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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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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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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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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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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전문가의 손을 타야 좋아져.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류지호를 태운 승합차가 김포공항으로 향하고 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류지호와 장문식, 박영규가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참에 영화판을 뒤집어 놓게?”


장문식이 슬쩍 우려를 드러냈다.

류지호의 마음도 편할 리 없다.

대중문화계 문제에 공권력이 개입하는 것이 좋을 리가 없다.

영화계 스스로 자정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좋다.

하지만 한 번은 영화계 비리사건이 터질 수밖에 없다.

굳이 류지호가 나서지 않더라도.


“이미 검찰에서 내사중이라면서요?"


박영규 이사가 대답했다.


”나래안전에서 검찰이 영화계의 탈세비리에 대한 내사에 착수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영화사, 직배사는 물론 WaW도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장문식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동안 사고가 좀 많았어야지.”


한때 외화직배를 둘러싸고 극장에 방화를 하거나 뱀을 푸는 소동이 벌어졌다.

최근에는 대종상 수상과정에서 큰 논란이 벌어졌다.

거기에 <Collapse>를 기폭제로 해서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WaW 픽처스 소송전 등 영화계에 잡음이 끊이지 않자 영화계의 전반적인 비리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명분은 충분합니다. 이번 기회에 영화계의 구조적이고 관행적인 부조리에 철퇴를 가하겠다는 명분이 설득력을 가지는 분위기입니다.”

“다온에서는 뭐래요?”

“WaW는 세금문제에서 이중삼중으로 관리하고 있으니까 별 문제 없을 거라고. 꽤나 장담합니다. 안심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어요. 다시 한 번 전반적으로 점검해보라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영화계 탈세는 영화업자와 극장주들의 고질적인 부분인데..... 이번 기회에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자행되던 적폐들이 정화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장문식 이사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수사 강도가 높을 것 같아.”

“WaW 같은 대형영화사나 극장뿐 아니라 충무로 전반을 다 털어보겠대요?”


박영규가 대신 대답했다.


“이번 기회에 극장운영과 영화배급구조를 투명하게 만드는 계기로 삼을 방침을 정했답니다. 부장 검사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으니 강도가 상당히 높을 것 같습니다.”

“지방업자들과 원로 영화인들 조사는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대요?”

“솔직히 우리가 가진 정보를 검찰에 넘겨주면 당장 쇠고랑 찰 놈들이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검찰이 주로 수사하는 비리는 뭐래요?”


류지호의 물음을 장문식이 받았다.


“크게 세 가지. 먼저 대형극장주들이 주로 써먹는 수법인 관객들의 입장수입을 축소 신고해 탈세하는 것.”

“극장표 빼돌리기 수법으로 관객들의 입장수입을 줄여 신고하는 거요?”

“이미 경찰이나 검찰도 인지하고 있던 비리더라고. 사실 WaW가 장기계약하고 운영하는 지방극장도 작년까지 그랬어. 나래안전에서 매표소와 극장 로비에 CCTV를 설치하면서 지금은 표 가지고 장난 못 치지만.”


WaW 픽처스는 G.O.M 강남점이 개관하기 전까지 지방 대도시의 수익률이 떨어지는 극장 몇 곳을 장기임대해서 운영대행을 했다.

인천을 제외하고 6개 도시에 한 개 극장씩을 임대해 운영 중이다.

WaW가 운영만 대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 극장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화장실, 매점을 리모델링하고, 낙후된 매표시스템을 손봐서 운영하고 있다.

매표소와 극장 로비에 CCTV 카메라까지 설치해서 질서유지와 매표소 부정을 예방했다.

적어도 WaW 픽처스가 운영하는 극장에는 따로 매표를 감독할 필요가 없다.


“그냥 삥땅치는 수준이 아니더라.”

“한 두 편이라면 모를까. 일 년 동안 개봉하는 매 영화마다 매표를 누락시키면 꽤 큰돈이 되겠죠.”

“신 변호사 말로는 탈세 외에 횡령, 배임도 붙을 수 있다더라고. 거 왜, 극장표에 문화예술진흥기금이라는 게 붙는다며? 그것도 내지 않게 되는 셈이라나..... 또 영화를 만든 제작사에 줘야할 돈도 지들이 챙긴 것에서 빼고 계산해야 하니까. 결과적으로 제작사에게 돌아갈 돈도 삥을 치게 되는 셈이래.”

“맞아요. 극장은 입장권 판매액의 7%의 문화예술진흥기금을 내야 해요. 또 매표를 누락시킨다는 것은 극장과 영화사가 나눠야 할 전체 지분이 작아진다는 것이기 때문에 극장들은 이중으로 돈을 착복하게 되는 것이죠.”

“사실 영화 쪽 담당하는 세무공무원 거의 대부분이 알게 모르게 다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야. 워낙 오래된 관행이다 보니 그냥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라고 할까. 주류 쪽이나 건설 쪽에도 옛날부터 하는 접대나 커미션이나 뭐 그런 게 수두룩하거든.”

“영화계와 공무원 사이에서 뒷돈이 건네지겠죠?”

“당연하지.”

“이번에 세무공무원들도 수뢰혐의로 같이 엮을 수 있을까요?”

“글쎄. 본보기로 몇 명 모가지 날리는 것에 그칠지. 윗선까지 싹 훑을지. 두고 봐야지.”

“오찌도 수사에서 건드릴 것 같아요?”

“두 번째로 수사할 게 바로 그거야.”


많은 극장업주들이 방화를 개봉해주는 대가로 일명 ‘오찌’로 통하는 거액의 커미션을 챙기는 것이 관행이다.


“일류극장의 경우 보통 3,000만 원 선, 이류극장이라 할지라도 500만 원 이상의 방화 개봉료를 받고 있나 봐.”

“그 부분은 WaW도 자유롭지 못한데....”


의무상영일수를 제외하곤 한국영화를 극장에 걸어주지 않으려했다.

그것은 WaW 픽처스가 투자·제작·배급하는 영화라고 다르지 않았다.


“걱정 마. 박 대표가 영리하게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 놓았더라.”

“빠져나갈 구멍?”

“WaW가 직접 극장 관계자에게 돈을 주지 않고, 제작사를 통해서 건네게 했어. 그리고 초창기에는 동우극장 라인을 탔기 때문에 그쪽에서 주로 극장을 상대했더라고. 그 양반 있는 척 온갖 똥 폼만 잡는 둘 알았더니, 은근히 너구리같은 데가 있더라.”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제일 중요한 게 하나 남았어.”

“지방배급업자요?”

“그쪽은 파면 팔수록 건더기가 줄줄이 딸려 나오더라. 탈세, 뇌물, 배임, 횡령.... 아주 종합선물세트야.”

“조폭하고 연계돼 있는 업자도 있을 텐데요?”

“다는 아니고, 몇 명이 반달 노릇하고 있더라고.”


20년 간 전국극장체인망을 장악한 영화배급업자들의 탈세는 심각한 수준이다.

이들은 영화사와 극장주간의 거간꾼 역할을 하면서 극장주들로부터 받은 개봉료 일부를 빼돌리는 수법으로 거액의 부당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일부 배급업자들은 이 과정에서 흥행이 잘될 것으로 예상되는 영화를 배급해주는 조건으로 극장업주들로부터 커미션을 챙기기도 했다.


“우리가 배급하는 영화도 끼어있다니 참....!”

“트라이-스텔라 영화들이 좀 흥행을 했어야지. 지방의 흥행업자 몇 놈이 그런 영화들 가지고 중간에서 장난질을 친 모양이더라. 지금은 중앙에서 컨트롤이 다 되지만, 초창기에는 지방을 다 컨트롤하지 못했잖아.”

“이번 기회에 그 사람들도 다 날려버렸으면 좋겠네요.”

“진짜 영화판이 아사리판 같은 것이 그 돈을 서로 갖겠다고 암투까지 벌였다는 거야. 정말 삼류 양아치도 아니고. 명색이 예술을 한다는 것들이 하는 짓거리가 참.... 저렴해.”


건달 출신에게 양아치 소리를 듣는 영화인.

한 때(?) 충무로에 몸담고 있던 몸으로 류지호는 창피함이 몰려왔다.

한편으로 분노가 치밀었다.


“암튼 이번에는 진짜루다가 검찰에서 작정을 한 모양이야. 굳이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검찰에서 꽤 전 방위적로 훑을 것 같아.”

“그러다 원하는 만큼 성과를 냈다 싶으면 종결시킬지 몰라요. 그렇게 내사하다가 연예인 마약 사건 인지되면 그쪽으로 수사방향이 틀어질지도 모르고.”

“설마 그럴 리가?”

“원래 그래요. 연예인 마약사건이 뉴스로 보나 대국민 파급력이나 모두 크니까.”


장문식과 박영규 두 사람 모두 납득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쨌든, 장 이사는 검찰의 수사상황을 주시하면서 계속해서 그쪽에 소스를 주세요. 영화수입과정에서 벌어진 탈세와 외화도피부분, 대유나 오성, 경일의 외화수입 과정에서 수입가를 줄여 신고하는 수법 같은 것들까지.”


류지호가 심증만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보면 대략적으로 할리우드 영화가 세계 각국에 어느 정도 가격에 팔리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대유, 오성, 경일 등 한국 대기업과 무비서비스 등이 배급에 뛰어들게 되면서 파인라인 시네마 같은 준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는 영화의 수입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올해 흥행에 성공한 수입영화들의 경우 150만 달러에서 200만 달러에 수입된 것으로 신고 돼 있다.

류지호가 보기에 300만 달러는 무조건 넘었을 것으로 의심되었다.

실제 충무로에서도 상당액의 웃돈이 외국영화사에 건네졌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고.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법이다.

충무로가 쓸데없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기도 하지만, 꽤 신빙성 있는 사실도 그 소문 속에 담겨있다.


“아차, 영화협회와 관련된 비리혐의도 검찰에서 수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잊지 말고요.”

“의장님아. 그건 좀 너무하지 않냐?”

“뭐가요?”

“노인네들 몇 명이 코 묻은 돈 가지고 소꿉놀이하는 건데....”

“그 소꿉놀이 하는 돈이 누구를 위해 쓰여야 하는지 몰라서 그래요?”

“몇 천만 원을 인 마이 포켓 하는 것도 아니고, 겨우 일이백 챙기는 건데.... 눈 감아 줄 수도 있지 않아?”


류지호가 정색을 했다.


“아이쿠! 무서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이 놈의 영화판이 제일 X같은 점이 뭔 줄 아세요?”

“한두 가지겠냐?”

“남의 돈을 마치 내 돈처럼 생각한다는 겁니다. 투자 받은 돈, 계약금, 동료들이 십시일반 회비로 낸 돈 등등. 그렇게 쌈짓돈으로 마구 사용하는 돈 만 원이 십 만원이 되고, 십 만원이 백만 원이 되고, 백만 원이 천만 원이 됩니다. 왜 회원들의 복지를 위해 써야할 돈을 자신들이 제 주머니 속 돈처럼 쓴단 말입니까!”

“나도 알어. 근데 가뜩이나 궁상맞은 노인네들이잖아. 코 뭍은 돈 삥땅하는 것까지 혼내주는 게 좀.... 넌 같은 영화인으로 선배들이 불쌍하지 않냐?”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잘못은 잘 못입니다.”

“알았어. 의장 뜻이 그렇다면.”


그들의 처지만 놓고 생각해보면 류지호도 당연히 안타까웠다.

하지만 ‘도제 시스템’ 의 입봉 인증제 같은 폐해를 버젓이 자행하면서 협회 회원에 대한 복지는 제로에 가깝고 회비를 거리낌 없이 사비처럼 사용하는 일부 기술스태프 협회의 전횡은 큰 문제다.

3대 기술협회인 촬영·조명·제작부의 경우 오야지로 모시는 사부가 추천을 하고, 현역 기사 3인이 동의해야만 입봉(데뷔)를 할 수 있는 협회 규약이 있다.

최초 취지는 역량이 부족한 사람이 감독급으로 활동하는 것을 예방하겠다는 것이다.

보다 적나라한 의도는 기득권들의 밥그릇 보존을 위한 수단이었다.

조수로 몇 작품, 퍼스트로 최소 몇 작품 이상 참여 등 조건을 명시하고 있어 무분별하지 않음을 내세우지만, 실력이나 능력보다는 때에 따라서 선배들에게 잘 보인 조수가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메인 스태프가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하루도 바람 잘날 없는 충무로란 말이지....’


류지호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영화판에서 서푼도 안 되는 그깟 영향력이 뭐라고.

최고 권위를 자랑했던 대종상영화제를 망치고, 영화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추락시키는 것도 모자라 한국영화 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마는 일부 원로들.

후배들이 명예를 챙겨주고 싶어도 선배들 스스로 그걸 차버리는 상황이다.

극소수의 과거에 잘 나갔던 원로 무리일 뿐이라지만.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대부분의 현장 영화인들은 오늘도 영화만을 생각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것도 문제네.’


온통 영화만 생각한다는 것.

똘똘 뭉쳐 일치된 목소리를 내면서 영화계의 질서를 다잡아야 하는데,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만 벌이는 현실.


‘그러니 대기업에게 시장을 모두 내주고, 하청업자로 전락하게 되지.’


영화관계자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관객이 보고 싶은 영화를 선택해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독점한 소수의 자본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좁은 선택지에서 골라 봐야하는 환경으로 전락할 수가 있다.


“의장님아.”


장문식의 부름에 류지호가 상념을 마무리했다.


“정치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돈 달래요?”

“노골적으로 정치자금을 달라고 하는 놈은 없어.”

“그럼 가만히 있죠 뭐.”

“한국에서 사업하려면 정치권과 선을 대어둬야 할 걸?”

“.....”

“사업 다 접고 미국으로 이민 가지 않으려면, 정치권에 인맥을 만들어놔야 하지 않겠냐?”

“그렇긴 한데.... 내키지가 않아요.”

“의장은 애매한 포지션을 잡는 걸로 해. 나래안전의 건희 형님이 오랜 시간 공직에 있어서 그런지 그쪽으로 발이 꽤 넓으니까, 정관계 상대는 건희 형님하고 웨딩의 심 사장이 주로 하는 걸로 정리해줘.”

“외삼촌이요?”

“심 사장이 사람 상대를 잘 해.”

“쓸데없이 청탁을 하는 건 아니겠죠?”

“가끔 고위공직자나 지역구 의원들하고 골프도 치고 밥도 먹고 사우나도 하면서 어울리는 거지 뭐. 내기 골프 치면서 용돈하라고 일부러 돈 잃어 주는 정도야.”

“흔적이 남는 뇌물, 성접대 같은 것은 절대 하지 말라고 하세요.”

“당연하지. 요샌 비자금이나 돈세탁도 최첨단이더라.....”

“영 뇌물을 안 줄 순 없겠죠?”

“사업 다 접고, 영화감독만 하면서 살면 가능할지도.”

“국회 문화체육위원회 국회의원들 미국으로 초청해서 거하게 접대 한 번 해야겠네요.”

“한국에서는 좀 그러니까. 미국에서 접대를 하겠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견학 좀 시켜주고, 하루 정도 라스베이거스 가서 놀라고 하면 좋아하지 않겠어요? 기자들도 몇 명 동행시키고.”

“그렇긴 하지.”

“제이콥 실장에게 계획을 세워보라고 해야겠네요.”

“미국 쪽 일은 미국 애들이 알아서 하겠지.”


장문식이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논의할 사안이 없다는 뜻이다.

류지호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율선.”


류지호의 중얼거림에 박영규가 즉각 반응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율선그룹이라고. 예전 신신예식장 정 이사가 알려준 기업이 있어요.”

“......?”

“70년대 자본금 100만원으로 창업해서 한때 14개 계열사를 거느리는 재벌이 되었던 청년기업이었어요.”

“청년들이 재벌소리까지 들었다는 겁니까? 마치 의장님 같은 이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망했어요. 지금은.”

“....예?”

“대기업들이 가만 놔두질 않았어요. 정치적 외압도 상당했고요. 결국 화려하게 비상했다가 창립 5년 만에 순식간에 고꾸라졌죠.”

“정권에 밉보이고, 재벌 견제 들어오면 어지간하지 않으면 못 버티는 게 현실입니다.”

“그때 생각했죠. 난 그 선배들의 성공과 실패를 거울삼아 똑같은 실수를 하지 말자고.”


율선그룹은 5년간 중소기업에서 재벌로 올라갈 만큼 신화를 썼다.

그 시대의 기존 경제인들과는 달리 관치금융에 의존하지 않았고, 열정과 아이디어로 승부한 점은 류지호가 분명히 배울 점이다.

류지호는 미래 지식이라는 엄청난 자산을 지니고 있다.

파커와 그레이엄 가문이라는 대단한 가문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

류지호를 망하게 할 목적으로 한국의 재벌이 압력을 행사하기 쉽지 않다.

또한 한국의 정치계 역시 마찬가지.

두 가문의 주력사업은 한국에서 많이 수입하는 농산물과 원자재다.

그들과 갈등이 생기면 한국의 산업계 역시 심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게다가 두 가문은 미 정치권에도 영향력이 있다.

잘못 건드리면 곤란한 것은 한국 정부다.

류지호는 이미 수 년 전부터 한국전쟁 참전용사회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쌓아왔다.

현 LA시장을 비롯해 다수의 하원의원과 윌리엄 파커 같은 상류층 인사도 포함되어 있다.

LA 폭동 당시 류지호의 영화 <Life Goes On>을 가지고, 미국의 언론과 일부 정치인들이 수작을 부렸을 때, 한국전쟁 참전용사회에서 류지호를 옹호하고 힘을 실어주는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노인네들의 성명이라고 해서 무시하다간 큰 코 다친다.


- 류지호는 전쟁영웅들의 친구다. 미국의 전쟁영웅을 후원하며 그들의 아들이자 손자처럼 관계를 맺고 있는 청년을 건들지 말아 달라.


어느덧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회사 내부 단속은 (주)가온웨딩의 감사실에 하겠지만, 충무로와 관련된 것들은 두 분이 처리해 주세요. 가능하면 장 이사 팀이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네. 의장님!”

“맡겨둬.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무리해서 진행하진 말아요.”

“어차피 검찰이 수사하면 다 드러나게 돼 있어. 우린 그림자 서포트만 하는 거지.”


류지호가 장문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 승합차에서 내렸다.

장문식이 허리를 넙죽 숙이며 작별인사를 했다.


“건달처럼 인사하지 마세요.”


류지호는 장문식이 움직일 때는 아슬아슬한 마음도 들었다.

선을 너무 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다.

그럼에도 나래안전의 군경출신 직원들에게는 맡길 수 없는 일들이 존재했다.

그런 일은 안기부출신과 조폭 출신이 할 수밖에.

류지호는 장문식과 박영규의 배웅을 받으며 미국으로 돌아갔다.


❉ ❉ ❉


미국으로 돌아온 류지호의 일상에 큰 변화는 없었다.

전공수업이 추가된 것 외에 캠퍼스에서의 일상 역시 특별할 것이 없었다.

<The Killing Road>의 포스트프로덕션 역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할리우드에서는 감독이 함부로 편집실에 들락날락할 수가 없다.

류지호는 스펜서 베어드가 작업하는 편집실을 방문할 수 있었다.

투자자이자, 제작자이며, 프로듀서이기 때문이다.

프로듀서는 편집의 과정을 점검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러니 류지호가 감독 입장이 아닌 공동 프로듀서로서 편집실을 들락거릴 수 있었다.

보통 편집은 프로덕션 단계에서 시작된다.

촬영 현장에서 넘어온 필름에서 NG 부분을 걷어내고 시나리오의 씬 순서에 맞게 연결하는 가편집(Rough Cut) 작업이 그것이다.

커트나 씬 혹은 시퀀스별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로 소리와 영상의 동조(sync)를 맞추어볼 수 있다.

러닝타임의 1.5~2배 이상의 분량인 가편집본을 바탕으로 최종편집(Final Cut)이 진행된다.

편집 과정의 마지막 단계인 최종편집은 이야기적, 기술적 편집이 종합, 마무리되는 단계다.

편집기사의 역량이 발휘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스펜서 베어드의 편집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촬영 본을 확인한 그는 류지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오프닝 시퀀스의 편집이 바뀌었네요?”


벤 사이퍼가 납치한 여자를 파이프 렌치로 가격하는 장면의 편집이 바뀌어 있었다.

육중한 파이프 렌치를 하늘 높이 치켜들면서 컷.

롱 쇼트로 바닥에서 몸부림치는 여자를 향해 무자비하게 파이프 렌치를 내려치는 것에서 다시 컷.

인물이 아니라 텅 빈 공간, 죠앤이 훔쳐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 그 밖의 거리 풍경이 조금 느린 템포로 편집되어 있었다.

류지호는 스튜어디의 편집 의도를 알아차렸다.


“여자를 직접적으로 가해하는 폭력을 보여주는 대신 소리로 표현하려고요?”

“응.”

“사운드 시작점은요?”

“롱 쇼트부터 살인마의 얼굴 클로즈업까지.”

“그러니까 관객들이 의미 없어 보이는 화면에서 들려오는 사운드로 벤 사이퍼의 폭력을 상상하게 만들고, 마지막에 그것의 쐐기를 박듯 무감정한 눈으로 파이프 렌치를 기계적으로 내리치는 벤 사이퍼의 얼굴로 캐릭터의 선명성을 부각하는 거네요?”

“BGM은 없었으면 좋겠어. 퍽퍽퍽 하는 사운드 이펙트와 메아리가 편집 리듬을 더 살려 줄 거야.”

“참고하죠.”

“오프닝 시퀀스 톤 앤 매너는 어떻게 맞출지 모르겠지만.....”

“메인 테마 톤으로 단순화 시키려고요.”

“나는 대찬성.”


류지호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전문가 손을 타니까 확실히 더 좋아졌어.’


흔히 촬영이 끝나면 그 이후에 영상이라는 사진적 작업과 음향적 작업이 각각 차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편집’이라는 것이 ‘영상’만 다루는 것이 아니다.

‘영상과 음향’을 함께 다루는 것이다.

그래서 편집 단계 이후의 음향 작업도 편집 과정의 연장으로 본다.

영화의 음향은 기술적 측면과 ‘영화적’이라고 불리는 측면이 결합되어 있다.

영화의 드라마와 심리 묘사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 소리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다양한 소리 중에 어떤 것을 두드러지게 하는가에 따라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달라질 수도 있다.

특정 소리를 강조하는 것만으로 감정상태를 묘사할 수가 있다.

주인공이 거칠게 열쇠 구멍에 열쇠를 돌려 잠근 문을 열고 아파트로 들어온다.

이때 풀 쇼트임에도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는 소리, 열쇠를 돌리는 소리의 볼륨을 키운다.

가방을 소파에 아무렇게 던져놓을 때 소리도 실제 들리는 느낌보다 훨씬 볼륨을 키워놓고, 이후로 냉장고를 여닫는 소리, 거실과 방을 오갈 때 나는 발자국 소리 등도 모두 볼륨을 과장해서 키워놓는다.

대사가 한 마디도 없이 동작만 있는 장면이다.

이런 씬에서 관객들은 무슨 느낌을 받을까?

주인공이 화가 나있거나 신경질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운드를 이용한 인물의 심리묘사 가운데 아주 기초적인 방식이다.

이렇듯 배우의 연기 톤과 대사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사운드의 질감과 볼륨 크기만으로 인물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아티!”


영화촬영으로 시민과 차량 통행이 통제된 블록으로 류지호가 들어섰다.


“헤이. Whizz Kid~”


앞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이탈리아 혈통의 남자가 류지호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티 린슨(Artty Linson)이란 이름의 프로듀서로 현재 <히트>를 총괄하고 있다.

류지호와 사적으로는 UCLA 동문이다.

아티 린슨이 학부를 버클리에서 하고 로스쿨을 UCLA에서 마쳤지만.


“클라이맥스 총격씬은 오늘이 마지막이죠?”

“문제의 LAX 촬영만 남겨두고 있지.”


영화 <히트>의 유명한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라고 해도 후반부 총격씬이다.

세트 없이 백퍼센트 로케이션 촬영만 고집한 마이크 만 감독으로 인해 15주의 촬영이 쉽지만은 않았다.

LA 시내 총격장면은 오직 주말에만 촬영허락을 받았는데, 낮 시간 동안 감독이 만족하는 커트를 뽑아내기가 매우 힘들었다.


“어쨌든 곧 크랭크업이잖아요.”

“워낙에 대단한 인사들과 작업을 했어야지....”


엄살이다.

아티 린슨은 안토니 드니로와 친분이 매우 깊었다.

<언터처블>과 <우리는 천사가 아니다> 두 편을 함께 한 바 있다.

류지호는 영화 <히트>의 최대 투자자이자 투자·배급사 오너 신분으로 자유롭게 촬영현장에 들어올 수 있었다.

촬영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아티 린슨과 함께 촬영을 지켜봤다.


투투투투.

타타타타.


공포탄이긴 하지만, 진짜 총탄이 날아다니는 살벌한 현장 같다.

이 영화의 음향팀은 등장인물이 사용하는 총기의 사운드를 일일이 구분해서 녹음해 총성의 현장감에 더해 캐릭터까지 입힐 예정이다.

영국과 미국의 군사분야와 경찰 전문가의 고증으로 재현된 완벽한 도심 총격장면.

디테일한 사운드.

베레타 권총부터 M16, 샷건, FN-FNC 돌격소총까지.

실제 총기류의 사운드를 제대로 구현할 계획이다.

M16의 총성까지 구별해서 구현한 영화다.

각각 배역에 맡게 그들이 사용하는 총기 모델을 대입했는데, 리얼 사운드와 함께 캐릭터까지 함께 표현한 굉장히 충격적인 총격전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여담으로 <히트>는 단순히 사운드의 기술적인 면뿐만 아니라 총성의 공간감까지 함께 담아냈는데, 더욱 이 영화의 사운드 디자인이 재미있는 건 총격전의 시끄러움과 완벽하게 대비되는 적막감이 도는 장면도 중요하게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총성, 파도소리, 도심의 다양한 소음, 정적 같은 것들을.

음향 디자인으로 최고의 영화라고 할 순 없다.

다만 사운드가 영화에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알려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사운드 디자인 혹은 믹싱은 연출, 편집과 함께 또 다른 창작의 영역이다.

한 장면에 등장하는 다양한 소리(음악까지)를 통해 감독의 연출을 뒷받침해줄 수도 있고 더욱 빛나게 해 줄 수도 있다.

영화 사운드 디자이너는 양성되기가 상당히 어렵다.

음향에 대한 기술적이고 감성적인 이해의 깊이는 물론이고, 영화적 기술 구현에 있어서 충분히 전문적인 편집자 혹은 연출자 수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당시 충무로에서 사운드 디자이너라고 칭할만한 전문가는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이다.


‘이 정도 수준의 영화 사운드 디자이너는 사실... 양성하거나 전문가가 되는데 많은 시간과 작품량이 필요하지.’


때문에 한국영화에서 사운드 디자이너 혹은 디렉터가 자리 잡는 시기는 앞으로 10년이나 걸리게 된다.

<히트>의 프로덕션 과정은 계획대로 풀리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마무리 단계다.

그 외 JHO Company 계열 영화사들의 작품들도 우여곡절은 있어도 한창 촬영 중이거나 포스트프로덕션을 진행하고 있다.

류지호의 <The Killing Road> 역시 마찬가지다.

포스트프로덕션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작가의말

편안한 주말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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