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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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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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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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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8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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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The Killing Road. (7)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이른 점심식사를 마친 두 가족이 행사장으로 향했다.

보안요원들로부터 철저한 신분확인 절차를 거친 후에 입장할 수 있었다.

류지호의 가족은 첫 방문이다.

호기심에 들 떠 링컨기념관과 주변 기념조형물을 구경했다.


“저것이 이번에 만든 거니?”

“예.”


한국의 논과 농수로를 연상시키는 풀밭에 19개의 판초우의 차림의 동상이 서 있다.

그 뒤로 50m의 화강암 석벽이 세워져 있다.

화강암 벽면에는 참전용사의 얼굴이 부조로 새겨졌다.

맞은편 화강암 보도경계석에는 한국전 참전 22개국 이름이 알파벳순으로 조각되어 있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을 지키려는 요청에 응한 전쟁에 참가한 미국의 아들과 딸들을 위해.]


19명 맨 앞 병사의 앞면 바닥에 새겨져 있는 문구다.


“만드는데 얼마나 걸렸대?”

“공사는 3년 걸렸고, 미재향군인회가 미정부에 요청한 것이 86년이었으니까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기념사업위원회가 설치되고 재원마련하고.... 대략 10년 정도 걸렸다고 들었어요.”

“네가 300만 달러 기부했다고?”

“예.”


류지호 가족은 석벽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아쉽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한미 양국 대통령이 입장할 통로와 가까워서 미군악대가 도열해 있었기 때문이다.


“빌!”

“하하. 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알루미늄 팔 목발을 이용해 씩씩하게 걸어왔다.

한국전 미군참전용사 기념재단 회장 데인 웨버다.

한국전쟁에서 중공군과의 전투 때 적군이 던진 수류탄에 오른쪽 팔과 오른쪽 다리를 잃었지만, 좀처럼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강단이 있었다.


척.


류지호가 데인 웨버에게 거수경례를 올렸다.

데인 웨버가 인사를 받아줬다.


“오랜만이다. 럭키 보이.”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이리 와봐라.”


류지호가 가까이 다가서자 데인 웨버가 어깨를 토닥거렸다.

친근함에 표시이다.


“저기로 가보자.”


류지호가 데인 웨버와 함께 참전용사 노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여기 이 친구는 어니 코우마야.”

“단결! 안녕하세요. 지호 류입니다.”

“어니라고 부르게.”

“어니는 한국전 참전용사 중에서 전차병으로는 유일하게 의회 명예훈장을 받았어.”

“아, 그러셨군요.”


류지호는 한동안 한국전참전용사 노인들에게 붙잡혀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뜻밖의 무용담을 들을 수 있었다.


‘이거 완전 <퓨리> 실사판이잖아?’


어니 코우마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한국전쟁 당시 탱크 한 대로 낙동강 전선을 사수한 전공을 세웠다.

북한군 500명 대 탱크 한 대의 9시간의 사투.

한창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질 때 칠곡군 왜관읍 아곡리에서 벌어진 전설적인 무용담이다.


‘명색이 ’메달 오브 아너’를 받은 분인데 거짓말을 하진 않았겠지?’


메달 오브 아너(Medal of Honor).

참전군인 중에서 미정부가 수여할 수 있는 미국 최고의 훈장이자 최고 명예다.

미국 국방부가 미국 의회의 이름으로 수여하기 때문에 '미국 의회 명예 훈장'이라고도 부르는데, 오직 군인에게만 수여된다.

이 메달 혹은 훈장의 혜택은 어마어마하다.

무엇보다 이 훈장 수여자의 경우 계급과 상관없이 대통령, 총리, 상원의원, 장군이 먼저 수여자에게 거수경례를 하도록 하고 있다.

대단한 명예와 대접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훈장은 미국 연방정부 아래 보호를 받는다.


빰빠밤~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쪽 광장에 새로 조성된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

무더위 속에서 참전비 제막식이 엄숙히 거행됐다.

참전용사 및 가족, 일반인 등 2만여 명이 참석해 있다.

근래 들어 보기 드문 규모의 행사다.

이 행사에는 한국의 3군 의장대와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한국육군취타대가 함께 참여했다.

행사는 방미 중인 한국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이 기념공원에 나란히 입장해 공원을 시찰하는 것으로 막이 올랐다.

두 국가 대통령이 기념조형물 맨 앞의 동상에서 기념촬영을 한 후 본격적인 식순에 들어갔다.

국가 연주와 기념연설이 끝나고, 미공군기가 축하비행을 하기도 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미군악대는 ‘아리랑’과 ‘그리운 금강산’ 등 한국 민요와 가곡을 연주해 분위기를 돋웠다.

현 대통령의 태권도 선생으로 알려진 재미동포 이준의 제자들로 구성된 태권도단원 100여 명이 양국 국기를 손에 들고 애국가와 미국국가에 맞춰 태권댄스를 선보였다.

국가급 규모의 행사여서인지 여러모로 신경을 쓴 태가 역력했다.


“빌 블라이드가 백악관으로 초청했다며?”

“이준 사범하고 서부의 태권도인 몇 분을 함께 초청한 모양이더라고요. 저는 영화를 찍어야 해서 참석 못 할 것 같아요.”


류지호는 겨우 태권도 3단일뿐이다.

그런데 미국 영화산업 및 서부지역의 청년 리더다.

중간선거까지는 꽤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대통령은 한국계 커뮤니티의 리더들에게 점수를 따둘 필요가 있다.

암튼 고등학교 때 월미도 해군기지 행사에 참석한 것과 비교해 류지호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다.

한국에서 대통령과 함께 온 취재단의 카메라가 류지호에게서 떨어질 줄 모를 정도로.


“할아버지, 물 좀 드세요.”


30도가 넘어가는 무더위 속에서 진행되는 행사다.

혹시나 윌리엄 파커가 탈진하지 않을까 류지호는 전전긍긍했다.

우려했던 대로 고령의 참전용사 몇몇은 더위를 먹고 쓰러졌다.

대기하고 있던 구급대의 들것에 실려 후송되기도 했다.


“안 되겠어요. 할아버지 그늘로 가요.”

“여기 그늘이 어디 있어?”

“일단 저쪽 나무 그늘에라도 가요.”


류지호는 몇몇 노인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더위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노인 몇 명을 나무 그늘로 데리고 갔다.

잠시 소란이 있었다.

류지호는 참전용사 노인의 가족들을 설득했다.

기념식 단상 맨 앞 쪽에서 앉는 것은 분명 명예로운 일이다.

하지만 한국전참전용사들은 모두 고령이다.

날씨라도 선선했다면 모를까.

섭씨 35도에 이르는 무더위 속에 앉아 있는 것은 노인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천막을 칠 수도 없고.

그늘로 인도한 노인 중에 어니 코우마도 끼어 있다.


“행사도 지루한데, 낙동강 전투 이야기 좀 해주세요.”


1950년 8월 31일.

낙동강 전선에서 아주 극적인 상황이 펼쳐졌다.

마치 영화 <퓨리>처럼.

당시에 낙동강 방어거점은 단 두 대의 M26 퍼싱 전차가 지키고 있었다.

그곳으로 500명이 넘는 북한군 보병이 돌격해 들어왔다.

설상가상으로 전차 한 대는 고장으로 못 쓰게 됐다.

심지어 미군 보병들까지도 철수해버렸다.

전장에는 어니 코우마 상사(이때는 중사)가 지휘하는 단 한 대의 퍼싱 전차만이 남아 무려 아홉 시간 동안 북한군에게 포를 쏘고, 기관총을 난사하며 분투했다.

심지어 전차포를 돌려 전차위로 올라온 북한군 병사들을 밀쳐내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벌어졌다.

전투가 끝난 후 다시 미군 보병이 돌아왔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무려 250여구의 북한군 시체들이었다.

그 전투로 코우마는 중상을 입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전차병으로는 처음으로 의회 명예훈장을 받았다.

한 계급 특진과 함께.

영화 <퓨리>가 이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유사한 사례는 전쟁사에서 여러 차례 있었으니까.


‘이 무용담을 영화로 만든다면 전형적인 미국만세가 되겠지?’


류지호는 카투사 복무를 하며 한국전쟁 당시 7,000여 명의 카투사가 전사했다고 배웠다.

카투사는 전쟁이 발발한 지 채 두 달이 안 된 시점에 창설되었다.

당시 대통령과 유엔군 사령관은 국군 병력 일부를 미군에 배속시키기로 합의했다.

미군은 병력이 모자랐고, 국군은 전투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윌리엄 파커가 참가했던 인천상륙작전 등 치열한 전투마다 카투사들이 선봉에 섰다.

카투사라 이름 붙여진 병사 4만여 명 가운데 무려 7천 명 넘는 카투사 병사가 여러 치열한 전투 중에 목숨을 잃었다.

실제 한국전쟁 당시에 카투사들과 작전을 함께 한 윌리엄 파커다.


"미군의 척후병 역할을 많이 했어. 왜냐면 한국 지리에 밝았으니까. 맨 앞 전선에 나서야 했기 때문에 전사자들도 많았지."


전사자 카투사 유해 일부는 미군 유해와 함께 미국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격전이 벌어졌던 함경남도 '장진호 전투'에서 숨진 한 카투사 병사의 유해가 수십 년이 지나서야 고향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15년 후에나 벌어질 일이다.

류지호는 슬그머니 호기심이 들었다.


‘카투사 주인공의 전쟁영화를 만들면, 카투사 만세라는 관객들의 빈정거림을 들을까?’


언젠가 한국에서 전쟁영화를 제작하거나 연출하게 될지도 모른다.

카투사 만세가 되었든, 국군 만세가 되었든.

그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전쟁영화 장르는 제작 인프라가 받쳐주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 JHO Pictures와 E.T Entertainment와 공동제작할 예정인 <라이언 일병 구하기>, JHO·TSTV·DreamFctoryTV의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최대한 노하우를 배워야 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몰라도, <밴드 오브 브라더스> 판권은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보고 배워야해.’


제막식 내내 여러 아이디어들이 류지호의 머릿속에서 폭죽 터지듯 터졌다.

두 여동생이 제안한 참전용사 후손들을 위한 프로그램.

한국이 주도하는 전 세계 청소년들의 평화캠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전쟁영화.

그를 위해 한국영화판의 인프라 확충.

할리우드 전쟁영화 노하우를 전파하는 방법.

사실 이런 고민들은 남 좋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류지호 본인을 위한 것들이다.

한국에서 영화를 편하게 작업하려면 시스템과 인프라가 받쳐줘야 하니까.


“거금을 기부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한국인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이 류지호에게 사의를 표했다.

류지호는 시종일관 담담했다.

그 모습이 건방지게 보인 모양이다.

황송해하기라도 해주길 바랐던 걸까.

대통령을 수행했던 수행원 몇 명이 못마땅한 태를 노골적으로 표했다.


“관료들에게 인기가 없구나?”


캐서린이 은근슬쩍 류지호를 놀렸다.


“반환점을 돈 정권이고... 단기성 해외투자자금에 대한 관리대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했다가 제가 미운털이 좀 박혔어요.”


이날 미국의 방송들은 한국전 참전 기념비 제막식을 생중계했다.

이어서 하루 종일 한국전 관련 행사를 톱뉴스로 다뤘다.

기념식이 끝이 아니다.

류지호는 여러 뒤풀이 행사를 돌아야만 했다.

파커가문은 워낙 대단한 가문이고, 제임스 부부 역시 마당발이다.

부부가 참석한 파티에 류지호를 데리고 다녔다.

류지호의 네트워크도 상당히 넓어진 상태다.

워싱턴에는 네트워크가 없었지만.

암튼 파티만 쫓아다닐 수만은 없었다.


“아무래도 이만 가보는 게 좋겠어요.”


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뉴욕을 떠난다고 하니 심영숙이 물었다.


“어딜 간다는 거니?”

“LA로요.”


심영숙이 류지호의 손을 얼른 잡았다


“아들, 이렇게 갑자기 가는 게 어디 있어?”

“애초에 뉴욕에 온 목적은 제막식 참석이었으니까요. 이제 돌아가서 제 본업에 충실해야죠.”


지금은 뉴욕 시간으로 오전 9시다.

동부와 서부의 시차가 3시간.

중요한 것은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사실.

곧 <The Killing Road> 촬영이 시작된다.

아무리 프로듀서와 조감독이 전반적인 부분을 잘 관리한다고 해도, 감독이 오랜 시간 손을 놓고 있어선 안 되는 법이다.

이번 동부 방문으로 목요일부터 4일을 까먹었다.

더 이상 자리를 비울 수만 없었다.


“동생들이 심통 부리기 전에 빨리 가봐야겠네요.”


심영숙은 더 이상 류지호를 붙잡지 않았다.

그럴수록 아쉬움만 더 커질 걸 알기 때문에.


“갈 거면 어서 가봐.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해서 쉬어야 일을 하지.”

“가을에 잠시 한국에 들어갈 거예요. 그때 한국에서 뵈어요.”


작별 인사를 건넨 류지호를 심영숙이 끌어안았다.

심영숙이 류지호를 놓아주자, 이번에는 류민상이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건강도 잘 챙기면서 해라.”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잖아요.”

“그러다가 골병드는 거야. 이 아빠 보면 모르겠냐?”

“골병 안 들게 잘할게요.”


류민상이 아들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류지호는 윌리엄에게 인사하고, 제임스 부부와도 작별인사를 나눴다.

류지호가 저택을 빠져나오자, 도널드 제이콥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다.


“어르신이 리무진을 내주셨습니다.”

“빨리 가요. 동생들과 마주치면 쉽게 못 빠져나가요.”


저택의 문이 열리고 류지호를 태운 리무진이 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Don, 내가 수염을 기르면 어떨 것 같아요?”

“잘 보여야 할 여성이 생겼습니까?”

“내 사생활을 다 알면서 그런 말을 해요?”

“왜 기르려고 합니까?”

“곧 영화를 찍잖아요. 좀 강인하게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해서.”


UCLA 심리학 연구 과제 중에 남성이 수염을 기르는 이유에 대한 것이 있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여성에게 남성의 수염 유무와 매력도는 연관이 없단다.

반면에 실험참가자들에게 수염을 기른 남성 얼굴을 보여준 뒤 인상에 대해 조사했는데, 남성이 턱이나 콧수염을 기르는 이유는 단순히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닌 남성의 강인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임이 밝혀졌다.

류지호는 별 걸 다 연구한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메이저리거, 대중문화 스타 등 많은 사람들이 수염을 기른다.

연구진은 수염을 기르는 것은 남성성을 강조해 다른 남성에게 더욱 강해보이도록 하는 유전적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인종에 비해 어려보이는 데다가, 순하게 보이면 스태프 컨트롤하는데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해서....”


할리우드 사람들은 충무로보다 더 수컷냄새를 풍기는데 열중하는 것 같았다.

마초에 대한 강박이라도 있는 것처럼.


“수염을 길러도 인상이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수염도 풍성하게 나진 않아요.”

“보스가 태권도 고수인 걸 모르는 스태프는 없습니다.”

“그럼 머리를 밀어볼까.....?”


별 걸 다 고민하는 류지호다.

첫인상에서 얕보여서 좋을 건 없었다.

특히나 충무로가 아닌 할리우드라면 더더욱.


❉ ❉ ❉


동부에 다녀온 후부터 류지호는 전보다 더 지독하게 콘티작업에 매달렸다.

아마 이 모습을 충무로에서 활동하는 몇몇 감독들이 보게 된다면.

할리우드를 꿈꾸는 감독이 어떤 식으로 영화를 준비해야 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뭘 잘 모르는 사람들이 흔히 날라리처럼 보이는 할리우드 감독이 파티나 다니고, 인맥 쌓기와 정치질에만 매달릴 것으로 생각한다.

실제 날라리 감독들 역시 남몰래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프로듀서들이 일을 맡기지 않는다.

결국 영화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철저하게 실적으로 평가받는 분야가 영화업계니까.


“오늘도 외출을 안 하십니까?”


도널드 제이콥의 걱정스런 물음에 류지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네.”


스토리보드 작업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며칠 째 지하작업실에 틀어박혔다.

비서들은 그런 류지호를 걱정했다.

도를 닦는 수도승?

아니다.

차라리 광인에 가까웠다.

미쳐도 한참은 미쳐야 저렇듯 일에 몰두할 듯싶다.

간혹 류지호가 사무실에 출근할 때 비서들도 덩달아 숨소리를 내지 못했다.

혹시나 보스의 집중을 깨뜨릴까 싶어서다.


‘진짜 미칠 순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미칠 정도로 해야지. 난 천재가 아니니까.’


좋아하는 일과 잘할 수 있는 일은 다르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 류지호다.

때문에 다른 감독들이 하는 것처럼 불현 듯 떠오르는 직관에 의존할 수 없다.

더욱 촘촘하고, 더더욱 성실하게, 불확실성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사전준비가 필요했다.

류지호는 동 세대의 젊은 감독보다 조금 앞서 있다.

그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전 삶부터 이어진 수많은 경험으로 인해 자신의 아이디어가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낼지 예측할 수 있고, 아이디어를 구체화 시킬 수 있는 실무능력이 있다.

마침내 준비한 능력을 드러낼 시점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해도 냉정하게 말해서 류지호는 할리우드에서 300만 달러 예산을 다룰 수 있는 정도의 영화감독일 뿐이다.

영화의 예산.

감독의 계약금.

할리우드에서 돈은 상징이다.

그의 가치를 평가하는 절대 기준이다.

5만 달러짜리 영화로 단숨에 5,000만 달러 예산 영화의 연출을 맡는 경우가 없진 않다.

저예산 영화를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상업영화로 만들 때뿐이다.

<엘 마리아치>의 로드리게즈 감독의 경우가 그렇다.

B급 영화로 대박을 친 감독에게 메이저 스튜디오가 단번에 대작영화를 맡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면에서 <반지의 제왕>의 로비 잭슨이 대단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그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엄청난 좌절과 준비과정이 있었다.

일정 부분 행운도 따랐다.

그가 작년까지 <킹콩>의 리메이크를 준비하다가 모든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거절당해 뉴질랜드로 돌아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류지호가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유니벌스와 3,000만 달러짜리 코믹 호러 영화를 찍기로 계약했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스튜디오는 로비 잭슨에게 <천상의 피조물>이 아니라 <데드 얼라이브>를 기대하며 투자와 제작을 맡겼다.

오직 이 세상에서 류지호만이 로비 잭슨의 집요하고 처절한 집념을 알고 있다.

그의 앞에는 결코 즐겁지 않은 시간들이 남아있다.

적어도 하비 웨인스타인과 함께 톨킨의 저 유명한 판타지소설의 실사화 프로젝트를 가지고 트라이-스텔라의 문을 두드리기 전까지는.

할리우드 B급 공포영화를 연출한 감독이 특수효과가 많이 들어간 블록버스터 영화로 넘어간 사례는 많은 편이다.

그런 삼류감독조차 어릴 때부터 많은 단편영화 작업과 미친 작업량을 자랑했다.

스튜디오가 그의 커리어 전부를 판단해 영화를 맡긴 것이다.

그런 면에서 류지호는 단편수상경력이 화려한 신인감독일 뿐.

준 메이저 스튜디오의 대주주라는 타이틀은 영화성공에 있어서 어떤 이득을 주지 못한다.


“듣보잡이 만든 영화를 봐줄 정도로 할리우드와 관객들이 호락호락하지 않지.”


뛰어난 재능을 가진 누군가 만들어낸 결과물의 성과가 미비하다면.

다음 기회는 줄어들게 된다.

들어오는 영화도 소품 위주일 수밖에 없다.

점차 외면 받는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그는 더 이상 천재가 아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천재가 무수히 많다.

게다가 할리우드의 메이저는 영화 천재를 좋아하지 않는다.

스튜디오 시스템에 잘 적응하는 범재를 더욱 선호한다.

천재는 스튜디오가 원하는 영화를 자꾸 비틀고, 변형시키려고 한다.

반면에 범재는 스튜디오가 요구하는 영화를 최선을 다해 구현해 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니 시스템을 해치지 않고 영화를 만들어 줄 범재를 선호할 수밖에.

메이저 스튜디오가 천재에게 투자하고 그의 영화를 제작할 때는 단 하나다.

감독 자체가 스타가 되어 브랜드가 되었을 때.

스티븐 아들러, 리드 스콧, 에드워드 놀란 같은 감독들이 그에 해당한다.

류지호는 길게 멀리 보고 있다.

할리우드 시스템에 성실하게 대응하며 작업하는 감독.

그리고 수많은 작업을 통해 커리어를 쌓아 그의 이름이 브랜드가 된 감독.

그러기 위해서.

실패는 작게.

성공은 가능하면 크고 화려하게.

항상 이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만 한다.


벌떡.


류지호가 상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길로 반바지, 티셔츠 차림으로 아파트를 나섰다.

머리가 복잡했다.

류지호는 UCLA 캠퍼스를 달렸다.

복잡해진 머리를 식혔다.

당장 코앞에 닥친 일부터.

먼 미래까지 벌써부터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 ✻ ✻


며칠이 지나서 류지호는 웨스트우드 주택 지하 작업실을 벗어났다.

ParaMax가 마련해준 산타모니카 호텔에 처박혔다.

그곳에서 스토리보드 작가와 작업을 했다.

틈틈이 촬영감독과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찾아와 함께 장면 연출에 대한 의견을 조율했다.

특히 프로덕션 디자이너 마이크 리바는 류지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카운티 관내 지도 대신 벽 한 면에 그림을 넣고 싶다는 거죠?”


마이크 리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벽에 걸려있는 보안관 사무실 콘셉트 부감도의 한쪽을 손가락으로 콕 찍었다.


“난 이쪽이 좋을 것 같네. 사무실 입구 복도에는 초대 보안관들 초상화가 걸릴 예정이고, 업무를 보는 메인 오피스에 카운티 전체 지도가 걸릴 예정이야.”

“그림은 제게 주신 걸로 하고요?”

“응.”


마이크 리바가 추천한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란 그림이다.

밀밭이 폭풍우 치는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흔들리고 있다.

검고 불길한 하늘 아래 펼쳐진 밀밭.

그 앞으로 세 갈래 길이 나 있다.

밀밭 위로는 수십 마리의 검은 까마귀들이 날아다닌다.

텅 빈 세 갈래 길은 우리에게 넌지시 선택을 바라는 것 같다.

밀밭 사이로 갈 것인지, 아니면 그 옆길로 갈 것인지.

그림 속에는 밀밭과 길 사이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에 걸쳐 난 농부들의 발자국과 달구지 무게에 짓눌린 걸 표현했을까.

붉은 기가 살짝 도는 갈색 땅은 울퉁불퉁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미 영화의 전체 톤을 결정했어요.”

“물론이네.”

“고흐가 사랑한 노란색... 저도 참 좋아해요. 하지만 내 영화에 썩 어울릴 것 같지 않아요. 이 그림의 해석과는 상관없이요.”

“고흐는 머리에는 태양을, 가슴에는 폭풍우를 품고 살았다고 하지. 그는 광부들과 농부들을 그렸고, 여염집 아낙네와 엉겅퀴에서 성인을 발견했고, 마지막에는 밀밭과 까마귀와 폭풍우 치는 하늘로 옮겨갔다고 해.”


[밀 이삭을 밀어 올리는 밭, 골짜기로 흘러내리는 물, 포도의 즙, 스쳐 흘러가는 한 인간의 인생, 이 모두가 하나이며 똑같은 것이라는 점이오.

생명에서 유일한 합일점은 리듬이라는 합일점이니까.

하나의 리듬에 맞추어 우리가 모두 춤추고 있소.

인간, 사과, 골짜기, 일구어진 밭, 밀밭 사이의 달구지, 집, 말, 그리고 태양, 그 모두가.]


빈센트 반 고호가 남긴 말이다.


“디렉터는 이 그림에서 무얼 봤어?”

“.....?”


류지호는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자신을 시험하는 건가?

아직 학생이란 이유로?

애송이 영화학도라서?


작가의말

1. 실제 어니스트 코우마 상사 분께서는 93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기념비 제막식에는 참석하지 못하셨겠지만, 소설에서 살아계신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2. 영화 <퓨리>는 여러 실화를 참조해 영화로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전쟁 왜관 전투도 참조하지 않았을까 하는 설이 있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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