식간에 주입시키고 있다.

블록버스터에는 예외 없이 등장하는 것이 이 성조기를 이용한 이미지 조작이다.

할리우드 영화사가 빼고 싶어도 반드시 넣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야 미국의 군대, FBI, 정보기관으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조기조차 영화에 등장하지 않으면 그들은 절대 지원하지 않을 테니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미군과 CIA등의 협조 없이는 제작하기 정말 힘들다.

류지호는 이 같은 할리우드 영화 클리셰인 성조기를 약간 비꼬는 방식으로 사용할 생각이다.

영화 속에서 벤 사이퍼가 호프타운을 방문하기 전까지 보안관 사무실 현관 앞에 걸려있는 성조기는 힘차게 바람에 펄럭인다.

첫 등장 단 한 번만.

이후 성조기가 등장할 때마다 물 먹은 솜처럼 성조기는 축 늘어져 있다.

심지어 바람이 부는 날에도 성조기는 그 힘을 잃고 늘어져 있도록 할 계획이다.

일부러 성조기를 강조해 보여주는 것도 단 한 번뿐이다.

그 외에는 인물들이 들어가고 나갈 때 배경에 잠깐 보이게 된다.

영화를 한 번 볼 때는 의도를 알아차릴 수 없다.

한국인이 웬 미국 찬양이냐고 욕을 먹지 않으면 다행.

감독이 영화 곳곳에 많은 상징과 장치를 해놨다고 믿었을 때, 그런 눈으로 성조기가 등장하는 걸 보게 되면 분명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비평가들이나 좋아할 만한 장치지.’


대부분의 관객은 이런 장치들은 주목하지 않는다.

연쇄살인마가 죽을 자리라고 할 만한 보안관 사무실에 들어가 어떤 사건이 벌어지게 될지 궁금할 뿐.

성조기가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든, 비에 젖은 강아지 귀처럼 축 늘어지든.

그 상징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성조기를 이루는 대표적인 색상인 푸른색과 붉은색.

푸른색의 차가움.

피를 떠올리게 하는 빨강.

<파리, 텍사스>처럼 푸른색과 붉은색을 영화 전편에 걸쳐 의미심장하게 사용하지는 않지만, <The Killing Road>의 두 가지 색은 중요한 상징 색이다.


“모두 수고했어요. 다음 주에 봅시다.”


소규모 팀만으로 닷새 간 사전 촬영을 마치고 LA로 복귀했다.

류지호는 웨스트우드로 돌아왔지만, 마냥 쉴 수만은 없었다.

소닉-콜롬비아스 스튜디오를 방문해 세트제작을 점검하고, Hues & Rhythm Studios에서 CG 관련 회의를 했다.

영화는 감독이 게으른 만큼 평범하게 결과가 나오고, 부지런한 만큼 비범하게 나온다.

류지호는 휴식일에도 열심히 일을 했다.

독립영화니까 가능한 것이다.

트라이-스텔라 투자배급 영화였다면 휴식일에 일을 하면 안 된다.

당장 감독조합으로부터 경고를 받게 되니까.


❉ ❉ ❉


배우는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본능적인 혹은 감각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

분석과 촘촘한 계산으로 연기하는 기술적인 배우.

굳이 나누자면 그렇다는 거다.

연기법과 상관없는 구분이다.

배우의 스타일 또는 성향에 따라 그렇게 볼 수 있다.

기본기가 충실한 배우는 연기 기술이 뛰어나다.

기술적인 배우는 큰 기복이 없다.

따라서 꾸준한 연기를 선보인다.

꾸준하고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야 하는 텔레비전 배우들이 대체로 이에 해당한다.

반면에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배우는 몰입 능력이 뛰어난 대신 연기의 기복이 클 수밖에 없다.

폭발적인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이 이에 해당한다.


[나 돌아갈래!]


유명한 절규 연기다.

연기력과 스타성을 함께 뽐내게 되는 한국의 모 배우는 초창기에는 대표적인 감각파 배우였다.

그는 시나리오를 디테일하게 분석하고 연구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촬영현장에 가기 전까지 가능하면 시나리오나 콘티를 보지 않았고, 최초 시나리오를 읽고 느낀 캐릭터의 성향과 느낌만 간직한 채 카메라 앞에서 계산되지 않은 연기를 펼치는 것을 선호했다.

그의 초창기 영화는 전편에 걸쳐 힘이 바짝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인다.

긴장, 이완, 폭발의 리듬이 단조로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때그때 본능에 따라 연기를 펼치다 보니 기복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필모그래피가 쌓이면서 연기법이 성숙해져서 단점을 보완했지만.

기술적이든, 감각적이든.

이 모두를 갖춘 메소드 연기의 대가라면 배우로서 완전체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둘은 섞이기 쉽지 않다.

본능적이고 감각적이란 것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배우가 에너지를 폭발시킬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감독이 이를 드라마와 합일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때때로 본능적으로 연기하는 배우를 연출이 제대로 다루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캐릭터는 매력적인데 드라마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좋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캐릭터만 도드라지고, 극 전반이 평범한 영화로 전락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진다.

반대로 평범한 드라마 속에서 배우가 감각적인 연기를 선보임으로 해서 극의 긴장감과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연기력이 증명된 대배우가 아닌 이상, 감각적인 배우보다는 기복 없이 꾸준한 기술적인 배우를 선호하게 마련이다.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감독에겐 상관없는 이야기다.

자신의 영화를 완벽하게 통제할 능력이 있으니까.

<The Killing Road>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대체로 사전에 꼼꼼하게 준비하고, 계산된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이다.

류지호가 그런 배우 위주로 캐스팅했다.

첫 영화부터 쓸데없이 기싸움을 벌이고 연기 성향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 싫어서.

그런데....


“컷! 다시!”


류지호는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사인을 냈다.

로즈 맥로한은 리허설의 연기가 다르고, 첫 테이크가 다르고, 두 번째 테이크가 또 달랐다.

그때그때 연기가 달랐다.

연기력이 부족하진 않다.

장면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제대로 몰입하지 못한 리허설에서는 심심했고, 몰입에 살짝 빠진 첫 테이크는 어중간했다.

세 번째 테이크는 완벽하게 몰입한 것처럼 연기했다.

오히려 몰입을 하지 못했을 때보다 나빴다.

과했기 때문이다.

로즈 맥로한은 감각적인 배우에 가까웠다.

문제는 몰입상태에서 연기 부분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죠앤은 지금 에일리언 괴물에게 쫒기는 게 아니야.”

“.....?”

“살인사건을 목격한 것뿐이야. 죠앤은 아직 벤 사이퍼란 남자에게 어떠한 위협이나 공격을 받은 적이 없어.”

“그래도 벤은 살인마잖아요?”

“로즈는 지금 영화를 한참 앞서가고 있어. 두려움을 표현하는 건 좋아. 너무 호들갑스럽지는 말아줘.”

“이해했어요.”

“진짜?”

“저는 우유가 가득 담긴 컵을 사정없이 흔들어 댄 거죠? 그래서 흘러넘친 것이고요.”


류지호 역시 로즈의 방식으로 설명했다.


“맞아. 우유를 조금 덜어내야 해. 우유 컵을 들고 달려도 마구 흘러넘치지 않도록.”

“조금 흘러넘치는 건 상관없어요?”


류지호가 엄지와 검지로 틈을 만들어 덜어낼 양을 보여줬다.


“컵에서 요 만큼만 덜어냈다고 생각해봐.”

“알겠어요.”


매번 알았다고 잘도 대답하는 로즈 맥로한이다.

막상 카메라가 돌아가면 무엇을 이해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문제다.


“레디!”


콜사인이 바쁘게 오가고.


“액션!”


텅.


죠앤이 건물에서 허둥대며 뛰쳐나온다.

얼굴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로 두려움에 질려 있다.

카메라를 향해 달려오던 로즈가 화면 오른쪽으로 사라진다.

잠시 사이를 두고.

죠앤이 뛰쳐나온 건물에서 벤 사이퍼가 모습을 드러낸다.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기던 벤이 그 자리에 멈춘다.


[......!]


벤은 갈등한다.

자신의 범죄행각을 보게 된 여자를 쫒아가 죽여 버릴지, 범행현장을 정리해야 할지.

고민은 짧았다.

미련 없이 다시 범행현장으로 되돌아간다.


“컷!”


류지호는 열 번째 테이크에서 OK 사인을 냈다.

로즈 맥로한의 잡스런 연기를 테이크가 계속될수록 하나하나 빼는 수고를 했다.

류지호는 단편영화 시절부터 좀처럼 다섯 테이크를 넘기는 법이 없었다.

로즈 맥로한은 여러 테이크를 찍어야 힘을 빼고 과잉된 감정을 덜어낼 수 있었다.

감독의 손을 많이 타는 스타일의 배우다.

반면에 해리슨 노튼은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류지호와 합의를 본 내용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연기로 구현해냈다.

류지호가 딱히 바로잡을 흠이 크게 없었다.


“디렉터. 스케줄에서 한 셋업 밀렸어.”


조감독 터커 레이튼이 류지호를 압박했다.

한 개 셋업이 밀렸다는 것은 최소 3~4 커트를 예정된 스케줄에서 소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명이 복잡하지 않은 로케이션 촬영에서 최소 30분, 최대 1시간이 밀렸다는 뜻이다.


“점심 식사 후에 그 밀린 것부터 해결할게.”


미국의 영화 제작 시스템을 한마디로 요약 한다면 ‘효율 적인 시간 관리를 위한 철저한 분업화‘ 라고 할 수 있다.

하루의 촬영시간은 10~12시간이다.

촬영이 끝난 후 그 다음 촬영 시작까지 12시간의 쉬는 시간을 필수적으로 보장해줘야 한다.

일요일은 무조건 쉬는 스케줄이다.

보통은 일주일에 이틀을 쉬는 스케줄로 진행한다.

독립영화조차 일요일은 무조건 쉰다.

암튼 하루 촬영에서 12시간이 넘어 가면 장기적인 촬영 스케줄에 무리가 오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 안에 계획된 쇼트들을 찍어내는 것이 가장 필수적이다.

감독은 주어진 시간 안에 얼마나 훌륭한 연기를 배우들에게서 끌어내느냐에 집중을 하게 된다.

촬영감독인 DP(director of Photography)는 주어진 시간 안에서 조명과 카메라의 위치 설정, 움직임 등 영화의 영상적인 부분을 관리를 한다.

DP는 촬영현장에서 모든 기술 스태프의 우두머리 역할이다.

촬영, 조명팀은 말할 것 없고 녹음 등의 모든 인력을 통솔하는 역할을 한다.

책임과 권한의 소재가 분명하게 주어진 것은 영화를 효율적으로 빨리 찍기 위해서다.

할리우드 촬영감독(DP)은 배우와 관련 되지 않은 영화의 진행속도에 책임을 지고, 감독은 배우와 관련된 영화의 진행속도에 책임을 진다.

촬영현장에서 그 같은 스케줄을 조절·관리 하는 역할은 제 1조감독이 한다.

한국영화에서처럼 감독을 보조 하는 직책이 아니다.

모든 일들이 스케줄에 맞추어져 돌아가게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터커 레이튼이 류지호를 채근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로 제작파트의 프로덕션 매니저는 제 1조감독의 창작적인 조율 외에 배우 콜, 장소 이동, 식사 등의 진행을 책임진다.


“디렉터.....”

“응?”

“혹시.... 날 미워해요?”

“아니.”

“내 연기가 그렇게 형편없어요?”

“아니.”

“근데 왜 내게만 디렉션이 많아요?”

“그건 로즈가 본능적으로 연기를 하기 때문이야.”

“.....”

“로즈는 캐릭터에 몰입하면 완전히 이성이 날아가 버려. 그렇지?”

“때에 따라서는 그래요.”

“로즈는 한 씬을 놓고 연기하지만, 감독인 나는 짧게는 그 씬이 포함된 시퀀스, 더 나아가 영화 전체를 함께 놓고 촬영을 해야 하잖아. 로즈의 연기는 아주 좋았어. 하지만 나중에 스테이지에서 해리와 로즈가 마주치면 재미가 없어질 거야. 왜? 그 전에 로즈는 많은 걸 보여줘서 막상 중요한 씬에서 시시해질 거거든.”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영화에서 악당이 주인공을 죽이려고 할 때 왜 하필 죽이는 바로 그 순간에 공이치기를 당기는 줄 알아? 미리 당겨놓고 겨누지 않고 말이야.”

“그건 벤이 죠앤에게 하는 대사.....”

“그 소리가 무섭기 때문이야.”


긴장감, 위기감을 느낄 때는 주로 과정 속에 있다.

실제 총을 쏘거나, 살인하는 장면에서는 그런 감정들이 해소가 된다.

악당들이 주인공을 위협할 때 공이치기를 ‘철컥‘ 당기는 클리셰를 영화에서 주구장창 쓰는 이유가 그런 점 때문이다.

반대로 주인공은 전투의지를 더욱 공고히 하는 의미에서 공이치기를 당긴다.

그럼으로써 앞으로 벌어지게 될 싸움의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이 별 것 아닌 클리셰도 서부극 시절부터 고안된 것이다.

로즈 맥로한은 대부분의 쇼트에서 두려움, 공포, 당황이란 감정을 다음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중간에서 모두 쏟아내 버렸다.

그러니 보는 사람은 맥이 풀린다.

극한 감정을 씬이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폭발해버린다.

폭발할 듯 말 듯 끌고 가야 하는데, 일찍 터트려서 긴장감이 해소되어 버린다.

반면에 계산된 연기를 펼친 해리슨 노튼은 그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시종일관 유지했다.

배우는 때로 연기를 통해 관객과 밀당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을 감독이 연출을 통해 극대화 시키는 것이고.

류지호는 속을 알 수 없는 해리슨 노튼의 얼굴에 사운드를 얹을 계획이다.

화면 밖 어딘가에서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리게 된다.

개 짖는 소리는 벤이 죠앤을 쫒아가는 대신 서둘러 시체를 처리하거나 범행도구 등을 챙기도록 압박한다.

죠앤 측면에서 보면, 짖는 개처럼 살인마가 사납게 뒤를 쫓아갈 것이란 것을 암시한다.

그렇게 씬이 완결되어도 여전히 긴장감은 유지된다.


“무엇을 말하는지 알겠어요.”

“그럼 됐어.”


로즈 맥로한은 직설적이고 다소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소위 골이 빈 배우는 아니다.

그녀가 연기하는 죠앤은 조단연급으로 노출빈도가 매우 적다.

그녀 입장에서 나올 때마다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싶을 수밖에 없다.

단역배우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딜레마다.

튀어야 살아남는다는.

류지호는 조단역을 수없이 많이 경험했다.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모를 수가 없다.


“수고했어, 로즈.”

“디렉터도요.”


<The Killing Road> 본격적인 촬영의 첫 시작을 알린 로즈 맥로한은 하루 꼬박 자신의 출연분량을 소화했다.


작가의말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습니다. 즐겁고 행복한 한 주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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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난 꿈꾸는 사람을 좋아해. (2) +5 22.09.06 4,951 147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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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전문가의 손을 타야 좋아져. +13 22.09.03 5,121 163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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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 도전은 좋은 겁니다. (1) +12 22.09.01 5,129 155 23쪽
264 그건 당신들 착각이고....! +9 22.08.31 5,055 171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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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다들 수고가 많다....? (1) +5 22.08.29 5,105 158 23쪽
261 누가 자네를 말릴 수 있겠어. +8 22.08.27 5,177 168 26쪽
260 The Killing Road. (14) +12 22.08.26 5,002 170 29쪽
259 The Killing Road. (13) +5 22.08.25 4,789 160 25쪽
258 The Killing Road. (12) +7 22.08.24 4,817 161 26쪽
257 The Killing Road. (11) +4 22.08.23 4,886 154 26쪽
» The Killing Road. (10) +9 22.08.22 4,892 148 23쪽
255 The Killing Road. (9) +6 22.08.20 5,006 152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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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The Killing Road. (6) +7 22.08.17 5,118 162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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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The Killing Road. (4) +5 22.08.15 5,161 163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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