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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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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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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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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0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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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The Killing Road. (9)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로즈 맥로한에 대해서는 다소 걱정이 있었다.

역시나 다소 웅얼거리는 느낌으로 대사를 쳤다.

그렇다고 해서 대사전달력이 떨어지거나 과도하지는 않았다.

연기력이 심각하게 부족하다거나 긴장감 때문에 주저하는 느낌은 아니다.

반쯤 마약에 취해있고, 당황과 혼란을 대사로만 전달하다보니 생기는 문제다.

류지호의 허용 범위 안이다.


“실제로 연기는 해봐야 아는 법. 어색한 부분이 나와도 일단 그대로 가죠.”


다들 기본기가 좋다.

꼼꼼하게 따져가면서 오디션을 보고 뽑았으니 당연한 거다.

대체로 배역에 잘 어울렸다.

캐스팅 디렉터에게 성격과 인성을 누차 강조하기도 했다.

모난 성격이 없는 이들로 캐스팅이 이루어졌다.

베테랑들은 툭툭 내뱉는 것 같은 대사조차 미숙함이 없었다.

가장 걱정이었던 UCLA 연기전공 학생들도 준비를 충실히 한 것이 느껴졌다.

다만 한두 명의 학생이 어색한 목소리로 다이얼로그를 읽었다.

현역 할리우드 배우가 섞여있는 대본 리딩이다.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힘을 빼주는 것은 현장에서 류지호가 도와줄 수 있다.

따라서 대본 리딩에서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류지호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다.

영어를 꽤 잘하지만, 원어민처럼 완벽하진 않다.

영어와 한국어는 발음기관이 다르고 소리가 나는 위치도 다르다.

한국어에는 강세라는 개념이 없다.

영어는 악센트와 억양을 통해 높낮이가 생기면서 리듬이 만들어진다.

무성음으로 약간 흘려주면서 발음하는 것이나 감정을 배제한 평서문을 읽을 때조차도 강세의 우선권이라는 개념이 있어서 미국식 영어는 곡선적으로 높낮이 변화가 있다.

또한 세대 별로 지역적으로도 억양에서 차이가 있다.

영어로 연기를 하는 것이 한국어 연기의 발성, 발음, 화술과 다를 수밖에 없다.

류지호가 그 모든 걸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화술 코디네이터가 따로 고용되었다.

코디네이터는 류지호의 바로 옆에 앉아서 배우들이 편안하게 웅얼거리고 혹은 빠르게 읽는 소리를 주의 깊게 들으며 열심히 메모를 했다.

류지호는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몇몇 경험이 적은 젊은 배우 경우에 놓치는 게 다반사여서 옆 사람을 보면서 간신히 보조를 맞췄다.

대본 리딩은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 촬영현장에서의 연기다.

대본 리딩에서 배우를 다그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실제 촬영현장에서 형편없는 수준의 연기를 보인다면 그때 가서 배우를 다그쳐도 충분하니까.

대본 리딩을 지켜보고 있으면 실제 연기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본 리딩에서 제대로 캐릭터를 못 잡고 허둥대다가 카메라 앞에서 전혀 다른 수준의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도 더러 있다.

그런 배우들은 사전에 꼼꼼하게 연기를 계획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직관에 의지해 연기하는 감정과 본능에 충실한 배우들이 주로 그렇다.

감독은 그 같은 배우들을 자신의 영화 안으로 포용해서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


“......!”


가장 압권인 것은 마리아 베리다.

그녀는 대사 몇 마디만으로도 ‘티아라 이브’의 캐릭터를 완벽히 재현해 냈다.

새장속의 아름다운 새와 같은 삶.

캠핑 트레일러에서 남자들의 정액받이가 된 채 살아온 비운의 여인.

연쇄살인범을 구원자를 여기며 급기야 범죄행각에 동참까지 하는.


‘혹시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린다고 하더니 소문이 진짜일까?’


그녀는 티아라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에 깊이 몰입해 미국식 메소드 연기에 깊이 침잠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이얼로그 때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류지호는 그녀의 연기에 불만이 없었다.

단숨에 대본 리딩이 쭉쭉 진행되었다.

몇몇 신인들이 어색한 리딩을 선보였음에도 진행 자체는 무리가 없었다.

대본 리딩이든 리허설이든.

사전 단계에서 아무리 잘 해봐야 소용없다.

실제 필름에 담기는 순간에 잘하면 된다.

약간 삐걱 거리는 것들이 있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 수다스러운 연쇄살인마가 있었나?’


해리슨 노튼이 연기하는 벤 사이퍼는 어떤 씬에서는 떠버리다.

누군가를 살해해야 할 때만 본래의 인격이 되는 것 같다.

심지어 FBI요원 놀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합법적으로 누군가를 벌줘도 되는 신분이 된 것에 사명감까지 품는다.


‘무감각해서 무감정해보이거나 악의로 똘똘 뭉친 사이코패스여야 하지 않나?’


배우들이 해리슨 노튼의 대본 리딩을 지켜보며 드는 생각이다.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나 슬래셔무비의 악당하고는 많이 달랐으니까.

그럼에도 캐릭터 자체는 재밌다.

벤 사이퍼가 지껄이는 말들이 온통 독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즈의 독설로 유명한 모 칼럼리스트가 싸지르는 칼럼을 읽는 것처럼.

게리 켐프가 내심 중얼거렸다.


‘음,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이 아니라 좀 많이.’


게리 켐프는 흥행에 성공한 사이코패스 스릴러나 슬래셔무비를 떠올려보았다.

<전기톱 학살 시리즈>의 레더페이스는 근육질의 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한다.

<할로윈>의 마이클과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속에서 사람을 난도질하는 처키나 프레디 크루거 같은 괴물도 있다.

<아메리칸 사이코>나 <내추럴 본 킬러> 등에서는 자제력이 없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가 등장한다.

지금까지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살인마의 이미지들은 대체로 그랬다.

그런데 <The Killing Road>의 벤 사이퍼는 캐릭터가 다소 가볍게 느껴진다.


“실제 촬영 때를 기대하겠습니다.”


류지호가 대본 리딩을 마치고, 배우들에게 힘차게 외쳤다.


‘태런티노와 고언형제 영화와도 또 다른 유머 코드란 말이지....’


게리 캠프는 영화의 에필로그를 다시 세심하게 읽었다.

어쩔 수 없이 오염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화를 보고 나면 잃어버린 순수한 본성은 절대 되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았다.

연쇄살인마인 벤 사이퍼는 해석 불가능한 사이코패스지만, 티아라와 그 밖의 인간 군상들은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인간들이다.

헌데 그들이 저지르는 행위 역시 연쇄살인마의 폭력과 크게 다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류지호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실화를 영화로 옮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사실성이 엿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다.

FBI 보고서를 참고해 실제 사례들과 에피소드들을 영화에 교묘하게 섞었으니까.

범인 혹은 피해자 가족들이 FBI 조사과정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실제 진술했던 말들이 곳곳에 들어가 있다.

게다가 류지호는 영화 내내 일상성을 가득 채워놓았다.

목장에서 일하는 카우보이들.

일과가 끝나고 펍에서 술을 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시골사람들.

순박하면서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사는 시골 특유의 정서.

그런 일상성을 한순간에 뒤집어 버린다.

그 속에 감춰져 있는 충격적인 비밀을 연쇄살인마를 통해 드러낸다.

시골마을 특성상 집들마다 띄엄띄엄 떨어져 있다.

그 같은 가정에서 벌어지는 아동성폭력, 동성 간의 부적절한 성폭력들을 보여준다.

그런 범죄에 대해서 이웃들은 서로 쉬쉬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나, 무관심하다.

더러운 범죄가 암암리에 자행되는 범죄마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마을의 이름은 ‘호프(Hope)'다.

스크립트에는 가상의 시골마을 호프의 일상이 매우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사실감을 더욱 살려준다.

일상의 모습이 섬세하게 그려지다 보니, 미국의 어딘가 시골마을에서 실제 벌어졌을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잘 찍으면 인디영화제 작품상 내지는 감독상 최소 노미네이트, 스크립트 정도만 나오면 그저 그런 범죄스릴러.....’


짝짝짝.


리셉션 홀에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본 리딩이 완전히 끝났다.

류지호와 참석자들이 우르르 리셉션 홀를 빠져나갔다.

상념에 잠겨 있던 게리 켐프의 정신도 돌아왔다.

게리 켐프가 얼른 대본을 챙겨 뒤풀이 장소로 향했다.


✻ ✻ ✻


메이킹 무비를 촬영하던 팀은 뒤풀이 장소로 함께 가지 않았다.

류지호를 포함한 참석자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서.

샴페인이 담긴 잔을 든 존 터튜가 게리 캠프에게 다가왔다.


“벤 사이퍼를 연기하는 친구는 어디서 데려왔어?”

“뉴욕에서. 디렉터가 직접 날아가서 오디션을 보고 뽑았지. 어때 보여?”

“괜찮아.”

“무명이라는 걸 빼면 꽤 흥미로운 친구이야.”

“아마추어들은 UCLA 학생들인가?”

“졸업생 중에서 골랐어.”

“그걸 알버트가 허락했다고?”

“디렉터가 ParaMax의 오너잖아.”

“알버트는 원리원칙주의자 아니었어?”

“원리원칙에 입각해서 디렉터 류에게 모두 맡겨도 된다고 판단했겠지.”

“제 아무리 스튜디오를 소유했다고 해도 감독이 되는 순간부터 여러 간섭에 시달릴 텐데... Jay가 제법인가 봐?”

“제법 이상이지. 이 배우가 좋다, 저런 배우가 정말 잘생기고 뛰어나다. 돈을 얼마 투자 할 테니 이 배우를 써 달라... 스튜디오에서 처음 작업하는 감독에게 일상이지. 하비 웨인스타인이 추천한 배우가 있어. 나쁘지 않아. 그런데 꽤 오랜 시간 고민하더군.”

“누구?”

“말해 줄 수 없어.”

“트라이-스텔라에서 더 근사하게 할 수도 있지 않았나?”

“알잖아. 스튜디오 오너라고 해도 변함없는 사실이 있지. 스튜디오 영화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순간부터 매주 임원들의 등쌀에 시달리기 시작한다는 것. 어떤 때는 감독이 불쌍하기까지 하지.”

“대신 스튜디오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별천지 대우를 받잖아.”


배우도 그렇다.

할리우드 A-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순간, 삶이 완전히 바뀐다.


“마음만 먹으면 Jay 저 녀석은 제이미 캐머론처럼 영화를 찍을 수 있을 텐데...”

“제작비가 문제이겠나? 상업성이란 것을 포기 할 수 있다는 메리트가 중요하지. 그래서 무명 배우들에게 기회가 돌아가고. 톱클래스 배우를 쓰고 싶겠지만 금전적 문제와 상관없이 유명하지 않으면서도 실력 있는 배우를 찾아서 쓴 거야. 그러면서 서로에게 윈-윈. 디렉터 는 자신의 의도대로 영화를 만들면서도 실력 있는 배우를 쓸 수 있고, 금전적인 문제도 해결되고. 배우는 커리어에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겠지.”

“나는 Jay가 십대일 때부터 알았는데, 여전히 종잡을 수가 없어.”

“어떤 면에서?”

“녀석이 쓴 <Collapse>와 이번 <The Killing Road>는 전혀 다른 영화잖아. 단편영화들도 그렇고. 평범한 사람들의 선량함과 무고한 희생에 대한 안타까움, 연민, 희망적인 메시지와 보통사람이 가진 악한 면을 까발리는 것은 극과 극 아닌가? 감독들은 어떤 특정한 철학적 주제에 깊이 빠져들잖아. Jay 저 녀석은 일관된 주제의식이 없는 것 같아서. 마치 고언 형제의 영화에 투자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B급 킬링타임용 저질영화에 투자하는 것 같은..... 뭐랄까.... Jay는 할리우드와도 다르고 유럽영화와도 다른 어떤 무엇에 심취하고 있다고 할까?”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지. 감독이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이야기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은 프로듀서 입장에서 여러 장르를 맡길 수도 있다는 것이니까.”

“그래도 Jay는 예술가가 될 것인지 상업영화를 찍는 스튜디오용 감독이 될 것인지 결정해야 할 거야.”

“왜 그래야만 하나?”

“영화감독에게 정체성은 중요한 문제니까.”

“과연 그럴까?”


게리 켐프가 배우들과 섞여 대화를 나누는 류지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이 프로젝트를 맡으려고 하냐고.

심지어 참여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경력에 오점이 남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

철부지 백만장자 수발이나 들다가 말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현재는 PC's Limited의 마이크 델이 최연소 억만장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컴퓨터 제조회사는 포춘지가 발표하는 ‘세계 500대 기업‘에도 들었다.

진짜 최연소 억만장자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

복합기업 JHO Company를 소유하고 있는 투자자 겸 제작자.

바로 한국에서 온 24살의 류지호다.

기업활동과 상관없이 보유한 금융자산(예금, 부동산, 주식 및 채권 등)만으로 억만장자다.

미국 경제지의 확인요청을 거절하고 있어 순위에 포함되지 않을 뿐.

포춘, 포브스 등은 부자 본인의 확인절차 없이 순위권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암튼 할리우드 스튜디오 오너의 위상은 절대적이다.

할리우드 업계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높다.

굳이 어렵고 고된 길을 갈 필요가 없다.

그런데 저 패기만만한 감독은 두르고 있는 황금 망토와 갑옷을 벗어놓고, 맨몸으로 도전하려고 한다.

골리앗이 굳이 다윗처럼 싸우려고 하는 것이다.

실수하기만 두 눈 시퍼렇게 쳐다보고 있는 이가 한 둘이 아님에도.

사실 류지호의 실패만 바라는 이들을 줄 세운다면, UCLA 캠퍼스를 몇 바퀴 돌릴 수 있을 정도다.

다만 한 번 삐끗한다고 해서 나락으로 가진 않는다.

이미 제작자로서는 엄청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으니까.


“디렉터.”

“왜요, 게리?”

“할 만 한 가?”

“재밌네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 좋아하는 일을 잘해냈을 때 행복이 찾아온다.

그럼으로 해서 직업을 사랑하게 된다.

그것은 삶의 축복이다.

예술영화, 상업영화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단편영화의 화려한 이력도 잊어야 한다.

카우보이 결투에 나선 것처럼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The Killing Road>의 프로덕션이 시작됐다.

또한 류지호의 장편영화 데뷔의 막도 함께 올랐다.


❉ ❉ ❉


대본리딩을 있은 후로 시간이 쏜살 같이 흘렀다.

<The Killing Road> 제작진 선발대가 샌프란시스코와 에인절스 캠프 사이에 있는 인구 250만의 스톡턴(Stockton)으로 이동했다.

이 도시는 <The Killing Road>의 주요 로케이션이 진행될 에인절스 캠프와 1시간 거리다.

제작진은 스톡턴 시내의 중급 호텔을 통째로 빌렸다.

호텔을 베이스캠프로 해서 4주간 에인절스 캠프를 오갈 예정이다.

마음 같아서는 최고급 호텔을 통째로 빌리고 싶다.

300만 달러 예산으로는 무리다.

류지호의 심정을 눈치 챈 롭 리차드슨 촬영감독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 할 거 없어.”

“잘 쉬어야 일의 효율도 좋잖아요.”

“이 정도 호텔도 감사하지. 필리핀에서 지냈던 걸 떠올리면 지금도 윌리엄을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야.”

“<플래툰>의 제작과정은 <지옥의 묵시록>과 함께 전설이긴 하죠.”

“고생한 만큼 좋은 작품이 나오게 돼 있어.”


이 말은 전 세계 영화판 어디나 통용되는 모양이다.


“어떻게 매번 최고급 호텔에만 묵겠어. 외딴 곳으로 들어가면 캠핑 트레일러에서 자기도 해. 그러니 미안해 할 것 없어.”


롭 리차드슨 정도의 촬영감독이 이런 대접을 받을 레벨은 아니다.

그는 <플래툰> 이후로 1,000만 달러 미만 예산의 영화는 두 번째다.


“메이저 영화도 아닌데 비밀서약을 하게 해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디렉터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우리 영화는 충분히 보호받을 가치가 있어. 그러니 그런 생각은 빨리 털어버려.”


롭 리차드슨의 격려에 류지호가 힘차게 대답했다.


“네.”


미국 영화는 계약 시 촬영부터 개봉할 때까지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해야 한다.

촬영장소나 시나리오, 배우의 동선 유출을 막기 위해서다.

<The Killing Road>는 저예산 영화, 스타가 출연하지 않는 영화다.

비밀서약까지 하는 것이 다소 과해보이는 것이 사실.

그런데 반드시 필요했다.

<The Killing Road>가 류지호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류지호는 할리우드 감독으로는 주목 받는 위치는 아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스튜디오의 오너이자, 손대는 영화마다 흥행불패를 이어가고 있는 투자자 겸 제작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편영화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그런 유망주가 본격적인 장편영화로 데뷔를 한다.

충분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무료봉사를 해주는데 내가 너무 한 건가?’


할리우드는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일을 할 수가 없다.

조합에서 철저하게 감시한다.

그런데 촬영감독, 미술감독, 마리아 베리, 존 튜 등은 무급으로 계약했다.

롭 리처드슨은 독립영화만이 할 수 있는 실험을 하는 동시에 류지호와의 친분 형성을 위해서.

마이크 리바는 촉망받는 UCLA 후배를 위해서.

마리아 베리에게 돈 몇 푼은 의미가 없어서.

존 터튜는 류지호의 십대 시절부터 맺은 인연으로.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저예산독립영화의 경우 감독이나 작가 또는 스태프들이 소액의 편당 계약금을 받거나 무료로 일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그러나 완전 공짜는 없다.

이 경우 1%, 2% 등의 러닝개런티를 계약서에 명시해 사후 발생하는 수익을 분배받는다.

<The Killing Road>에서 무급으로 참여한 배우와 스태프는 이러한 러닝개런티 부분을 계약서에 명시했다.


‘만에 하나 내 영화가 <펄프 픽션>급의 대박을 터트리면 무급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한마디로 로또 맞는 셈이지.’


“터커, 모두 짐 풀었대?”

“응.”


선발대는 주로 촬영과 조명팀이다.

배우들이 오기 전까지 인서트와 주요 배역이 출연하지 않는 로케이션 위주로 프로덕션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모두 시내로 나갑시다!”

“샌 호아킨 강이라도 구경하게?”

“저녁 살게요. 가볍게 술도 한 잔 해요.”


류지호는 선발대와 함께 시내로 나가 이른 저녁을 먹었다.

할리우드 영화 제작비가 많이 소요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건비 때문이다.

영화제작에 필요한 시간들을 세분화해놓고, 체계적으로 마련된 시간별 임금이 적용된다.

스태프의 노동시간이 곧바로 돈으로 직결된다.

미국영화계에서 배우조합(SAG)과 작가조합(WGA)을 비롯해, 감독과 조감독, 유닛프로덕션 매니저들을 위한 감독조합(DGA) 등이 강력한 파워를 가진 대표적 조합이다.

이 밖에 나머지 영화스태프들은 미국 영화 및 연극기술, 예술가연합(IATSE)의 300여개 분과에 모두 속해 있다.

미국 영화스태프들의 노동조건은 기본적으로 스태프별 조합이 마련한 규약들에 근거를 두고 계약을 체결한다.

미국의 영화 관련 조합들은 강력한 단합력과 힘을 가지고 있다.


‘충무로는 제대로 된 조합조차 없는데.....’


한국 영화계에 협회라는 이름의 영화단체들이 여럿 존재하긴 한다.

별다른 역할도 하지 못하는 친목단체 역할에 그치고 있다.

반면에 미국 영화인 조합들은 제작자들과 최저임금에 대한 기본협약을 마련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저임금은 자기가 속한 파트의 포지션, 촬영장소, 영화예산 규모, 노동시간 등 다양한 변수에 따라 하루 최저임금과 주급(주당 5일 기준) 최저임금으로 나눈다.

이 밖에 시간외수당에 대한 지급도 포함된다.

기본협약의 내용은 어떤 상황, 어떤 스태프에게도 적용될 수 있도록 아주 자세하게 마련되었다.

TV·영화에 종사하는 스태프들의 최저임금을 규정한 책자는 1,000 페이지에 이를 정도다.

변호사와 함께 검토해야 할 만큼 방대하다.

예를 들어 배우조합의 경우 주요 배우, 일반 배우, 스턴트, 엑스트라, 특수배우 등까지 최저일급과 주급이 계약단위 및 배우 수준에 따라 세밀하게 정해져 있다.

저예산영화일 경우 50만 달러 이하, 200만 달러 이하, 300만 달러 이하 등으로 차별을 두어 여기에서 30% 정도 절감된 최소임금이 정해져 있다.

배우와 작가조합을 제외한 나머지 조합들은 여기에 동부와 서부 등으로 나뉜 지역별 최저임금을 또 다시 다르게 규정하고 있다.


“한국에 가지고 있는 영화사가 30페이지짜리 표준계약서 하나 만드는데 몇 년이 걸렸는데... 앞으로 갈 길이 멀고도 험난할 것 같네요.”


류지호가 게리 켐프를 향해 부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할리우드는 그 역사가 긴 만큼 수십 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수백 페이지짜리 계약서가 당연하게 통용되고 있는 거니까.”

“디렉터는 인턴을 안 해봤지?”

“학교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이 작업을 인턴십으로 인정해줄 것 같아요.”


교수들 입장에서는 준메이저 스튜디오를 소유한 류지호에게 인터십 문제를 따지기도 애매했다.

마침 장편영화를 찍는다고 하니 인턴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게리 켐프가 류지호에게 친절한 설명을 이어갔다.


“한 영화가 제작될 경우 조합에 소속된 인원을 쓸 때는 반드시 조합에 신고해야 돼. 조합이 제시한 최저임금을 바탕으로 스태프의 숙련 정도에 따라 각기 다른 등급의 임금에 계약하게 되는 거야. 각 파트 헤드의 임금이 정해지면 그 아랫단계의 스태프로 내려가면서 각각 20∼30% 정도 적은 임금을 받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지.”

“퍼센트는 제작사가 정하는 거죠?”

“가이드라인 안에서 정할 수 있지. 각 파트의 헤드들은 표준화된 정식계약서에 계약하고, 어시스턴트들은 대부분 ‘딜 메모’(간이계약서) 형식으로 계약해. 딜 메모라도 반드시 계약서를 써야 해.”

“문서교환 없이 일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겠죠?”

“조합원들에게 지급된 임금 중 일정액은 정부와 각 조합의 연금 및 복지기금으로 할당되거든.”


<The Killing Road>에는 일부 B, C유닛이 동원된다.

대규모로 조명을 하는 장면도 있다.

일당직 스태프가 꽤나 많이 고용될 예정이다.


“일당직은 하루 8시간, 주급계약자의 경우 주당 44시간을 기준으로 계약한 임금이 지급되지. 시간외수당의 경우 초과 2시간까지는 임금의 1.5배, 이후 두 시간은 2배로 계산되고, 공휴일 촬영에도 2배 원칙이 적용돼.”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보장된 휴식시간이 끝나면 개별적으로 스톡턴으로 모이기로 했어요?”

“그래야지. 우리가 LA에서 픽업하는 것은 무리야.”


4주간 진행되는 에인절스 캠프 로케이션에서 금요일 6시에 촬영을 종료하면 거의 대부분의 스태프가 LA로 돌아갈 터.

월요일 새벽에 에인절스 캠프로 합류하거나 스톡턴으로 돌아오게 된다.

독립영화의 경우 하루 12∼14시간의 촬영을 허용한다.

그럼에도 다음날 촬영까지 모든 스태프들에게 최소한 8∼10시간의 휴식시간을 보장해야만 한다.

금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사이에는 57시간의 휴식시간을 가지는 것이 원칙이다.


“조합에 등록하지 않은 좀 더 싼 스태프를 쓸 수도 있어.”


할리우드와 뉴욕에만 영화사가 모여 있는 것이 아니다.

주마다 지역방송국, 케이블TV, 영화사가 존재한다.

조합에 가입하지 않고 활동하는 이들도 많다.

샌 페르난도 밸리 지역의 포르노산업 종사자들이 대표적인 경우다.


“비조합원들은 각자 영화사와 주급, 오버타임 등에 대한 협상을 벌인 뒤 독립적으로 계약을 맺을 수 있어.”


<The Killing Road>에는 조합의 견습생들도 참여할 예정이다.

이들 역시 최소한의 주급이 지급된다.

각 조합의 견습생들은 각 조합이 운영하고 있는 교육시스템에서 일정 시간을 교육받은 뒤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 권리를 보장받는다.

마지막으로 UCLA의 영화과 학생들이 학점 이수를 목적으로 무급인턴으로 고용되었다.

주로 3학년들이다.

미국의 영화과 학생들은 인턴에 참여하기 위해 학기 중에 수십 장의 지원서를 작성하고, 영화팀들과의 미팅을 보러 다닌다.

트라이-스텔라와 ParaMax에도 방학을 앞두고 수많은 학생들이 인턴 지원을 한다.

또 모든 영화예산에서 보험예산은 기본이다.

보통 실제제작비의 1.5∼1.7% 정도 들어간다.

보험은 배우 및 스태프들의 안전사고부터 필름, 촬영기재, 의상 등의 손상이나 재해발생상황을 뒤처리할 수 있게 해준다.


“건배 하죠.”


류지호가 맥주병을 들어올렸다.


챙.


류지호의 맥주병에 선발대의 맥주병이 차례로 부딪쳤다.

입가심으로 맥주 한 병을 비운 류지호가 먼저 호텔로 돌아왔다.

건장한 체격의 꽁지머리 남자가 로비에서 서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스턴트 코디네이터 비키 빅키 햄휴스다.


“Vic!”

“헤이~”

“내일 오전에 합류하기로 한 것 아니었어?”

“하루 먼저 왔어.”


두 사람이 가볍게 주먹을 맞부딪치며 인사를 나눴다.

경호원 티노와 말릭과도 빅키와 악수를 나눴다.


“저녁은?”

“응.”

“혼자 왔어? 팀은?”

“내일 에인절스에서 합류할거야.”


류지호는 일단 빅키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The Killing Road>에서 몸과 도구를 사용하는 모든 것에 빅키가 관여할 예정이다.

권총을 쥐는 것부터 배우들의 몸싸움, 심지어 고문장면의 연출까지.

배우가 몸으로 펼치는 거의 대부분의 퍼포먼스를 디자인하고, 미세한 동작에서 류지호의 연출을 지원할 예정이다.

달리는 차를 롱 쇼트로 촬영할 때, 배우 대신 운전하는 것도 빅키 팀의 몫이다.


“영화에 날 불러줘서 고마워.”

“그런 말 하지 마.”


빅키는 <레니게이드>에 스턴트 코디네이터로 추천한 이후로 크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고예산 트라이-스텔라 엔터테인먼트 제작 영화에서도 썩 괜찮은 스턴트 안무를 보여주면서 메이저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었다.


“나는 게으른 사람, 말만 내세우는 사람과는 일 안해.”

“맡겨보라고, 친구!”

“기대할 게.”


메인 스태프 면면만 봐도 영화에 대한 답은 어느 정도 나와 있다.

오스카 수상자인 롭 리차드슨과 마이크 리바가 참여한 이상 시시한 영화일 리가 없다.


작가의말

편안하고 행복한 주말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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